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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와 도자기의 아름다움
기증 받은 토기와 도자기
기증 받은 토기와 도자기
기증 받은 토기와 도자기
김홍기 선생이 기증한 토기
故 김홍기 선생의 부인 엄순녀 씨가
남편이 생전에 수집한
문화유산 1,512점을
2004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구 홍산박물관 소장품 1,512점 수증
국립중앙박물관은 故 김홍기 선생(1921. 4. 7~1992. 2. 21)의 부인 엄순녀 씨로부터 구 홍산박물관 소장품 전체 1,512점을 수증하였다. 이번에 수증한 문화재는 토기 1,004점을 비롯하여, 도자류 150여점, 서화류 40여점, 고문서류 40여점, 목제품 100여점, 금속품 100여점, 기타 70여점 등이다. 구 홍산박물관은 고 홍산 김홍기鴻山 金鴻基 선생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토기 전문 박물관으로 1992년 8월 설립 당시 문화부 등록 제1호 사립박물관이었으며, 1999년 5월 문을 닫았다.
이번에 수증된 문화재는 토기 전문박물관이었던 '구 홍산박물관'의 성격과 같이 청동기시대~조선시대의 다양한 토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기증자가 체계적인 기획을 통해 수집한 방대한 수량의 토기들은 우리나라 토기문화의 정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수증 문화재의 중심을 이루는 삼국시대 토기는 신라, 가야, 백제 등 각 지역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기종器種면에서도 굽다리접시[고배高杯], 단지[호壺], 그릇받침[기대器臺], 뚜껑단지, 이형토기異形土器 등 대부분의 기종을 망라하고 있다.
이밖에 원삼국시대 토기와 고려~조선의 도기, 자기가 다수 포함되어 수집품을 다채롭게 한다. 원삼국시대 토기로는 쇠뿔모양손잡이단지[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 굽다리목단지[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굽다리접시, 화로모양토기[노형토기爐形土器], 두드림무늬단지[타날문호打捺文壺] 등 대부분의 기종이 망라되어 있고, 고려~조선의 도기도 편병扁甁, 매병梅甁, 정병淨甁, 장군, 호壺 등 기종이 매우 다양하다.
이밖에 삼국시대 신라의 출자형 금동관出字形 金銅冠 1점은 수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6세기 신라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금동관은 동원 이홍근 선생과 변종하 선생 기증 금동관에 이어 중요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조선시대 문인들의 간찰류, 고문서, 서화, 시문집詩文集 목판류 등도 홍산 선생 수집품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주요 문화재들이다.
고 홍산 김홍기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한국전쟁시 월남하여 건축자재와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여러 기업을 운영한 기업가이다. 선생은 "기업 활동을 통해 모은 재산이라 하더라도 일정규모 이상이면 사유재산이 아니므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홍산박물관과 홍산장학재단의 설립을 유언으로 남겼다. 홍산장학재단은 자산규모가 100억원에 달하며, 기초과학분야의 우수한 학생 및 학자에게 학자금 및 연구비를 지원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부인 엄순녀 여사는 선생의 뜻을 더욱 높이 받들고 더 많은 일반인이 수집품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번 기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2001년 겸산 최영도 선생의 토기 수집품(1,582점) 기증에 이어 대량의 토기를 수증하게 되었으며, 새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을 앞두고 문화재 기증문화 활성화와 기증품 관련 분야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아무런 조건없이 문화재를 기증한 고 김홍기 선생의 부인 엄순녀 여사의 높고 순수한 뜻을 기리고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오는 2005년 개관 이후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품을 특별전시하고 도록을 발간할 예정이다.
아울러 기증자의 숭고한 뜻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부 서훈을 추천하였다.
기업인 고 김홍기씨 수집품 토기 등 1512점 박물관에 기증
한겨레 기사 입력 2004. 10. 28. 10:31수정 2004. 10. 28. 10:31
노형석 기자
[한겨레] 국립중앙박물관은 1970~80년대 문화재를 수집했던 작고 기업인 홍산김홍기(1921~1992)의 부인 엄순녀씨가 토기류를 비롯한 고인의 옛 컬렉션 1512점을 최근 기증해왔다고 28일 밝혔다. 기증 유물들은 토기・도자류(1150여 점),서화류(40여 점), 고문서류(40여 점), 목제・금속품, 고문서류 등 다양한 항목을망라하고 있다.
김홍기는 함남 원산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한 뒤 건축자재・화학제품 사업을하며 부를 쌓았다. 기증 유물들은 박물관을 세우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92년 8월문화부 등록 1호로 설립된 홍산박물관의 소장품이었으나 박물관이 99년 문을 닫자 부인이 거두어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쪽은 내년 용산 새 박물관 개관 때 기증품을 특별전시하고 도록도 펴낼 계획이다.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이 기증한
아시아 민족 조형품
아시아 민족 조형품 1,499점을 기증한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
[강구열의 착한공유, 기증](2) "나는 김해 김씨의 후손"
세계일보 디지털기획입력 : 2016-04-30 13:00:00 수정 : 2016-04-30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일본인 노학자 한국과 아시아를 잇다. 가네코 가즈시게
서기전 1세기, 지금의 태국 동북쪽 반 치앙 마을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머리는 동쪽으로, 얼굴은 남쪽로 향하게 시신을 안치했다. 주변에는 붉은 칠을 한 소용돌이 문양의 토기를 관의 형태로 둘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보이게 해 환생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2010년 9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테마전 ‘흙으로 빚은 아시아의 꿈’에 크림색 바탕에 주홍색의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토기가 출품됐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태국 반치앙 유적에서 발굴된 높이 44.2㎝의 ‘긴 목 항아리’. 반 치앙인들의 수준 높은 미감을 보여주는 유물이었다.
서기전 1세기와 2010년, 태국과 한국. 반 치앙의 무덤에 묻혔던 토기가 엄청난 시·공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한국과 만난 것은 한 일본인 노학자의 지독한 한국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가네코 가즈시게(金子量重·1925∼)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장은 스스로 가네코(金子)라는 성이 김해 김씨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냐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 일본은 삼국시대 이래 한국으로부터 문화적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고,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의 기반을 확립해 지금의 발전으로 이어올 수 있었다. 일본인으로서 작은 보은의 징표이다.”
2003년 ‘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아시아 민족 조형 특별전’의 기자회견에서 기증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가네코 선생의 대답이다.
그가 한국의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일협정으로 국교가 정상화될 즈음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중 한 명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지역부(地歷部)를 만들어 근처 유적에서 토기, 돌도끼 등을 수집해 전시회를 열 정도로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의 관심은 대학에서 일본사를 전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일본역사와 일본인의 생활문화는 주변 아시아 여러 민족과 맺어온 밀접한 관계를 빼고서는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해 주변국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교류 또한 활발했던 한국은 빼놓을 수는 없었다. 1964년 11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이후 아시아 전역으로 조사, 자료 수집의 여정이 시작돼 반세기 동안 500여회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유물을 수집했다.
특히 주목한 건 각 민족이 의식주, 신앙, 교육, 예능, 놀이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민족조형’이라는 새로운 인문학 장르를 개척하는 토대였다. 자연에서 가장 적합한 소재를 골라 숙련된 기술과 도구로 만든 물건은 삶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지역성, 시대성, 민족성이 배어 있다고 인식이다.
