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씨의 ‘백범 암살’ 배후 고백
역사의 진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적이 거의 없다. 역사의 주체인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진실을 빛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씨의 입을 통해 진실의 일부를 밝혀낸 과정에서는 권중희씨라는 한 실천가의 집념과 끈질긴 노력이 진실 찾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49년 6월26일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에서 권총으로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씨는 지난 43년 동안 참으로 끈덕지게도 ‘단독범행’이었음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 말을 믿었던 사람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한명도 없을 것이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민족지도자이던 백범에게 대낮에 권총 실탄을 네발이나 쏘아 숨지게 하고도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것도 곧 15년 징역으로 감형받은 안씨의 배후에 암살을 조종한 세력이 없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이제 75살이 된 안두희씨가 권중희씨 일행의 녹음기에 ‘고백’한 내용은 49년 당시 육군 1연대 정보관이던 김창룡이 암살의 실질적 배후이며,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의 중령이 백범 암살을 교사했을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그러나 방첩대장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일개 정보관에 불과하던 김창룡이 암살 배후의 총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50년대 자유당 정권 시절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군대와 장군들을 정치적으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다가 결국 암살당했지만, 49년 6월에는 그렇게 큰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극우단체로서 제주 4·3항쟁 때 양민 학살에 앞장선 서북청년단의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현역 소위이자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독당의 위장당원이었던 안두희씨는 암살의 하수인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그를 조종한 실무자의 위치도 김창룡과 미군 정보기관 장교까지로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45년 9월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에서 군정을 시작한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남진을 막기 위한 ‘반공의 교두보’를 남한에 구축하는 데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세력은 불법화되어 지하로 들어갔고,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던 중도좌파의 민족 자주화운동도 몽양이 암살당한 뒤 약화되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쪽에 미국식 자본주의 나라를 세워 신식민지주의 정책을 펼치려던 미군정의 ‘눈엣가시’는 김구 선생이었다.
사상적으로는 분명히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김규식 선생과 더불어 분단의 장벽을 허물려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찾아갔고, 피눈물을 쏟으며 민족의 통일을 이루자고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대중 사이에서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백범은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미 군정과 이승만의 기도를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의 정적인 동시에 미국의 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백범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 정권과 미국이 있었다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안두희씨의 고백에는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지금의 내무장관 격인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수도청장 장택상씨의 소개로 백범 암살의 암시를 준 미군 정보기관의 중령을 만났다는 것이다. 조씨와 장씨는 단독정부가 선 뒤 제헌국회가 만든 반민특위를 테러와 무력으로 해체시킨 책임자들이었고, 이승만과 결별하기 전까지는 그와 미 군정의 손발처럼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이 두사람 말고도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씨가 백범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주장이 60년 4월혁명 뒤에 나온 적이 있다.
분단 47년은 친일·반민족 세력과 미국에 굴종하는 군사정권이 진실을 어둠에 가둔 세월이었다. 이 어둠을 걷어내고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려면 권중희씨 같은 용감한 사람들의 활동을 온 국민이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고 이승만씨 양아들,최능진 다룬 내용 보안법 고발/“북한 대남전략 동조” 주장에 제작진 “이해 안된다”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의 간판프로인 〈다큐멘터리 극장〉(일요일 저녁 8시)이 때아닌 ‘이념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고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63·명지대 교수)씨는 4일 지난 1월23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극장〉의 ‘대통령에 도전한다 최능진’의 내용이 “북한의 대남전략과 궤를 같이하고, 우리의 건국사를 왜곡·날조했으며 건국원훈에 대한 터무니없는 중상모략과 음해를 했다”면서 홍두표 한국방송공사 사장 등 3명을 사자의 명예훼손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또 30여개 단체로 구성된 건국애국단체총연합(의장 윤재욱)도 이날 “이 프로가 평양방송이 아닌가 경악했다”며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한국방송공사 사장이 프로그램 내용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피소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의 프로는 해방 당시 경찰간부 출신으로 친일경찰 청산을 주장하고, 제헌의회 선거 때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를 시도하는 등 이 대통령에게 도전하다 한국전쟁중 내란죄로 총살형을 당한 최능진을 통해 해방 당시 상황을 다뤘다.
이씨 등은 이 프로가 46년 10월폭동과 관련해 “식량정책에 실패한 미군정이 일제 때의 공출제도를 부활시켜 친일경찰과 관리로 하여금 이를 강제함으로써 일어났다”고 주장해 북한의 ‘10월 민중항쟁론’에 동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작진은 “미군정 정책과 친일경찰 등용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을 한 바 있다”며 “그러나 최능진의 큰아들 최필립씨의 인터뷰를 인용해 ‘공산당이 쌀 공출, 친일경찰 부분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이용했다’고 언급한 사실을 이씨 등은 간과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씨 등은 이 프로에서 “이른바 신탁통치 정국은 민족주의 대 반공주의였던 우리의 정치구도를 우익과 좌익의 대립구도로 바꿔놓았다”고 언급한 부분을 문제삼아 공산주의자들을 민족주의자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제작진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좌익이고 반공주의가 우익이라는 뜻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제작진은 또 “최능진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미군정의 민정보고서인 G2보고서와 당시 총선 때 성북구에서 조소앙 선생이 조병옥 선생을 30만∼40만표 차로 이긴 것으로 보아 90% 지지로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방송내용이 사실왜곡이라는 이씨 등의 주장과 관련해 90% 지지와 ‘30만∼40만표 차’ 부분은 G2보고서를 잘못 해석하고 인터뷰를 한 사람의 착각에서 비롯됐다고 시인했다.
이 프로의 남성우 부주간은 “우리 사회가 다양한 사회인 만큼 방송내용을 문제삼을 수 있고 또 잘못된 내용은 시정할 수 있으나, ‘평양방송’ ‘북한의 대남전략’ 등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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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임헌영이 쓴 문학속의 그사람:24)
한 겨 레 1994-08-03
광복 후 이승만에 관한 쟁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단정수립인데, 이와 관련해 〈적과 동지〉는 “남한 단정안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구상”이라는 버치 중위의 말을 원용한다. 단정, 곧 분단고착화는 친일파의 시각으로 보면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국가가 되고 말 것”(이병주의 〈지리산〉)이라는 현실정치론이 될 것이다. 이런 현실정치론의 맥락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도 “이승만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산하〉)으로 풀이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지리산〉)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봄과 동시에 미국에 등을 댄 이승만의 위대성을 수긍한 이병주는 집권의 이유로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 원숙성을 들고 있다. 〈남로당〉에서 인용한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이 아닌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라는 이승만의 말이 바로 그렇다.
이승만 치정에서 한가지 돋보인 것은 농지개혁이었는데 이 점을 소설 〈산하〉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농지개혁을 농림장관이었던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이라고 보아 강력히 반대의사를 개진하던 조병옥에게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밝히는데 이유인 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기반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게 된다.
