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신 시사모웃 : 크메르 음악의 제왕 (상편)
Sinn Sisamouth
신 시사모웃
Sinn Sisamouth |
"크메르 음악의 제왕" |
배경정보 |
생년월일
및 출생지 |
1935년
스떵 뜨라잉 도 |
사망년월
및 장소
|
1975-11-1
껀달 도
꺼 톰(Koh Thom) 군 |
음악장르
|
사이키델릭 락
개러지 락
크메르 전통음악 |
직 업
|
가수, 작곡가,
밴드 리더, 프로듀서 |
활동시기 |
1950–1975 |
함께한
동료
|
로 세레이소테어
(Ros Sereysothea),
빤 론(Pan Ron) | |
신 시사모웃(Sinn Si Samouth, ស៊ីន ស៊ីសាមុត: 1935–1975)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한 캄보디아의 가수 겸 작곡자이다.
여가수 로 세레이소테어(Ros Sereysothea) 및 빤 론(Pan Ron) 등과 활동했던 그는, 일반적으로 "크메르 음악의 제왕"(King of Khmer music)이라 불린다.
그는 크메르 전통음악의 리듬과 정서를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및 "락 앤 롤"(rock and roll)과 접목시켜, 사이키델릭 락(psychedelic rock)이나 개러지 락(garage rock)과 유사한 서구식 음악을 창조하여, 당시 번창하던 프놈펜 대중음악계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신 시사모웃은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1975년 11월에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1. 초기의 생애
신 시사모웃(Sinn Sisamouth)의 영문표기는 "Sin Sisamouth", "Sinn Sisamout/h", "Sisamut/h", "Si Samouth"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그는 1933년 스떵 뜨라잉(Stung Treng) 도에서 화교계 크메르인 집안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 리엉(Sinn Leang)으로 화교계 크메르인이었고, 어머니는 라오스계 화교인 셉 분레이(Seb Bunlei)였다. 그는 4남매 중 막내로 형 1명과 누나 2명이 있었다. 신 시사모웃의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처음에는 교도관을 하다, 나중에는 군인으로 근무했다. 그의 아버지는 병사했고, 이후 그의 어머니가 재가하여 2명의 형제가 더 늘어났다.
신 시사모웃은 5세 무렵에 "스떵 뜨라잉 도립 중앙초등학교"(Central Province of Stung Treng Elementary School)에 입학했다. 6-7세 무렵에 그는 기타(guitar)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후 학교의 행사에 초청되어 연주도 했다. 그는 또한 불교 경전에도 관심을 가져, 스님으로부터 빨리어(Pali)도 배웠다. 그는 독서와 축구, 연날리기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1951년 무렵에 그는 기초적인 교육을 마쳤고,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놈펜의 삼촌 집으로 가서 살았다. 의학대학의 빡빡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와 작곡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그는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났고, 학교의 행사가 있으면 항상 불려다녔다. "성꿈 리어스 니욤" 정권 및 론 놀(Lon Nol) 정권에서 고위직 대변인을 지낸 한 원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 벌써 신 시사모웃 및 그의 밴드를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에 고용했었다고 한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신 시사모웃이 18세에 이미 대중적 공연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3년 캄보디아가 독립할 무렵에 신 시사모웃의 목소리는 "국영 라디오" 전속가수로서 전파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학업도 계속하여, "쁘레아 께또미얼리어 병원"(Preah Ketomealea Hospital)에서 근무도 했다.
2. 음악경력 초기
신 시사모웃은 맑은 저음의 목소리를 지녔는데, 이 목소리가 낭만적 희노애락을 주제로 한 자신의 작품들과 결합하여 곧 아이돌로 성장했다. 그는 발라드도 많이 불렀지만, 디스토션 기타가 주도하고 하몬드 오르간과 복잡한 드럼 연주가 섞인 빠른 템포의 락 음악들도 많이 연주했다. 또한 목관악기와 금관악기 및 보조적인 퍼커션까지 갖춘 라틴-재즈 풍의 곡들까지 연주했다.
