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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돈 크레이머 1위, 안네-소피 무터 2위...
많은 청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어린 음악도들의 스승이자 한국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우리 바이올리니스트 100인에게 “이 시대 최고의 연주자는 누구일까?”를 놓고 설문 조사를 하였다.
바이올린이 나온 것은 르네상스시대였으나, 찰현악기로서 비올이 고도의 기법을 완성하고, 또한 이에 알맞는 악곡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린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반해서 바로크시대의 음악양식은 르네상스시대와는 다른 음향을 동경했기 때문에 음량이 풍부하고 표현수단이 다양한 바이올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 바이올린의 기본적인 주법이 확립되고, 통주저음이 붙은 바이올린 소나타, 무반주 바이올린곡 또는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독주·합주 협주곡 등의 형식도 만들어졌다. 이 시대의 기교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마리니와 파리나에서 시작되는 이탈리아의 음악가들이며, 그 중에서도 노래하는 듯 선율을 연주하면서 균형 잡힌 음악을 만든 코렐리와 여러 가지 연주 기법으로 당시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 로카렐리 등이 유명하다. 고전파에서는 비오티에서 시작되는 프랑스 음악가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비오티의 제자인 크로이체르·로드·바이요·드 베리오 등은 연주자로서뿐만 아니라 후세의 바이올린음악의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매우 눈에 띄는 연주자 한 명이 등장한다. 바로 ‘파가니니’이다. 그는 특수한 운궁법, 왼손의 피치카토, G선을 포함한 하이 포지션 등을 사용함으로써 바이올린의 기교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20세기가 되자 고전과 낭만 시대의 연주 기법을 뛰어넘는 각 연주자만의 개성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즉 음정의 도약방법, 음량변화의 방법과 또한 격렬한 어택에의 요구 등 전통적인 기법에 없는 것을 연주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응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장차 바이올린이 비올이나 류트와 같은 낡은 악기가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현대의 악기로서 살아남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해 줄, 혹은 이미 해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일까? 역시 마찬가지 임무를 갖고 있는, 국내 대학 재직중익나 출강중인 중견급 바이올리니스트 100인에게 “이 시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인가?”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 우리 시대 연주자들의 ‘살아있는’ 우상 설문 조사 결과 모두 21명의 연주자들이 언급되었다. 그 중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유명 연주자들도 있었지만,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치고 있는 연주자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예의 1위는 기교의 대가로 꼽히는 기돈 크레머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아무 생각 없이 현란한 기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로 연주의 재창조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항상 새롭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크레머의 음악적 해석이나 연주 활동에 따라서 전 세계 음악계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작년 내한 연주회 때 보여 준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8季’연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많은 지지를 얻은 연주자는 ‘안네-소피 무터’였으며, 3위는 내한 공연을 통해 완벽한 연주와 함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로 국내 청중들을 사로잡았던 ‘막심 벤게로프’가 차지했다. 특히 벤게로프의 경우는 1996년 첫 내한 연주회 때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 준 조부모를 모시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함께 한의원에 들러 침을 놓아 드렸으며, 연주 후에는 민속촌을 방문하는 등 조부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해 국내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도 인기 비결이 아닌가 생각했다. 4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이차크 펄만’이, 5위는 자랑스런 한국인 ‘정경화’가 선정되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은 ‘이차크 펄만’과 한때는 ‘동양에서 온 마녀’라고 불리었던 ‘정경화’가 사이좋게 순위를 차지하게 된 것도 흥미있는 결과였다. 이 외에도 장영주·길샤함·침머만·주커만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강효·김영욱·김지연·강동석 등의 한국인 연주자들에 대한 지지도 반가운 결과였다. 러시안 스쿨의 직계인 젊은 연주자 바딤레핀도 10위의 순위를 차지, 그의 대가적 풍모의 균형잡힌 해석을 높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설문 조사 중 이미 타계한 연주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 중엔 초절기교를 요하는 곡들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아주 드문 존재로서 인식되었던 헨릭 쉐링도 있었다. 특히 음반을 통해 안정감 있고 정확하며 전체적인 흔들림 없는 연주를 들려주었던 그는, 1993년 3월 4일 6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와 함께 ‘이자이’로부터 “어서 가게. 자네에게는 가르칠 것이 없네.”라는 찬사를 받았던 나탄 밀스타인 역시 1992년에 고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가슴 깊은 곳의 존경을 버릴 수 없다는 답변도 있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1970년 이후로 바로크 시대의 원전 악기로만 연주를 하며 옛 방법(어깨 받침을 사용하지 않으며 악기를 턱에 대지 않고 연주하는 것)을 고수하고 있는 지기스발트 쿠이겐과 1980년 말 뮤직센터에서 헨릭 셰링의 대역으로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여 급부상한 1960년생의 젊은 연주자, 초량린도 거명,눈에 띄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한편 넘치는 끼와 독특한 음악적인 개성을 겸비하여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는 나이젤 케네디· 바네사 메이 등의 연주자에 대한 지지가 없었다는 것이 의외의 결과. 아마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주가들은 정통 클래식의 범주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외도에 대해 그 음악적 가치를 높이 사지는 않는 듯하다. 우리 모두의 생김새가 각기 다르듯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이 창조적인 활동에 그 생명이 존재하는 음악가들의 생각이란 똑같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00인의 조사 대상자들이 서로 다른 100인의 연주자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는 아닐 듯싶다. 따라서 이번 설문 조사를 통하여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우리 나라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연주자들의 음악적 ‘멘토’를 발견하는 기쁨에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란다.
