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The Financial Times 2010-01-14 (번역) 크메르의 세계
태국정치의 향방 : 빛을 잃어가는 미소
Faded smiles
기사작성 : Tim Johnston 및 David Pilling
마치 벵쿼(Banquo: 세익스피어의 멕베드 등장인물)의 유령 마냥, 아직도 태국의 만찬회 석상과 회의장, 그리고 내각회의 주변에서는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전 태국총리가 맴돌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분명 미래에도 예상되고 있는 이 축출된 전 총리에 대한 어떠한 열띤 논쟁도 없이, 한번의 기적같이 이뤄졌던 경제적 성과가 다시금 나아갈 사회 정치적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거의 부재한 상태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탁신 전 총리는 2001년 총선에서 자당이 기록적인 승리를 기록하며 무대에 올랐다. 그는 태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를 채운 총리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대중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인기를 차지했지만, 끊임없는 부정부패 폭로전에 시달리다, 70년전 태국이 입헌군주제로 변한 이후 18번째로 발생한 "2006년의 군사쿠테타"로 인해 실각했다.
(추가사진: The Bangkok Post) 탁신 전총리의 모습.
하지만 이 축출된 지도자는 소외된 농촌지역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열망의 요정이 숨겨진 병마개를 따도록 호소하고 있어, 좀처럼 무대 뒤로 퇴장시키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권개입 혐의로 내려진 2년형의 유죄판결을 피해 두바이에 망명 중인 그는, 여전히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2번이나 대리정권을 탄생시켰고, "붉은셔츠"(UDD: 반독재 국가민주연합전선) 시위대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자신의 이름하에 거리로 나서게 만들고도 있다.
이들 탁신 지지자들은 이번주부터 반-탁신 주자인 아피싯 웻차치와(อภิสิทธิ์ เวชชาชีวะ, Abhisit Vejjajiva) 총리가 이끄는 현 정부가 물러날 때까지 무기한 농성에 돌입할 것임을 예고하였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의 태국 정국은 친-탁신계 "붉은셔츠"(UDD) 시위대와 반-탁신계 "노란셔츠"(PAD) 시위대 사이의 충돌이 주류적 국면이었다. PAD는 왕정 지지자들로 2008년 태국의 관광성수기에 국제공항을 1주일간 점거하여 국가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한편 UDD도 2009년 4월 파타야(Pattaya) 시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세안(ASEAN) 정상회담장까지 난입해,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포함한 각국 지도자들이 이 "미소의 나라"에서 긴급대피를 해야만 했다.
역내의 많은 업저버들은 태국 민주주의 향방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토요타(Toyota), 테스코(Tesco), 시게이트(Seagate) 같이 정치적 안정을 바라며 예민하게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관점보다 훨씬 더 폭넓은 영역으로 뻗어있다. 대만이나 한국과 같이 역내에서 예외적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들에서는, 태국의 사례가 연약한 민주주의의 생존투쟁 사례로 회자되기도 한다.
정치분석가들은 지난 60여년간 군림해온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국왕이 서거할 경우, 이러한 가두시위가 보다 더 나쁜 폭력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국왕의 입원기간과 만의 하나 발생할 수도 있는 건강문제에 대해, 아피싯 총리는 "지난 60년간 매우 강력하고 영감을 주는 지도자를 가진 상태라면, 거기에는 언제나 변화의 갈망이 있을 수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에 말해주었다.
쭐라롱꼰 대학 겸임교수인 티띠난 퐁수티락(ฐิตินันท์ พงษ์สุทธิรักษ์, Thitinan Pongsudhirak) 씨는 이보다 한발 더 나가 태국이 지금 [인화를 기다리는] "기름통"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탁신계 총리 2명이 제거된 후 2008년 말에 구성된 아피싯 내각에 대해, 사회적 변화의 홍수를 담아두고 있는 댐에 비유했다. 티띠난 교수는 왕당파, 군부, 그리고 현체체로부터 이익을 얻는 세력을 지목하면서, "아피싯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피싯 총리는 탁신 전 총리가 풀어놓은 세력에 뚜껑을 덮는 민주적 방식의 마지막 저지선"이라고 말했다.