그는 멜로디를 만돌린에 맞춰 작곡했다. 그의 노래들은 언제나 센치멘탈한 감성을 지녀, 로맨틱한 희노애락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의 작사 능력은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강도높은 노력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적절한 단어들을 선택하기 위해 언제나 크메르어,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등 3권의 사전을 갖고 다녔다.
1950년대 초, 그는 시소왓 꼬서막 니어리리엇(Sisowath Kossomak Nearyrath) 왕후에게 발탁되었다. 그리하여 소 맛(Sos Matt)과 함께 "왕립문화재 고전악단"(classical ensemble of the Royal Treasury)에 합류하여 궁정 리셉션과 국가적 행사에서 연주했다. 이 형식화된 수년 간 그가 작곡한 음악들은 자연스레 크메르 전통음악의 정형화된 음울한 멜로디를 사용하여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신 시사모웃은 바이올리니스트 핫 살런(Hass Salan 혹은 Hass Salorn)이 작곡한 로맨틱 발라드 "위올론 스네하"(Violon Sneha)란 곡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 기간 중 그의 히트곡들에는 다음과 같은 곡들이 포함된다.
- Srey Sros Khmeng
- Anussavry Phnom Kravanh (Meul phnom thom theng ream reng viyauk..)
- (Chett Srey doch) Chong Srol
- Thngay Dob Pee Thnou (thngay dob pee thnou chhea thngay kann touk sneha..)
- Kakey (chheat chhea eung euy sattrey dauch neang Kakey kom k'chey yok khluon biet..)
- KangRey (kuor nass assor dal roub neang Kang Rey..)
- Thngay Muoy Kakkda
- Somros Chhne Keb
- Stung Pursat (Toeuk ho roheng, ho m'neak eng katt wat song sar..)
- Prek Eng Oss Sangkhim
이 기간 중 발표한 곡들 중 다음의 3곡은 1970년대 초반에 재발매된다.
- Oudom Duong Chett : 대중적인 비디오 사이트에서 시청가능.
- Prek Eng Oss Sangkhim
- Chau Dork
특히 마지막 2곡은 여가수 로 세레이소테어(Ros Sereysothea)와 함께 부른 기념비적 듀엣곡으로, 핫 살런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신 시사모웃이 만돌린을 연주했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인터넷에서 "Chong Srol"과 "Somros Chhne Keb"을 검색해보길 바란다. "Chong Srol"은 최근 크메르 인터넷 라디오 한 곳에서 "Akhara bong sorseh teuv"란 제목으로 공개해놓고 있다. 특히 피아노 반주를 기본으로 하는 "Chong Srol"은 크메르 결혼식에서 최고의 람붕(Ram vong) 춤곡으로 끊임없이 연주되는 곡이다.
3. 1960년대의 캄보디아 음악계
1963년 초반경부터 신 시사모웃은 "왓 프놈"(Vat Phnom) 브랜드로 레코딩을 시작했다. 그의 노래 "Champa Batdambang"은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71년에 드물게도 "크메르공화국 텔레비전"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1965년경 이 방송국 개국 시 자신의 곡 "Champa Batdambang"이 바로 개국 방송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 곡이 팬들을 사로잡은 요인으로는 목관악기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으로 편성된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반주가 아니라, 기타와 퍼커션 등 "락 앤 롤" 스타일의 4인조 밴드가 반주했기 때문이다.
