한국 야구의 기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야구가 소개된 것은 을사조약의 해인 1905년 미국인 선교사 Gilbert가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야구를 처음 가르친 일이였다. 당시의 이름은 타구 또는 격구라 명칭하였다.
1906년 2월11일, 황성기독교청년단과 독일어학교팀 간의 한국최초의 야구경기가 훈련원 마동산에서 개최되었으며 1909년 동경유학생들의 모국방문경기가 시작되었다. 7월 21일 대한광학회 운동부 주선으로 동경유학생단 25명이 여름방학을 이용, 모국을 방문하여 재경선교사와 중앙기독교청년회원 연합팀과 경기를 가졌는데 동경유학생단팀이 19대 9로 대승. 승리팀은 정규유니폼을 착용한 상태였으며 이를 신기하게 여긴 구경꾼들로 경기장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유학생팀은 같은 달 평양, 개성, 선천, 안악, 철산 등지를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펼쳤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나라 초기야구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1913년까지 대한의원부속학교, 동경유학생, 독일어학교, 일본어학교, 한성고등학교, 황성기독교청년단, 휘문의숙(현재 휘문고) 등의 팀이 활동을 해오다 1919년 배재고보, 송도고보, 오성학교, 중앙고보가 야구단을 창단하여 휘문의숙 등의 팀과 활발한 연습과 경기를 벌렸다.
1920년 7월에 창립된 조선체육회의 주최로 제 1회 전 조선야구대회가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으며 행사는 중등부와 청년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중등부 참가팀은 경신, 배재, 보성, 중앙, 휘문 등 5개 팀이었고, 청년부는 삼한구락부, 전경신, 전배재, 천도교, 청년회관 팀 등 5개 팀이었다. 이 경기에서 승리팀은 모두 배재고보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22년 미국 메이저리그의 프로야구단이 내한하여 전조선군과의 경기에서 21-3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들이 선보인 앞선 기량은 우리나라 야구발전에 큰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5월 23일 류용탁, 윤치영, 이석찬, 이원용, 허성 등의 발기로 조선야구협회 창립되어 한국야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26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제 1회 4구락부 리그전이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1930년 조선야구심판협회 발족되었다.
1934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전 일본대표로 선발되어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에 출전.
1938년 민족 체육의 총본산인 조선체육회가 일본인들에 의해 조직된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됨으로써 자주성을 잃게 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조선야구협회 재조직되었다.
1946년 5월, 학생야구연맹 탄생.
6월, 제 1회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7월, 제 1회 전국야구선수권대회 개최됨.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 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 같은 해 11월 야구협회가 국제 야구연맹에 정식가입하였다.
1958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팀이 내한하여 전서울군과 경기를 벌였고. 이승만 대통령의 시구로 펼쳐진 가운데 카디널즈팀이 3-0 으로 승리하였다.
1962년 메이저리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내한하여 전서울군과의 경기에서 8-0 으로 승리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 프로야구팀인 고쿠데쓰 스왈로즈와 도에이 플라이어즈 등 두 팀이 내한하여 전서울군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이때 도에이팀에는 장훈과 백인천, 고쿠데쓰팀에는 김정일 선수가 포함되어 있어 감명을 주었다.
1963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최초로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1967년 중앙일보, 동양방송의 초청으로 일본 프로야구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와 도에이 두 팀이 내한하여 실업선발과 경기를 하였다.
1970년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연식야구협회가 대한야구협회로 통합되었다.
1971년 9월, 서울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개최. 참가국은 한국, 일본, 자유중국, 필리핀과 호주 등 5개 팀.
1975년 10월, 일본 프로야구팀인 롯데 오리온즈가 내한하여 실업선발과 경기. 같은 날 재일동포 출신의프로 야구선수들이 팀을 구성하여 실업선발과 대결하기도 하였는데, 재일선발은 김유세, 김무종, 백인천, 장훈, 김일융, 주동식 등이었다.
1976년 재미 실업가 홍윤희씨가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프로야구의 출범을 추진. 당시의 준비위원은 한전감독 김계현, 실업야구연맹사무국장 이호헌, 육군감독 허종만, 상업은행감독 장태영, 제일은행감독 박현식, 철도청감독 정두영, 농협감독 허정규 씨등으로 구성. 그러나 이 계획은 정부지원의 부족과 시기상조론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제 3회 대륙간컵국제야구대회에 참가하여 미국과 일본 등을 누르고 우승 차지하였다.
1980년 일본에서 열린 제 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과 함께 공동준우승. 같은 해 11월 일본의 롯데 오리온즈와의 3차전에서 2승1패를 기록. 이때 한국대표팀의 최동원 투수는 1차전에서 12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승리투수의 영광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