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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한배달 21호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
세계사의 흐름인 민주주의와 우리의 민족이념인 홍익인간 이념을 융합한 "홍익민주주의"가 21세기 세계가 추구하는 이념으로 또한 우리 민족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아래 이를 현대화하기 위하여 본지에서는 지난 17호에 종합시론을 발표한데 이어 18호(정치편), 19호(교육편) 그리고 계속해서 20호에는 경제분야에서의 실천방향 및 국민정신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아직은 시론인점을 감안, 독자제위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 자율 속에서 신바람 난다 / 이용환
- 민족문화 계승과 발전의 문제 / 박성수
- 새로운 무노하정책의 방향 / 이중수
- 실종된 놀이문화와 그 대안 / 김종해
- 우리 민속에는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어 / 신성우
- 홍익문화 구축을 위한 문화계 제언 / 편집부
- 민족문화재단 설립이 시급하다 / 편집부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1
우리 문화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속성
자율 속에서만 신바람이 난다
이용환|전경련 조사담당 이사
자율과 규제는 상반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자율은 규제가 적어야 신장될 수 있는 것이고 규제가 강할수록 자율은 적어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자율의 정신이 강할수록 규제는 작아진다. 사람에게는 원천적으로 누구로부터라도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자율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오히려 타율에 익숙해진 듯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많은 법률과 행정규제가 그 예이다.
혹자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자율의 능력이 약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개인은 똑똑한데 모여 놓으면 무능하다는 것이 바로 이 자율적으로 집단을 조정하고 지도해 나가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이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대단한 관심과 아량을 보이나 공공의 문제나 사회질서에 있어서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는 인식을 갖거나 관심을 가져도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이 자율에 익숙하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자율이 체질화 된 민족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자율의식이 부족한 민족일까? 이미 살펴본 대로 그러한 논리를 펼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과 논리상의 설득력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보면 이 같은 지적은 우리의 가치관과 의식의 측면에서 보기 보다는 개인주의나 계약사상에 기저한 서구적 가치관의 시각에서 나온 평가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자율을 생활 속에서 체질화 해 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만 보더라도 누가하라고 해서, 특히 강요에 의해서 할 때는 특별한 논리나 상황적 변화가 없는데도 부담스러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저항을 하기도 한다. 일을 끝내도 매끄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해결이 안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스스로 기분이 나서 일을 하게 되면 흥이 나고 신명도 저절로 나면서 즐겁게 일을 하고 일의 성과도 예상보다 높게 된다. 물론 사람인 이상 자율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생산성이 높고 성취의욕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유달리 그러한 것이 높고 그것이 신바람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기대 이상의 것을 이룩한 사례를 갖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니,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는 세계적 평가도 실은 타민족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이러한 신바람의 행태가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일이나 무엇인가를 자꾸 하라고 하면 거기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거나 회피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느끼고 좋다고 생각되어야 하려고 하지 다른 사람이 권하면 그리 썩 내켜하지 않는 자세를 보인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유난히도 이러한 성질이 강한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자율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흥은 저절로 우러나는 것
우리의 경우 자율이란 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놀이나 오락에서만 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일에서도 흥이 나야 일을 잘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도 흥과 어울려야 생상성이 올라간다. 밭을 매거나 모내기를 할 때도 노래를 부르며 한다거나 소리 내어 박자를 맞추며 흥을 돋우었다. 공동의 작업일 때는 박자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가 일의 과정을 맞추어 나가는 역할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노동은 이렇듯 처음부터 여러 사람의 협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흥과 어우러지게 된 배경을 발견 할 수 있다. 어우러진다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는 뜻과 같다. 인위적인 조화가 아니라 상호필요에 의한 자율적 조화라 하겠다. 이러한 데서는 흥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이렇듯 흥이란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누가 시켜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일을 완성하여 놓고도 기분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면 저절로 흥이 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기분이 좋으면 집안이거나 심지어는 공공의 장소라도 하다못해 콧노래라도 부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평소에는 노래를 잘하고 적극적인 사람인데도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노래를 하라고 하면 열이면 열 모두 뒤로 뺀다. 속마음은 하고 싶고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도 지적을 받아 하라고 하면 할 줄 모른다고 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는 경우에도 마지못해 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던 일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해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겸허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신명이 날 리가 없다. 이렇듯 우리는 누가 하라고 하면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일도 일단은 멈칫하거나 기분 좋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성향은 비단 놀이나 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제도를 만들거나 운용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성향이 나온다. 제도라는 것은 하나의 제도적 틀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 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참여하여 고쳐야 하는 데도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등의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제도란 사회적 환경의 소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지키는 자세보다도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말에 원만한 사람을 지칭하여 “법 없어도 될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법이라는 것이 소극적인 의미에서 질서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법이 없이도 스스로 질서를 지켜 나갈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의미도 담겨져 있다. 이러한 생각은 불필요한 규제가 많은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현상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의식 속에 이러한 제도라는 것이 체질화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이 향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예로부터 자율적으로 지켜나가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법의 준수에 대하여 일본과 대비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어떤 제도를 만들건 잘 지키고 활용한다고 한다. 이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의식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제도를 멍석이라고 하면 그 멍석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식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는 이러한 멍석을 깔아 놓으면 멍석 밖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 멍석을 치워 버리려고 한다. 멍석 그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태도나 우리 스스로 자연취향의 생활태도를 유추해보면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가 준법정신이 약하다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영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풀이는 곧 신바람으로
우리문화를 한(恨)의 문화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한의 문화는 한풀이라고 일컬어지듯이 맺혔던 것이 풀려야 끝이 난다. 때문에 한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라 하겠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자기 스스로 뉘우치는데서 해결이 가능하다. 물론 우리의 한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남으로부터 받은 상처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 한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자기 자신에 향한 마음을 제때에 풀지 못하고 안으로 쌓여가는 과정에서 그 자체가 한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속에 무엇을 바라고 성취하려는 욕망이 강할수록 많이 나타난다. 오히려 이런 것이 없을 때는 막연히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원(怨)과 같은 개념이 될 수 있다. 우리처럼 교육열이 높은 사회에서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도 한이 된다. 그것은 학교에 진학함으로써 한풀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자기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의 문화에서는 타인의 희생 없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목적을 이루기만 하여도 한풀이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목적을 변경하거나 자신과의 화해과정에서도 해결이 된다. 남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상호간 공존의 논리도 가능하게 된다. 마음에 간직했던 목적을 달성하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피해를 보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한이나 시름이 풀리면 기분이 탁 트이듯이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기분이 좋으면 신바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바람이 나면 누가 시켜도 하지 않던 일도 스스로 나서서 하기도 하고 남과 더불어 호흡을 맞추어 일을 하기도 한다. 신바람이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여야 기분이 좋아지고 흥도 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자율인 것이다. 이러한 자율의 문화가 체질화되어 있는데도 우리가 규제에 무감각한 것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규제를 당하여 오면서 나타난 환경에 대한 적응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규제 완화가 잘 안되는 이유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심성은 오히려 자율을 선호하고 그럴 때만이 일에 있어서도 생산성이 올라가고 창의력도 나타나게 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 운용이나 생활주변에서는 정부의 규제완화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실질적으로 규제가 줄어들었다는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회의 다양화, 전문화 추세에 따라 규제의 폭이 확대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러한 규제의 증대는 국민편익을 증진시키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행정편의에 따라 나타나는 경우가 많음을 보게 된다. 그간 지속적으로 행정규제 완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규제완화가 기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는 규제완화가 권한의 축소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행정의 자기보전적 생리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규제에도 파킨슨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기구나 조직은 그 목적이 다하였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어떠한 명분을 붙여서라도 조직을 유지하려는 속성과 마찬가지로 규제도 역시 그 목적이 다 하였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유지하려는 속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규제완화는 지지부진하게 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규제완화가 당면과제처럼 부각되고 있고 정부 스스로도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것은 규제가 경제에 있어서 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규제완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고 규제가 필요한 부분도 많이 있고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바로 여기에서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역할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게 된다.
규제는 최소한, 자율은 최대한
국민생활이나 경제에 있어서 규제는 최소화하고 특히 국민의 생활과 관련된 부문에 대하여는 가능한 자연스럽게 하여주어야 한다. 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칙만 분명히 하여주고 그 밖의 인, 허가와 관련된 사항은 폐지하거나 절차의 최소화로 기업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어야 한다. 기업의 경우에도 우리의 기본 심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율의 분위기를 힘껏 발현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기업은 근로자들에게 응분의 대우를 해주면서 땀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 때는 부끄러움 없는 자세에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은 끊임없는 연구와 투자를 통한 혁신, 이노베이션 그리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한 이윤의 축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자도 스스로 자기 맡은 일에 대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기업의 지불 능력이 없는 요구는 자제하고 우리 공동의 일터라는 인식을 새로이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경제주체가 역할 분담을 통해 자기 자리에서 서로의 역할을 다 할 때 우리 힘도 솟구칠 수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이 높아지고 기업은 기업대로 저절로 신이 나서 일을 하게 되고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참여해서 일을 하게 되는 신바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국민의 진정한 힘이 사회 전체적으로 어우러져서 나오게 되고 잘 사는 나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평화스런 나라가 되어 한국의 힘이 형성되면 이러한 힘은 절로 세계로 뻗어나가 신바람 나는 나라가 될 것이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2
홍익인간 정신의 꽃인 우리의 민족문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의 문제
박성수|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문화접촉과 민족문화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뚜렷한 문화정책 없이 경제발전에만 몰두해왔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 때문에 문화발전과 문화대국가로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한 자기반성을 하게 되었다.