한편 캄보디아의 라틴음악 열풍은 아마도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이 1965년 초 "Reatry Del Ban Chuop Pheak"과 "Phnom Penh"을 작곡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 시사모웃이 실험적으로 시도한 라틴음악 "Khnang phnom anussavry"은 어코스틱 기타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전의 음악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수년 동안 신 시사모웃이 보여준 음악적 자기혁신 과정은 그 자신의 위대한 재능이었을 분만 아니라, 어찌하여 그의 음악이 세대를 뛰어넘어 크메르인 애청자들에게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게 해주는지를 설명해준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신 시사모웃의 유명세는 정점에 달하고, 그를 찾는 곳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의 호소력을 이용한 사례로는 노로돔 시하누크 공이 자신의 2번째 정규영화로 만든 <쁘레이 쁘라싯>(Prey Prasith: 은총의 숲)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신 시사모웃은 자신이 작곡한 이 영화의 주제가를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는 장면으로 등장하고,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하누크 공의 더빙 목소리 역시 신 시사모웃의 음성이었다.
이러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신 시사모웃은 다른 음악인들과의 레코딩 작업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국영 라디오"(National Radio)에서 임 송 슴(Im Song Seum) 및 후오이 미어(Huoy Meas)와 함께 한 작업들이 두드러진다.
당시 "왕립 예술대학"(Sala Rachna: 간단히 "살라 리엇나"라고 부름)에 소속되어 있던 가수 미어 혹 셍(Meas Hok Seng)도 1966년에 "Lolok Nhi Chmaul"을 발표해 유명세를 탔다. 당시 이러한 유명 가수들에게 가사를 준 재능있는 유명 작사가로는 마 라오 삐(Ma Lao Pi)를 들 수 있다. 현재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살고있는 마 라오 삐의 대표곡에는, 원래 께오 소카(Keo Sokha)가 부르고 이후 또웃 소닛(Touch Sonich)이 리바이벌한 "Day Samot Trapaing Roung"과 위에서 언급한 "Lolok Nhi Chmaul" 같은 곡들이 있었다.
임 송 슴(Im Song Seurm)은 작곡자라기보다는 가수활동을 더 많이 했다. 1963년 그가 발표한 곡 "꺼 뜨랄"(Koh Tral: 뜨랄 섬)은 크메르인들로 하여금 베트남 남부에 있던 이 섬의 영유권 상실의 비통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1965년에 발표한 "Kanseng nissay"(Kanseng nissay sros srey proloeung chhrus neouv tarm dang stung ouyw khnom rompeung chhoab chhet) 및 "Kangkeb er boeung"를 필두로, 1967년의 "Chhnam Mun"까지 인기몰이를 해나갔다. 임 송 슴은 후오이 미어와 함께 국가수반인 시하누크 공이 지방순시를 나설 때 수행하면서, 환영나온 지방 주민들을 위해 대중적인 람붕(Ramvong) 곡들을 들려주곤 했다. 임 송 슴은 1972년 폐암으로 사망했는데, 태국 영화를 차용한 곡으로 여가수 로 세레이소테어(Ros Sereysothea)와 함께 부른 "Khmao euy Khmao"를 비롯하여 몇 곡의 유작들을 남겼다. 후어이 미어([여가수] 곡명: "Chamkar Samrong")와 께오 소카(Keo Sokha: 곡명 "Day Samot Trapaing Roung"), 임 송 슴, 인 옝(In Yeng) 등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에 사이에 "국영 TV"에 종종 모습을 비추곤 했다.
한편 소 맛(Sos Matt)은 "Akassyean" 같은 곡들을 종종 히트시키곤 했지만, "왓 프놈"(Vat Phnom) 및 조금 더 후대의 "쩐 짜야"(Chan Chaya) 같은 레코드사들이 촉발한 상업적 시장에서는 불공정하게도 약간 제외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 시사모웃 활동 후기의 음악적 변혁에 적응이 안 되는, 보다 나이든 세대들의 인기를 계속해서 얻고 있었다.