“선생의 학설은 (각 민족의) 물건을 미술과 공예, 즉 미술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던 한계를 지적하고 풍부한 현지조사와 혜안을 통해…물건의 근저에 항상 ‘인간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논파한 것이다.”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기증은 2002년 시작됐다. 막역한 친구인 곽소진씨를 통해 기증 의사를 밝혔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지건길 관장이 흔쾌히 수용해 이뤄졌다. 2002년 5월 250점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003년 7월, 2005년 9월 네 차례에 걸쳐 1035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졌다. 토기, 도기가 가장 많고 목제, 죽제, 석제, 금속 등 재질별로 다양했다. 국적별로도 중국, 일본을 비롯한 베트남,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네팔, 이란, 이라크 등 아시아 전역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민 전 부장은 기증품에 대해 “소장품 중 가장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고 칠기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라며 “현장을 답사하면서 직접 구한 것이라 각 유물의 내력, 제작기법이 분명하다. 골동상에게서 구입한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고 평가했다. 2007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립민속박물관에도 태국 관련 자료, 아시아생활문화 관련 필름 1만700여점을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가네코 선생의 기증으로 아시아 유물을 대폭 확충하며 박물관의 격을 높였다. 한국문화를 아시아문화와 비교해 거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된 것도 큰 성과다. 또 다양한 전시회 기획이 가능해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가네코 기증품을 중심으로 2003년 7월 ‘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아시아 민족 조형품’ 전시회, 2010년 ‘흙으로 빚은 아시아의 꿈’ 전시회, 2012년 ‘아시아, 나무에 담긴 이야기’ 전시회를 열었다. 전문가들은 ‘아시아의 목공예, 복식문화, 불교미술, 민간신앙 등을 주제로 한 전시회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이 이어지면서 가네코 컬렉션의 가치를 저평가했던 일본에서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한다. 규슈박물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이 기증을 받았다. 베트남 하노이 민족학박물관에도 가네코 선생의 기증품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관 2층에 ‘가네코실’을 만들어 소중한 뜻을 기리고 있다.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이 기증한
18세기 캄보디아 목조흑칠 부처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이 기증한
중국 한나라 시대 무덤을 지키는 동물
(흙으로 만든 유물)
장정순(유강열의 미망인)이 기증한
캐롤 서머스의 작품 [무지개 빙하]
[ 홍익대 미대 교수를 역임한 고 유강열 화백의 미망인인 장정순씨가 생전에 고인이 수집한 한국 민화와 민예품 등 304점과 관련 전문서적 1400여권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기증된 문화재는 서화류 74점,전통공예품 107점,토기류 77점,도자기 43점 등이며 고인의 판화작품 3점도 포함됐다. ]
재일교포 금속 공예가인
나성순(일본명 이나가키 데레즈) 선생이 기증한
폴 자쿨레의 판화 작품 [보물]
한국인에 대한 사랑, 따뜻한 색채로 옮기다
[리뷰]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다색판화전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06.05.17 19:58l최종 업데이트 06.05.18 08:48
김현자(ananhj)
지난 일요일(14일). 아이들과 함께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고대유물 전시공간으로서의 박물관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박물관에서의 폴 자쿨레와의 만남은 우선 신선하였다. '박물관도 유물 전시만이 아닌 이런 미술전시를 할 수 있구나'싶었다.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아시아의 색채-폴 자쿨레 판화전>은 박물관을 좀 더 종합적인 문화공간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폴 자쿨레가 만난 따뜻하고 온화한 한국과 한국인들
전시실에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진 속 주인공들은 다소 의아했다. 커다란 리본을 꽂은 동양 소녀와 동양 아이의 손을 잡고 미소 짓고 있는 서양인. '1957년 폴 자쿨레와 기증자 나성순'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옆에는 이들의 특별한 인연과 폴 자쿨레에 대하여 길게 설명되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동양의 소녀는 한국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주인공 '폴 자쿨레'였다.
폴 자쿨레는(Paul Jacoulet 1896-1960) 동양인들을 주로 자신의 작품 주인공으로 표현하였다. 게다가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은 더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국권을 상실한 국민으로서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방인 폴 자쿨레는 한국인들로부터 따뜻함과 온화함, 그리고 희망을 보았나 보다. 작품마다 폴 자쿨레의 한국인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세심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고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그리운 고향이 있는 한국이었으니까.
폴 자쿨레는 1896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도쿄외국어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던 1899년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동양과 평생의 인연을 맺는다. 일본에서 성장한 그는 일본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인 나영환을 만나게 된다.
나영환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영환은 폴 자쿨레의 조수가 되어 작품 활동을 돕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영환의 동생 나용환도 함께 살면서 창작활동을 돕게 된다. 또한 폴 자쿨레는 나영환의 장녀인 나성순을 양녀로 삼아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까지 물려주게 된다.
이런 과정들을 보면 폴 자쿨레의 한국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어땠는 지가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나성순은 자신의 아버지와 폴 자쿨레의 특별한 인연을 기리고자 지난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 165점을 기증한다. 이렇게 만나게 된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들인데, 프랑스 파리태생의 이 판화가는 평생을 일본에서 살았지만 한국인들에게 더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도 그럴밖에, 폴 자쿨레에게 한국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따뜻한 나라였다. 그의 아버지가 1921년에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는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학박사인 나카무라 히로시와 재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 수시로 한국에 드나들면서 한국인들의 모습에 감동하고 작품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럴까?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속에서 살아있는 한국인들은 밝고 온화하다.
한복의 우아한 선과 질감을 충분히 살린 작품들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판화전>을 통하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20세기 초, 이방인의 눈에 비친 가까운 옛날, 우리의 모습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한복에 대한 표현은 얼마나 섬세한 지 애정이 특별하게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한복의 우아한 선을 충분히 살리면서 우리 고유의 바느질인 '누빔'을 질감까지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을 표현하면서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을 보면 우리의 전통에 대한 관심까지 많았지 싶다.
화려함이 장점인 다색판화에서 흰색의 높은 비중을 표현하기에는 상당히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을 표현하면서 소재로 사용한 색채는 다른 아시아인들(중국, 일본, 미크로네시아)을 표현한 색에 비하여 월등히 흰색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폴 자쿨레는 화려한 색채 대신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무수히 스케치하는 방법으로 우리 고유의 흰색과 한복의 우아한 선을 살리고 있었다. 한복 바느질에 자주 사용되는 '누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빔을 색으로 쉽게 표현해버리지 않고 목판을 눌러 찍는 엠보싱 기법을 이용하여 입체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폴 자쿨레가 이렇게 표현해낸 한복을 보고 있으려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누빔의 입체감이 뛰어났다. 만져 보면 올록볼록할 것 같았다.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 속에서 한복의 우아한 선과 한복천의 질감이 생생하였다.
폴 자쿨레의 다색 목판화는 수없이 많은 스케치와 수채화를 통해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정한 다음, 색깔의 숫자만큼 목판을 파고 겹쳐 찍기를 반복하여 완성된 작품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최고의 조각과 찍기의 장인과 공동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그 색채는 60~70여 년 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20세기 초 프랑스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한국, 일본, 중국, 미크로네시아 등 아시아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폴 자쿨레는 모국인 프랑스, 삶의 터전이었던 일본, 어머니가 살던 한국, 화려함의 나라 중국, 나비를 찾아 떠났던 미크로네시아의 사람들을 간명하고 단정한 필선과 화려한 색채로 표현하였다. 폴 자쿨레의 작품에는 국적을 초월하여 온화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인간애(人間愛)가 깃들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홍보자료 중에서
아이들에게 고대역사유물을 보여주기 위하여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따뜻한 이국인을 만나고 왔다. 이방인 폴 자쿨레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한국인들은 식민지 국민의 힘없고 어두운 모습보다는, 어미 잃은 새끼 새들이 굶어 죽을까봐 둥지를 가져다가 먹이를 먹여 지성으로 살려내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아시아의 색채 -폴 자쿨레 판화전>은 한국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 외에 중국, 일본,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까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또한 폴 자쿨레가 생전에 사용한 화구도구나 유물이 함께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6월 4일까지 전시, 이후 6월 13일부터 7월 30일까지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될 계획이다.
▶ 폴 자쿨레 연보
- 1896년 파리 출생.
- 1899년(3세) 아버지가 프레드릭 자쿨레 동경외국어대학 교편을 잡으면서 일본으로 감.
- 1920년(24세) 재일 프랑스대사관 근무.
- 1921년(25세) 아버지 사망.
-1928년(32세) 어머니가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학교수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씨와 재혼하여, 어머니는 서울 거주.
- 1929, 1930, 1932, 1934, 1938년 서울 방문.
- 1931년(35세) 나영환(전남 영암 출신)을 조수로 맞음.