입으로는 5천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실제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 그리 많지 않다. 있는 것마저 우리 손으로 파괴해 버린 것이 허다하다. 한번 사라진 문화제는 다시 복원할 수 없고 복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사품일 따름이다.
예를 들자면 국보 제1호 남대문을 헐고 전혀 새로운 재료를 써서 다시 짓는 따위의 일이다.
따라서 문화유형재보다는 무형문화제의 복원이 더 긴요하다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형문화재란 노래나 기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와 기예를 가져다준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신문화의 복원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할 것이다.
같은 정신문화라 하더라도 그것이 민족문화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외래문화인 경우가 있다.
외래문화는 지난날 어느 시기에 타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문화로 정착된 것을 말한다. 가령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전통외래문화는 오랜 접촉과정을 통해서 “민족문화”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서로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로 융합되어 있다. 그것은 두 문화의 이른바 복합이 아니라 문화 혼합인 것이다. 이 경우 민족문화는 파괴되지 않고 한층 더 살찌고 발전하여 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민족문화의 자주성이 무너지지 않는다. 민족문화는 그 자주성과 독자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문화접촉의 서유럽 문화를 살펴 볼 때 고대 게르만 문화를 주체로 하여 외래문화인 그리스․로마 문화 그리고 역시 외래문화인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만일 게르만 민족이 이들 두 외래문화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아마도 근대화에 앞장서는 민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기술문화를 선도하는 나라들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유럽 여러 민족의 고유문화는 매우 낮은 수준의 원시문화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말하자면 백지상태와 같은 처지에서 훨씬 발달한 그리스․로마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게르만 원시문화는 그리스․로마문화에 흡수 통일되어 버린 셈인데 그렇다하더라도 게르만 민족문화의 주체성은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서유럽에서 근대 과학기술문화가 싹터 올랐지만 같은 그리스․로마문화와 기독교문화를 받아들인 동유럽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동유럽에서는 끝내 과학기술문화의 싹이 터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여러 민족을 슬라브족이라 하는데 서유럽의 게르만 민족과 구별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였더라도 주체가 다르면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대 이전의 시대에 있어서는 여러 민족간의 문화 접촉이 빈번하고 서로 문화를 주고받고 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고 한다.
정치의 흐름은 이와 다르다. 반드시 발달된 선진민족이 후진민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몽고 같은 유목민족이 발달된 농경민족을 침략하여 지배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다 선진적인 지역의 여러 민족을 정복했다 하더라도 문화적으로 다시 정복당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한 민족의 선진문화가 다른 여러 민족의 후진문화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런 지배적인 민족문화를 세계문화라고 한다. 예컨대 기독교문화, 불교문화, 회교문화, 유교문화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러한 문화의 교류와 접촉과정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도 문화적으로 타문화의 정복을 당했다고 보아야 하느냐,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필자는 우리가 타민족문화나 세계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코 흡수당하거나 정복당했다고 보지 않는다.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계속 유지하여 온 것이다.
문화식민주의와 민족사학
이상과 같이 근대 이전에 있어서의 문화접촉에 있어서 민족문화는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여 왔으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서구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침략자들의 문화식민주의로 인하여 민족문화 말살의 위기에 부딪쳤다.
문화식민주의에 있어서는 그 나라 역사의 왜곡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한 민족이 자신의 역사를 상실한다는 것은 곧 민족의 긍지와 지존심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역사의 왜곡과 상실로 그들은 자기 멸시와 열등감을 갖게 되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감 넘친 판단과 희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상실로 자신이 세계 속의 한 구성원임을 잊게 되며, 역사적 결단과 행동의 주체란 의식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식민주의 역사학은 우리의 역사의식을 오도하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현실관과 실천력을 약화시켜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역사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용기와 슬기를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민족사학의 회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동시에 민족저항사학(民族抵抗史學)이 탄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학자가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였다.
이 두 사람은 「나라는 망해도 겨레는 망하지 않아야 하며 겨레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이다.
박은식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가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단 말인가”고 반문하면서 유태인의 예를 들었다. 3천년 동안이나 나라를 잃고 유랑한 유태인이 어떤 다른 민족에도 동화(同化)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조상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조상의 가르침이란 바로 그들의 역사인 것이다.
1908년에 지은 <독사신문>에서 단재는 민족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고,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도 없어지는 것이니, 아! 역사가의 책임이 무겁기도 하구나!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 되는 민족을 선명히 나타내어 그를 주체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무정신(無精神)의 역사이다.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국가를 만들어 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을까.”
그러므로 민족사학에서는 반드시 그 주체가 「민족이 발달한 상태와 민족의 큰 재난과 행복을 가져다 준 사실」이어야 하며 「민족의 큰 이해(利害)에 관계된 인물」만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사는 모름지기 「민족 전체의 역사」이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편협(偏狹)된 분단사를 배격하였다.
1911년 박은식은 간도에 망명하여 많은 사론(史論)을 썼다. 그 중에 <꿈에서 김태조를 만나보다>(몽배김태조(夢拜金太祖))라는 반소설적 역사 논문이 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단군 태황조(太皇祖)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후, 4368년 여름 5월에 무치생(無恥生․박은식 자신을 가리킴)이 슬하의 자녀들을 버려두고, 압록강을 건너가니 바로 만주 땅인 흥경(興京) 남쪽이었다. 무릇 이 땅은 우리 선조의 고토이다. 지금 그 지도를 살펴보면 고대의 유적을 찾으니, 백두산은 단군 태황조께서 발상하신 땅이요, 현토(玄兎) 이북 천여리의 옛 부여국은 오늘의 개원현(開元縣)으로서 단군 후예의 땅이요, 요동 서쪽 2천리에 걸친 영평부(永平府)는 기자 조선의 경계요, 만주 땅 전부가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다. 우리 선조의 시대에 이처럼 광대한 땅을 개척하신 정황(情況)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할 뿐이다.”고 하면서,
“여하한 방법으로 우리 선조 시대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또 여하한 방법으로 이 민족의 좋은 성질을 이용하여 문명의 정도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고 묻고 있다. 박은식은 앞에 든 <꿈에 김태조를 만나보다>란 글에서 우리 역사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하면서 특히 고구려의 무강(武强)의 향기와 독립정신을 들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대륙 국가를 유지하여 오다가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정체기를 맞게 되어 자존심을 잃고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는 이같이 자기를 작게 보고 남의 노예로 생각하는 습성을 자소적 근성(自所的 根性)이요 자노적 근성(自奴的 根性)이라 매도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동 민족이 아니라 소동 민족이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를 되찾는 데에는 일대 정신교육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정신교육에는 역사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2천 만 민족을 모두 역사학교에 입학시켜 재교육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문화의 독자성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는 중국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 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 민족문화는 중국문화권과 전혀 다른 문화이며, 중국문화권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친 북방문화권에 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언어와 문자사용에 있어 우리 민족은 처음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각목문자(刻木文字)를 사용하였는데, 이 문자는 북방민족 특유의 것이었고, 한자의 최고 형태인 갑골문자에 깊은 영향을 끼친 문자였다. 기록에 보면 각목문자는 신라 초기까지 쓰여졌던 것이 확인된다. 또 족장이나 군장을 제가(諸加)라고 부른 것도 북방문화계의 영향을 받은 증거라 할 수 있다.
둘째, 생활문화에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나타내주는 것은 의상이다.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댕기를 매는 민족문화의 머리형은 뒷날 중국 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는데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생활 풍속이었다.
근대에 와서는 일제와 그 주구들인 친일 개화파가 단발령을 내려 상투를 일시에 가위질하려 들었으나, 이에 저항하여 끝까지 이를 고수함으로써 백의와 함께 상투는 민족문화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상투는, 최근 중공에서 발굴된 진시황의 거대한 무덤에서 무사의 인형이 나왔는데, 그 무사들의 머리형이 상투인 것으로 미루어 중국문화권의 일부 지방에 북방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의 생활풍습 가운데 지금까지도 남아 내려오는 북방문화의 유습이 있으니 「고수레」가 한 예다.