당시 대중적이던 45회전의 LP 레코드 생산방식은, 음악가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2분 50초 정도의 정형화된 틀로 작곡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음악 속에 시(詩)를 담아넣으려던 신 시사모웃의 취향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국영라디오" 방송이 크메르 음악 전파의 주류적 매체로 부상하면서, 이전에는 보다 덜 알려졌던 가수들도 전국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리드 싱어 시소왓 세레이웃(Sisowath Sereyvuth) 왕자가 이끌던 밴드 "돈뜨레이 압사라"(Dontrey Apsara)는 그들의 고전적 히트곡 "Anny"와 "봣 오운"(Batt Aun: 너를 떠나 보내고)을 발표했다. 특히 "Batt Aun"의 전주에 나타난 절묘한 기타 솔로는 거의 모든 신진 기타리스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초반에 "돈뜨레이 압사라"는 "국영라디오"의 "아침 예불" 방송이 나간 직후, 정규적으로 방송을 탔다.(역주)
(역주) 신 시사모웃이 한국 대중음악의 고(故) 배호와 같은 위상을 가졌다면, "돈뜨레이 압사라"는 아마도 신중현이나 "사랑과 평화" 같은 뮤지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 현대사의 그 굴곡 많은 역사에서 "크메르루즈" 정권을 제외하면, 여타 정권들 역시 상당히 권위주의적 정권들이었지만,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같이 문화적으로 편향된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이는 당시의 크메르 권력층들이 지닌 문화적 소양이 보편적으로 높았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돈뜨레이 압사라"의 "봣 오운"은 이후 크메르 기타리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멋진 기타 솔로를 포함한 곡이다. 이 곡은 현재 캄보디아 최고의 인기가수 쁘리업 소왓이 리바이벌하여, 40년 전과 동일한 노래 및 기타 솔로 멜로디 라인으로 발표하였다. 쁘리업 소왓의 "봣 오운" 동영상을 감상하려면,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라. ☞ 쁘리업 소왓의 "봣 오운" 바로가기 |
학교 때 성적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국립 상업학교"(Faculte de Commerce: 현 "왕립 프놈펜대학"에 통합) 출신이었던, 작곡자이자 기타리스트 몰 까맛(Mol Kamach)은 1960년대 전반기에 "Noeuk Sranoss dol ti Kanleng.."와 "Oh srey sross bang keng srawmaih.." 등의 일련의 곡들을 프로듀스했다.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그의 최대 히트곡 "Lea Neak Mean Kun"은 발표되자마자 크메르 학생들의 "국가"가 되었다. 이 노래는 몰 까맛이 프놈펜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부모님들께 바친 곡이었다("Kaun saum oywn kay krab thvay bangkum..").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 시절 프랑스 파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타향에서의 어느 오후에..."(Roseal neouv srok keh..)란 가사로 시작되는 망향가를 작곡하여, 고향을 등진 자신의 비통함을 표현했다.
1972년에는 미어 사리(Meas Sary)가 "Pul tau aphoap"를 발표하며 유명세를 탔는데, 그는 외모가 중동 사람을 닮아 미국인 군사고문이 붙여준 "압둘"(Abdul)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주1)
(주1) Khieu San Sanna: Abdul Sary mchhas bot chamrieng Pull Tau Aphoap, Tussnavoddey Prachheaprey, 16-30 September 1996, no. 45 - Cambodia Publishing Co. Ltd, Phnom Penh. |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신 시사모웃은 여러 대중적인 캄보디아 영화들의 삽입곡을 불렀다. 그 대표적인 영화들로는 "Orn Euy Srey Orn", "Tep Sodachan", "Thavory meas bong" 같은 작품들이 있다. 1967년에 히트한 떼어 림 까잉(Tea Lim Kaing) 감독의 영화 <Peou Chhouk Sar>에서는, 신 시사모웃의 노래 "니어위어 찌벗"(Neavea Chivit: 영원한 동반)(역주)이 주인공 배우들인 디 사웻(Dy Saveth)과 찌어 유탄(Chea Yuthan)의 가슴아픈 이별 장면에 삽입되었다. 신 시사모웃의 출렁이는 애절한 음성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련의 영상들과 결합되는 가운데, 떼어 림 가잉 감독은 주인공 찌어 유탄이 강둑을 따라 울부짖으며 쫓아오는 아내(디 사웻 분)를 남겨둔 채, 나룻배(touk: 뚝)를 타고 떠나는 장면을 연출해냈다.