- 1934년 서울 미쓰코시백화점에서 ‘폴 쟈쿨레 판화전’을 개최.
- 1949년(52세) 나영환의 딸 나성순(현재 이름 이나가키 데레즈)을 양녀로 맞음.
-1954-1955년 세계일주를 하면서 전시회 개최.
- 1960년 일본 가루이자와 (輕井澤)에서 사망.
재일교포 금속 공예가인
나성순(일본명 이나가키 데레즈) 선생이 기증한
폴 자쿨레의 판화 작품 [잉어 장수]
재일교포 금속 공예가인
나성순(일본명 이나가키 데레즈) 선생이 기증한
폴 자쿨레의 판화 작품
[사이판의 소녀와 히비스커스 꽃]
프랑스 판화가 폴 자쿨레의 작품 165점을 기증한
나성순 선생
장정순이 기증한
프랑스 판화가 자크 비용(본명 가스통 에밀 뒤상)의 작품
[제목 미상]
국제판화전 출품 판화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록펠러재단
록펠러재단이 기증한
카를 하인츠 클리에만의 판화작품
[꽃 피는 나무]
록펠러재단이 기증한
폴 아널드의 판화작품 [꿩]
이홍근 선생이 기증한
통일신라시대 금동 불상
"딸을 좋은 곳으로 시집 보낸 느낌이다"…의사 선생님·마크 테토·송성문 참여한 '기증'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MBN 기사 입력 2024-01-13 16:07 l 최종수정 2024-01-14 23:22
김문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전체 소장품의 11% 기증품
마라토너 손기정도 일본인도 '소유' 아닌 '기증' 결심
"영광스러운 일"…정성껏 수집한 문화유산, 조건 없이 국가에 내주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 싸서 박물관에 이사시켜 놓고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느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며칠 안 되어서 가셨지요."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푼 의사인 수정 박병래(1903-1974) 선생의 딸 박노원 씨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한 말입니다. 박 씨는 "아버지께서 '월급쟁이라서 자잘하게 산 것이 나중에 이렇게 남들에게 호감을 주게 됐다'고 기뻐하셨다"고도 전했습니다.
박병래 선생은 우리 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도자기를 모은 수집가입니다. 조선 청화백자를 주로 수집해 중요한 우리 청화백자가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1974년에는 평생 모은 도자기 중 무려 37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박 선생이 돌아가신 뒤 박 선생의 부인 최구 여사도 4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작고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미가 살아있는, 기증자의 안목을 꼭 닮은 도자기들을 누구든지 가까이 감상할 수 있도록 정성껏 간추리고 포장해 전달했습니다.
기증이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주는 일입니다. 개인에서 사회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공유하는 고귀한 뜻을 실천한 이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TV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인지도가 높은,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마크 테토도 그 중에 한 명입니다.
마크 테토는 국립중앙박물관의 YFM 단체(Young Friends of the Museum)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돈을 모아 단체의 기금을 함께 조성했고, 일본 수집가가 가진 고려 시대의 불감을 사들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한 뒤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유명한 송성문 씨도 지정문화재 다수를 기증했는데요. 송 씨의 기증품 중 국보 1건과 보물 4건 역시 그제(12일)부터 새롭게 단장해 대중에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2층의 기증관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는 누가 있고, 기증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를 알아봅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그리스 투구, 손기정이 기증했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 손기정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그리스 청동 투구를 부상으로 받기로 돼 있었지만 받을 수 없던 손기정은 1986년이 돼서야 돌려받았는데 국가에 이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손기정 선수 자신의 투구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공공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대중은 기증관을 방문하면 그의 그리스 투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원 이홍근(1900-1981)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혼란기 속에서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평생에 걸쳐 문화유산 수집을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98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기증한 물품은 1만 202점에 이릅니다.
이 선생과 유족은 당시에 운영한 동원미술관의 콜렉션 전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품도 보물인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을 포함해 금속, 토기, 석기, 석조물까지 방대한데 그가 수집한 서화는 전체 수집품의 백미로도 불립니다.
이 선생은 문화재는 한 점이라도 사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증을 하겠다고 의사를 확실히 했고, 이에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받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족들은 수집품을 하나하나 감싸두고 오동상자 안에 정성껏 보관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을 방문할 때는 이 선생의 생전 수장고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선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또는 멀찌감치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관람할 때의 '꿀팁(유용한 방법 또는 정보)'입니다.
'가보' 기증하다…치과 의사·코리아나 회장 유상옥 '유산 사랑'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인 '가보'가 기증되기도 합니다.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과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등이 그 예시인데요. 임진왜란의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이항복의 15대 종손인 이근형 선생이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알려진 송성문 씨가 국보 5점, 보물 21점을 기증했다면 김성용 씨는 2011년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편집한 지식백과인 지봉유설을 기증했습니다.
치과의사인 박영숙 씨는 화장 도구 등 과거 규방 유산들을 기증했고, 코리아나 회장 유상옥 씨가 기증한 고려 시대 청자 기름병 등 토기들도 우리 문화 유산을 감상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재를 털어가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혼란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족문화재를 지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만큼이나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는 다양한 개인들의 노력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인의 한국 기와 사랑…옛것에서 '현대 공예'로 이어지는 아름다움도
또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일본인 내과 의사인 이우치 이사오(1911-1992)입니다. 어린 시절 삼촌으로부터 짐승 얼굴무늬의 기와 선물을 받고 기와에 빠진 이우치는 한국의 와전이 일본 와전의 원류임을 알게 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기와와 벽돌을 평생 동안 모아온 그는 이중 1,082점을 1987년 한일 친선을 위해 기증합니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랑했던 일본인이 소유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박물관을 위해 기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아쉬움을 넘어서 한일 친선과 양국의 학문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매우 만족합니다." 전 시대를 망라하는 한국의 와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와전의 절반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면서 이우치가 한 말입니다.
유강열(1920-1976) 선생은 1954년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에서 염색과 판화 공방을 맡아 전통 민예를 현대 공예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현대의 판화나 염색 등의 모티프가 되는 전통 공예 미술품을 그의 소장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토기, 조선 시대의 백자와 나전칠기, 민화 등에서 발견한 옛 장인들의 조형 의식을 발견한 유 선생은 실내 디자인 등 현대 조형예술의 발전을 이끌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아틀리에의 모습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현해 놓았습니다.
5만여 점 기증 받았다…세한도와 수월관음도 등 '장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동안 기증자 313명이 소장품 5만여 점을 380여 차례 기증했습니다. 박물관의 소장품 43만여 점 중 5만여 점이 기증품인 것입니다.
이 기증자 숫자에는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제(12일)부터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는 기증자 114명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번 기증관 재개관 전시에서는 5월 5일까지 특별 공개되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가 기증한 국보 '세한도'(歲寒圖·정식 명칭은 '김정희 필 세한도')와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서화류와 목가구 등은 재질의 특성상 4개월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교체될 예정입니다.
기증자실 운영 어떻게 돼왔나…기증자 예우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개인 기증관은 이홍근 선생과 박병래 선생을 기린 동원기념실과 수정기념실로, 1981년에 만들어져 상설 전시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박물관의 부지가 서울 용산구로 이전되면서 기증자의 이름을 딴 기증자실이 다시 운영됐습니다.
이후 기증관의 재방문율을 높이고, 점차 늘어나는 기증품들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방법을 찾기 위해 '테마별'로 구성한 기증관이 이번에 새로 꾸려지게 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은 단적인 예를 들면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보 14건과 보물 46건 등 2만 1,6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대규모로 늘어나게 됐는데요. 이 회장의 기증품도 순회 전시 등이 끝나면 추후 일부 선별해 기증관에서 전시할 예정입니다.
기증을 하면 우대받는 것도 있을까요? 기증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증서와 기증자 명패를 받습니다. 박물관에 기증자로서 이름이 올라가 전시도 됩니다.
예우가 큰 것은 아닙니다. 무료 주차와 전시 관람에 있어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기증자가 요청하는 경우, 소득 신고 시 '평가 금액'만큼 법정기부금액으로 세제 혜택을 볼 수 있도록 국세청에 신고 가능하도록 처리해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증자가 이렇게 요청을 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전했습니다.