농지개혁 성과에 대해서는 분단시기의 가장 비판적인 소설인 〈태백산맥〉조차도 긍정적으로 보는데, 조정래는 만약 농지개혁 없이 6·25를 맞았더라면 엄청난 비극을 증폭시켰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조봉암 토사구팽 삼아
단정 수립 이후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점점 그 빛이 바랜다. 그 결과를 〈태백산맥〉은 제2대 총선결과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 서술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민당에 등을 돌려버린 이승만을 옹립하여 결성된 의석 칠십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당”인 대한민국당이 “겨우 스물두명의 당선자를 냈을 뿐”이고, 친일지주의 정당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했으나 스물세명의 당선자를 냈다. 이에 비하여 무소속은 백스물여섯명이나 당선된 사실을 인용하면서 〈태백산맥〉은 “선거결과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친일주의 중심인 한민당 계열의 배척을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 이후의 사실들은 아마 사족이 될 것이다. 6·25와 4·19에 이르기까지의 실정은 우리 문학이 두고두고 담아온 민족사적인 비극이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
역사에는 자랑할 부분도 많지만 감추고 싶은 내용도 많기 마련이다.더욱이한 핏줄을 나눈 민족끼리,그것도 양민을 무장군경이 학살한 비극을 드러낸다는 것은 용기에 속한다.
MBC-TV가 12일 밤 11시30분 방영한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편 ‘제주 4·3’(김윤영 기획,이채훈PD)은 이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
ANCARUM이란 통신명을 사용하는 김모씨는 “(MBC의)용기에 감사드리며 단지방송시간이 너무 늦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고 시청소감을 보내왔다.
제작진은 1948년 ‘5·10’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좌익 무장대가 관공서들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이 비극의 발단과 전개과정,미국의 역할 등을 6개월의 치밀한 준비 끝에 밝혀냈다.
미군정은 당시 그날그날의 사태전개를 문서로 보고 받았고 전투기의 위력시위,구축함의 해상봉쇄,통신부대의 항공촬영 등으로 이승만 진영과 친일경찰,우익청년단의 ‘빨갱이 사냥(Red Hunt)’으로 불린 초토화작전을 거들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승만정권 수립후에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초토화작전에 도움을 주었다.결국 1년2개월여만에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인 3만여명이 희생됐다.
당시 좌익세력의 무장이 허술한 상황이었고 조직 자체가 궤멸직전이었다는점을 일본에 건너간 전 남로당 간부 등의 증언을 통해 확보한 것은 돋보였다.특히 ‘꿩 잡는 게 매’라며 친일경찰을 끌어들여 학살을 주도하게 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더욱이 전두환정권 때까지 유가족들이 경찰의 검속을 받아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것은 이 참극의 현재적 의미에 귀기울이게 한다.
그러나 제작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 문제에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지난 6월 방영예정이던 이 기획이 경영진의 압력으로 연기되다가 이제야 방송을 탄 사정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4·3과 겹쳐보이는 광주항쟁을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다음주에는 동백림간첩단 조작사건의 진실이,10월3일에는 여순반란사건이 오른다. 임병선기자
○동교 실세로 자리굳힘
하지만 정치인 2세로 현재 국회에 진출해 있는 이들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우리 정치풍토상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때문에 대체로 선대의 덕을 보아왔지만, 때로는 ‘1세’의 무게에 짓눌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대중씨의 장남 김홍일(47)씨는 지난 5일 권노갑 의원으로부터 목포 지구당을 물려받아 ‘정식으로’ 정계에 진입했다. 이날 지구당 개편대회엔 민주당 지도부 및 국회의원 40여명이 대거 참석해 김씨의 당내 ‘위치’를 실감케 했다. 3월11일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물밑에서 맹렬히 뛰고 있는 김씨는 개인 개인을 떼어놓고 볼 때는 가장 막강한 득표력을 가진 지구당위원장 중 한 사람으로 안팎의 공인을 받고 있다. 옛 신민계의 모임인 ‘한국정책개발연구회’(한정회) 이사로 있으면서 김 전 대표의 청년전위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기반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가 이런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배경엔 두말할 것도 없이 영국에 가 있는 아버지의 존재가 있다. 그래서 당내 일각에서는 “당내 문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전파하면서 특정세력의 세불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 아니냐”는 가시돋친 비판을 보내기도 한다. 경희대 정외과를 나온 김씨는 71년 대선 때부터 아버지 바로 옆에서 심부름을 해가면서 ‘정치’를 배워왔다. 80년 봄 연청을 조직하다 ‘내란음모사건’으로 교도소 생활을 했고, 아버지가 형집행정지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엔 신촌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85년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한국정치의 ‘핵’이 되자 아들도 바빠졌고, 동교동의 ‘실세’로 확고히 자리잡게 됐다. 그는 주로 아버지의 돈심부름을 하면서 국회의원 공천 등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김씨 본인은 강력히 원했음에도 ‘세습체제’라는 등 주변의 비판적 여론에 밀려 공천을 받지 못하는 ‘비애’를 번번이 맛보아야 했다. 지난 14대 총선 공천과정에서도 목포를 김씨가 차지하고 권노갑 의원이 전국구로 가는 방안이 심도있게 거론되다가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좌초’됐다.
섬세하고 치밀한 성격의 김씨는 어릴 때부터 정치권의 생리를 몸에 익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등 ‘기본기’는 상당수준에 올라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하지만 국면을 크게 볼 수 있어야 하는 정치적 식견면에서는 아직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있지 않으냐는 주변의 지적도 있다. 김씨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김대중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나름으로 어떻게 ‘특화’해내느냐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달려 있다 하겠다.
○어지러운 행보에 눈총
한편 50년대 야당의 거목이었던 유석 조병옥씨의 두 아들은 지금 모두 국회의원이다. 형 조윤형(60) 의원은 6선인데, 14대 민주당 공천이 어려워지자 국민당으로 가 전국구로 국회에 들어간 뒤 다시 국민당을 탈당해 대선 기간중 민주당으로 복귀하는 어지러운 행보를 보여 집중적으로 여론의 매를 맞았다. 동생 조순형 의원(58·민주·도봉병)은 3선으로 국회 교육청소년위원장을 맡고 있다.
역시 야당의 거물이었던 정일형씨의 아들 정대철 의원(49·민주·서울 중구)은 4선째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경선에 나서고 있다. 정 의원은 당권보다는 야당의 다음 대통령후보감으로서의 이미지 홍보에 주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야당 중진이었던 정해영씨의 아들 정재문 의원(56·민자·부산 진갑)은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이고, 14대 대선에서 참패한 정주영씨의 아들 정몽준 의원(42·울산동)은 재선으로 최근 아버지를 따라 국민당을 떠났다.<문학진 기자>
지난달 8일 방송된 '국가보안법, 존속돼야 하나'란 주제의 문화방송 (100분 토론)은 지금까지도 진행형이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했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사회학)가 해방 이후 미 군정 당시 경찰총수에 해당하는 경무부장을 지낸 유석 조병옥을 친일파로 규정한 발언에 대해 한양조씨 대종회가 '망언'으로 단정하고 법적 대응까지 서슴지 않을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조씨 대종회(회장 조종익)는 지난달 20일 "2월28일까지 10대 중앙일간지에 조병옥 박사가 친일파라는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글을 올리라"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민.형사상 책임 추궁 등 모든 법적 조처를 취하겠다는 내용증명을 강 교수에게 보내왔다. 한양조씨 대종회는 "유석 조병옥 박사는 1962년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건국훈장(독립장)을, 선친인 조인원씨는 3.1운동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거국훈장(애족장)을 받는 등 애국자이지 친일파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본의 아니게 한양조씨 대종회에 심적 상처를 준 것과 유석을 초대내각의 내무부 장관이라고 착각한 것에 대해 2월15일 한양조씨 대종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정중히 사과했다"며 "하지만 유석이 '광의의 친일파'라는 내 발언은 학문적 연구에 바탕한 소신이며, 취소하거나 사과할 뜻이 없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런 내용증명을 6일 대종회쪽에 발송했다.