고수레란 야외에 나가 음식을 차려먹을 때 우선 먼저 음식의 일부를 땅에 뿌리는 풍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고수레!」라고 소리 지르는데, 이것은 「음식을 먼저 천지신명에 제사 지낸다」(飮食先祭 天地神明)고 하여 일월성신과 산천을 숭배한 북방계의 자연신 숭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민족문화의 뿌리와 성격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중요한 일은 눈을 밖으로 돌려 무리 민족이 과거 오랜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하나이고 인류는 한 가지 문화 속에 살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 날 수많은 외래문화와 접촉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다음에 유교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들 문화는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접촉하면서 한국화되었다.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한국화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부처의 미소를 예로 들겠다. 불상은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다. 그러나 한국 불상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특이한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그 표정이 다른 것이다. 석굴암의 불상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그 특이한 미소에서 비롯된다. 이 미소는 어느 고고 미술 사학자가 헬레니즘 세계에서 흘러온 미소라 했으니 놀라운 망발이다. 이 학자에게는 한국 미술의 독자성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한국 건축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도 똑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어느 문화 인류학자가 우리 가옥의 마루와 온돌을 남방문화와 북방문화의 상징이라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우리 문화의 고유한 성격을 탐구하려 노력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학자들이 매양 우리 문화를 외래문화의 도입으로만 이해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문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다. 박은식이 자소적 근성이라 부른 일종의 문화 열등감이 지난 100백 년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소하지 않고서는 자주적 민족문화를 창조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인석 선생은 일찍이 실아화피(失俄化彼)를 경고하였다. 실아화피란 자기를 잃고 남에게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자기문화에 자신을 잃었을 때 문화식민주의가 오는 것이며, 자기 역사를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쓰지 못할 때 민족문화의 상실이라는 문화적 실향민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민족문화
우리는 과연 문화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치․경제 문제와 문화의 문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도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표면상 세계문화에 종속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불풍(佛風), 유풍(儒風) 그리고 왜풍(倭風)과 양풍(佯風)이 불어왔으나 우리의 국풍은 여전히 남아 내려왔다. 그렇듯 앞으로도 민족문화는 살아나서 든든해지고 풍부해져야 할 것이다.
민족문화의 시체 위에 민족의 행복은 없을 것이다. 민족문화의 터전 위에 문화 창조의 힘이 솟아오를 것이며, 세계 문화에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할 것이다.
백범 김구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삼천만 민족 모두가 정신적으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겉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달라서는 안 되고, 겉과 속이 똑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현대 문명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에 대한 고발이 들어있고, 식민지 지배하에서 잠시 잃었던 민족자존심의 회복에 대한 호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3
새로운 문화 정책의 방향
자율성 보장하고 자생력 키워야
이중수|세계일보 기자
문화체육부는 최근 규제․감독위주의 문화예술 관계법령을 지원․진흥 중심으로 대폭 바꾸겠다고 일대 개혁을 선언하고 나섰다. 문화체육부는 72년에 제정돼 20년간이나 지속돼온 문화예술진흥법을 전면 개정키로 하는 것을 비롯해 문화예술인의 창작활동 진작, 창작 소재의 전면 개방 등을 골자로 한 「신한국 문화발전 5개년 계획」의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정부 측의 이와 같은 입장은 더 이상 창작 소재 제한에 따른 해묵은 논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문화예술계의 자율성의 최대한 보장, 지원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문화예술계의 파행성
이 같은 문화체육계의 정책전환을 정작 환영해야 할 문화예술계는 오히려 당혹감 속에 빠져 있다. 문화체육부가 규제․감독하고 있던 시절 독점을 누리던 일부 문화예술 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는가 하면 군소단체들조차 이제는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예술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여 일반 대중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문화예술 공연단체들은 의존적이고 파행적이며 파벌적인 예술 활동을 해왔다. 영리가 목적인 기업의 체질을 알면서도 무조건 지원만을 요구하는 문화예술계의 구걸, 연주자의 친지 동료들까지 가족 학예발표회 성격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회성 공연, 대중 관객의 참여는 외면한 채 대관료만 챙기면 그만인 극장 경영, 국내 예술가들의 기획 무대보다 외국 유명 스타들의 경쟁적 유치에만 골몰하는 상업 기획단체의 난립 등 병폐를 안고 있다. 또 우루과이 라운드(UR) 한․미간 지적재산권 협상에 따른 외국 문화 상품의 홍수 속에서 국제적 상표권을 획득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전통 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필요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국립 현대미술관과 크고 작은 소극장들이 지난 80년대 이후 많이 확충됐지만 이 공간에 내세울 만한 우리 창작품이 몇 개나 될까. 또 이를 키울 만한 예술지원단체나 기획사들이 얼마나 영세한 수준인가 등을 되돌아보면 암담하다고까지 할만하다. 더욱이 최근 광고 영화 시장의 개방과 함께 영상매체, 음반, 비디오 등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대로라면 「문화 종속국」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까지 일고 있는 형편이다.
해외의 고급문화 상품과 저질 문화에 대처할 만한 우리의 준비는 어떤가. 결국 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길이 가장 우선순위에 꼽힌다. 외국 문화의 유행적 도입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 공연, 미술, 건축, 영상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우리 전통을 재창조 해낼만한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최근 영화「서편제」가 몰고 온 전통 문화에 대한 보존성은 바로 현대적 창조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다.
자생적 역량을 갖추어야
문화예술계가 자생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은 특히 문화산업의 경우에 절실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방송, 영화, 음반, 영상매체 등은 시장이 개방되면 하루아침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현재는 독점을 확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외국의 고급 문화상품, 특히 프로그램이나 소프트웨어들이 밀려오게 될 경우 이들을 방어해낼 만큼 우수한 우리의 소프트웨어가 없기 때문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CATV의 경우 우리 자체 개발 프로그램을 한 달간 돌리면 더 이상 보여줄게 없다고 한다. 그 이후는 할리우드나 일본에서 제작한 고급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장악할 것이라는 얘기다.
소위 순수예술이라 불리는 음악, 연극, 무용, 미술, 문학 등에 비해 영화, 영상매체, 방송 등 대중예술이 산업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신장했다. 그러나 이들을 운용할만한 인력과 예산 확보는 아직도 20년 전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제 우리 문화예술계의 자생력이 필요해진 때다. 문화체육부는 영화․영상산업의 육성을 위해 이들 업종을 준제조업으로 규정, 금용․세제 지원도 강화하기로 하고 그동안 말썽이 많던 공연관계법령도 대폭 정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한국 문화예술을 대표할 만한 이미지 상품이 없다. 예컨대 일본의 사계극단은 60년대 몇 명 안 되는 영세성 속에서 출발, 그간 꾸준한 재투자를 통해 현재 공연자 2백명, 기획자 1백 , 무대 예술가 1백명 등으로 구성된 주식회사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물론 정부지원보다 단체구성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이제는 아동극에서부터 뮤지컬, 성인극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이면 누구나 믿고 찾을 수 있는 고유 이미지를 창출해낸 것이다.
문화체육부가 할 일
문화체육부가 해야 할 일도 많다.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의 문화예술 인력 양성, 문화예술 전문가 육성 등이 시급한 과제다. 교육부가 한국교육개발원(KEDI), 과기처가 과학기술원, 경제기획원이 한국개발원(KDI)을 통해 우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관련 정책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현 「문화발전연구소」를 이들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문화예술전문 「싱크탱크」에 눈을 돌려야 한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4
민족문화의 바른 이해와 진흥을 위한 제언
박정학|본 법인 창립이사
머리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 6개월,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사회는 정치적․경제적․사회도덕적인 면에서 상당히 많은 개혁을 국민들의 지지 속에 추진해왔고 또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식자들 간에는 대부분 개혁 조치들이 외형적인 현상 치료에 주안을 둔 「충격요법」, 「반짝 개혁」, 「들춰내기」의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개혁하는 장기적인 안목의 효과의 범위가 크게 미칠 수 있는 미래비젼 제시형 개혁정책을 바라보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문화정책이다. 일반대중들이 생각하는 문화는 예술의 범주와 그 부근을 지칭하고 있으나 문화란 그것보다 더 넓고, 깊으며 그 효과 또한 매우 큰 것이다. 신한국 문화정책이 발표되기도 했으나 문화에 관심을 가진 많은 국민들로부터는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생활의 뿌리를 개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미흡하긴 하지만 문화의 의미와 우리 민족문화의 특성 및 그 중심점(뿌리)을 알아보고 21세기를 장식할 홍익 민주주의 사회의 총체적 모습이면서 신한국 건설을 위한 개혁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할 문화정책의 방향을 개략적으로나마 제시해 본다.
문화란
가. 문화의 뜻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문화 창조력을 가졌고 자연환경 외에 문화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는 전통문화, 음식문화, 놀이문화, 군대문화, 생활문화, 문화권, 문화인 등 정확한 뜻은 몰라도 「문화」라는 말을 생활 속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게 되었다.
따라서 처제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이론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문화를 “사회 성원으로서의 인간이 습득한 지식․믿음․예술․도덕․법․관습, 기타 모든 용력(容力)과 습관을 다 포함하는 복합적인 총체”(Tyler), “인간 스스로가 창조하여 자신의 환경의 일부로 삼는 사고방식․감정양식 및 행위유형으로서 한 특정사회(집단)를 다른 사회와 구별지어주는 행동과 믿음의 조합”(Biesanz),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따르는 생활양식으로서 그들이 사회생활을 통해 배운바 행위의 유형이며, 전통의 묶음이요, 의식과 믿음의 총체”(Hodges) 등으로 정의하고 있는바, 사회를 ‘상당한 기간을 함께 삶으로서 조직을 이루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단위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문화는 「인간 사회에 특유한 것으로 사회라는 그릇 속의 내용물-총체적인 생활 그 자체-로서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습득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문화의 특성(Hodges와 Biesanz)
⑴ 문화는 자연환경에 적응, 극복하고 나아가 조정 통제하기 위해 사람이 만드는 것으로 그 핵심적인 힘은 상징력이고 이로써 기호를 만들어 말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
⑵ 문화는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고 공유하는 것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상징력과 언어가 있었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⑶ 문화는 사회생활의 맥락 속에서 학습을 통해 습득하고 대대로 전승하는 것이다.