그만큼 기증자들이 '기증'이라는 숭고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었고, 소중한 문화유산일수록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는 기증자들의 마음이 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 기증자들이 기증을 결심한 이유 등을 이야기한 영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홈페이지(현재 '소장품-수어동영상' 제공, 이후 카테고리 수정 가능)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 해당 전시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증품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재현한 '손으로 보는 기증 문화유산' 공간도 전시 뒤편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기업인 하치우마 다다스가 기증한
한국의 금속공예품 문화유산
1998년 변종하 기증
신라 5~6세기 금동 관
남궁련이 기증한
고려시대 짐승 얼굴무늬 풍로
이홍근이 기증한
고려시대 동합금 용무늬 거울
한국3대 고미술품 수장가의 선택 - 동원 이홍근
글 등록일 : 2023-07-24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는 오래전 떠났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안팎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의 유산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과 장명등도, 청자실의 귀한 고려청자도, 고종어진도 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산이다. 5천 건이 넘는 문화재를 기증한 인물 바로 동원 이홍근 선생이다.
개성 출신인 이홍근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종합물산회사와 양조회사를 운영하며 젊은 나이에 이미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것이 우리 문화재였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은 돈이 많다고 수집한 것이 아니에요. 문화재에 애정을 가지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게 애국하는 일이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계셨어요.
선생은 개성 출신 문화재 관련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 인터뷰>
고유섭 선생도 개성 분이고, 황수영 선생도 개성 분이고, 최순우 선생도 개성 분이니까.
이홍근 선생은 30대부터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화재가 돈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안목을 쌓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했다.
누구의 감정을 받지 않고 내 눈으로 보고 샀다. 그래야만 감식안이 생긴다.
반세기 동안 문화재 수집에 몰두한 이홍근 선생은 한국 3대 고미술품 수장가로 꼽힌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5천여 건. 하루에 한 점씩 사들인다 해도 15년 가까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동원 컬렉션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정수영의 해산첩, 단 세 점만 남아있는 평탈 기법 거울인 금은 평탈 보상화 무늬 거울, 그 외에도 수많은 도자기와 서화 등 문화재들이 그의 안목 덕분에 가치를 되찾았다.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인터뷰>
우리나라 미술사 전반을 이분의 소장품을 가지고 서술할 수 있을 만큼 두루 갖춘 그런 컬렉션입니다. 한 화가의 기준작이면서 대표작인 작품을 기증하셨고 그 자체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메꿀 수 있는 그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죠.
동원, 미술관을 만들다.
한국 최초 기업 미술관 동원미술관 설립
1967년, 이홍근 선생은 자택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미술관인 동원미술관을 설립하고 습도와 온도를 관리할 수 있는 수장고를 만들었다. 수집품들은 딸과 며느리가 바느질해서 만든 비단 주머니에 싸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이 박물관을 하려고 이층집을 잘 지었어요. 이홍근 선생 거실이 박물관의 2층이에요. 항상 거실에 계시거든요. 이홍근 선생이 거실에 앉아계시면 앞을 지나가야지 수장고에 들어갈 수 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곳에 계셨어요.
이홍근 선생의 문화재 사랑은 각별했다. 이정의 <대나무> 5폭이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직접 일본 왕실에 출입하는 표구상을 찾아가 표구를 요청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한번은 일본의 한 재벌총수가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를 사겠다고 사흘을 조르고 돌아가는 공항에서도 전화를 걸어서 간청했지만 이홍근 선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 문화재를 해외로 유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문화재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문화재는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집만큼 정성을 다 한 보존.
수집 문화재는 자손에게 상속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문화사업으로 영구히 남는 일이 되어야 한다.
기증으로 남긴 영원한 유산
유족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1980년, 1995년, 2002년, 2003년 네 차례에 걸쳐 총 5205건, 10,192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은행 주식 약 7만 주를 출연해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에 기여한 연구소도 설립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이 자식들에게 ‘이것은 국가 것이니까 너희들 것은 없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들 이상용(이홍근 선생 둘째 아들) 선생은 이홍근 선생의 평소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상용 씨가 ‘정 선생, 빨리 가져가시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거죠.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동원 이홍근 선생님 컬렉션이 박물관에 들어온 다음에 굉장히 연구가 활성화됐는데요. 선생님의 후손인 이상용 선생님이 기금을 대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목록집이 발간됐습니다. 이상용 선생님은 아버님의 뜻을 이어가길 원하셨고 저희한테 계속 연구비 지원을 해주실 정도로 한 번에 끝나는 기증이 아니었던 거예요.
한국 3대 고미술품 수장가의 마지막 선택, 기증.
이홍근 선생의 이야기는 오늘날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의 문화재 사랑과 문화재 사랑과 노력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사랑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동원의 유산
‘선생 수집의 문화재가 이제 이렇게 우리 민족문화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민족 전체가 보고 배우고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이 선생이나 선생가문의 보람과 경사일 뿐 아니라 나라와 우리 전체의 기쁨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동원 이홍근 선생 기념비 비문 중
1986년 박병래 기증
고려시대 동합금 종
전통미술의 재발견
1987년 김종학 기증
조선 19세기 오동나무 배나무 제작 이층 농
김종학이 기증한
조선시대 19세기 감나무 약장
판화가이자 공예가인 유강열 선생이 작고하자
남편의 유작과 수집품들을 기증한
장정순 여사
장정순이 기증한
작고한 남편 유강열의 판화작품 [카드]
장정순이 기증한
작고한 남편 유강열 작가의 십장생
(국회의사당 벽화 시안2)
김종학이 기증한
조선시대 19세기 제작
호랑이와 매를 새긴 목판
장정순 여사가 기증한
유강열 작가의 유작
목판화 [정물]
장정순 여사가 기증한
유강열 작가의 유작
리놀륨판 판화 [해안풍경]
장정순 여사가 기증한
유강열 작가의 유작
실크스크린 [제기정물]
장정순 여사가 기증한
유강열 작가의 유작
천에 납염 [제목 미상]
손창근 선생이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삶의 향기] 국보 '세한도' 국가 기증 손창근 선생, 아들이 말하다
출처 : 월간중앙 202101호 (2020.12.17)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176년 세월 중 50년… 잠깐 맡고 있었을 뿐”
2018년 서화 304점 기증할 땐 “손 아무개로 해 달라”
돈 벌 때도, 쓸 때도 가치 좇았던 ‘개성상인 핏줄’이 바탕
추사(秋史)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1844년 작, 국보 제180호)는 가로 70㎝, 세로 33.5㎝ 크기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직접 그린 서화의 크기가 대개 그렇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 전시된 [세한도]의 길이는 15m에 이른다. 특별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다. 17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청나라와 조선의 문사들이 쓴 감상평이 줄줄이 그림에 덧붙여져서 그렇다.
개성 출신 실업가 고(故) 손세기(1903~1983) 선생은 1970년대 [세한도]를 사들였다. 이후 그의 장남 손창근(91)이 2020년 1월 박물관에 기증하기까지 약 50년을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소유했다. 176년 세월의 3분의 1을 함께한 셈이다. 그런데도 손씨 부자는 감상평을 남길 종이를 덧대지 않았다. 손창근 선생은 [세한도] 기증에 앞서 2018년 서화 304점을 먼저 중앙박물관에 내놓을 때는 “손아무개 기증으로 해달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숨겼다.
이들 부자는 개성상인의 피를 잇는 기업인이다. 투자와 보상에 관한 관념이 누구보다도 확실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 이들이 한사코 무명(無名)을 고집했던 이유는 뭘까. 답을 찾기 위해 손창근 선생의 차남인 손성규(61)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간 언론에 나서길 꺼려왔던 손 선생이 아들에게 자신을 대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세한도]를 봤을 때가 언제였나?