티띠난 씨는 탁신의 반대파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과 태국 남부의 소요사태 과정에서 발생한 초법적 처형과 같이, 탁신 정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달러가 채 안되는 금액으로 병원진료를 가능케한 "30바트 의료정책"이나 사회기반시설 확대, 농촌대중들에게 기회를 부여한 융자정책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했다. 그는 이러한 정책들이 지난 수십년간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던 수백만명의 태국인들이 가진 사회 정치적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간 탁신을 배제시키려 한 이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들은 탁신을 폄하하거나 악마화시키는 대신에,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호출신호란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탁신은 발생이 필요한 일에 대한 촉매제"라고 말했다.
아피싯 총리가 이끄는 현 정부는 탁신 정부의 정치적 장삼을 빌려 입기 위해 노력해왔고, 탁신이 추진하던 진보적 사회사업정책을 지속하면서 북동부 지역의 유권자들을 사로잡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축출된 지도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아피싯 총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태는 악화되었다. 작년 말 캄보디아는 탁신 전 총리를 자국의 경제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이웃한 양국 사이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넘쳐나는 말의 홍수 속에서, 탁신은 심지어 충성스런 북동부 군대의 선봉에 서서 방콕으로 진군함으로써 군부의 개입에 대해서도 확고하게 맞설 것이라고 말하기조차 했다.
태국의 지도자들은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창조를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립서비스하고 있다. 또한 독립 이후 줄곧 일당독재를 해온 싱가포르와 같은 "아시아적 민주주의"(Asian-style democracies)를 말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태국정치에 왕성하게 개입해온 군부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많은 태국인들은 권위주의적 이념에 찬성하지 않는다.
태국 민주주의의 장애물은 이 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분석에서도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심지어 중국의 성장율도 능가하며 태국이 10년간 고성장을 이룩하자, 1995년 무렵의 분석가들은 흥분에 들떠 태국이 한 세대 안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할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태국의 성장이 멈춘 것이다. 소득불평등도 더욱 간극을 넓혀갔다. 1997년 불어닥친 "아시아금융위기"는 18개월에 걸친 재앙적 시기를 안기며 GDP(국내총생산)를 15%나 갉아먹었다. 이후 태국은 매년 4-5%의 성장율 확보를 위해 투쟁하다가, 작년(2009)에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GDP가 또 다시 3.5%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러한 수치는 역내 국가들과 비교할 때 최하위권에 속하는 것이다. 태국의 1인당 GDP는 3,850달러로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에 비교대상이 됐던 대만의 4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중앙은행인 "태국은행"(Bank of Thailand)의 타리사 와따나껫(Tarisa Watanagase, ธาริษา วัฒนเกส) 총재는 이러한 경제상황이 명백하게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라며 비판했다. 그녀는 2000년대 초반에 매년 12%씩 성장하던 민간투자도 거의 멈춰선 상태라고 말했다. 은행의 기업대출도 활력을 잃어 1990년대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고, 경제 자체는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 이전과 비교해 더욱 더 수출의존형으로 변했다고 한다. 타리사 총재는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상황"이라며, "이래 가지고는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필요한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태국의 상황이 이렇게 실망스런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에는 미국의 자본이 태국으로 유입됐고, 1980년대에는 일본으로부터 외국인투자가 들어오면서, 태국은 전통적으로 의존했던 관광과 농업을 넘어선 분야로 경제성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태국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토착자본을 온전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탁신 전 총리 역시 대표적 사례 중 한 사람이지만, 태국의 기업은 정치인과 함께 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했고, 이는 이동통신이나 건설업과 같은 서비스업에서 독점권을 따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태국 대중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파숙 퐁파이찟(Pasuk Phongpaichit, ผาสุก พงษ์ไพจิตร)과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는 공동 저술인 <탁신: 태국의 정치 비지니스>(Thaksin: The business of politics in Thailand )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큰 사업들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업가들은 자신의 이익 일부를 장성들에게 분배해주고, 대신 그 장성들은 사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자신들의 절친한 친구들을 계약 시에 소개를 해주거나, 아니면 여타의 이권을 분배해주거나 지원을 한다. |
이러한 현상은 세계 수준의 기업이 출현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질서로 인해, 특히 일본, 대만, 한국에서는 일찍이 시행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어준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일련의 사회적 변화를 지연시키고 있다.
