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의 작고 문인 시비
대전은 1989년 1월 1일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광역자치단체인 대전광역시로 승격되었다. 광역자치단로 격상된 만큼 새로운 차원에서 권한이 확대되고, 지역이 대덕군 전역을 흡수하여 확장되었으며, 시와 의회 ․ 5개 자치구 등 행정기관은 물론 교육, 경찰, 소방, 수많은 단체, 등 사회 전반의 위상과 기능의 재정립이 수행되었다. 시의 행정에 있어서도 각 분야별로 새로운 차원의 기획이 추진되었다. 더구나 1993년에 개발도상국 최초로 세계 과학기슬 엑스포를 대전에서 열도록 결정되어 이를 준비해야 하는 막중한 사업들을 정부와 대전광역시가 동시에 추진해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광역자치단체로 탄생된 대전광역시의 백년대개를 열어가야 할 각 분야의 발전계획들은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광역시의 문화예술분야 발전계획은 우선 중기계획을 실무적으로 수립하여 추진하였던바 《한밭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1992~1996)》이 시장의 결심으로 성립되었다. 본 계획서에 담긴 내용들은 실용적 계획들이었으며 문화예술 불모지란 오명이 붙어 다니던 대전이 비로소 문화도시의 기반이 마련되는 소중한 기획이었다. 본 계획서상(41p) 문화정서를 통한 애국심 고양 항목에 한 부분으로 「 시비공원 조성 ․ 성격 : 향토시인의 명시가 시민과 함께 영원히 사는 공간 마련, ․ 대상지 : 보문산 사정공원 내. ․ 대상자 : 작고 시인 대표작, 」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이 같은 계획에 힘입어 보문산 사정공원에는 이미 조성된 박용래 시비 주변에 김관식 시비, 한용운 시비 등이 지역 문인들의 노력으로 건립되었다. 전국에서 저명한 문인들은 물론 문학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시비를 찾아오고, 보문산을 산책하는 많은 시민들도 여유롭게 시비 앞에 서서 시를 감상하는 명소가 되었다. 대상 문인에 대한 소개와 시세계에 대해서는 중복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상 시비의 제원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박용래(1925-1980) 시비
● 박용래 시인 약력 : 청시사 소개부분 참조.
● 시비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1984년 10월)
● 시비 수록 작품
저녁눈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시비 건립기
박용래 선생은 평생 시 하나만을 위해 살다간 전통적 서정시인이다. 이 고장을 지키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고운 나뭇결 같은, 향토색 짙은 언어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다. 눈물로 외로움을 달랬고, 술로 좌절을 풀었다. 작은 것을 사랑했고, 사라져가는 사물에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 그는 삶의 멋과 깊이를 알고 간 시인이다. 그를 아끼고 잊지 못하는 문학 동호인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여기 시비를 세운다.
김관식 시비
● 약력
1934년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서 金洛羲 차남으로 출생
1952년 강경상업고등학교 졸업 및 첫 시집 ‘낙화집’ 출간
1953년 고려대에서 동국대 농과대학으로 전학. 崔南善과 吳世昌 등에서 성리학 동양학 서예 등 사사
1954년 未堂 徐廷柱 처제 方玉禮와 결혼, 서울공고 교사
1955년 서울상고 교사. “현대문학”에서 ‘연’, ‘자하문 근처’등 시로 문단에 등단. 李炯基 李相魯와의 3인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 출간
1957년 ‘김관식시선’ 출간
1959년 세계일보 논설위원
1960년 4월 혁명 후의 총선에서 민주당 張勉 박사와 겨루기 위해 서울 용산 갑구에서 민의원 출마
1968년 ‘서경’ 번역 출간
1970년 8월 30일 간염으로 요절. 사후 고향인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에 안장
1976년 시전집 ‘다시 광야에’ 출간
1983년 方玉禮 여사의 ‘대한민국 김관식’ 출간
● 시비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1992년 10월 22일)
● 시비 수록 작품
다시 광야에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놓고
당신의 그림자가 어리울 때까지를 가슴 조여
안타까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그러면 저의 옆에 가까이 와 주십시오.