“2019년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정작 아버지가 소장하실 땐 집 금고에 보관하셔서 보기 어려웠다. 한번 꺼내서 보여주셨을 때 본 것이 전부다. 사실 내일(인터뷰 다음 날인 12월 15일) 지인들과 특별전을 관람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
박물관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 기증을 기념해 특별전(‘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을 기획했다. 2020년 11월 24일부터 새해 1월 31일까지 약 두 달간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특별전을 연 지 2주일 만에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박물관 전체가 12월 8일부로 기약 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마지막 한 점’ 두고 고민한 1년 2개월
2019년이면 아직 아버님께서 소장하실 때 아닌가?
“2005년 5월, 2010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70점, 135점을 박물관에 기탁하셨다. 이때 이미 [세한도]를 포함해 모든 컬렉션을 맡기셨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었다. 2010년 아버지께서 경기도 용인의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보관이 어려워진 사정도 있다.”
이때 기탁한 문화재 305점은 손세기·손창근 컬렉션으로 불린다. 손세기 선생과 장남 손창근이 대를 이어 수집한 작품들이어서다. [세한도] 외에도 추사의 걸작 [불이선란도], 최초 한글서적인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 등이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손창근 선생은 2018년 11월 21일, 구순을 맞아 [세한도]를 제외한 기탁품 304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이를 기념해 상설전시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하고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손 선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서 작품을 내놓는 소회를 밝혔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한 점 한 점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 앞으로 내 물건에 대해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손 선생은 기념식에서 소회를 말하지 않을 생각도 했었다고 손 교수는 전한다. 손 교수는 “아버지께서 처음엔 말씀조차 안하신다고 했다”며 “‘당신께서 안하면 누가 하시겠냐’고 설득해서 나서신 것”이라고 돌이켰다. 손 선생은 이후 언론 인터뷰만큼은 한사코 사양했다.
손 선생은 많은 작품에 대한 애착을 내려놨지만, [세한도]에 대해선 내려놓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 듯하다. 추사의 작품 중에서도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리는 작품이었다. 손 선생은 2018년 기증 이후 1년 2개월여가 지난 2020년 1월 29일, 비로소 [세한도] 기증서에 서명했다.
父子이자 동지였던 손세기-손창근
손 선생께서 [세한도]만큼은 고민을 더 하셨던 것 같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이건(세한도는) 가치가 조 단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아끼셨던 작품이다.”
가족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셨나?
“아버지의 기증 결심을 1월 중순에 알게 됐다. 2018년 때도 결심을 굳히고 나서 가족들에게 알렸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대기업 2, 3세들도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숱하게 싸우지 않나. 자식들하고 의논하기 어려우시지 않았을까. 원체 과묵한 분이시다. 혼자 고민하느라 힘드셨을 거다.”
손 선생이 홀로 판단했던 데는 가족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그가 경기도 용인시 소재 산림 약 6600㎡(200만 평, 시가 약 1000억원)를 산림청에 기부할 때는 자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손 교수는 “2012년 때 그렇게 의견을 모아주니 ‘내가 하자고 하면 존중해주나보다’라고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손 선생은 산림청에 ‘아들딸 등 가족도 손씨 뜻에 적극 동의했다’는 점을 함께 알려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결정에는 선생의 부인이자 손 교수 어머니께서도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2018년 기증 때 어머니께서 ‘왜 한 점(세한도)만 뺐느냐, 이럴 거면 나한테 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손 선생은 지난 12월 8일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 문화재청이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을 시작한 이래 금관문화훈장 수훈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날 훈장은 손 선생의 자녀들이 대신 가서 받았다. 다음날인 9일엔 청와대 초청도 받았지만, 이것 역시 처음엔 사양할 마음이었다고 한다. ‘손 아무개 씨’의 진심으로 읽혔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멀어서 안 간다’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자손들이라도 와달라고 하더라. 저도 ‘(참석은)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설득 끝에 아버지께서 마음을 돌리셨다.”
청와대 방문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세한도] 복제본이 청와대에 있더라. 원래 만들면 안 되는 건데, 행사 담당자가 저한테 양해를 구하더라. 별달리 이야기는 안했지만, ‘이제 우리 아버지 것도 아닌데, 우리한테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 선생의 고서화 수집·기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손 선생의 부친 손세기 선생은 “간송미술관 특별전이 열리면 전시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서화 감상에 열중했다”(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고 할 정도로 고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손창근 선생도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부터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손세기 선생께서 개성 인삼 업계에서 ‘떠오르는 실업가’로 불렸다고 들었다. 인삼 재배·무역으로 축적한 자본이 밑천이 됐을까?
“6·25전쟁이 나면서 다 두고 부산으로 피란 가셨다. 이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광물사업으로 일어서셨다고 들었다. 아버지께서도 스위스계 상사에 수 년간 계시다가 나와서 할아버지와 사업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성함 ‘세’ 자에다 아버지 성함 ‘창’ 자를 써서 ‘세창물산’이라는 회사를 경영하셨다. 지금은 정리하셨다.”
상인의 감각과 수집가의 안목
조부께선 어떤 계기로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나?
“간송 선생처럼 거창한 가치로 시작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미술품이 한 국가에 갖는 의미는 고민하셨던 것 같다. 1973년 조부께서 서강대에 작품 200점을 기증하셨을 당시 쓴 글에 그런 마음이 드러난다. 조부께서 쓰셨지만, 아버지 조언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번 고치셨다고 하더라. 아버지의 마음도 담겨있는 셈이다.”
손세기 선생이 당시 서강대에 써 보낸 기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보존 하여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73년 1월 30일 석포 손세기’
작품들은 그동안 어떻게 수집하셨나?
“두 분이서 같이 수집하셨다. 수집을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말씀하신 적 없다. 다만 개성 출신 분들이 고서화 수집에 관심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故) 최순우(1916~1984) 선생님과 교분이 깊었다. 이외에도 개성 출신인 고(故) 서성환(1924~2003)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고(故) 이회림(1917~2007) 동양제철화학그룹(현 OCI) 창업주 등도 고서화에 투자를 많이 하셨다. 호림미술관을 세운 고(故) 윤장섭(1922~2016) 성보화학·유화증권 회장은 아버지의 고종사촌이시기도 하다.”
좋은 작품 찾으러 두 분께서 발품을 많이 파셨을 것 같다.
“가회동 집에 살 때 두 분께서 인사동을 자주 다니셨다. 그동안 수집한 작품 대부분을 인사동에서 구하셨다. 당시 집에서 두 분이 ‘어느 작품이 좋더라, 뭘 살까’ 논의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나머지 형제분이나 저희 자녀들은 지식이 없어 말을 나누기 어려웠다. 나중에 특별전에서 조부님 안방에 걸려 있던 작품들을 보고 가치를 알았다.”
조부에 대한 다른 기억은 있나?
“제가 스물네 살일 때 돌아가셔서 희미하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경기도 광주에 묘소를 만들어두셨다. 예전 어르신들은 가실 곳 미리 만들어두시고 흐뭇해하지 않나. 할아버지께서도 묘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앉아계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개성사람에게 돈은 어떤 의미였을까?
“개성사람만큼 부에 대한 관념이 투철한 사람들이 없다. 이름 뒤에 상인이란 단어가 붙는 지역은 개성이 유일하다. 그런데 개성사람은 돈 버는 감각도 뛰어나지만, 돈 쓰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 과시하듯 쓰지 않는다. 굉장히 검소하신 분이 많다. 돈을 쓸 땐 가치 있는 데 쓰길 원한다. 그런 맥락에서 조부와 부친은 고서화에 투자하셨다고 생각한다.”
부친도 검소하신 편이었나?
“아버지는 지금도 이면지 쓰신다. 택시 탈 때도 목적지와 반대방향 도로에서 타는 것 용납 안하신다. 저도 부지불식 간 아버지를 따라할 때가 많다. 집안 내력이다. 자식한테 검소하게 살라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삶을 보고, 묵묵히 배운다.”
“세한도, 이제 국민의 것”
그렇게 살뜰히 모은 부를 모두 내려놓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칠순에 서강대에 기부하셨고 팔순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팔순 때 용인 땅을 내놓으시고 2018년 구순 때 고서화 304점을 기부하셨다. 할아버지의 족적을 지켜보며 계획해 오셨던 것 같다.”