강 교수가 일제시대에 직접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 유석을 광의의 친일파로 규정하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이에 대한 강 교수의 학문적 연구는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역사비평사, 1996) 1부 2장에 정리돼 있다.
먼저 민족사적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을 위해 1947년 7월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라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는데, 당시 경찰총수 유석은 친일 고등계 경찰을 대거 등용하며 이 법이 경찰에 적용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1946년 10월 '대구 10월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해 구성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가 낸 보고서다. 이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경무부장인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유는 대구 사건을 촉발시킨 '일제시기 경찰의 대거 충원, 일제 경찰의 관행이던 고문과 잔인성의 상존, 정치적 목적을 띤 경찰의 동원, 우익 청년단체들의 경찰 업무 동원 등에 두 사람이 앞장섰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미군정 당시 수사국장이던 최능진과 조병옥 사이에 벌어졌던 친일파 논쟁이다. 유석이 친일 고등계 형사를 대거 요직에 등용해 좌익 타도의 선봉장으로 삼고 있는 것을 최능진이 문제삼자, 조병옥은 이들이 경찰이라는 직장에 충실한 직업경찰이라고 비호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까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친일파냐'라는 것으로 모아지는 이번 갈등은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슬픈 현실이라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다. 조준상 기자
한때 독재자 이승만에 대항해 싸우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유석 조병옥이 범친일파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러 논란이 일고 있다. 범친일파로 모는 꼬투리는 일제가 물러가고 난 해방 후의 그의 행적에 있다. 그는 미군정의 경찰 총수인 경무부장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경찰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친일 경찰을 대거 기용해 결과적으로 친일적 정서가 주조가 되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친일행각이 별로 보이지 않는 그를 범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하는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세력을 대거 기용한 오늘의 국민의 정부는 범유신 세력이란 말이냐고 대든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우선, 나는 친일파를 규정하는 데서 지나친 엄격주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지금이야 배불리 먹고 등 따스운 방에 누워 쉽게 생각하지만 당시의 엄혹한 사정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는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한 생업까지 일제 통치에 대한 협력이었다고 해서 친일파로 몬다면 그때를 산 사람치고 살아남을 사람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인정식 김한주(모두 해방 후 월북) 같은 경제학자도 부분적으로 친일을 했고, 이용악 임화 등 시인, 김남천 같은 작가도 친일적 행위를 했다. 이들을 도매금으로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들은 살아남아야 했고, 장렬하게 죽는 것보다 살아 남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순리였을 터이다. 문제는 적극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하나 더 잘 살기 위해서 친일행각을 벌인 사람들이다.
더 나쁜 경우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친일을 한 인사도 있었으니 육당 최남선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그는 1937년 연변 등 만주 일대를 여행한 기행문 '송막연운록'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면서 조선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를 돕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아주 그럴 듯하다. 중원은 원래 주인이 없는 땅으로 변방에서 강력한 민족이 일어나 들어가 차지하게 되어 있는바, 이제 일본이 그러한 민족이 되었으므로 조선 민족은 순리에 따라 일본을 적극 도와야 하며, 이 기회는 조선 민족을 위해서도 큰 행운이라는 요지다. 순문예지 (문장)이 창간된 것이 1939년이니까 이때만 해도 일제의 지식인 포섭이 본격화하지 않았을 때다. 육당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증거다. 이와 같은 적극적 친일파와 부득이한 친일파가 엄격히 구분되면서 전자가 철저하게 숙청되는 사회가 되지 못하고,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어데 있느냐는 식의 온정주의가 판을 치면서 친일적 정서가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 우리 사회다. 이 점, 범친일파라는 명칭은 좀 심하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일제의 경찰 조직을 온존시킨 유석에게 책임이 있다.
문제는 "훈련된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친일파 기용의 변이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점이다. 3당야합으로 정권을 잡은 문민정부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자민련의 도움으로 집권한 국민의 정부의 사람이 없다는 구실을 단 유신세력 대거 기용도 같은 닮은꼴이다. 요즘 주류 운운하는 논란이 시끄럽지만 그 주류가 친일에서 독재로 이어지는 기간 중 계속 지배적 위치에 있던 계층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는 나라다.
주류는 마땅히 일제시대 민족 독립운동을 한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의 대권은 이런 친일적 정서를 척결할 수 있는 민주화 세력에서 나와 이들로 하여금 이땅의 새 주류가 되게 하는 것만이 우리나라를 밝고 아름다운 나라로 만드는 길이고, 외국으로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을 없애는 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경림 시인
1927년 2월15일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가 출범했다.
신간회는 '민족 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만든 단체다. 안재홍 백관수 신채호 등 34인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초대 회장에 이상재를 선임해 출발했다.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ㆍ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이라는 정강정책에서도 드러나듯, 신간회는 조선총독부가 용인한 합법 단체이면서도 민족해방이라는 비타협적목표를 또렷이 내세웠다.
신간회는 지난 한 세기동안의 우리 민족 운동의 역사에서 좌파와 우파가 손을 맞잡고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통일 전선을 형성한 거의 유일한 예다.
신간회 성립의 밑바탕에는 식민지 사회에서는 계급 운동과 민족 운동이 서로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당시 좌우파 지도자들의 성숙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간회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일제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범민족 진영 대부분이 참여했다. 그 조직의 속도도 빨라서, 삽시간에 전국에 200여 개의 지회ㆍ분회가 생겨나 30년에는 그 회원수가 3만9천에 이르렀다.
신간회에 대한 일제의 시각은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여기 가입했고,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다. 이들은 반항적 기세를 선동하여 분규 확대에 힘쓰고."하는 고등경찰 요사(高等警察要史)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29년 11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는 한편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조병옥 이관용 등 간부 44명이 체포돼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신간회가 31년 5월에 해산한 것은 일제의 직접적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좌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서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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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사상 집대성 전집 출간
중앙일보 2000-11-27 19면
시대의 '어른' 이 그리운 시절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일수록 그런 아쉬움은 크기 마련이다. 국난(國難)이란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는 요즘이야말로 더욱 그런 때다.