⑷ 문화는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학습, 전승할 수 있는 짜임새 있는 틀(유형, Patterm)이 생긴다.
⑸ 문화는 전 인류에 보편적이면서도 사회마다 다양하여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이 각양각색이다.
⑹ 문화는 과거의 것, 주변의 것을 창의적으로 변용하면서 언제나 변한다.
즉, 문화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그의 특질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핵심적인 열쇠는 상징력과 표현 수단으로 만들어낸 언어라는 것이다.
다. 문화의 기능
문화는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며 환경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별다른 고민 없이 자연스레 움직이게 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가장 효율적인 생존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한번 만들어서 우리들 삶의 환경의 일부가 된 뒤에는 문화가 인간 생활의 모습을 일정한 틀 속에서 묶어주는 구실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Spencer는 문화를 “개인의 생애나 세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생활양식을 결정해 주는 체계, 즉 초유기체적 체계”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살지만 무엇을․언제․어디서․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정해주는 것도 문화요, 성인들은 누구나 성적인 충동이 있는데 누구와․언제․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충족시킬지 지시해 주는 것도 그 사회의 문화다.
이처럼 삶의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문화의 힘이 작용하고 있어 문화는 사람이 사는 세계를 규정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 현실과는 관계없이 사회적 존재가 무엇인지를 구성해주는 것이 문화인 것이다.
라. 문화의 요소와 구조
문화를 성립시키는 요소(문화형상)는 언어․예술․학문․종교․법률․정치조직․습관․경제․기술 등 수없이 많고 학자들의 주장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기술․가치․사회관계․언어 네 가지, 또는 물질을 덧붙여 다섯으로 크게 나눈다(李光周).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적인 기능과 작용을 가지면서 내부적으로 유기적 통합을 통해 구조적․기능적으로 통합적인 하나의 전체를 이루며 그 전체가 개성을 지닌다.
따라서 문화는 유기체와 닮았으나 가치라는 면이 있어 초유기성을 가진 통합형태라고 부르며 각각의 문화에는 집단이나 지역에 따라 특유한 성격을 띠는 패턴이 있고 이를 문화권 또는 문화영역이라 부르는데 범위를 잡기에 따라 통속으로 음식문화, 군대문화, 정치문화…… 등등 무수하게 들을 수 있으나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민족성이나 국민성이다.
또한 문화를 언어나 기풍, 종교 등과 같은 관념문화, 제도와 민속 등과 같은 규범문화, 시대별 유행과 같은 용기(用器)문화로 나누기도 하는데 문화의 패턴이 바뀌기 어렵다고 해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는 시대․지역․집단간의 활발한 상호교류와 변용을 통해 변모하며 그 정도는 용기문화가 가장 쉽게, 그 다음이 규범문화 순이며 이런 문화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규범문화가 가장 바뀌기 어려워 수천 년이 지나도 그 근본은 바뀌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상 개략적으로 살펴본 문화는 쉽게 말해 “사람이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 속에서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향과 그 산물”이라 볼 수 있으며 문화성립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사회를 둘러싼 자연환경(영토)과 구성원의 상징력(생각하는 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말과 글)에 따라 다른 사회와 구별을 지어주는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주는 근원인 동시에 삶을 규제하는 기능을 하면서 그 사회(집단)의 생활을 토대로 하여 변화 발전하는, 즉 살아있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관념문화의 중심이 되는 상징력은 거의 변화하지 않으면서 그 문화의 특성을 규정하고 있음을 추리해 낼 수 있다.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
가. 우리 민족문화의 몇 가지 특성
⑴ 우리 민족의 상징력으로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삼국유사의 단군설화를 보면 신(환인), 자연(곰이라는 동물, 마늘․쑥이라는 식물), 인간(단군)이 환웅의 매개에 의해 하나의 장(場) 속에 연결되고, 은퇴 후 신선(신)이 되므로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고 연장선상에 놓고 있다.(무속신앙도 같음)
⑵ 우리 그림(한국화)은 화면 전체를 채색하는 서양화와 달리 빈공간도 그림의 일부분으로 활용하는 비움(無)과 채움(有)의 조화를 중시했다.
⑶ 우리의 음악은 독특한 음계로서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슬픔과 기쁨을 동시적으로 표현하고, 듣는 사람을 서로 어우러지게 하며, 주제도 인간 누구나 가진 한(恨)을 맺는 것 보다는 풀기 위한 것이 많다.
⑷ 우리 의약(醫藥)은 사람의 몸의 병뿐 아니라 얼․넋의 병까지를 다스리기 위해 약재(동식물)를 다양하게 하고 정성을 중시하여 서양이나 중국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신경․정신계통의 난치병까지도 고쳐낸다. (사암침, 민간요법 등)
⑸ 우리 전통 정원(청평사 등)에는 일본정원처럼 축소판을 만들어 가져다 놓는 등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고 자연 경관과 조화되게 집․연못․정자를 지어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⑹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서 높은 영양가와 함께 항암작용을 하는 된장, 살아있는 유산균을 먹는 김치, 열효율을 극대화하고 몸의 활기를 돕는 온돌 등 인위적으로 만들기보다 자연의 원리를 우리 생활에 효율적으로 이용한 슬기로움이 번뜩인다.(최근 세계학자들이 증명해 가고 있음.)
나. 우리 민족의 상징기준: 「한」(홍익인간)
문화 창조의 원동력은 상징력(생각하는 힘)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상징력은 바로 우리 민족 문화를 규정하는 것이므로 그 특성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우리 영토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그것에 적용하고 극복하기 위한 문화를 창조함에 있어 무엇(어떤 가치)을 기본(기준)으로 하여 상징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징기준으로서 오랜 역사 발전 속에서도 변화되지 않은 민족혼․겨레얼이며 오늘날 우리가 시대상황(민주화, 국제화, 정보화, 이데올로기의 쇠퇴 등)에 맞는 우리의 미래지향적 한국적 성격의 문화를 창조하는데 가치 기준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우리 문화의 특성에 나타난 공통점은 바로 「조화」(調和)라는 것이다. 산과 자연과 사람이 서로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조화 속에 있으며, 삶과 죽음․유(有)와 무(無)․슬픔과 기쁨․사람의 몸과 자연(동식물)․관객과 연주자 및 관객 간․좋고 나쁨 등 이 모든 것이 대립 관계가 아닌 협조(협동)의 관계로 조화를 이루고, 또 조화가 되도록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우리 문화의 공통점으로서 이것이 바로 「한」(韓, 桓)사상이며 인간 사회 속에서는 「홍익인간」이다.
따라서 「한」, 즉 홍익인간은 우리 민족의 얼이요 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최민홍 교수는 이것을 ‘민족문화의 성립조건은 경전(철학)과 말․글․자연영토’라고 규정하고 경전의 중심점으로서 불교문화에서의 「자비」, 유교의 「인」,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다. 민족 결속의 원동력 정(情)
우리의 민족문화란 우리 민족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중심점인 한(조화)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같은 말과 글을 통해 학습을 하지만, 결속시키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같은 느낌’을 갖는데서 출발된다. 대부분의 다른 민족문화, 특히 구미의 물질 중심 문화는 공통된 말과 글, 생각으로 결속을 이루는 형태이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의약과 음식을 비롯 예술 활동이나 예술품에도 혼(정성)이 들어가야 함을 강조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 하기 어려운 어떤 요소를 강조했다. 조화를 위해 꼭 필요하고 정성, 좋고, 미움 등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이 요소는 하나의 「느낌」으로서 영어에는 단어조차 없으나 우리 겨레 누구나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정」(情)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계에서 가장 정 많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에는 애정, 동정, 증오, 흥분, 한, 두려움, 무서움 등 수없이 많은데 우리 민족은 이러한 정을 생활의 에너지로 여기고 생활의 풍요로움을 저해하는 증오, 흥분, 한, 두려움 등을 풀어 도움이 되는 정으로 바꾸어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노래(음악), 시문(詩文), 술 등을 활용했기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민족이 되었다.
이런 정은 느끼는 것이기에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되며 가까이 있을수록 교감(交感)에 의해 강화되므로 미운 사람은 ‘눈앞에 보이지 마라’, ‘나가라’, 고운 사람을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다’는 식이 되며, “마음”이라는 수단이 사용되고 가슴(心)에서 형성된다. 즉 「정」은 「한」을 실천하는 (움직이는) 원동력인 것이다.
라. 실종된 우리 민족문화의 경전(經典)
최민홍 교수는 문화권 형성의 첫 번째 조건이 경전인데 그 경전에는 중심점과 실천을 위한 세부적인 지침들이 적혀 있으며 불경, 성경, 논어, 코란 등이 그것이라면서 우리 민족문화의 경전으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정을 들고 그 중심점이 「한」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전이 세계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짧게 축약되어 표현되었으면서도 가장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이유립 선생은 여기에 태백진훈과 태백속경을 보태어 홍익5서라 하고 특히 참전계정을 논어, 법구경과 함께 3대 경전이라 했으며, 최동환은 환역(桓易)을 추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강단학계나 정부 측에서는 우리의 민족 철학에 대한 별다른 연구도 없으면서 이들의 주장과 연구 실적을 “위서다”, “믿을 수 없다”하여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내용의 옳고 그름이나 필요성은 생각해 보지도 않으려는데 있다.