연세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손 교수와 함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측은 손세기-손창근 기증자의 후손인 손 교수를 위해 [세한도] 특별전시실과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두 곳을 공개해주었다.
손 교수와 함게 1시간여 동안 전시실들을 둘러봤다. 세한도 특별전 전시실은 손 교수도 첫 방문이었다.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던 손 교수는 이따금 “옛날 할아버지 안방에서 본 것”이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손창근 선생 소유의 미술품은 없다. 아들로서 아쉬운 마음은 없을까. 작품 관람을 끝낸 손 교수에게 물었다.
“1844년에 세한도가 세상에 나왔다. 조부께서 1970년대에 사셨고, 부친께서 2020년에 내놨다. 176년 역사 중 약 50년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 갈지 모르는데, 50년이면 짧은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가족이 잠깐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국민의 것이다.”
[세한도] 두루마리의
첫번째 부분
소장자 김준학의 시
[세한도] 두루마리의
두번째 부분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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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부분 [세한도]
[세한도]의 제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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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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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부분 [청나라 문인 16인의 감상문] 7
[세한도] 두루마리의
세번째 부분 [청나라 문인 16인의 감상문] 8
[세한도] 두루마리의
세번째 부분 [청나라 문인 16인의 감상문] 9
추사 김정희가
제자인 이상적에게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그림인
[세한도]
유창종이 기증한
통일신라시대 제작
짐승 얼굴무늬 기와의
모작품(관람객들이 만져볼 수 있음)
통일신라시대 제작
짐승 얼굴무늬 기와에 관한
안내문
퍼트리샤 슈밋이 기증한
고려말 조선초 14~15세기 제작
금동 불상의
모작품(관람객이 만져볼 수 있음)
고려말 조선초 14~15세기 제작
금동 불상에 관한
안내문
2024년03월24일(일요일)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Korea, 國立中央博物館)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보물 창고
소재지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휴관일 1월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이용 시간 월ㆍ화ㆍ목ㆍ금요일 09:00 ~ 18:00, 수ㆍ토요일 09:00 ~ 21:00, 일요일ㆍ공휴일 09:00 ~ 19:00.
※2017년 7월 1일부터는 개관시간 9시→10시로 조정.
목차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넓고, 크고, 깊다. '국립', '중앙', 그리고 '박물관'. 그 이름에서도 품위와 무게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국 각지 박물관의 종합관 격이다. 게다가 역사 연표와 영상 등을 활용해 유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우리 아이의 '역사 공부'에 이만큼 훌륭한 교과서도 없다.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터를 잡기 전까지 숱하게 이전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선총독부 건물(사진에서 광화문 뒤로 보이는 건물로 1995년 철거)을 사용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을 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지 면적이 약 9만 평(30만m²), 총면적(한 건축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의 합계)이 약 4만 1000여 평에 이른다. 계산상으로는 30평 아파트 1300채를 합친 면적이다.
이를 하루 만에 모두 섭렵하겠다는 '욕심'은 접어두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다가갈수록 살며시 고개 드는 남산과 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수하러 나타나는 거울 연못과 박물관 녹지 공간 속 야외석조물정원, 종각, 전통염료식물원, 이웃한 용산 가족공원 등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할아버지 격인 '국립박물관'은 100년 전인 1909년 창경궁에서 태어나 1995년 현재 용산에 자리 잡기까지 전국각지로 피난민이 보따리를 싸듯이 숱하게 이전해왔다. 셋방살이를 견디며 흩어졌던 유물들이 이 자리에 모여 대가족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더욱 크다.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열린 마당 오른편으로 상설전시실이 모여 있는 으뜸홀이 있다. 세 개 층을 어우르며 웅비하 듯 높이 뻗은 천장이 박물관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으뜸홀은 총 여섯 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되어 있다. 이곳에 상설전시된 1만 2000여 점의 유물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으뜸홀의 내부는 마치 연극에서 무대의 장막이 걷히고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순간과 닮았다. 으뜸홀 가운데로 곧게 뻗은 '역사의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전시실이 자리해 있다. 1층에는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이, 2층에는 서화관과 기증관이, 3층에는 아시아관과 조각·공예관이 있다. 특별히 정해진 관람 순서는 없다.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면 되는데, 대부분 1층의 선사·고대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꼭 챙겨볼 것은 고구려에 관한 전시다. 고구려 땅은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의 수가 백제와 신라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1층의 비밀은 관람객의 동선이 곧 역사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재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 세월은 가늠하기 힘든 약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불과 100여 년 전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휴대폰에 있는 스톱워치로 입구에서 1층 끝까지 관람 시간을 재보자. 70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삼국시대 전시실에 놓인 영산강 지역의 대형 독널(옹관)을 아이와 함께 살펴보자. 설명에 앞서 아이에게 질문을 건네보자.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이 항아리는 무엇에 쓰였던 걸까?" 독널은 항아리나 독 두 개를 맞붙여 만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館)이다.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독을 관으로 이용했다. 대형 독은 높이가 어른 키만 하다.
전시된 독널은 삼국시대 영산강 인근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본래 독 두 개가 입구를 맞대고 캡슐처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독널의 크기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사하던 권력의 크기를 대변한다.
독널을 통해 아이에게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줄 수 있다. 아이는 열 살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실제 개념을 형성한다. 이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자. "떠나버렸어"와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보았으면 하는 것은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서양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금동일월식삼산관사유상(국보 제78호), 금동연화관사유상(국보 제83호)의 미소가 있다.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동시에 만나볼 수 없다. 둘을 교체하며 전시하기 때문인데, 자주 방문해 두 반가사유상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여성미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남성미가 감돈다. 이름은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에 따라 붙여졌다. 두 반가사유상 모두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 얹고 오른손은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 쉬는 듯한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한다. 국보 제78호,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물 중 하나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역사의 길을 따라 중앙통로에 보이는 거대한 석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이다. 경기도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었다고 한다. 다행히 일제강점기가 끝나기 전에 탑을 돌려받았으나, 그 후 오랫동안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었다. 1960년에 탑을 다시 세우고 1995년에 복원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르되, 고려 말 유입된 원나라 문화도 반영되어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균형감이 뛰어나고 우아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문화재를 호위하는 무사 같기도 하다.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2층 서화관은 서예, 회화, 불교회화, 사랑방 등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인과 선비들은 글씨가 정신과 인격을 반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예는 예술 활동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수양하는 과정이었다. 서예 작품을 보면서 선의 기세에 따라 달라지는 감흥을 아이와 이야기해보자.
회화실은 전시품이 가장 자주 교체되는 전시실이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풍속화, 초상화, 산수화, 화조·동물화, 사군자화, 궁중장식화와 민화 등 그림의 소재에 따라 세분화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람 전 아이와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꼽아보기로 하는 것도 좋겠다.
3층 공예·조각관에는 백자실, 분청사기실, 청자실, 금속공예실 등이 있다. 불교조각실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한국 불교 조각의 시대적인 흐름과 함께 불교 도상에 따른 주제별 특징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은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실내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박물관의 야외 석조정원에도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염거화상 탑(국보 제104호)을 비롯해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들여 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제100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 제2호)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문화재의 백미로 손꼽힌다.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어린이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유물을 어린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즐길 수 있도록 복제하여 전시해 놓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여섯 번 매회 한 시간 20분씩 300명이 선착순 입장한다. 100명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받고, 200명은 현장에서 표를 배부한다.