만약 현실에서 그런 인물을 찾기 힘들다면 역사 속에서라도 찾아내 지혜를 구함은 어떨까. 마침 그런 사표(師表)의 전형이랄 수 있는 한 인물의 전집이 나와 힘을 준다.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일제의 강점기 등 60평생을 위민애국의 정신으로 일관했던 난세의 선구자였다.
'도산안창호전집' (중앙M&B)은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가 치밀한 자료조사 끝에 완성한 도산사상의 결정판이다. 전14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도산의 시문(詩文)과 서한(書翰).일기.연설문.전기(傳記).사진 등을 망라했다. 각 주제별로 일별한 뒤 연대순으로 재배열한 짜임새 있는 편집을 자랑한다.
전집 편찬위원으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신용하 서울대 교수 등 근.현대사 전공학자 10명이 참여했다. 제1~3권은 시문.서한편. 선생의 명의로 발표한 글과 미발표 원고, 지인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정리했다. 도산(島山)이란 아호의 유래에 대한 설명도 이 편에 나온다.
선생은 1937년 동우회(同友會) 사건(동우회는 22년 평양 대성학교를 출신들로 짜여진 민족운동단체로 일제는 이를 말살하기 위해 37년 안창호.이광수.조병옥 등 주도자 검거에 나섰다)으로 재수감되기 직전 잡지 '조광(朝光)' 에 실린 글인 '태평양상의 일소도(一小島)' 에서 그 유래를 밝혔다. 1902년 미국으로 가는 도중 망망대해를 지나 하와이 부근에서 작은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기개에 감동한 나머지 '도산' 이라 했다. 반도강산(半島江山)의 도산은 아니란 얘기다. 1910년 해외로 망명하며 지은 '거국행(去國行)' 등도 시문.서한편에 실렸다. 민족운동가로서 도산의 궤적들은 제5~10권 사이에 주로 담겨있다. 미국에서 애국활동의 구심점이었던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해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절과 유일당 운동, 흥사단 활동 등과 관련한 자료들이 죄다 이 쪽에 묶였다. 이 가운데 1913년 5월 도산 주도로 미국에서 창립된 흥사단(興士團)은 민족대업의 기초로서 선생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으로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유일당 운동은 26년 미주순방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온 뒤 "우리의 혁명은 민족운동" 이라며 좌우익을 불문한 '대혁명당' 의 조직을 역설한 것이다. 이밖에 이광수.주요한이 쓴 선생 전기와 각종 논찬(論纂).휘호.유품.사진 등은 각각 제11~14권 속에 들어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늘 현재와의 연관성 속에서 되물어야 가치가 새로운 법이다. 우리가 이번 전집 발간을 반기며 도산사상의 '현재성' 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도산기념사업회 강영훈 회장은 "도산사상은 독립된 국가의 이상을 자유.민주.정의.복지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광복이후 조국의 국가체제가 자유민주국가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했으며, 그 속에 농후하게 보이는 도의(道義)민주적 색채는 인류보편의 가치와 부합한 것으로 21세기 우리 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 이라고 밝혔다. 정재왈 기자
81회 3.1절 아침, TV에 비친 천안 아우내에 있는 유관순(柳寬順)열사 추모각을 보고 놀랍고 자괴감이 들었다. 너무 초라하고 빈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관순열사의 생가엔 영정을 모신 추모각과 기념비, 복원된 생가, 가묘(假墓)인 초혼묘(招魂墓)가 있을 뿐이다. 1920년 서울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에서 토막으로 참살된 유열사의 시신은 모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선생들에 의해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일제(日帝)가 군용지로 쓰기 위해 파헤치는 바람에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안중근의사나 마찬가지다.
생가인 초가 역시, 유관순열사가 아우내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된 후, 주동자의 집으로 불태워졌다. 당시 만세시위 중 함께 만세를 부르던 열사의 부모는 일제의 총칼에 피살되고 주도자의 한 분인 같은마을의 기독교도 조인원(趙仁元·고 조병옥·趙炳玉 박사 부친)옹도 중상을 입었다.
정치지도자가 죽었을 때 국민의 반응은 대개 다섯 갈래로 나타난다. 첫째는 기쁨이다. 스탈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철(鐵)의 인간’이란 뜻을 지닌 스탈린이란 필명에 걸맞게 철권을 휘둘렀던 독재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발표됐을 때 소련 국민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경우 20여년에 걸친 절대권력자로서의 생애가 국민 봉기로 마감됐을 때 루마니아 국민은 환호작약했다. 그렇게 하고도 그에 대한 미움은 너무나 커서 총살당한 그의 시신은 1년 넘게 묏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 死後반응 다섯가지 ▼
둘째는 슬픔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인도의 네루총리,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 그리고 며칠전에 별세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등이 이 경우에 속한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가 죽은 직후의 한식날 때는 수백만명의 추모객이 베이징(北京)에 몰려와 그를 핍박했던 당대의 집권세력 4인방을 성토하기에 이르러 그들은 민중봉기가 뒤따르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했다. 중국 현대사의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죽었을 때도 중국 전역에서 국민이 눈물을 흘렸다.
슬픔은 뒷날에야 나타나기도 했다. 헝가리의 반소(反蘇)자유화 운동을 이끌었던 나기가 소련침공군에 의해 피살됐을 때 헝가리 국민은 공개적으로는 울 수 없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지배가 약화되자 그동안 버려졌던 그의 유해를 찾아내 국장을 치러 주면서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도 비슷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맞서 스스로 총을 들고 싸우다 죽었을 때 칠레 국민은 공개적으로는 슬픔의 뜻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나 20여년 뒤 민정이 회복되자 그동안 지방의 한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던 그의 유해를 수도의 중앙국립묘지로 화려하게 이장하면서 실컷 울었다.
▼ 김구-신익희-조병옥 ▼
셋째는 기뻐하는 쪽도 있지만 슬퍼하는 쪽도 있는 가운데 상당한 수준의 예우를 베푸는 경우이다. 헝가리의 카다르가 여기에 속한다. 카다르는 나기와 함께 자유화운동을 이끌다가 소련침공군에 회유되어 동지들을 배반하고 친소괴뢰정권을 세우는 데 앞장선 뒤 30년 가까이 통치했다. 그가 죽었을 때 헝가리는 이미 자유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따라서 그의 장례식은 초라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애도의 행렬을 이뤄 주었다. 그들은 그의 집권과정이 정당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의 통치아래 조국이 다른 어느 공산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번영했음을 인정했던 것이다.
넷째는 경멸이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이 이 경우에 속한다. 그가 민중봉기로 도망쳤을 때 기뻐했던 국민은 그가 망명지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30년 가까운 집권기간 부정축재한 거만(巨萬)의 재산도 그를 질병으로부터 구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를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는 무관심이다. 그래서 빠르게 잊혀지고 말며 그 뒤의 추도식은 가족행사로 끝나고 만다. 뜻밖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지 않은 정치지도자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요즈음 전직 대통령들의 언동이 시정의 화제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대한민국 50년사에 등장했던 정치지도자들의 죽음을 비교해 본다.