우리는 철학도 경전도 없는 문화를 가진 민족인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긴긴 역사 속에서 오늘까지 맥락을 이어 올 수 있었을까? 그래서 한배달에서는 12월 중 천부경에 대한 대토론회를 개최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사계의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경전을 갖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홍익민주주의에서의 문화정책 방향
가. 「한국적 성격」의 정립
문화는 변화 발전되는 것이지만 우리 것을 바탕으로 창의적 변모가 돼야 하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보면 학문이나 예술․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외래 요소가 들어와서 판을 치고 있다. 경제에서는 선진국의 기술도입에 혈안이 되어 있고, 젊은이들은 국악 한 자락 할 줄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팝송이나 랩송에 빠져있고 된장찌개보다는 햄버거를 더 좋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종교 전시장인 듯 온통 외래 종교 천지가 되어 사회질서, 가치의식이 혼돈 속에 빠져 있다.
물론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 되어가듯 국제화 시대가 되어가는 시대의 흐름이지만 그럴수록 「한국적 성격」이 없는 문화로서는 세계 속에서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격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홍익민주주의적 세계관이 시급히 요구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가 우리 문화에 대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한국적 성격」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만의 독특한 내용을 담은 우리 경전을 소중히 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그 내용을 모든 문화 요소에 창조적 변용을 하는 기간으로 삼고 그 내용을 생활화하는데 대한 정부와 온 국민의 관심이 요구된다.
나. “한국학” 연구의 획기적 진흥
민족문화의 통합적․전체적 구조는 장기간의 역사발전 속에서 성립되어 그 주체인 민족 또는 국민과 더불어 끊임없는 발전을 하기 때문에 민족․국민문화가 위축되거나 퇴폐하는 일이 없이 계속적으로 새로운 빛을 발휘하여 갈 수 있으며, 민족혼․겨레얼을 바탕으로 한국적 성격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그 주체인 우리 민족․국민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우리 것(외국 사람이 말할 때 한국학)에 대한 관심은 어떠한가?
수치스럽게도 우리 문화는 중국의 변방문화로 자리를 굳히고 이제는 서구의 철학, 학문, 예술 등에도 밀려 그 독자적 존재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와 있다. 미국에서만도 20여개 대학 이상이 한국학 강좌를 열고 있다 하며 동․서 유럽과 동남아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큰 폭으로 증가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고유한 우리의 무엇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문화의 진수가 녹아 든 우리의 역사, 그 역사가 형편없이 왜곡되었음이 많은 인사들에 의해 지적되고 밝혀지고 있는데도 왜 새로운 주체적 시각의 국사연구는 제자리걸음이고, 공자니 칸트니 하는 외국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석가를 능가한다”는 원효, “공자를 능가한다”는 퇴계, 중국 삼론종의 창시자 승랑 등등 우리의 고유철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고리타분한 것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가?
과학도 정신과학이 중국․서구보다 앞섰던 우리 과학의 뿌리를 찾고, 음악도 예부터 음악이 훨씬 앞섰던 우리가 악기도 다른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다는데 대한 의심도 해소해 주며, 오히려 서양에서 우수성을 증명하는 우리의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도 강화하여 「우리 것」의 바탕 위에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국제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의 과감한 예산 할당과 학계에 대한 관심 촉구로 연구 주체와 대상, 방향을 전혀 새롭게 하여 적극적인 진흥책을 추진함으로써 태평양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신한국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다. 우리의 혼.얼을 일깨우는 교육.언론 돼야
문화는 사회생활 속에서 학습으로 습득․전승된다고 했다. 따라서 교육과 언론․출판은 문화정책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감수성(느낌을 가장 왕성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예민한 유아기․청소년기의 교육은 우리 문화를 전승시키는 가장 적기인데 이 때 「한」과 「정」을 일깨우는 교육이나 TV 방송 프로그램의 개발은 너무 미미하여 일본 만화 영화, 번역된 동화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어른들도 문제다. 우리 것을 너무 모르고 있으니 실천으로서나 얘기로서나 자식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로부터 우리 얼과 혼, 역사를 공부하고 생각하여 바르게 실천할 뿐 아니라 정부나 언론사․출판사에서는 돈을 좀 들여서라도 우리 얼․민족혼이 담긴 동화책과 역사책, 위인전 등을 새롭게 만들어내어야 한다.
학교 교육도 입시 위주여서는 정말 안 된다.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자연․신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올바른 시민을 만들어 내는 인간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표를 분명히 해놓고 신중한 연구에 따라 과감한 개혁(금융실명제처럼)을 해야 한다. 교과 내용도 에디슨보다 장영실을, 괴테보다 황진이를, 칸트보다 원효를, 공자보다 퇴계를, 바하보다 우륵을 먼저 가르치는 등 민족혼․겨레얼을 배울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하고, 교과 과정도 각자의 소질과 창의력을 계발하고 소질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다양화하며, 입시제도도 초기 약간의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종합적인 능력을 고려하여 학교 특성을 갖도록 개선해야 할 것이다.
성인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출판의 경우도 현재 TV 교양 프로의 소수의 자리하고 있는 우리 문화와 외국의 고급문화보도의 비중을 대폭 증대하고, 번역물이 훨씬 많은 출판도 처음에는 다소 장사가 안 되더라도 우리 것이 더 많아지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정부의 지원과 지도도 적극 가미되어야 할 것이다.
라. 외국문화의 무분별 도입 견제
문화는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보다 활발히 발전할 수 있지만 근래 우리나라의 경우 시장 개방의 확대와 함께 언론의 무자각과 돈만 벌면 된다는 얄팍한 상혼에 의해 저질의 외국 청소년 문화와 상품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오고, 심지어 TV에서는 심청전보다는 외국가무단의 초청 공연 등을 더 많이 비춰 주고 있어 종종 사회에서 지적받고 문제도 야기하듯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심히 오염시키고 있다.
외국문화 중에서도 고급문화보다는 저질문화를 수입․소개함으로써 국민문화를 국적 없는 저질문화로 이끌어가는 언론은 나중에 역사적인 비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의식과 정서와 건강에 맞지도 않는 외국문화나 상품을 수입해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상혼들은 몰매를 맞아야 마땅하다.
옷도, 음식도,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우리의 것, 외래문화를 주체적․창의적으로 변용한 것의 우수성(고유성)을 알리는 보도를 많이 하고, 우리의 자연 및 문화 환경과 국민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즉 우리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우리 상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국산품 애용운동을 문화보호 차원에서 벌여 나가는 등 언론과 기업과 국가와 국민이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
마. 각급 문화재단의 역할 조화
근래에 들어 대기업을 비롯한 사회의 각종 문화재단들이 많이 생기고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런데 한 분야라도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사업을 하는 곳은 별로 없고, 수익성이 있거나 인기가 있어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쪽의 활동을 경쟁적으로 벌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정부지원 재단도 지금까지의 우리 문화에 대한 연구가 주체성이 결여된 부분이 많아 연구자체를 새롭게 해야 되는데도 잘못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문화대백과 사전을 만드는 등 성과가 부각되는 사업에 투자를 많이 해온 것이 사실이다.
21세기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우리 것을 바로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화도 될 수 있도록 연구하여 발전시키며, 국민들의 관심 유발에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광고․세미나․토론회 등 분야별로 나누어 한 재단이 한 가지 사업에 집중 투자하여 특화한다면 우리 문화의 진흥과 문화재단에 대한 국민 시각도 많이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모든 재단이 중복되는 여러 사업에 예산을 분산 집행하다 보니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국가 전체적으로는 투입 예산에 비해 효과가 아주 작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정부에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편 가르기나 하지 말고 재야의 학자들을 과감히 영입하면서 우리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업에 예산을 과감히 투입하면서 문화재단간의 역할 분담을 잘 조정하고, 각급 재단들도 자기의 특색을 살리는데 노력한다면 우리 문화의 진흥에 크게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바. 남북 통합과 민족 통일시대에 대비를
최근 퉁일(사실은 남북 통합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지고 금세기 내의 통일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지고 있는데 그 때 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각종 제도나 국민들의 의식 등 모두 이질화(異質化)되어 한마음이 되는 데는 장해요소가 된다. 같은 것은 6천년을 같이 살아온 우리의 전통 문화다. 물론 북쪽에서는 많이 변모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일단 그것은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하고 있는 폭이 넓을수록 통합(통일)으로 생기는 부담과 파장을 줄이기 용이해진다. 거기에 대비한 연구도 시급하다고 본다.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와 쉽게 합쳐 질 것인가? 여기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세계화를 지향하는 홍익민주주의만이 가장 잘 맞는 처방이 될 것이다. 폐쇄되어 있던 북한 사람들에게 햄버거와 디스코를 먼저 내놓을 것인가? 그것은 민족 양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의 개발로 통합(통일)시대에 대비하는 지혜가 오늘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맺음말
문화는 우리 생활 그 자체다.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도 문화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배달민족 문화권에 살면서 습득한 것이며 그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승해야 하는 책임도 갖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생활 주변은 어떠한가? 국적분간이 어려울 만큼 뒤죽박죽되어 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나라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대로 우리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김진현 전장관의 말처럼 “충실한 민족주의가 충실한 세계화라는 국제주의적 민족주의” 의식하에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인 홍익인간(한) 철학을 오늘의 우리 생활(문화)에 되살려 “한국적인 성격”을 세워야 세계성도 갖게 되며 그럴 때 우리나라도 세계 속에 부상할 수 있다는 사회․역사․문화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노력할 것을 제언한다. 특히 정부와 문화단체, 기업과 문화인들의 획기적 정책 변화와 노력의 효율성 증대를 위한 상호 대화에 따른 역할 분담을 기대해 본다.