▶ 기돈 크레머(Kremer, G)
라트비아 리가 출생으로 모계로는 독일, 부계로는 스웨덴 계통의 피를 이어받았다. 외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브루크너(Karl Bruckner)였고, 부모님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4세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1965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하여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67년 퀸엘리자베스콩쿨, 1969년 몬트리올콩쿨에 출전하여 각각 3위와 2위로 입상했고, 1969년 파가니니국제콩쿨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차이코프스키콩쿨에서 1위를 차지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번스타인·카라얀·주빈 메타·제임스 레바인 등 명망 높은 지휘자 및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게 된다. 기돈 크레머는 무엇보다 고전과 낭만주의의 주요 바이올린 곡에서부터 베르그·스톡하우젠과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어우르는 광범위한 레페토리로 유명하다. 더 나아가 현재 생존해있는 러시아와 동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한 알프레드 슈니트케·아르보 패르트·루이지 노노·존 아담스·아스토르 피아졸라 등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음악을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는데, 30년이 넘는 연주경력을 지녔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명성을 가진 연주자들 가운데 기돈 크레머 만큼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많이 연주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전통을 유지한 채로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미 100여 종이 넘는 음반을 발매한 그는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수많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녹음한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바흐의 파르티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한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명반으로 꼽힌다. 또한 최근의 피아졸라 탱고 음반은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후 요요마, 베를린 필 12첼리스트 등 클래식 음악계에 탱고 연주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파가니니의 환생’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뛰어난 기교의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크레머의 위대함은 무엇보다 현대 작곡가들과 숨겨진 작곡가들을 소개하며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찾아 떠나는 도전 정신에 있지 않을까?
▶ 안네-소피 무터(Mutter. A)
최근 앙드레 프레빈과 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던 바이올린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그녀는 1963년 6월 29일 라인펠덴에서 태어났다. 5살 때에 피아노를 시작했으나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976년에 있었던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카라얀은 무터에게 깊은 음악적 애정을 갖게 되었고 1977년 13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카라얀과 함께 데뷔공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인 1978년에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함께 그녀의 첫 레코딩 작업을 했고, 그 레코드는 Grand Prix Disque와 Deutsch Schallplatten Preis를 수상했다. 그러나 1989년,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카라얀의 죽음은 무터에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1991년에 모든 연주를 접고 안식년을 취하면서 무터는 그동안 자신의 연주가 고전과 낭만 등 너무나도 한정된 레퍼토리에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 음악을 선택하게 된다. 이미 1989년에 뛰어난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 비톨드 루토슬라프스키를 만나 공동 작업을 하면서 현대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무터는 당시 루토슬라프스키의 ‘체인 2’를 초연하였고 그 음반으로 국제음반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현대음악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는 1990년 스위스 작곡가인 노르베르 모레의 ‘꿈’을 초연하기도 하고 볼프강 림의 ‘시간의 노래’와 펜데레츠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등을 통해 새로운 바이올린 기법을 꾸준히 개발하는 등 후대를 위한 개척자인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무터는 까다롭게만 느껴지는 현대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대음악 연주회에 대규모의 청중이 들어 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데 개인이나 연주단체가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현대음악을 하고, 모레나 루토슬라프스키 같은 작곡가들이 확실한 메시지를 가진 작품들을 계속해서 창작한다면 언젠가는 대중들도 현대 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즐기게 될 날이 오리라고 봐요. 현대음악의 경험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한편, 지난 8월 1일에 독일 태생의 미국 지휘자 겸 작곡가인 앙드레 프레빈(73)과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1999년, 프레빈은 무터에게 바이올린 독주곡 ‘탱고, 노래와 춤’,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했고, 무터는 지난 6월~7월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심포니 순회공연에 협연자로 출연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 나갔다고 한다. 대표 음반으로는 안네-소피 무터의 로망스,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가 있다.