어린이박물관은 아이들 세상이다. 다소 엄숙한 느낌의 상설전시장보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곳이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따끈따끈, 삶의 보금자리', 농기구의 발전과 생활 양식의 변화를 학습해보는 공간인 '밥을 담는 그릇', 시대별 다양한 장신구, 금관, 복식 등을 체험하고 과거 사람들이 입었던 옷을 살펴보는 '고운 우리 옷', 음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마음과 영혼의 소리', 전쟁에 사용된 무기와 갑옷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무기와 무사들', 동력을 이용한 에너지 생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자연 에너지 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책도 읽고 박물관 신문도 만들어볼 수 있는 '작은 쉼터, 어린이들의 도서공간'이 있고 박물관 선생님들과 함께 즐거운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어린이 교실' 등 다양한 체험 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기념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매표소 맞은편에는 '도시락 쉼터'가 있으니, 허기를 달래가면서 신 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미리 먹을거리를 준비해와도 좋겠다.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해설은 대표 유물과 전시관별로 구성되어 있고, 오전 오후 각 2회 정도 열린다. 야외 석조물 해설은 봄가을 매주 토요일에만 진행된다. 이 밖에 예약이 필요한 '박물관 명품 유물 산책' 해설과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도 꼭 들어봄 직하다.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는 관장이 추천한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 속에 담긴 숨은 이야기 등 유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당장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하고, 회원 가입도 미리 해두자. 예약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서 회원 가입은 필수다. 또 홈페이지에는 미리 살펴볼 자료가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 알차게 구성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만 참여해도 우리 아이의 역사, 문화 교육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을 정도다.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해설 '스마트 투어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가면, 안내데스크에서 따로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지 않아도 된다. 박물관 영상·음성안내기는 관람 전날까지 예매해야 대여할 수 있다.
관람시간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수, 토요일: 10:00 ~ 21:00 (입장 마감: 20:30)
옥외 전시장(정원)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휴관일 및 휴실일
휴관일: 1월1일, 설날(2.10.), 추석(9.17.)
상설전시관 정기휴실일: 매년 4월, 11월(첫째 월요일)
상설전시관 내 특별전시실 휴실
기획전시관(특별전시 미운영시 휴실), 야외전시장은 정상 개관
2024년 휴실일: 4.1.(월), 11.4.(월)
관람료 : 무료
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무료 특별전시 해당
유료 : 유료 특별전시 해당
관람권 구입하는 곳: 기획전시실 앞 매표소
관람권 판매시간 :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학생단체관람 안내
초·중·고 학생단체(30명 이상)의 박물관 관람은 사전예약제로 운영합니다.
(사전예약하지 않은 학생단체는 입장 불가)
상설전시실 층별 안내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장은총 7개의 관과 39개의 실로 구성되어 9,884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전시물은외부전시일정 및 유물의 보존 상태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상설 전시장은누구나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층 ○중·근세관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고려, 조선, 대한제국실로 꾸며진 북쪽 전시공간은 당시의 역사자료를 관람객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사·고대관
인류가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입니다
2층 ○서화관 ○사유의방 ○기증관 ○실감2관
서화관은 서화, 불교 회화, 목칠공예 등 선과 색채로 발휘된 한국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유의 방은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된 공간입니다.
기증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재를 전시하여 기증자들을 기리며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공간입니다.
※VR체험 예약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온라인접수는 서버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1 VR체험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 2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 관람료는 없습니다.
2 VR체험은 예약제로 운영합니다.
가상현실(VR) 체험을 제외한 디지털 실감 영상관 콘텐츠는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합니다.
3 예약은 관람일 30일 전부터 가능하며, 회차 당 이용 인원은 6명입니다.
4 예약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회원 가입 후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5 1회 예약 가능 인원은 최대 4명입니다.
6 아이디 당 1일 1회의 예약만 가능합니다.
7 00:00~00:30에는 시스템 점검으로 당일 예약을 할 수 없습니다.
8 예약과 취소는 회차 시작 전까지 가능합니다.
9 예약 시간 이후 도착하실 경우, VR 체험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10 VR체험은 1회 1종만 가능하며 입장 순서에 따라 콘텐츠 주제 선택에 제한이 생길 수 있습니다.
11 VR 체험은 이용자 안전과 원활한 체험을 위해 8세 이상, 키 130cm 이상인 경우만 가능합니다.
12 VR 체험은 양 손 및 몸의 움직임이 필요한 체험이므로 이용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3 장비 소독 및 기기 교체 등 쾌적한 체험 환경 유지를 위한 1일 2회(12:30-13:00, 15:30-16:00) 점검 시간을 운영합니다.
14 문의전화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02-2077-9093
3층 ○조각·공예관 ○세계문화관
조각·공예관은 한국 불교조각과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의 도자공예 그리고 금속 공예문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입니다.
세계문화관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인도•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지하철로 오는 방법 : 경의중앙선(문산-용문)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도보로 468m 이동
탐방코스 : [이촌역 2번 출구~국립 중앙박물관 서문~거울못 청자정~배롱나무못~국립 한글박물관~석조물정원~미르폭포~보신각종~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전시동 1층~전시동 2층~전시동 3층~(엘리베이터 이용)~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이촌역 2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3월24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시 용산구 최저기온 8도C, 최고기온 2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7시간12분 소요)
10:14~10:55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이촌역으로 간 후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옴 [41분 소요]
10:55~10:59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7 번지에 있는 이촌역 2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으로 이동
10:59~11:02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번지에 있는 거울못 청자정으로 이동
11:02~11:10 사진촬영
11:10~11:12 배롱나무못으로 이동
11:12~11:20 사진촬영
11:20~11:22 국립 한글박물관으로 이동
11:22~12:03 국립 한글박물관을 관람
[국립 한글박물관
목차
1. 개요
2. 상세
2.1. 소장품
3. 교통편
4. 역대 관장
5. 역사 왜곡
6.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 2014년 10월 9일에 개관했다.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남쪽에 있다. 애초에 중앙박물관 부지 일부를 사용해 건립한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통합 수장 센터가 건립 중이다.
2. 상세
4층 건물이지만 전시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은 2층과 3층이다. 가장 주가 되는 2층 입구 앞에 계단이 크게 설치되어 있고, 1층 입구는 옆의 쪽문에 있다. 4층은 직원을 위한 공간이고, 3층 내부에 4층행 계단이 있지만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관에서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이두와 향찰을 쓰던 시절부터, 한글 전산화와 글꼴에 대한 논의가 있던 20-21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는 전시관 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고,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절의 기록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한글이 국문으로 지정되기부터 일제에 의해 조선어로 지위가 격하된 것,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글 전산화 과정에서 발명된 송기주의 네벌식 및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 그리고 현대에서 사용되는 글꼴에 관한 이야기까지 있다.
2021년 4월 5일부터 2022년 1월 20일까지 상설전시관 개편공사를 진행하였고, 1월 21부로 재개장되었다. 재개장한 상설전시는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으로 전시장은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한글의 역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화재급 소장 자료와 관내외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글 자료들이 소개된다. 유가사지론(13~14세기), 선종영가집언해(1495년),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곤전어필(1794년), 말모이 원고(1910년대) 등의 보물 자료를 비롯해 무예제보언해(171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훈맹정음(1926년, 국가등록문화재), 송기주타자기(1934년, 국가등록문화재) 등 다양한 등록문화재들도 전시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쓴 한글 편지를 모아 놓은 정조 한글어찰첩과 양반 송규렴이 노비 기축이에게 쓴 한글 편지, 과부 정씨가 어사또에게 올린 한글 청원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가의 한글 자료, 일제 강점기 발명가 최윤선이 한글 교육을 위해 만든 조선어 철자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 소개되어있다.
3층에서는 기획전시가 이루어진다. 상설전시관이 재개장한 시점에는 조선 시대와 근대의 여성들이 주로 지은 내방 가사를 다루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기획전시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가 신나게 놀면서 한글을 이해하고 한글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체험전시 공간인 '한글 놀이터'가 있다. '한글, 어린이가 소통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힘'을 주제로 한 공간으로 일상 속에서 어린이들이 새롭게 한글을 발견하고, 한글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며 한글문화를 스스로 창작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한글 놀이터'는 사전 예약으로 운영되며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1층에는 한글도서관이 있다. 대부분의 분야를 취급하지만 한글박물관 내에 있는 도서관인 만큼 한글 관련 자료가 가장 주를 이루고 있다. 도서관 규모도 아담한 편이고, 열람을 위한 공간이 매우 적어 장시간 활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박물관 별관 건물 내에 '도란도란 쉼터'라는 휴게공간이 새로 재개장하였다. 관람객 휴식공간과 어린이 독서공간을 함께 조성하여 해당 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책을 읽거나 쉴 수 있다.
