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환상의 토왕골
개스(산안개)와 바람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씨름판을 벌이며 아가씨 마음 같다는 산 날씨의 변덕을 과시 했다.
“어쩔 것인가? 후퇴냐 전진이냐?” 고심 끝에 장경덕 대장은 벽에 붙은 김성택 대원과 상의했다.
김 대원은 “지금 올라가나 어두울 때 내려가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죠” 라며 계속 등반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 대장은 장비와 식량을 빨리 정상으로 날라야만 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해가 함지덕 머리 위로 넘어간 데다 개스가 잔뜩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찰그랑찰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끝까지 등반하겠다던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유한규 대원이 베이스캠프 로 돌아 가기위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달고 있는 온갖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논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황소의 목에 달린 요령소리처럼 울렸던 것이다.
얼마 후 장 대장을 그토록 애태우던 개스가 완전히 걷혔다.
시야가 탁 트였을 때 장 대장은 전날 벽에서 김 대원에게 젖어들었던 상실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것은 지금 토왕골 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보름달이었다.
그랬다. 달빛 받은 토왕골 에는 김 대원 의 해머 질 소리와 그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하나의 음악이 돼 울려 퍼졌다.
그 밖의 모든 소리들-토왕폭 에 매달린 고드름 질 얼음이나 그 위를 흐르는 실 뱀 같은 물줄기나 바람이나 별 빛 등-은 그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 순간
장 대장은 달빛에 빛나는 소리의 선율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토왕폭 에서라면 수 십리 밖에서 가늘게 떨리는 땅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하등동물처럼 사람도 시공을 뛰어 넘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돼 노래하는 그 순수음악을 듣고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토왕폭 의 사나이들은 원초적 감성의 시간대에 놓여있다. 지원 품이 든 배낭을 지고 장 대장은 달빛을 받으며 우측 능선을 올랐다. 이해관 대원과 그는 오후 8시쯤 토왕폭 우측 벽 상단에 이르렀다. 김 대원과 송원기 대원의 이마에 단 랜턴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장대장의 왼쪽 편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김 대원도 장 대장 의 이마 등 에서 비치는 노란 불빛을 보고“경덕 이형, 우리가 먼저 올라갈 거요, 천천히 와요”라고 소리치며 올라왔다.
장 대장 은 더욱 서둘렀다. 공격조의 김 대원과 송 대원보다 먼저 토왕폭 정상에 올라가 그들의 언 몸을 녹여줄 따듯한 차를 끌 여 놓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앞길이 순탄치 않았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설 사면이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드러난 바위 면이 몹시 미끄러웠다. 그 사이사이 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에만 의지 한 채 오르느라 장대장과 이대원은 고초를 겪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들은 오후 9시30분쯤 상단 정수리에 올라섰다.
31 사라진 산사나이들
하지만 그곳에는 김성택. 송원기 대원이 없었다.
장 대장은 ‘내가 먼저 왔구나. 차 끓일 시간이 있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소나무에 고정시킨 자일을 타고 장 대장은 공격조가 올라올 토왕폭 우측 벽의 최 상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처럼 설동을 팠던 중단의 설원과 눈 덮인 토왕굴 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다만 김. 송 대원이 등반을 마무리하느라 애쓰고 있을 우측 벽 상단만 먹물 먹은듯한 어둠에 잠겨 의뭉스레 숨어있었다.
그 신비스러운 벽 쪽에서는 어쩐 일인지 김대원 의 해머 질 소리도 들여오지 않고, 송 대원의 이마에서 반짝이던 랜턴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쏘아보던 장대장의 머릿속에 돌연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잃어버렸던.
보름달을 다시 찾은 후배들이 벽에 없었기 때문이다.
장 대장은 호 홉을 가다듬고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성택아. 원기야 어딨냐! 하이 빌라! 대답 좀 해봐! 안 들려! 하이 빌라! 성택아, 원기야 대답 좀 해!”
목까지 피가 올라오도록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고함치던 장 대장은 멀리 떨어진 베이스캠프 주변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 ‘공격조원들인가, 하고 생각한 장 대장은 다시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 절규가 하늘을 움직였는지,3백50m 아래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불빛의 주인공들은 김. 송 대원이 아니라 베이스캠프 를 지키던 김상규. 이지원 대원이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벽 쪽에서 헤드랜턴 불빛이 비췄는데 어느새 그 불빛이 내려간 것 같다” 는 베이스캠프 에 있는 대원들의 고함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 송 대원이 완 등을 포기하고 지금쯤 중단 설동으로 내려가 대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장 대장은 그 가능성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로 했다. 모든 사실은 날이 새야만 밝혀질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장대장과 이대원도 뜬눈으로 다음날 아침 해를 맞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이 영하 18도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에 스며든 동상 기운을 참고 있던 이대원은 0시 무렵 도끼날 맞은 장작처럼 나뒹굴었다. 외과의사인 장 대장은 이 대원부터 살려야 했다.
구두를 벗기고 언 발을 우모 복으로 감싸 온기를 돌게 한 다음 허리 까지 빠지는 눈을 헤집으며 모닥불이라도 지필 나뭇조각을 주워 모았다. 이 대원을 껴안은 장 대장은 스물아홉해의 삶 에서 가장 길고 혹독한 밤을 토왕성 의 꼭대기에서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