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문 칼럼]처음으로 끝까지 지켜본 장례식
무엇보다도 9월에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권고안으로 내어놓은 형식적 법안인 건설교통부안과 장애인당사자들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 작성된 이동법률안이 모두 국회에 상정되어 있기에 어떤 법안이 받아들여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 장애인당사자들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 지고 있다. 그 움직임의 하나로 지난 3일, 서울에서는 36차 버스타기 행사와 함께 국회에서 장애인 이동권 현장 보고서인 ‘버스를 타자’(다큐인 제작, 박종필 감독)의 영화제가 열렸다. 이번에는 국회로부터의 형식적 초청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장애인 당사자로서 행사 주최로서 국회로 들어가게 되었기에 그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런 행복한 기분에 젖어 있던 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민주노동당 경남도의원이며 여성운동가인 이경숙님의 사망소식이었다. 1일 창원에서 열린 이동보장법률 공청회에도 참석하셨고, 지난 4월에 장애인차별철폐 경남공동실천단에서 요구안으로 내어놓았던 ‘경상남도의회 장애인정책특위 구성’건에 대해 의원발의를 위한 의견을 나누느라 그 다음날도 통화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월요일에 바로 만날 약속을 했었다. 피곤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다른 기색은 없으셨는데…. 그런데 사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당장 경남으로 돌아가서 어찌된 일인지 다시 한번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역대표로서 참여한 이 행사를 시작도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순 없었다. 그 날, 이동권을 보장해달라는 장애인들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새벽을 넘어 다음 날까지 진행되었지만 다행히 충돌 없이 건설교통부 장관과의 면담을 약속 받고 자진 해산하였다.
뜻밖의 비보, 믿을 수 없었다
창원병원 장례식장. 설마 설마하며 들어선 그곳에는 흰 국화로 만들어진 화환이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었다. 거짓말이길 바랐는데, 그곳에는 이경숙 님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지역 여성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던 많은 여성의 눈은 얼마나 운 것인지 퉁퉁 부어있었다. 그렇게 너무나 많은 조문객들 사이에 어떻게 해야할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을 별로 가 본적이 없다. 물론 결혼식장 또한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확실한 초청이 없으면 절대로 가질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은 불행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아니 그 자체가 불행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친척 집 대소사에조차 별로 참석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장애인권운동가로서 자기가 가고싶으면 가는 거지, 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세우지 못하냐는 말도 들었지만, 그것은 나의 권리를 내세우기 이전에 그 대소사의 주체인 사람들을 존중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딸 결혼식에 장애인인 내가 참석한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어떤 어머니가 계시다면, 그 어머니가 딸이 잘 살 것을 확신하며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실수 있도록 그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장례식장에는 더더욱 참석해본 적이 많지 않다. 조문한다하여도 잠시 들렀다 갔을 뿐, 오래 자릴 지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경숙 님의 장례는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다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한 구석에서 빈소를 지킬 수 있었고, 장례식부터 화장하는 것까지 모두 보게 되었다. 지켜보는 동안 계속해서 솟아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당당하시던 분이, 그 활기 넘치시던 분이 저렇게 조용히 절을 받고 있다니. 시민사회장이 다 끝나고, 진해 화장터로 옮겨져 화장장에 들어갔을 땐, 도저히 가슴으로 전해지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욱 활발한 인권운동 펼쳐야
처음 보는 장례이기에 더더욱 그렇기도 하였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저렇게 조용히 사라져버리다니 무섭기까지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나의 생활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우연히 이경숙님의 얘기를 꺼내더니 이런 말을 하였다. ‘그렇게 갈 것을,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살 거라고. 대충 살면 되지, 다 부질없는 것을. 자기 몸이 우선이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라고. 어쩌면 이 사람 외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일제시기에 대한독립을 외치며 죽어간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의 종속국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죽어간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자유를 빼앗긴 채 숨죽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 뜻을 위하여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평생 살면서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누군가에게 생명이 될 수 있다면 어차피 덧없이 죽어갈 인생, 이 만큼 보람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늘 서울이 중심이 되어, 중앙 위주의 정책이 우선되는 속에서 지역, 그리고 여성,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해 한 가지라도 더 나은 정책을 만들어가고자 애쓰신 그분의 뜻이 짧은 생애 앞에 다르게 해석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히려 더욱 활발한 인권운동이 이 지역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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