▼ 정치인들 교훈삼아야 ▼
전국적인 슬픔속에, 온 국민의 눈물속에 영결한 정치지도자가 몇이나 됐던가. 올해로 암살 5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제1야당 대통령 후보로 급서한 신익희(申翼熙)와 조병옥(趙炳玉) 정도가 아니었던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국부’와 ‘부정선거’의 엇갈리는 이미지 속에, 그리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민주헌정의 파괴자’와 ‘조국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상반된 평가속에 애증이 교차했던 경우에 속한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과 장면(張勉)총리, 올해로 처형 40주년을 맞는 혁신운동지도자 조봉암(曺奉岩)의 경우는 어디에 속할까. 그뒤는? 안타깝게도 최근의 평론집 ‘전직대통령이 죽는 날 우리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의 제목이 자꾸 떠오른다. 정치인은 자신이 죽었을 때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미리 생각하며 매사 올바르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김학준(본사 논설고문·인천대 총장)
조선일보 1996-03-05 24면 수만쪽에 이르는 총독부 비밀문서(조선일보에 대한 공작 건수가 가장 많다 함)는 박춘호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고려대의 한 연구센터에서 확보
◎반일성향 취재보도 잦아 툭하면 압수정간/창간 두달만에 황태자 파혼기사로 ‘미운털’/전조선 기자대회 주도하자 일경사찰 본격화/“방응모 사장 도산장지에 가는것 강제로 저지시켰다”/38년 종로서극비 보고서
조선일보는 1920년 1월 6일 발행허가를 받아 그해 3월 5일자로 배대판 크기의 16면을 창간했다. 같은 날짜로 발행허가를 받은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은 4월 1일에 창간했으므로 조선일보가 1910년 일본의 한국병탄후 최초의 민간신문인 셈이다.
그러나 일제가 민간신문의 발행을 허가했어도 이것이 결코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 언론의 길은 험난했다.
조선일보의 경우 최초의 시련은 창간된 지 불과 2개월도 안지난 4월 28일자가 일제의 관헌에게 압수되면서 시작된다. 일제가 비운의 황태자 영왕 이은과 민규수의 약혼을 파혼시키고 일본의 왕족 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시키게 된 후의 민규수댁 탐방기사가 화근이 된 것이다. 그런데 1925년 초부터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해 초에 국내의 각종 사회운동단체들은 소위 「전조선민중운동대회」(전조선민중운동대회)의 개최를 계획하여 2월 19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그 취지와 준비위원 명단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후일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맡게되는 방응모가 정주지역을 대표하여 72명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에 참여한다.1925년 4월 10일자 경기도 경찰의 보고서(경고비 제1692호)에는 이 대회의 준비과정및 사회단체들의 동태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일경은 여기에 참가신청을 한 각종 사회단체가 3백52개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일제의 문화탄압에 대한 언론계의 저항으로는 1925년 4월 15일에 개최된 전국기자대회를 들 수 있다. 3월 6일의 제1회 발기인대회 후에 8백통의 참가권유장을 발송하여 마침내 7백23명으로부터 참가신청을 받았으며 4월 15일의 첫날 대회에는 4백94명이 참가했다. 회의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일경이 몹시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1925년 4월 20일자 경기도 경찰의 보고(경고비 제1287호)에는 이 회의의 계획, 진행, 결의사항 등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회 의장에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 부의장에는 동사 이사 안재홍이 추대되어 잘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는 의장과 부의장 외에 조선일보 기자가 1백11명이나 참가하여 마치 조선일보 기자대회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고 전한다.조선일보는 1930년대 초까지 허다한 난관을 겪는데 그 중에서도 재정문제는 매우 심각한 처지에 있었다. 1932년 11월에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부사장에는 임경래, 전무에 조병옥, 편집국장에 주요한 등 새 진영으로 재출발한다.
그런데 부사장 임경래는 조선일보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조만식과 임경래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이 전개되었는데, 일경은 이 과정을 세밀히 감시한다. 1933년 3월 2일자 「조선일보의 동정에 관한 건」 (경종고비 제2585호)을 비롯하여 종로경찰서장은 20여회에 걸쳐 조선일보의 사내분쟁을 자세히 보고한다.
이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주요한은 그때까지 광산업을 하고 있던 방응모를 찾아가서 조선일보를 인수할 것을 종용한다. 물론 사장 조만식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다고 전한다.
결국 방응모는 1932년 6월에 일단 영업국장으로 입사한후 1933년 1월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새 출발한다.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1937년에 일제의 중국침공과 더불어 언론탄압이 다시 머리를 들 때까지 「중흥시대」를 맞는다.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 도산 안창호의 장례에 관한 일제 경찰의 보고에는 방응모조선일보사장에 관한 기록이 많이 눈에 띈다. 일제는 도산의 장례식을 가급적 한산한 행사에 그치도록 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했고 장례행렬에도 동행을 금했다. 이때문에 조의금을 낸 사람도 12명에 불과했는데 조선일보사장 방응모가 이 명단에 들어있다.
또 3월 12일자 종로경찰서장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사장 방응모는 당서의 주의에 응하지 않고 자가용 자동차로 장의일행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이를 완곡유지(완곡유지:완곡히 일러 단념케 함)시켰다』는 것이다. 또 3월 16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이 총독부에 보고한 「안창호의 사망에 대한 부민의 감상에 관한 건」(경고특비 제5122호)에는 도산의 죽음에 대한 방응모의 논평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안창호는 조선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상깊은 인물이므로 그분의 생애를 생각할때 감개무량하다. 그는 마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에 태어난 것같다. 자기의 주위 사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인물은 드문 법이다. …안창호의 사망으로 민족주의는 자연히 조선으로부터 그림자를 감추지 않을까 우려된다.』
1940년 8월 10일은 우리의 양대 민간신문이 강제폐간이라는 운명을 맞는 날이었다. 조선일보는 지령 6923호를 끝으로 창간이래 20년 5개월 5일후, 그리고 4회의 정간과 수없이 많은 압수처분, 발매금지, 삭제 등 갖은 탄압과 학대의 연속을 겪다가 마침내 문을 닫는다.
그 후 5년 3개월의 동면기를 거쳐 1945년 11월 23일에 지령 6924호로 복간되니 조선일보의 역사는 민족사의 단면을 여실히 말해준다.〈고려대 명예교수〉
◎일경,허헌조병옥 등 불러 “민중선동말라” 경고/툭하면 강연중단 “만세삼창도 금지”/“합법단체인데 집회자유 달라” 항의/민족사회주의계열 감시위해 결성허가… 한때 회원3만
○27년창립 4년간 활동
1926년 6월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6·10 만세사건이 일어난다.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은 이 사건에 자극되어 상호 합작을 시도하게 되며 그 궁극적 결과로 신간회가 탄생한다. 신간회는 비록 창립된지 4년만에 해산됐지만 일제치하 최대규모를 자랑했으며 좌우익이 합작했다는데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항일 단체였다.