비전문가로서 비논리적인 얘기를, 너무나 방대한 문화 분야에 대해 쓰다보니 매우 방만해져 송구스럽고 지면 관계상 평소 생각했던 구체적 분야의 내용을 다 쓰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 기회에 또 쓸 기회가 있기를 바라고 내용에 대한 독자들과의 토의를 통해 한 단계 스스로 발전하고픈 희망을 가져본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5
전통놀이 문화를 생활화해야
실종된 놀이문화와 그 대안
김종해|한국무용협회 성남시 지부장
우리는 요즈음 주위에서 한국 사람은 놀 줄을 모른다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가족대사(家族大事)로 모처럼 모이는 가족모임이나 명절모임, 침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친지모임, 또는 새로 이사하여 모이는 집들이, 심지어 직장동료나 동창회로 모이는 야유회에서까지 소위 화투놀이 중의 하나인 고․스톱(go stop)이 만연 되어 있고, 언제부터인가는 일본문화인 가라오케와 서구문화의 디스코 춤(Disco dance)이 우리 주위를 질식시키고 있어서 나온 말일 것이다.
장단만 나오면 덩실덩실 어깨춤-사실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춤을 추었던 우리 조상들과 디스코 음악에 맞추어 흔들어대는 요즘 사람들의 놀이 방식은 형식에 있어서는 어쩌면 같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일면이 있다. 디스코 춤은 지극히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만, 우리의 어깨춤은 가슴의 느낌으로 추는 카타르시스(Katharsis)적인 춤으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 놀이 문화의 근원
우리 놀이 문화의 근원을 우리는 고대의 제천(祭天)과 사신의식(祀神儀式)에서 추론한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이 3천 단부를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여 백성의 생명, 곡식, 병(病), 형(刑), 선, 악 등 무려 360여 종류의 사회사(社會史)를 대신한 제천(祭天), 사신(祀神), 기곡(祈穀), 료병(療病)과 상벌(賞罰) 등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식 중에서 제천과 사신은 자연히 집단적인 공동체적 가무를 동반하였으며, 그것이 점점 발달하여 각 부족국가 별로 농경사회가 형성되면서 농작(農作)에 관한 의식놀이로 5월 파종과 10월 추수 때에는 모든 사람이 한결 같이 대동굿을 벌이며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진수(陣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의 <마한조(馬韓條)>에 보면,
常以五月下種 祭鬼神 群*歌無飮酒晝夜無休 其舞數十人 俱起相隨踏地低昂 手足相應 節
奏 有以 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즉, “5월 파종을 끝내거나 10월 농사를 마친 후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밤낮없이 술을 마시고 함께 일어나 발을 구르며 따르면서 손과 발을 맞추어 음악에 따라 춤을 추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부족국가 제천의식으로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濊)의 ‘무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제천의식을 벌이던 장소를 우리는 예부터 ‘판’이라고 일컬어 오고 있으며, 그 판은 성격에 따라서 이름을 달리 하는데 굿을 벌리는 판을 ‘굿판’이라하고 놀이를 벌리는 판을 ‘놀이판’ 또는 ‘난장판’이라고 한다. 이 놀이판은 지속적이거나 안정된 것이기 보다 동요(動搖)스러운 찰나성 내지 즉응성(卽應性) 혹은 즉흥성(卽興性)을 내포하고 공간을 역동(力動)시키고 소용돌이로 변하게 하여 감정적인 고조를 유발하여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내는 공동체적 공간이다. 이 공간은 제의(祭儀)의 공간이며 노동의 공간이요 곧 삶의 터전(휴식과 놀이)이 혼재된 인간 생활의 공간이어서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고 일하면서 놀았던 우리의 휴식개념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놀이문화의 문제
오늘날 우리 놀이문화는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천함에 따라 일의 공간과 놀이의 공간이 구분되기에 이르러 일은 일이고 놀이는 놀이라는 개념이 싹트게 되었으며 일하면서 논다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재현되고 있는 ‘민속놀이’나 ‘민속극’의 마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열린 공간인데 반하여 우리 현대인의 의식은 폐쇄적이어서 전통적인 놀이문화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해서 오늘 우리는 잘 놀 줄 모른다는 억울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놀이문화를 어떻게 생활에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시대에 놀이문화가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그동안 우리 것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어서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없다고 푸념한다. 또한 우리의 전통에 술이나 민속놀이에는 다이나믹한 힘이 없어서 매력이 없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양인의 필수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의 고전음악이 과연 현대의 전자음악보다 더 역동적이어서 동서고금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어필한단 말인가?
현대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 수많은 음악이 있어도 결국 가장 위대한 음악은 소위 클래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역동적이어서도 아니다. 우리 인간의 정서를 정화해주는 탁월하고 중요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전통음악도 마찬가지다. 비록 느린 템포에 지루하고 역동성은 없어도 ‘인간 심성을 정화해주는 신비의 소리’라고 극찬하는 말을 우리보다는 서양인들이 더 하지 않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전통극인 가무기(歌舞伎, 가부끼)나 능(能, 노오)은 일본 사람들이나 서양인들에게 대단한 호평과 사랑을 받고 있는 전통예술이다. 그것은 물론 그것들이 탁월한 예술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렇게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푸대접을 하고 있는 우리 전통예술 중에는 그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 많은데도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부터 20여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서울 덕수궁에서 「한국미술 오천년전」을 개최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동안 조용하다가 별로 관람객이 없었다는 신문 보도가 이어졌다. 다시 며칠 후 이제 그 행사가 일본에서 개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신문에 일본에서 벌인 그 행사의 소식을 전한다.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것이 우리 문화의 원류다.’하고 대단한 관심과 함께 큰 성황을 이루었다는 보도다. 그 뒤 며칠 후에 다시 서울에서 「한국미술 오천년 귀국전」을 열었는데 대대적인 성황을 이루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었다. 그 보도를 읽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마디 하기를 “우리 국민의 문화 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우리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둘째,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교육의 부재(不在) 속에 살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좋은 줄을 알아야 소유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평범한 진리다. 그 좋은 예가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서편제」이다. 그 영화의 내용이야 그다지 새로운 것도 없고 기가 막히게 창작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로 그렇게 푸대접 받던 국악이 레코드 가게에서 상당히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보도다.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오랜 시간을 우리 것에 대해서 망각한 채 모르고 살아왔다. 아니면 오히려 외면하고 살아 왔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 것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놀이문화의 생활화
우리가 우리 것 특히 우리의 민속예술 내지는 민속놀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다가서기 위해서는 우리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알지 못하고는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서두에서도 예시한 고․스톱만 하더라도 그것을 즐기는 남자들은 고․스톱 삼매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그것을 모르는 여자들은 재미는 그만 두고라도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푸념한다. 남자들의 낚시 취미나 바둑 취미도 같은 원리이다. 나는 중요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이수자로서 봉산탈춤에 대해서 잘 알고 애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길을 가다가 ‘장고 소리’나 ‘추임새 소리’가 나면 들어가 살펴보고 어울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생면부지 생소한 소리라면 그 장고 소리는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을 통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첫째, 기초교육을 통한 방법이다.
유치원이나 초등교육기관(초등학교)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우리 어린이들의 정서를 우리 것에 맞게 가꾸어나가야 한다. 지금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일부가 우리 것에 대해서 편찬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지극히 단편적일 뿐 아니라 더욱이나 실행 가능성이 없는 제도적 모순 때문에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육부의 교육방침에 따라서 교과서에 집필만 되어 있을 뿐 후속실행 방침론은 전혀 제시되지 않아 현장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일선 교사는 그 분야에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부분은 거의 건너뛰고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백년대계를 위하여 집필된 교과서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집필된 교과서 부분에 대해서는 각 교육구청별로 강습회를 통하든지 아니면 영상자료(VTR 등)를 통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교사들의 기본교육 기관인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교과과정(커리큘럼) 속에 우리 전통예술이나 민속예술 또는 민속놀이의 내용이 삽입되어 기본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교육적으로 매우 난감한 실정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인 초등교사 교육기관인 S교육대학 신체표현 놀이 담당과목 교수는 유일하게 한분 계시는데, 그분의 전공은 한국무용이 아닌 현대무용(Modern Dance)이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신체표현 놀이가 지극히 창의성과 창작성을 필수로 하므로 현대적인 움직임이 훨씬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창의성과 창작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교육부나 교육 담당자들께서 더 잘 알 것이다. 교육은 그 민족의 정서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터득케 하는데 있다고 말하는데 서구문화의 정서를 향유해온 우리 아이들은 요즈음 햄버거와 치즈 문화에 침잠되어 있지 않은가? 김치와 된장 맛의 텁텁한 인정 문화인 ‘공동체 문화’는 말살되고 말이다. 왜곡된 우리 문화는 교육 이외에는 바로잡을 묘안이 없다.
