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상파 화가들을 꼼꼼히 드려다 보는 중입니다.
저에게는 ‘깍두기’ 형님들처럼 기억에 남아 있는 화가들이죠.
그러다가 의외로 밀레의 만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밀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밀레는 ‘지평선 화가’로, ‘신과 성인이 등장 하지 않는 종교화를 그린 화가’로도
불립니다. 그가 남긴 명작들을 중에는 지평선이 묘사된 작품이 많기 때문이고
그의 작품이 어느 종교화 못지 않게 경건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동네 신부님의 지도로 부터 시작된 그의 미술 공부는 처음에는 초상화에
집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살롱에 입선한 작품도 초상화였고 그 후 초상화 화가로
밀레는 널리 알려집니다.
초기의 밀레가 그린 초상화들 입니다.
33세가 되던 해 살롱 전시회에서 성공을 거둔 밀레에게 그 다음 해에 당시 프랑스 정부는
그의 ‘키질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을 1,000프랑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구매를 합니다.
밀레는 이 돈을 가지고 첫 번째 아내와 사별 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으로 이사를 갑니다.
(키질하는 사람)
바르비종은 파리가 가깝고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한 쪽에는 그 유명한 퐁텐블로 숲이 붙어 있었고 또 다른 편에는 샤이 들판이 어깨를
붙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은 퐁텐블로 숲을 찾아 그림을 그렸지만
밀레는 벌판으로 나갔습니다.
밀레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붓 터치로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제작했지만
그의 작품은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파리에서 가져왔던 돈도 점차 떨어졌고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이틀을 굶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와의 사이에 9명의 아이를 낳았으니까 ----,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아이를 이삭 줍듯이 낳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납니다.
(
양치는 소녀)
이 작품에 대한 첫 느낌은 평화로움입니다. 뜨개질을 하는 소녀의 어깨 너머로는
아스라한 들판이 펼쳐 있고 머리 위의 태양은 구름 사이에서 빛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완벽한 안정감입니다. 왜 밀레의 작품을 ‘시정이 어려있는 경건함’
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괭이를 든 사람)
이 작품은 밀레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 의미가 대중들에게 달리 읽혀진 작품입니다.
‘나는 태어난 이후 전원을 본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을
그릴 때 나는 가장 잘 그릴 수 있다’ 라는 밀레의 말을 기억한다면
이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농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거대한 산업혁명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 들었습니다. 물론 파리도 예외는 아니었죠.
이 작품이 발표되자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괭이를 든 사람’은 도시로의 이동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밀레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오랫동안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하긴 손 떠나면 더 이상 제 자식이 아닌 것이 어디 미술뿐이겠습니까--.
(이삭 줍기)
추수를 하고 난 뒤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행위는 당시 사회에서도 가장 하층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밀레는 세 명의 여인을 아주 당당하게
화면에 배치하여 완벽한 장면을 연출해 냈습니다. 여인들의 어깨에는 따듯한 햇빛이
비추고 있고 그 너머로는 황금빛 벌판이 펼쳐 있습니다. 푸른색 두건을 쓴 여인은
허리가 아픈지 손이 허리에 얹혀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보는 견해에
저는 손을 번쩍 들고 싶습니다. 세 명의 여인을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3여신을 나타냈다고 보는 견해는 너무 억지스럽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상징으로 보는 것도 병은 병이지만 간혹 그렇게 상징으로만 보아야 하는
작품과 작가들도 있습니다. 다음에 날을 한 번 잡고 그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죠.
(
쉬고 있는 추수하는 사람들)
밀레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작품이고 제작을 하는데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작한 날짜를 적은 유일한 작품이자 그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실하게 가져다 준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종)
이 작품을 제가 처음 본 것은 제가 다니 던 국민학교 앞 이발관이었습니다.
나중에야 밀레도 알게 되고 작품의 이름이 만종인 것도 알았지만
나란히 걸려 있던 돼지 그림과 별 차이를 몰랐습니다.
얼마 전부터 ‘만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 돌고 있습니다.
내용은 부부가 기도하고 있는 발 밑에 놓여 있는 감자 바구니가
원래는 두 부부의 죽은 어린아이를 담은 관이었는데 밀레 친구가 그 그림을
보고 너무 참혹해서 바꿀 것을 요청했고 밀레는 감자 바구니로 대상을
바꿨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어린아이를 담은 관이었다면 이 광경은 너무 참담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살바도르 달리 때문에 나온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그림에 매혹되었던 달리는 ‘만종’에 대한 분석을 ‘ 밀레의 만종에 대한 비극적 신화’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우리가 이 작품에서 느끼는 마음의 평화를
그는 ‘억압된 성적 충동’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책을 읽지 못해서 무엇이 억압된 성적 충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 대단한 달리입니다.
한참을 드려다 봐도 억압된 성적인 충동을 상징하는 또는 짐작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없는 저 같은 신참들에게 달리는 정말 무섭습니다.
그가 주장한 것 중에 하나가 부부는 땅에 아이를 묻고 기도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달리는 이 그림에 X-ray 투사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마침내 작품에 대해 X-ray 검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사 결과, 바구니가 있는 위치에 처음에 관과 같은 기하학적인 도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게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밀레가 관을 그렸다가 바구니로 바꾼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떠다니는 이야기는 관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밀레만 알고 있겠지요.
(오후의 휴식 – 밀레)
(오후의 휴식- 고흐)
(씨
뿌리는 사람 –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중 일부 – 고흐)
고흐는 밀레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밀레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거나 동일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모사라기 보다는 밀레에게 바치는 고흐의 헌사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중 일부는 www.blog.empas.com/bebede 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농민들을 바라보았던 밀레의 작품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말년에 밀레는 금전적으로도, 화가로서의 명예도 모두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늘 사람에 대해 따뜻한 눈 길을 거두지 않았던 그에게
신께서 내려주신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가을)
(램프 옆에서 바느질 하는 여인)
(빵 굽는 여인)
(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