일제가 신간회를 합법으로 인정해 준 것은 손쉽게 국내 민족사회주의 두 계열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신간회 창립이후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1929년 9월16일자로 종로서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경종경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12833호 「신간회 중앙 상무 집행위원회건」의 내용을 보면 일제 간섭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경기도 경찰부장은 종로서장을 통해 1929년 9월12일 허헌 조병옥 김병로 등의 인사에게 출두 지시를 내린다. 경찰부장은 이들을 대상으로 신간회 운영방침에 대한 취조활동을 벌인다.
『「신간회」는 조선민족의 복리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됐으나 민족주의 취향이 엿보인다. 신간회는 자국민인 조선인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갑산 화전민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등…, 행동방침이 불합리하다. 또 일반 민중을 선동하는 경향이 있다.』
경찰부장은 계속해서 『신간회는 우려할 만한 단체로 통치제도를 변혁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며 조선 통치방침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간회 강령의 범위를 초월하지 말라. 합리적으로 운동을 전개하라. 그리고 절대 망동적 행위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유일당 운동」 구체화
이에 대해 허헌 등은 『일본 경찰이 신간회의 창립을 인정한 이상 금후 경성은 물론 각 지방의 집회도 자유로 개최토록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경찰이 신간회활동에 압력을 가한 하나의 사례다. 신간회는 이러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1929년 5월 경기도 경찰부가 작성한 「치안개황」 문서중 「신간회 창립 및 그 후 행동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종로 경찰서장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제휴할 수 밖에 없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1924년 사회주의자 탄압으로 1925년말 이래 민족주의 운동이 부각됨. 조선이 처한 이같은 특수상태로 미루어 민족주의와 제휴치 않으면 안되겠기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운동을 총괄하는 민족 유일당 기운이 있음.』
신간회는 결국 이 민족 유일당운동이 구체화된 모임이다. 1927년 1월 조직계획이 발표됐으며 1927년 2월15일에는 경성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1928년 말 지회수가 1백43개에 회원 3만여명에 달했다 하니 신간회에 보낸 국민의 지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경종경고비 2146호로 1929년 7월22일 동대문 경찰서장이 검사정에 보고한 문서내용에 따르면 신간회 경동지회 임시대회는 규약개정과 간부개선 등의 안건을 처리하고 심야 12시에 폐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야 안면방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만세삼창을 금지당한다.
회원들은 아쉽게도 박수를 치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 해야만 했다. 서울 청년회가 보낸 「축 신간회 경동지회 임시총회 성황」이라는 축하문도 「불온」이라는 이유로 낭독을 금지당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집단의 생명은 용감한 투쟁에 있다. 투쟁을 못하는 집회는 시체를 의미한다. 동지제군! 우리는 생명있는 집단이 되도록 용감한 투쟁을 전개하자.』
이 이외에도 회의 때마다 툭하면 축문축사강연회 등이 금지를 당했다. 예컨대 1929년 9월8일자 경종경고비제 12199호 종로서장의 「신간회 교양강연회건 보고」를 보면 조병옥이 「신간회의 운동사명」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다 중지당한 기록이 나온다. 안재홍도 『신간회운동은 독립완성을 의미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다가 선동적 언동이라는 경찰의 주의를 받는다. 안재홍은 이에 불응, 강연을 계속하다 결국 경찰에 의해 강연을 중지당한다. 그외에도 신간회 함북 부령 지회 설립대회가 금지당했는가 하면 신아산지회 현판식도 안면방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금지 당한다. 일제가 가장 손쉽게 써먹던 금지이유가 「안면방해」였으니 일제는 우리 민족의 숙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세아문제 연구소가 소장한 총독부 문서에는 신간회가 당시 일부에 존재하고 있던 전근대적 농노제도에 대해서도 조사활동을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30년 4월30일자로 종로서장이 보고한 경종경고비 제5753호 「통문 우송에 관한 건」을 보면 농노제와 관련된 신간회 조사내용이 있다.
당시의 농노제도는 신문에도 보도되는 등 사회문제화 되고 있었다. 그러나 농노를 소유한 지주들은 당시의 지배계층이었으므로 누구도 쉽사리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농노 매매」도 행해지고 있었다. 당시 신간회 조사부장 김병로는 평북 7개 지회에 통문을 보내 농노제도내용에 대해 조사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법리상 인도상 용서할 수 없으며 죄악인 농노제도의 상존은 대중투쟁이 당연하므로 조사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에대한 지회의 답변에 의하면 평북지방에 봉건시대의 농노제가 존재하고 있어 지주가 소작인을 매매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선천, 곽산, 구성지방에서 농노제가 상존한다고 하였다.
○「안면방해」 구실붙여
경종경고비 3028호 「26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의에 관한 건」에는 「북선일보 조선인 모욕사건」에 관한 내용이 있다. 신간회 청진지회 집행위원장인 김창근이 일본인 발행 신문의 조선인 모독내용을 본부측에 보고한 것이다. 일본인이 사장, 발행인, 편집인을 맡아 발행하고 있던 북선일보의 정청냉어라는 난에 기재된 기사내용이 문제가 됐다.
『1월30일 현재로 지정된 면의 실업조사를 시행할 모양이다. 이번 가을에는 국세조사가 행해진다. 조선 사람의 동태가 정확히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중에는 호적이 없는 자가 많다. 사주(가축을 기르는 주인) 없는 개를 야견(들개)이라 한다면 인간이 호적이 없는 자는 야인이라고 할까? 국세조사의 결과는 야인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호적담당 계원 등은 그런 야인을 보는대로 호적을 만들어 주고 있는가.』(이상 조선인 모욕기사)
『중국인은 호적이 없기로 유명하니까 인을 살하는(사람을 죽이는) 것을 야견을 박살내는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이상 중국인 모욕기사)
○경관 살해사건 조사도
이 기사에 대해 민족전체에 대한 모욕이라 하여 민심이 극도로 동요됐다. 이 사건에 대해 신간회측은 일본인인 북선일보 사장과 편집인, 발행인 등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책임을 추궁키로 했다. 신간회 청진지회도 대책회의를 결성, 김창근이 위원장이 되어 응징책을 강구했다.
일경 보고서에 의하면 신간회는 조선인 모욕기사 성토 민중대회와 연설회를 계획하여 민중에 반일여론을 확산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경은 이러한 신간회의 집회계획에 대해 허락을 내주지 않을 방침을 정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간회는 그외에도 일본 경찰의 권리남용등 형사사건 조사에도 개입했다. 신간회 구성지회 집행위원장의 「균성살인사건 진상조사 보고」가 그러한 경우다.
균성 오봉면 육양동에서 일본인 순사 야마모토(산본)라는 자가 조선인 박경주라는 사람을 포승으로 교살하자 이에 격분한 박씨가족이 순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전부터 도피행각을 벌이던 박경주는 경찰의 눈을 피해 동네 이장집에 숨어 있었는데 일본순사가 호구조사차 이 집에 이르러 우연히 박경주를 발견했다.