둘째, 모든 교육기관 교과과정에 전통문화를 교양과목으로 채택하는 방법이다.
중․고․대학교의 교과과정에 기본적으로 전통문화 과목을 이수케 함으로서 우리 것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사회교육기관을 통한 교육방법이다.
전통문화의 기본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을 위해서 사회의 각 교육기관을 통해서 우리 것에 대한 교육을 수행하는데, 특히 직장에서는 의무적으로 한 가지 이상 우리 것에 관계된 써클을 조직하도록 유도하여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
또한 현재 각 중요무형문화재 보존단체 운영이나 일반인 강습회에 정부보조가 전무한 상태인데 지원금을 책정하여 일반인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일반 문화센타(각 신문사 문화센타 등) 전통예술 분야에 지원금을 책정하여 일반인이 전통문화 분야를 수강할 경우에 혜택을 줄 수 있도록 촉구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어쩌면 강압적인 방법일는지 모르지만 각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전통예술의 기능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방안이다.
예를 들어 봉산탈춤의 기본춤사위를 선정하여 학력고사 체력장 시험을 치룬다. 그 기본춤 속에는 ‘지구력’과 ‘순발력’ 그리고 ‘유연성’, ‘율동성’ 등을 측정할 수 있어서 현행 체력장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측정이 될 수 있고 우리 전통문화에 관한 인식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활성화에 폭발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 입시에서 단 1점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봉산탈춤을 수학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봉산탈춤뿐만 아니라 몇 가지 모범적인 종목을 채택하여 실시하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탁월성을 대대적으로 알려 주어야 한다. 특히 TV 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주자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오늘날 소위 일반 대중의 우상(소위 스타)은 날마다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탈렌트나 가수, 개그맨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아닌가? 그들도 물론 중요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인이겠으나 한국문화의 전통과 정신을 이끌어 가는 전통문화인들이 결코 그들 스타보다 못하지 않고 등한시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각 TV 방송국에 “주부가요열창”, “신인가요제”,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등등 일반인의 관심을 유도하는 프로가 많은데 왜? 우리 문화는 그렇게 외면하는가?
끝으로 우리 문화의 모든 출발점은 가정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우리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각 가정의 어머니들이 우리 문화를 접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니들을 재교육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각 학교의 「어머니회」를 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교실’을 상설하여 어머니들로 하여금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면 그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우리 문화의 촉매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놀이문화의 생활화는 우리가 우리 문화를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6
우리 민속에는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어
신성우|홍익 인간학회 회장
민족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아온 불문(不文)의 전설과 풍습이 있다. 그 가운데 글로 문자화 된 것도 있겠지만 대개는 노래, 무용, 행사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가운데에 담겨진 원리를 분석하면 어떤 것은 참으로 심오한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도 있다.
우리 풍습과 민속놀이에 담긴 뜻
우리나라 농촌에 가면 풍류도(風流道)가 있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당산에 제사하고, 온 마을 사람들은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그 해의 풍년을 천지신명에게 비는 풍습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온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협동을 도모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고, 둘째로 천지신명에게 빈다는 것은 자신의 새로운 각오와 더불어 지난해의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이웃과 나와의 총화와 협동이 있으며, 자기 발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단 보자기에 개똥을 싸는 것보다는 누더기에 황금을 싸는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좋아했던 풍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어리석고 미신에 빠진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겨진 심층원리(深層原理)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많은 형태의 민속놀이가 있으며, 이른바 무속(무당)도 많이 있다. 이 가운데 좋은 원리가 담겨진 것은 장려하되 그렇지 못하고, 혹세무민하는 것은 없애야 할 것이다. 혹세무민이란 곧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알맹이가 없는 헛된 유혹과 공포심을 조작해 내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바와 같이 똑같은 식물을 가꾸는데, 소리를 내면서 기르는 것과 소리는 내지 않고 기르는 것과는 그 결실(열매)에 있어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만물은 생명체가 없는 것이 없으며 땅도 분자가 집결하여 자연이란 흙을 이루었다. 우리 몸에 세포가 있듯이 땅도 세포가 집합에 있음으로 소리에 민감하며, 소리가 조직을 돕는다는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땅은 토(土)가 됨으로 쇠 소리, 금(金)을 내주면 땅의 생기를 복돋아 주기 때문에 농작물이 잘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농악 즉, 꽹과리가 생겼다고 한다.
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삼신(三神)을 모시는 제도가 있었다. 삼신은 가신(家神)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우주의 근원은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하나의 개체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모자라거나 넘쳐도 이상(異常)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삼신은 크게 천지인(天地人), 인간에게 있어서 인류시조로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단군), 개인으로써 조상신(祖上神), 성주신(城主神), 조상신으로써 숭복하는 풍습이다.
이러한 풍습은 인간의 근본에 있어서 그 본성을 찾기 위함이라고 하겠다. 빌고 제사 지내는 가운데 인간의 참된 정신을 일깨우고, 그러한 행사를 통하여 교육을 대신하며, 생각하고 실천하게 하기 위한 원리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현대의 심령학적 차원에서 그 원리를 찾아볼만 하다. 한국에 무속(巫俗)이 많은 것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심령적 발달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교육적 민속 구전(口傳)
또한 우리나라의 민속 가운데 교육적인 구전(口傳)이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가 막 돌이 지나면, 도리도리(道里)하고 애기에게 고개를 흔들게 가르친다. 이것은 사람은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조상을 알고, 부모를 알고, 나를 알라는 이치(理致=道里) 교육인 것이다. 하늘이 없으면 땅도 없고, 사람도 없고, 만물도 없는 것이니 이의 도리(道里)를 알고, 언제나 전체를 생각하고 나를 인식하게 하는 교육의 원리로써, 홍익인간의 이념을 문자적 교육을 대신하여 언어와 행동으로 습성화시킨 것으로 보아진다. 또 한 가지, 짝짝꿍짝짝꿍 하면서 애기에게 양손의 결합을 가르친 것은 음양의 이치를 설명하는 원리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음양으로 결합하고 생성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치를 언어행동으로 표현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곤지곤지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이 세상에 내가 있음으로 만물이 있고, 항상 나는 만물 가운데에서 주인(으뜸)이 되라는 이치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속의 좋은 점은 장려해야
이와 같이 우리의 민속에는 그 저변에 깊은 이치가 담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속의 자료나 형태의 분석도 필요하지만, 민족의 심층 원리를 잘 연구 분석하여 좋은 것은 장려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하는 용단을 가져야 하겠다.
예
팽이치기
얼음판 위에 팽이치기!
옛 조상들은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팽이치기」를 시켰다.
팽이는 놈팽이, 잠팽이, 곰팡이의 뜻으로 더럽고 악하고 추한 악의 대명사다. 인간이 선한 것이 되지 못하고 악한 사람이 된 것은 우리 몸속에 팽이의 본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재물욕, 식욕, SEX욕, 자식욕, 감투욕, 이익욕, 과시욕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온갖 나쁜 짓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 조상들은 자식들을 팽이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인 「천자(天子)」로 만들기 위해 팽이를 만들어 팽이를 치면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놈팽이, 잠팽이, 곰팽이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천자(天子)가 되라고 팽이를 치면서 가르친 것이다.
우리 남북동포들은 2000년 동안 몸속에 숨어서 기생하고 있는 팽이를 때리고 굴복시켜 조상이 바라던 하나님의 자손인 「천자민족(天子民族)」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7
홍익문화 구축을 위한 문화계 제언
편집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문화계에서도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해방 후 지난 40여 년간 민족문화는 우리의 관심에서 하나 둘 멀어지고 잊혀져 왔다. 문화현장의 최일선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온몸으로 느껴온 각 분야의 의식 있는 인사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음악: 이병옥(작곡가, 서원대 교수)
지난 8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근 10여 년이 지난 후 독일로 유학길에 오르던 때의 일입니다. 칼스루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만난 지도교수인 로날드 베버는 대뜸 “당신은 여기에서 현대음악을 배울 사람이 아니다. 너희 나라 산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게 바로 현대 음악이다.”라며 허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현재 독일에서 「제2의 모차르트」로 떠받드는 최고의 현대 음악가 볼프강 림에서도 사사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첫 대면에서 “당신은 당신 나라의 음악을 바탕으로 곡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반음까지도 다시 반으로 쪼개고 컴퓨터로 진동수를 계산하여 새로운 음을 발견하는데, 나중에 보니 한국의 가야금이나 대금소리에 다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이런 경험들은 저의 음악 인생에 커다란 깨우침을 주었고 저는 귀국 후 창조적인 우리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88년 신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연주자들과 뜻을 같이 하여 「어울림」을 만들고 현재 5집 녹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음악을 신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기존의 국악과 양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분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음악은 전통 민속음악에 뿌리를 두되 이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 대중의 감성 자체를 잘 읽고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면서도 한국의 고유성을 간직한 음악, 외래 악기를 수용하면서 우리의 정서와 기법을 담아내는 창작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음악의 현대화,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지요.