▶ 막심 벤게로프(Vengerov,M)
벤게로프의 음악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향 시베리아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한다. 벤게로프는 1974년 서 시베리아의 수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태어난 지 몇 개월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겨울바람이 매서운 혹독한 시베리아의 한 집에서 추위와 허기를 느끼는 외손주의 울음에 당황하던 노부부가 문득 떠오른 노래 소리를 흥얼거리자 갓난아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할머니는 벤게로프가 음악가가 될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적막한 생활 속에서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었던 벤게로프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노보시비르스크 오케스트라의 오보에 주자였던 아버지와 합창단 지휘자인 어머니는 늘 밖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바이올린이 친구로 다가온 것이다. 어머니가 직장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6시로 저녁을 먹고 나면 7시나 8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면 어린 벤게로프의 바이올린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는 더 이상 연습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칠 때까지 연습을 계속했다. 그러면 새벽 3시. 그는 그제서야 밖으로 나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지칠 때까지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한밤중에 마당을 돌며 자전거를 타던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단지, 좀더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게 된 것과 이 덕분에 아주 큰 자전거(피아트 500)를 살 수 있게 됐다는 것뿐입니다.” 이제 그는 ‘100년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는 연주자가 되어 매년 전 세계 100여 도시에서 130여 회의 공연을 갖고 있다. 빡빡한 연주 일정 때문에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크지만, 무엇보다 그는 무대를 사랑하고 청중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연주자이다. “공연장이 제 집이죠. 청중들이 원하는 곳이 제가 살고 싶은 곳입니다.”
▶ 이차크 펄만(Periman. I)
1958년 당시 미국의 유명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한 소년이 등장해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듯 다리가 불편해 보이지만 오동통하게 살이 찐 열세 살짜리 소년은 의자에 앉은 채 ‘왕벌의 비행’을 단숨에 해치워버렸다. 그는 신동 메뉴인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스라엘에서 미국으로 갓 건너 온 이 소년은 다름 아닌 이차크 펄만. 수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인 스타로 대중매체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미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펄만이 처음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세 살 때라고 한다. “제가 어렸을 때는 라디오를 통해서 클래식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며 난 내가 뭘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지요. 세 살 반이 되던 때 부모님은 내 손에 바이올린을 쥐어 주었지만 난 너무 어려서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정식으로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 다섯 살이 되던 때예요.” 1945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이차크 펄만은 13세가 되던 해까지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뮤직 아카데미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비록 4살 때 심한 소아마비를 앓아 걷기가 불편하게 되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한 미국인이 펄만을 미국으로 초청하게 되는데 그가 처음으로 미국인들에게 연주를 보인 것은 앞서 언급했던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이후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공부하게 된 그는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당시 바이올린 교수의 대가였던 두 사람, 이반 갈라미안과 도로시 딜레이에게 한 주씩 돌아가면서 약 9년 동안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에게 이 경험은 평생 매우 소중하게 남게 된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엄격한 교습법의 갈라미안과 자유롭고 대담함을 강조하며 제자로부터 스스로의 생각을 끌어내려 했던 딜레이. 전혀 상반된 접근 방법으로 지도하던 두 사람의 교육적 효과를 고스란히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펄만은 그의 위치에 있는 다른 연주자들만큼 다수의 연주회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그는 많은 음반을 통해서 팬들과 만나고 있다. 그의 음반은 바로크에서 현대음악까지, 독주곡에서 다양한 종류의 앙상블까지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 95년에는 그의 5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년 넘게 EMI를 통해 발표한 40여 종의 음반들 중에서 자신이 직접 선별한 음악을 CD로 묶어 20장의 ‘펄만 콜렉션’으로 내놓은 바 있다. 언제나 부인 토비와 다섯 명의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이차크 펄만. 그가 지닌 뛰어난 기교와 세련된 음악성보다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이 따뜻한 마음이 더욱 그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 정경화
1972년,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방송교향악단의 협연으로 베를린 페스티벌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어려운 콘체르토를 연주했을 때 청중들이 일어서서 5분간이나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로린마젤은 정경화가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의 콘체르토에 '그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고 하며 절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경화는 결코 자신을 재능 있는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능이나 소질은 매우 복잡한 용어들입니다. 재능이란 조심스럽게 키워져야 하며 일생 동안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죠. 재능이 얼마나 깊이 파묻혀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재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을 겁니다. 그 같은 재능을 다룰 수 있는 기질을 지녔다는 것이 축복이죠. 이런 생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자동 조절 장치에 의한 연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무대 위에서 우리는 매순간 순간을 창조하기 위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연주자들이 없다면 음악 작품은 단지 빛바랜 종이 위에 그려진 희고 검은 음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세요. 우리는 작곡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는 기쁨과 책임감은 지니고 있습니다. 청중들에게는 우리의 연주가 항상 자연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자아 비평의 중요한 수단이 되죠.”(헤더 쿠르츠바우어와의 인터뷰 중에서)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이미 예약된 일류 호텔을 삼류 호텔로 바꾸어가며 7년에 걸쳐 악기 값을 갚은 일이며, 여성과 동양인이라는 편견과 싸우기 위해 연주 도중 한 음이라도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집으로 돌아와 20시간 넘게 다시 연습했다는 얘기를 통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재능’이라는 말을 아끼고 또 아끼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