2층에 카페와 기념품점이 있다. 카페의 음료 가격은 시세와 비슷한 편이고, 기념품들은 다소 비싼 편이다.
3. 교통편
도로교통
자가용을 이용하면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에 있는 대체주차장에 추자해야 한다. 박물관과의 거리는 약 700m로 이촌역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조금 더 멀다.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서빙고로를 지나는 서울 버스 400, 502번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정류장 또는 이촌역 정류장에서 내리면 갈 수 있다.
철도교통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하다. 되도록이면 2번 출구 옆에 있는 박물관 나들길이라는 지하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꽤 길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무빙워크가 설치되어 있어 역의 다른 출구로 나와서 야외를 걷는 것보다 빠르게 갈 수 있다. 박물관과의 연계를 위해 지어진 곳인 만큼 통과하며 걷는 도중 박물관과 관련된 볼거리가 있다.
4. 역대 관장
문영호 (2014~2016)
김철민 (2016~2017)
김재원 (2017)
박영국 (2018~2019)
김낙중 (2019)
심동섭 (2019~2021)
황준석 (2021~2022)
김영수 (2022~2023)
김일환 (2024~현재)
5. 역사 왜곡
국립한글박물관이 유튜브에 게시하는 영상 중 대중을 대상으로 제작된 『만화로 즐기는 한글 이야기』라는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많은 영상은 북한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친북적 논조와 민족의 고난이나 선조의 영민함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논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조가 단순한 편향을 넘어,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까지 날조하는 역사 왜곡에 이른다는 점이다. 모든 사례를 일일이 다 반박할 수는 없으니 심각한 역사 왜곡의 사례 두 가지만 살펴보자.
「원고로 남은 비운의 사전_말모이, 보물이 되다!」편에서는 미완성 사전 원고인 『말모이』가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던 김두봉이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했다고 설명한다. 『말모이』는 한글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던 우리말 사전으로, 주시경의 요절로 인해 작업이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김두봉은 훗날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는 인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1919년에 상해로 망명하면서 스승의 유작인 『말모이』 원고를 상당 부분 반출하였다. 그러나 영상의 설명과 다르게 김두봉은 상해로 망명한 이후 해방 이전까지 귀국한 적이 없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했다. 게다가 『말모이』는 『조선말 큰사전』을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이 김두봉에게 있다.
1927년 국내의 한글학자들은 사전 편찬을 재개하기 위해 이윤재를 상해로 보내 사전 편찬 경험이 있는 김두봉을 초청하고, 김두봉이 반출한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여 새로 편찬하는 사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두봉은 국내로 귀국하지도 않았고 원고를 빌려주지도 않았으며 그 뒤의 김두봉의 행동은 힐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게 김두봉은 이윤재에게 당시 큰 돈이었던 200원을 보내면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겠다고 제안한다. 맨손으로 귀국한 이윤재는 김두봉의 말을 믿고 출판업자 이중건으로부터 200원을 기부받아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은 약속과 다르게 원고를 보내지 않았고 원고를 손질해서 완성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동생을 통해 사전 편찬의 의욕을 꺾는 납득하기 어려운 훈시를 전보로 보내왔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김두봉의 이 행위는 능력도 없이 원고를 혼자 완성하려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주시경의 유작인 말모이는 다른 사전의 기초가 되는 일도 없이 미완성 상태로 방기되었다. 이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서 사전 편찬을 재개한 한글학자들은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겪었다. 이윤재가 김두봉에게 보낸 200원은 결과적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가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돈을 보낸 당사자인 이윤재는 일제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받고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전편찬을 다루는 다양한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도 한글박물관 측은 북측 인사를 미화하기 위해 『말모이』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김두봉의 귀국과 사전 편찬 사업 합류라는 허구로 대체했다.
「철자법 논쟁_주시경파 vs 박승빈파」편에서는 일제가 일관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주시경파의 조선어 학회가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박승빈 중심의 반대에 직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상과 달리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책을 실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이 시기에 주시경파는 탄압을 당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여 영상의 주제인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다. 박승빈파가 본격적으로 주시경파에 반발하기 시작한 것은 주시경파가 참여하여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언문 철자법」 때문이지, 주시경파가 독자적으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때문이 아니다.
1930년 최현배, 권덕규, 심의린 등 주시경파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사업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산하 각급 학교가 사용하는 조선어 교재에 주시경식 철자법이 보급되었다. 이는 철자법 논쟁에서 주시경파에게 큰 우위를 가져다 주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박승빈파의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본격적인 반대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로 1931년에 박승빈파는 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에 대항해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에는 동아일보가 개최한 한글 토론회에서는 양파가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는 모두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주목할 점으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총독부의 사업에 참가한 주시경파를 비난하는 평가가 있었다.
하여간 한글運動도 現實에 잇어 우리의 思想을 기록하는 統一된 道具를 使用하여야 하겟다는 意味에서 무엇보담도 焦眉의 急務에 잇는 것인즉 蛙鷸이 相爭하고 同志가 相賊하다가 그쫓아 아무 解決된 事業이 없이 남의집웅아레 뫃여서 그 政治的 背景밑에 비로소 改正綴字法을 定하얏다는 것도 우습다란 羞耻다.
(현대어) 하여간 한글운동도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을 적는데 통일된 도구를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다. 개구리와 도요새가 서로 싸우고 동지들이 서로 해치는 사이에 아무 해결된 일도 없었다. 남의 지붕아래에 모여서 남의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야 비로소 개정철자법을 정했다는 것은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다.
金台俊, 「硏究者的 態度에서」, 『東光』, 1932.04.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맞춤법을 정립한 주시경파가 조선총독부의 사업에 참여하여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글박물관이 일제가 일관적으로 민족 말살을 시도했다고 거짓 서술을 하거나 박승빈파의 반대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학술기관이 지배계층의 이념을 선전하며 국민을 '계몽'하는 것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까지 일삼는 것만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배반하면서까지 주권자를 기만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6. 기타
중국 출장 중이던 김재원 3대 관장이 2017년 12월 6일 아침에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 호흡정지.
방역패스 적용시설로 지정받았지만 재개장한 주부터 패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거리두기 완전 해제 이후로는 미접종자도 이용 가능하다.]
12:03~12:05 석조물 정원으로 이동
[석조물 정원에는 국보 99호인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국보 100호인 남계원 칠층석탑, 보물 166호인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보물 358호인 영천사 보제존자 사리탑 등의 유물들이 야외 전시되어 있다.]
12:05~12:09 사진촬영
12:09~12:10 미르폭포로 이동
12:10~12:15 보신각종으로 이동
12:15~12:19 사진촬영
12:19~12:22 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로 이동
12:22~14:55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1층을 [구석기실~신석기실~청동기&고조선 전시실~부여&삼한 전시실~고구려실~백제실~가야실~신라실~경천사 10층석탑~통일신라실~발해실~고려I실~고려II실~디지털 복원 광개토대왕릉비~조선I실~조선II실~조선III실~대한제국실]의 동선으로 관람
14:55~16:32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2층을 [사유의 방~나눔의 서재~손기정 기증 그리스 투구~이홍근 기증 유물~박병래 기증 유물~윤동한 기증 수월관음도~이병창 기증 유물~이원순 기증 유물~최영도 기증 유물~유창종 기증 유물~이우치 이사오 기증 유물~김홍기 기증 유물~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유물~유강열(미망인 장정순) 기증 작품~록펠러재단 기증 판화~김종학 기증 유물~손창근 기증 세한도~불교회화]의 동선으로 관람
16:32~18:00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3층을 [불교조각~금속공예~도자공예 청자~분청사기~청화백자~철화백자~달항아리~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중국~인도]의 동선으로 관람
18:00~18:07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을 거쳐서 이촌역 2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8:07~18:17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전철 승차 대기
18:17~18:56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9분 소요]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2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3층 시설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