만일이라도……만일이라도……
이승 저승 어리중간 아니면 어데든지
당신이 계시지 않을 양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몸뚱어리는
암소 황소 쟁기결이 날카론 보습으로
갈아 헤친 논이랑의 흙덩어리와 같습니다
따순 봄날 재양한 햇살 아래
눈 비비며 싹터 오르는 갈대순같이
그렇게 소생하는 힘을 주시옵소서.
● 시비 건립기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이 어찌 나무나 땅이나 하늘뿐이랴. 폭풍도 있고, 불도 있다. 김관식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썼다. 맑고 어린 한국적 서정시를 동양정신의 미학에서 승화시켰고, 남다른 개성과 호쾌한 기개는 세인의 화제를 일신에 모으기도 했다. 독립적인 개성이 있었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김관식’은 그의 천재적 재능을 모두 꽃피우지 못한 채 37세로 요절하였다. 세속의 온갖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했던 그의 ‘오만한 시혼’은 무한한 창작력의 원천으로서 새로운 매력과 그리움을 주는 바가 있다. 이에 그의 높은 시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정을 함께 하고자 문단과 지역사회의 정재를 모아 시비를 건립한다.
한용운 시비
● 약력
187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84 ~1897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4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2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8 월간 교양지 <惟心>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6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다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1933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重章이 수여되다
1967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됨
1973 <한용운 전집>(전 6권)이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됨
● 시비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1990년 10월 9일)
● 시비 수록 작품
꿈이라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공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 시비 건립기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탄생하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하여 3·1운동을 선도하시고, 평생을 조국독립에 헌신하신 민족의 태양이시며, 한일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시고 ‘불교유신론’, ‘유심’지를 발간하여 한국불교를 위기에서 구하고 그 방향을 바로 잡아준 불교계의 거성인 동시에 ‘님의 침묵’ 등 주옥 같은 시와 소설을 창작하여 민족의 가슴곳에 아름다운 정서와 정의로운 마음을 심어준 문학계의 등대이시었다. 이에 우리 보문로타리 회원들은 선생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그 높은 뜻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이곳 보문산 산성공원에 간절한 정성들을 모두어 이 시비를 세운다.
※ 주요작품 :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예술가, 당신이 아니더면, 잠 없는 꿈, 생명, 사상의 측량, 진주, 비밀, 꿈과 근심. 나룻배와 행인 등.
지헌영(1911-1981) 학덕 추모비
● 약력
1911년 3월 8일 대전시 중구 선화동69번지에서 아버지 설운 지영식 공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10남 중 장남으로 출생.
1926년 대전보통학교 졸업
1931년 대전공립중학교 졸업
1932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뒤 항일학생운동을 하다가 다음해 2월 피체, 여러달 옥고를 치르고 나와 일제하의 교육을 마다하고 자퇴, 스스로 학문을 닦음. 향가여요신석(鄕歌麗謠新釋,1947)은 대학교재로 쓸만한 참고서임. 양주동등과 함께 개척적인 연구업적을 인정받음.
1945년 정훈 등과 호서민중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대전 문단에서 활동, (호서문학회 등)
1949년 전주 명륜대학(현 전북대) 교수
1952년 6월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전임.
1957. 7월 충남대 교수를 사임하고 언론인으로 활동. (중도일보, 대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1961. 4월 대전일보 사장으로 취임. 그러나 충남대와 대전대에서 강의는 계속함.
1964년 어문연구회를 창립 회장에 피선. ,
1965년 한국어문학회 회장 피선.
꾸준히 국문학자로서 무게 있는 논문을 발표하고 국어학, 민속학, 지리학, 사학 등에도 널리 학문의 폭을 넓힘.
1981. 1.1일 자택에서 별세.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에 안장.