미술: 안휘준(서울대 박물관장)
우리는 지금 많은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여 산업화 되어 갈수록 그것은 더욱 심각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그 원인을 문화적인 현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 문화는 심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의 갈등, 우리문화와 외래문화의 갈등! 이것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는 생략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그 해결방법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범위를 미술로 국한시켜 보지요.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교육입니다. 현재의 입시제도나 교육과정은 우수한 인재들이 문화 예술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분야인데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미대에 들어오려면 실기 40%의 관문을 뚫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달 레슨비로 수십-수백만원까지 지출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소질이 있고 배우고 싶다 해도 평범한 가정의 학생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류의 학생이 들어올지는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기 비중은 기본 소양만 점검하는 정도로 최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럼 교육 과정은 어떻습니까. 전공을 동양화, 서양화로 분류하여 따로따로 가르칩니다. 게다가 동양화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실정이지요. 하지만 동양화, 서양화라는 분류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둘 다 한국화(韓國畫)가 아닙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동양화는 수목화요, 서양화는 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볼 때 유화(서양화) 중심의 현행 교육은 절름발이 교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을 무시하고 전통의 기초가 없는 편향된 교육 아래 진정한 기초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현재의 동․서양화과를 회화과로 통합하여 기본을 가르친 후 3학년 때부터 전공분야를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얼마 전 「국제 수중 발레」에서 전통음악을 이용한 율동으로 1등을 한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문화 유산은 이처럼 창조의 밑거름입니다.
연극: 오태석(극단 「목화」대표)
먼저 우리의 공연 예술과 서양의 공연예술의 대표적인 차이점을 한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양의 공연은 합리성을 근거로 하며 모든 것을 사전에 완성하여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은 은연중에 구경꾼 내지는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연은 전통적으로 직관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관객이 무대에 한발자국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유도하기 때문에 관객도 공연 참가자가 되어 혼연일체가 됩니다.
예부터 우리의 공연은 「판」이나 「마당」이라는 형태로 흥과 신바람을 공유해 오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무조건 외국 것만 모방한다거나 번연극 위주로 공연을 진행하는 행태는 결코 우리의 진정한 감성을 자극하지 못할 것입니다. 최근에는 다행스럽게도 창작극 위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때 우리 연극의 미래도 전망이 밝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전통극 예술을 기반으로 하여 1993년 현재에 맞는 속도와 빛깔을 찾아내어 적절히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의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구한말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언어는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많이 다쳐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우리 언어를 되찾고 또한 거기에 새 옷을 입히는 작업, 이것이 이 시대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해내야할 사명입니다.
무용: 문일지(국립 국악원 무용단장)
홍익인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세상은 바야흐로 지구촌, 지구가족화(化)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만 보더라도 외래 문물이 아닙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것만 고집한다는 것은 어린애 같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문화적인 교류는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문제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문화내지는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아무런 기준 없이 받아들인다면 문화적인 종속국, 즉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체질에 맞게, 우리 토양에 맞게 받아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화교류에서의 주인 된 입장이지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를 한 가지 지적하겠습니다. 그것은 “옛날 문화는 오늘날의 문화에 비해 미개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문화와 문명을 혼동하는데서 생기는 오류입니다. 문명은 시대에 따라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게 되어 양(量)적으로 “많이” 그리고 “빨리” 볼 수 있다고 하여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낫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각각의 시대와 환경에 맞도록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었습니다. 따라서 미개하고 가난하고 구차한 것으로 제껴놓았던 우리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없이는 결코 올바른 문화인식도 더 나아가 주체적인 문화교류도 불가능합니다. 사랑으로 우리 것을 되새겨 볼 때 우리 전통 문화는 곧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뿌리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만 나무가 잘 자라듯이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새로운 문화 창조도 가능할 것입니다. 즉 가장 한국적이어야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용도 그렇습니다. 전통무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바탕 위에 현재와 미래 그리고 동․서양의 요소들을 취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올바른 창조정신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독창적인 「문일지식(武) 무용」이 나올 수 있겠지요.
출판: 김경희(한국출판연구소장)
현대는 열린사회, 개방사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문화는 한국문화만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문화는 곧 세계문화 속의 한국문화여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민족문화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제가 본 바로는 우리 민족문화는 현재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10년 일제강점으로부터 현재의 분단 상태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식민지 내지 반(半)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아직도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구조적 모순으로 인하여 민족문화를 주체적으로 가꾸고 다듬어 오지 못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로 작게는 자기비하와 엽전의식으로부터 크게 민족문화에 대한 백안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출판계를 이야기해 볼까요. 저는 문화를 정삼각형 구조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좁은 의미의 문화를 학문과 과학 기술 그리고 예술 활동으로 분류해 볼 때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일은 1차적으로 해당 분야 종사자가 있겠지만 크게는 언론․출판․교육이 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삼각형의 특징은 한 변이 변함에 따라 다른 두 변도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이 줄어들면 언론․출판이 줄어드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최근의 학원비리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잘못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종사하는 언론이 또는 출판이 제대로 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민족문화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출판계로 축소시켜 볼 때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위기는 곧 위험과 기회가 공존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 시기는 문화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외부로부터의 개방 압력은 거세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준비 없이 개방되었을 때 우리 민족문화는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 들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문화계에서도 혁명적인 결단과 개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책적으로 대통령 직속의 「문화발전 위원회」를 두어 문화발전을 제도적․행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한편, 해당 분야의 담당자들이 1차적으로 분위기를 선도하여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곧 온 국민이 민족문화의 주인으로서 「민족문화 바로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문화편)>8
민족문화재단 설립이 시급하다
편집부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자기 생애동안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고 태어났다. 이를 잘 깨닫고 바르게 실천한 사람은 후세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표본으로 존경하고 있다. 성공적인 삶은 크게 나누면 「자신에게 충실한 삶」,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삶」 그리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으로 나눌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밝혀주었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최고의 삶」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데 주저치 않게 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공익사업에 뜻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으며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삶은 우선 자신의 충실한 삶을 토대로 이루어지며 큰 뜻과 이를 결행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
우리 주변에는 빈곤, 질병, 인간소외, 윤리관 파괴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 불행한 일들이 많이 널려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은, 우리 겨레 모두가 삶의 가치를 잃고 지향해야 할 목표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데도 선뜻 앞장서서 큰 뜻을 여기에 바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윤리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미풍양속은 간데없고 사람들의 심정은 날로 황폐화 되어 정치도 경제도 제 갈 길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에는 온갖 부조리, 부도덕, 범죄, 과소비 등이 만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현대 과학문명과 외래문물만 숭상하다가 그 폐단에 파묻혀 조상의 슬기와 지혜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따라서 지금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속에 스며있는 조상들의 지혜와 숨결을 바로 계승하여 오늘에 되살릴 수 있도록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후대에 열심히 살아간 조상들로 기억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 후대의 번영을 흐뭇한 마음으로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
빈민구제, 장애인 보호,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복지사업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 겨레 모두가 잃어버린 제정신을 되찾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 말로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한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만족스럽게 달성키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고려 될 수 있다.
가) 한국학(역사, 사상, 민족, 전통문화 등) 분야를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즉, 장학기금의 설치가 필요하다.
※ 현존 장학기금은 대부분 특정 지역이나 씨족을 지급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특수 학문 분야 발전을 위한 장학기금은 별무함.
나) 한국학 분야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 지원 사업을 시행해야 한다.
※ 연구비 지원 및 연구결과 출판 지원(예: 대우학술재단-기초과학 분야)
다) 한국학 문헌 및 문화자료 보존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
※ 국내외 흩어진 귀중한 국학 자료를 수집, 종합 자료실에서 보존하고 학자들의 연구 자료로 제공
라) 청소년 및 일반국민들에게 조상의 슬기와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 바른 역사, 사상, 도덕, 전통문화 등을 교육할 수 있는 전문 강좌 개설
공익재단 설립 방향
겨레의 올바른 역사, 사상, 전통문화를 발굴․계승․발전시킴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무궁한 번영과 대동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며 설립자가 출연한 재산을 근거로 공익재단법인을 설립, 과실금으로 목적사업이 영구적으로 수행되도록 하여야 한다.
기대 효과
연간 5천만 원 상당의 장학 사업을 시행할 경우 매년 50명씩 수혜자가 발생하며 10년 내에 수백 명의 석․박사들이 탄생, 민족지도자로서 국민정신을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게 될 것이며, 연간 3천만원 상당의 연구지원 사업을 시행할 경우 매년 귀중한 연구 논문 15편 이상이 생산되고, 10년 내에 수백 종의 국민정신교육자료(출판물)가 발간, 배포될 것이며, 연간 2천만원 상당의 자료수집 및 보존 사업을 시행할 경우, 10년 내에 국내외에 산재한 고귀한 문헌 자료 원본 및 사본을 망라해 비치할 수 있으며 국내 유일한 국학도서관으로 발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국민교육을 위한 전문 강좌를 개설, 연간 수천명씩 교육시킴으로써 10년 내에 수만 명의 교육 수해자들이 경향각지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솔선수행하게 될 것이다.
※ 이상의 모든 사업은 연간 1억원 내외(운영관리비 제외)의 투자가 지속된다는 전제하에서 검토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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