박경주는 후문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붙잡혀 포승으로 양손이 결박되고 목을 졸려 질식사했다. 이에 흥분한 피살자가족 및 마을사람들이 『살인자를 죽여라』하고 외치며 순사를 살해한 것이 문제가 돼 12명이 검거된 사건이었다.
신간회가 이에대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간회는 조선인에게 불리한 조사가 행해질 것이 분명한 이런 유형의 한일간 형사사건 조사에도 개입해 전후사정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단체로 활약한 신간회는 창립 당시부터 계속된 좌우익의 이념대립과 갈등의벽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민족주의 계열에 눌린 좌익계열이 신간회 해소론을 제기, 1931년 5월16일 해소대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해산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신간회가 창립된지 만 4년만의 일이었다.〈아세아문제연구소 객원교수〉
◎“장서 5만5천권은 곧 내 인생”/40여년간 돈시간만 있으면 책방순례/한권 20억원짜리 등 희귀도서 수두룩/“달동내 14평집에 살지만 「꽉찬 인생」 자부심”
한평생 책을 모으면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지난해 한국기네스협회가 인정한 「기록 보유자」는 현재 한국장서가협회회장인 신영길씨(71)이다. 그가 갖고 있는 책은 5만5천3백여권. 40여년 전부터 책모으는 일을 시작했다하니 하루 평균 4권정도를 쉬지않고 꼬박 모은 셈이다.
서울 서대문구 문화일보 지하실에 있는 그의 서고. 책장이 몇겹으로 되어 있는 70평정도의 방은 책 냄새로 가득했다. 일제침략사관련책이 2만여권, 경제학서적과 역사학서적이 각각 1만여권, 정치 법률관련서적이 8천여권 되며 이중 국내에 한권뿐이라는 책이 3백여권,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 1천5백여권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모았습니까.
『주머니에 돈이 생기는대로 책방을 드나들었습니다. 설악산은 고사하고 서울 남산에도 올라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럴 돈과 시간이 있으면 인사동이나 동대문 책방만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별난 사람이다. 전남 광양군출신으로 고등전형고시 행정과에 합격(1950)했으나 50년대에는 민주당 당원으로 6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때 유명했던 민주당의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그가 만든 작품이다. 60년대부터 공무원생활을 시작, 그리 높지 않은 직위(주사)로 있다가 70년대에는 시중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했고 81년 공직에서 퇴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루 세끼 식비외에는 번돈을 모두 책사는데 들였다. 술과 담배는 일찌감치 끊었다. 2남2녀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모두 출가했다. 전직 은행지점장인 그에게 책 말고 남아있는 가장 큰 재산은 금호 재개발 지구에 있는 건평 14평짜리 달동네 집뿐이다. 문화일보 지하실의 현재 서고도 사실은 임대료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52년부터 수집
책사는데 신들린 것처럼 살아온 사람에게 처음 그 「신」이 들기 시작한 것은 52년 늦가을.
『그해 8월 제2대 정부통령선거를 마친 몇달후 부산에 계시던 성재 이시영 선생을 뵈었습니다. 조병옥박사도 함께 있던 자리였는데 「유석(조병옥 박사의 호)으로부터 신군이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좋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성재 선생은 「내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때부터 일제의 첩자들이 하도 많아 관상보는 법을 배웠다」면서 「내말을 명심하면 신군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걸세」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선물을 주실까 기다렸는데 전혀 엉뚱한 선물을 주셨어요. 「일간지 두개와 월간지 네개를 읽지 않고는 바깥 출입을 하지 말게. 이 말이 내가 자네에게 줄 선물이네」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책이 저의 생활 한가운데로 파고든 것입니다』 ...중략
◎좌익봉쇄 대한민국 건국의 선봉/군정경무부장 맡아 전국 경찰조직 확립/공산세력 철저 응징 5·10총선 치안유지/「거창양민학살」 반발 반이승만 기치… 60년 대선출마중 신병으로 타계
해방 3년사는 결국 남한에 대한민국이 서고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는 것으로 귀결됐다. 그 과정의 끝부분이 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 선거였다. 이 선거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이가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3년 가까이 재직했던 만54세의 유석 조병옥이었다.
조병옥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충남 천안군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넉넉했던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평양의 숭실중학교 서울의 배재전문학교에서 신학문에 접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명문사립학교 와이오밍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사 경제학석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흔히 조병옥이 컬럼비아대에서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논문으로 경제학박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컬럼비아대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11년에 걸쳤던 미국 유학은, 특히 7년에 걸쳤던 세계적 명문 컬럼비아대에서 정상급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던 그의 학문적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조병옥은 만31세이던 1925년에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경제학 교수가 됐다. 그때 연전의 경제학은 백남운등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학풍이 강했다. 이에 맞서 조병옥은 자본주의 학풍을 보급했다. 그는 컬럼비아대에서의 경제학 공부가 자신을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신봉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는데 그의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의 노선은 그 뒤에도 일관된다.
○한민당 총무 활동
조병옥의 교수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국내에 하나뿐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이던 신간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특히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때 일제를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고자 시도하다가 체포돼 3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출옥한 뒤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으로 활약했고 한때는 광산에도 손을 댔으나 실패했다. 그러다가 흥사단 계통 항일인사들을 억압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투옥됐다.
두차례에 걸쳐 5년 동안 옥살이를 한 조병옥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방 한칸이 없어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고 굶고 지내기가 일쑤였다. 일제는 그를 여러 조건을 내세워 회유했다. 그러나 그는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8·15해방이 찾아왔다. 조병옥이 만51세 때의 일이었다. 항일투사로 신망을 받던 그였기에 해방정국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해방정국을 바라보는 조병옥의 시각은 1차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와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로 귀결됐다. 임정이 3·1운동 이후 한국민족주의운동의 법통을 이어받고 있으므로 하루 빨리 환국시켜 건국사업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정권장악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그 변형으로서의 조선인민공화국이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밀사가 서울에 잠입해 지령을 내린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인공타도를 부르짖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병옥은 우선 송진우와 손을 잡고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일에 앞장 섰다. 그리하여 조선 8도를 상징하는 8총무제도를 도입한 한민당에서 총무로 뽑혔다. 당수격인 수석총무에는 물론 송진우가 뽑혔다.
45년 9월 16일 정식 출범한 한민당은 남한에 주둔한 미군을 환영하는 범국민적 대회를 열기로 했다. 조선의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미군을 환영한다는 취지였다.