(역주) 크메르어 "니어위어"는 "나룻배"(=뚝)를 의미하고, "찌벗"은 산스끄리뜨어 "지와따"(jiva-ta: 생명[성], 영혼[성] - 산스끄리뜨 접미사 "따"는 영어의 "ness" 혹은 한문의 "性"에 해당)에서 소리가 변한 말로 "인생"이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직역하면 "인생의 나룻배"이지만, 크메르인들은 이 두 단어를 합쳐 남녀 한쌍의 "영원한 동반"으로 이해한다. |
신 시사모웃은 오랜 활동을 통해 여성 가수와의 혼성듀엣 곡들도 많이 발표했다. 1960년대 초반에 그와 호흡을 맞춘 여가수들로는 마오 사렛(Mao Sareth), 께오 몬타(Keo Montha), 께오 셋타(Keo Settha), 춘 완나(Chhunn Vanna), 후오이 미어, 로 세레이소테어, 빤 론(Pan Ron) 등이 있다.
약간의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마오 사렛은 캄보디아 독립 후 최초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여가수였다. 그녀의 초년에 대해선 그다지 정보가 많지 않다. 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기 전까지 거리에서 복권을 팔았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녀의 곡 "Sombot Krom Khneuy"은 아마도 인터넷을 통해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Oay Own Oss Chett"은 당시 탄생한 젊은 졸부들의 모습을 회상케 만드는데, 이때도 그녀의 재능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춘 완나는 "오운 스럴란 따애 벙 무어이 네약"(Oun Srolanh Tae Bong Mouy Neak: 당신만을 사랑해), "꺼 떤사이"(Koh Tonsay: 토끼 섬), "Lea reach theany" 같은 곡으로 "국영라디오"를 통해 우명해졌고, "쫑우 스네하"(Chum ngeu snaeha: 사랑의 열병)과 같은 수많은 람붕 곡들을 발표했다. 그녀는 도한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된 후 공연된 <라우 로웩>(Lav Loeuk)에서 열정적 연기를 보여줘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사는 다시 번안되어 프놈펜을 유령의 도시로 표현하여 비통함을 표시했다.
빤 론은 "Oh Satt Ching Chak"으로 1966년 신 시사모웃과 듀엣 곡을 녹음하면서 데뷔했다.
로 세레이소테어는 1967년 "Stung Khieu"가 히트하면서 데뷔했다. 그리고 1972년의 히트곡 "츠남 오운 16"(Chnam Aun 16: 제 나이는 16살예요)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고 음역대의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그녀의 고음은 깊이있는 음성을 지닌 신 시사모웃과 좋은 조화를 이뤘다고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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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영 방속국 안단의 실력이 상당한 것 같네여... 상당히 관록있는 연주들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완전한 락 뮤직과 재즈, 그리고 댄스뮤직과 힙합, 테크노만 있어서, 저런 식의 클래시컬 한 연주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죠. 그런 장르 뮤지션들의 생계를 이어가던 캬바레나 밤무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는 의외로 뮤지션들에 대한 수요가 엄청난 시장 같더군요... 그럼에도 저 젊은 기타리스트의 프레이즈는 상당히 세련됐네여. 아마 에릭 클랩튼을 많이 공부한듯..... 보통 캄보디아 기타리스트들이 테크닉과 멜로디 프레이즈는 좋은데 톤(음색)이 안 좋은 단점이 있는데, 이 친구는 톤도 참 좋네여~
일단 저 기타리스트 실력이 어떤지 잘 확신이 안 서시는 분들은, 음악감상실에 가셔서 <다문화 포용의 대가 "에릭 클랩튼"> 게시물부터 공부하신 후에 다시 한번 봐 보세요... 볼수록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