《 주요 학문적 업적 》
(1) 향가여요신석(鄕歌麗謠新釋) 1947. 8월 정음사에서 출간. 무애 양주동의 저서와 대등,
(2) 향가 ․ 여요 제망매가, 월명의 도솔가설화 연구 고려가요 정읍사 연구 등
(3) 지명 ․ 인명 두량윤성 등 여러 성의 위치, 인명은 왕의 칭호를 다룬 (, , ) 등 많은 연구로 학계에 금자탑을 쌓은 큰 별로 이름. 인품으로도 꼿꼿한 항일정신과 불의를 배척하는 올곧음. 평생 책을 모으고 책과 함께한 독서광 연구광으로 후진들에게 귀감을 보여줌. 제자들에게 저마다 만권 장서 모으기를 추진하면서 모은 책은 정독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음.
● 시비 대전 보문산 사정 공원 1994년 12월
● 시비 수록 작품
아! 대전아
(전략)
아! 대전아
무명 조상의 넋들이 지성(至誠)이 어린 땅
피와 땀의 자국이 선한 산하
역사의 향기조차 곳곳에 서린 내 고향
살아 있기로 살아야겠기에
어허, 인정(人情)은 진한 냄새이기에
굶주린 눈물진 어버이의 조린 허리여
하다가 흉(兇)하야
시혹, 역질의 맹독에 몰라
아이고 땅을 치던 터뜨린 울음…
갈다, 일으키다 몰려간 이름 없는 이들
주인 잃은 무덤이 골골에 넋두리 한다
아! 산에 들에 배인 피땀의 자욱
눈물의 흔적… ‘개척’
다시나 더러힐가 영(靈)이 혼(魂)이
고시레! 새날이 지새고 지샜다(중략)
아! 나의 대전아
불굴한 식장의 자세, 홀(笏) 안은 보문(寶文)의 정의(情誼)
담청색 금병산(錦屛山)
국사(國事)·망덕(望德)이 주춤, 갑화(甲華)·우산(牛山)의 비상
영기(靈氣)는 계룡(鷄龍)을 돌아, 대둔(大屯)·서대(西臺)에
마주 보아 안아드리어 다사한 나날이여!
중계·버드내·살내의 물은 겁겁으로
닦어, 흘러 나려… 하얀 달이 지면
새날이사 솟아오리
아 나의 사랑 대전아!
스스로이 아릿다이 있을
● 학덕추모비 건립기
장암 지헌영 선생께서 70평생 학술문학에 큰 공적을 세우시고 정신문화계를 이끌어오시다가 타계하신 지 어언 십 년이 넘었다. 선생께서는 가셨지만 남기신 업적과 끼치신 훈도는 오늘에 와서 더욱 빛나고 있으니 우리의 감회가 날로 새롭고 그 감은이 더욱 깊어진다. 선생께서는 선각적인 학자로 고전문학을 비롯하여 지명학, 고대국어, 고대사, 종교철학 등에 획기적인 업적을 내시고 대전고등학교와 충남대학교에서 후학양성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고장에 새로운 학통을 세우셨으며 나아가 문학계를 일깨우려고 문학활동에도 직접 동참하시어 훌륭한 작품을 남기셨다. 선생께서는 이 고장을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신 터줏대감으로서 청빈하고 대쪽 같은 선비생활을 통하여 정신문화를 계도 창달하셨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이 고장을 지키겠노라 애국운동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루셨고, 한때는 대전일보 등 언론계에서 사장과 논설위원으로 어지러웠던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 문제를 바로잡으려 헌신하셨고, 그 어두웠던 시대에는 민주화의 길을 밝히려 앞장서기도 하셨다. 그리하여 선생께너는 우리 학술문학계의 거목이며 정신문화계의 스승으로서 날이 갈수록 더욱 우러러뵈고 우리 앞에 찬연히 빛나시는 터이다. 이에 우리는 선생의 학덕과 은혜를 기리고 그 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10주기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그 학덕추모비를 여기에 세움으로써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으려 한다.
< 문희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