45년 10월 20일 중앙청에서 성대히 열린 「연합군 환영회」에서 조병옥은 위원장의 역할을 맡았다. 이때 그는 4일전 귀국한 이승만을 대중 앞에 부각시키고자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여러 차례 설득했다. 그래서 하지는 이승만을 맨앞줄에 앉혔고 자신이 답사를 하면서 이승만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임정 추방계획」 만류
이 무렵 미군정은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에게 남한 치안의 총책임자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경무부장 자리에 임명할 한인 지도자를 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송진우는 조병옥을 추천했다. 미국에서의 교육과 뛰어난 영어를 갖춰 미군정 수뇌들과 호흡이 맞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사로 정평이 높아 민중이 신뢰하리라는 점, 게다가 반공정신이 강하고 배짱이 두둑해 혼란과 투쟁의 해방정국에서 치안을 제대로 유지해 나가는데 적임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병옥은 미 군정의 요직인 경무부장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나는 외국 군정의 용병으로 경무부장의 정복을 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조병옥은 미군정을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과도적 존재라고 여겼다. 그는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나라이며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나라인 만큼, 이미 연합국의 결정에 의해 남한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을 돕는 것이 한민족의 완전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조병옥은 경무부장으로서 우선 국립경찰의 체제화를 실현했다. 도에는 경찰청을, 시와 군에는 경찰서를, 동과 면에는 지서를 두게 해 경찰조직의 계통을 세웠고 경찰전문학교를 창설해 경찰 간부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국립경찰의 전체 병력을 2만5천명 규모로 확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 총독부 경찰관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남았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조병옥은 공산당 세력의 제거 또는 약화에 모든 힘을 쏟았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시인했듯, 인공의 불법화와 그리고 인공 산하조직의 해체에 앞장 섰다. 지방시찰을 갔다가 인민위원회 간판이 보이면 그 스스로가 그 간판을 떼는 일도 가끔 있었다.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약칭 민애청)을 비롯한 많은 좌익단체들의 해체를 주도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좌익 테러의 표적이 되곤 했고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좌익 선전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결코 「미 군정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45년 12월 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모스크바 의정서」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임정의 주권행사를 선언했을 때 일이다.
하지 사령관은 『임정 간부들이 미 군정을 부인하면서 미 군정 상대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는 만큼 그들을 체포해 인천에 있는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는 취지로 방송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조병옥은 정색을 하고 강력하게 말렸다. 그런 방송이 나가면 남한의 모든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미군정에 반대해 미군정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 대안으로 조병옥은 하지와 임정 주석 김구사이의 회담을 제시했다. 하지와 김구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46년 1월 1일 회담이 열렸고 임정세력이 반탁운동을 하기는 하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질서있게 하며 주권선언은 취소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성립됐다.
46년 연초부터 남한의 해방정국이 좌익진영과 우익진영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충돌한 이후 조병옥은 더더욱 좌익세력의 제거 또는 약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 군정장관이 좌익 청년단체를 해체했듯 우익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도 해체하라고 지시해도 거부했다. 『북한에서 공산독재에 반대해 싸우다 월남한 청년들의 조직을 해체하면 우익의 사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경찰력만으로 좌익세력의 폭동을 견제하기 어렵다』고 맞선 것이다.
○남북협상파 경계
좌익세력을 반드시 제압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조병옥의 신념은 「정치강령 5개 조항」을 미군정에 건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경찰력과 국방력의 강화, 검찰 법원 경찰 군대 요원들의 사상적 무장 등을 골자로 한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에 대한 경계심도 감추지 않았다. 이것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조병옥이 미군정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48년에 들어서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참관 아래 남한에서 선거를 치러 정부를 세운다는 방향이 확실하게 섰다. 선거날짜는 5월 10일로 잡혔다. 그러자 5·10총선을 파탄내려는 좌익의 폭동이 격화됐다.
조병옥은 여기에 결연히 맞섰다. 지방에서는 청년들로 하여금 향보단을 조직해 경찰을 도우며 좌익세력과 맞서게 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5·10총선은 비교적 큰 탈없이 치러졌고, 그것에 기초해 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섰다. 미 군정은 물론 같은날 폐지됐다. 조병옥은 경무부장에서 물러났다.
해방3년사를 돌이켜 볼때 조병옥은 대한민국 건국의 1등 공신이었다. 그 점은 그에 대한 공산세력의 비난에서도 증명됐다. 예컨대 북한은 그뒤 남북통일 방안을 제시할 때마다 통일정부에서 배제돼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하곤 했는데 그 명단에 그의 이름은 반드시 포함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에서 조병옥의 이름은 없었다. 이승만은 경무부장 3년 동안 좌우대결 가운데 때때로 강수를 둠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를 대통령 특사로 임명해 해외로 내보낸 것이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했다. 특히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의 승인 여부를 다루게 됐을 때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49년에 귀국한 조병옥은 김성수와 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에서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대 민의원선거에 서울성북구에서 출마했으나 조소앙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면서 남쪽으로 계속 쫓기던 이승만대통령이 내무장관으로 부름에 응하여 대구사수론을 폈다. 대구마저 빼앗기면 대한민국은 살 길이 없으니 대구는, 그리하여 낙동강전선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51년 초에 경남 거창에서 일어난 일부 군인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은 조병옥을 놀라게 했다. 그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인책과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했다. 그 뒤 그는 이대통령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 섰다. 특히 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반독재운동에 나섰으며 56년 민주당 창당을 주도해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56년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대표최고위원 신익희가 급서하자 조병옥은 그의 뒤를 이어 대표최고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이대통령에 보내는 공개장」을 통해 자유당정권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이것은 58년의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약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됐다.
60년의 제4대 대통령선거에 조병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신병이 도져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60년2월15일 별세했다. 향년 만66세였다. 국민장으로 모셔졌다.
▷약력◁
△1894년 3월 21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목천 출생
△1918년 숭실중학교 배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와이오밍고등학교 졸업
△1923년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사 경제학석사
△1925∼45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신간회 서울지회장, 3년간 제1차 투옥, 조선일보사 전무, 2년간 제2차 투옥
△1945년 8월 15일∼48년 8월 14일 한국민주당 총무, 미군정 경무부장
△1948년 9월∼49년 2차에 걸쳐 대통령특사
△1949∼50년 민주국민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2대 민의원 낙선
△1950년 7월∼51년 내무부장관
△1951∼54년 대한체육회 회장, 민주국민당 사무총장, 제3대 부통령선거 3위, 제3대 민의원 당선
△1955∼58년 민주당 최고위원 대표최고위원
△1958년 「이승만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통해 자유당 정권 비판, 제4대 민의원 당선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했으나 2월15일 신병으로 별세, 국민장
▷어록◁
△『나는 기독교 신자다.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의 입장에서 일본을 위해 잘 되라는 기도는 차마 못올리겠다』 (1920년 후반 어느 청년회의 강연에서)
△『코민테른의 지령이라면 꼼짝 못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를 해소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에 무조건 추종해 조국을 배반한 결과 신간회는 해소되고 말았다. 이것을 보고 그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합동작전을 펴서 일하는 것을 단념했다』(신간회 민중대회 일로 투옥됐다가 1932년에 출옥하고 나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부터 한 걸음이라도 후퇴한다면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1951년 내무장관을 사임하면서)
△『나는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가 되기보다는 소를 몰고 가는 농부가 되고자 했다』(1951년대 초 야당운동에 뛰어들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유당정권 치하에서 살고 있는 한, 민족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드높이 든 민권옹호의 민중의 봉화와 깃발 아래 최대한 항쟁을 계속할 것입니다』(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발표한 「이승만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