태국의 많은 엘리트들(기득권층)은 탁신 전 총리가 좌지우지하는 분위기를 두려워한다. 심지어는 비교적 포용적인 사회정책을 취했던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อานันท์ ปันยารชุน: 1991-1992 집권) 전 총리조차도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 추구에 대해서는 경계의 목소리를 냈을 정도였다. 그는 "우리도 야망이 있다. 하지만 그 야망을 과장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회적 요구를 억제시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환경 측면에서 우리는 복을 받았다. 이렇게 기후도 좋고, 집도 별로 튼튼하게 안 지어도 되고, 옷도 그다지 두툼하게 필요없고, 가는 곳마다 밥주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
하지만 탁신은 바로 그들이 가진 가부장적 확신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정치분석가들은 태국의 현상유지 상태가 푸미폰 국왕의 사후에도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현재 82세인 푸미폰 궁왕은 태국의 미묘한 사회적 안정을 유지시키는 데 광범위한 신뢰를 가진 설득자 역할을 해왔다. 비록 그의 독특한 역할이 제도보다는 사람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긴 하지만, 역할의 측면에서 대체자를 구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 아피싯 총리는 푸미폰 국왕의 국가통합적 역할에 대해 "태국 사회는 우리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자라왔다"고 말했다.
일부는 보다 더 비관적인 견해를 보여, 푸미폰 국왕의 사후에 완전한 사회적 혼란이 시작될 것으로 보기도 했다. 티띠난 겸임교수는 일부 헌법적 문제들이 국왕에 대한 존경으로 인해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일부 잠재된 봉건사회적 흔적들이 길을 안내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한 흔적들이 빠르게 나타날지 점진적으로 이행할지, 아니면 탁신 전 총리와 직접 관련을 갖고 발생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선, 어떠한 상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태국의 많은 행동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바가 정치적 격동 속에 빠질 때를 대비하는 중이다.
정치활동 금지를 당한 야당의원 111명 중 한 사람인 짜뚜론 차이셍(Chaturon Chaisang)은 "만일 탁신을 제거한다고 해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태국 정치는 탁신을 뛰어넘어 가고있다"고 말했다.
국부는 아프고, 국민들은 더욱 상처받는 미래를 사색한다
태국의 국왕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 중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35음절에 이르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단순히 "퍼"(พ่อ), 즉 "아버지"라고 부른다. (Tim Johnston) |
푸미폰 국왕의 공식적 권력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헌법은 군주는 정치를 넘어선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지난 63년간 열심히 일하는 동시에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포착한 덕분에 그는 거의 절대적인 도덕적 권위를 확보했다.
(추가사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국왕.
그는 기능장애를 가진 정치적 궤도가 순항할 수 있는 중력 중심축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선출직 권력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권위도 제공했다. 게다가 그는 대부분의 태국인들이 거대한 사회경제적 융기의 지표면에서도 보존하길 원하는 속성들 --- 즉 공동체, 자비, 평온 --- 의 존경받는 담지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 그 틈을 더욱 넓힌 정치적 분열은 군주가 국가를 통합한다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통합에 대한 전통적 방식의 호소에 대해 면역성을 보이고 있다. "붉은셔츠"(친-탁신계 UDD)와 "노란셔츠"(반-탁신계 PAD)라는 색깔로 양분된 전투는 서로가 "태국의 영혼"(soul of Thailand)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면서, 태국인들이 "고도의 제도"(high institution)라 부른 것을 갈등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있다. 왕실 관계자는 국왕의 이름이 서로 다른 정치세력에서 불려지는 것을 국왕 자신은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보일 우려가 있어서 중재를 하는 데도 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권총에 의한 총격으로 사망한 자신의 형을 뒤이어 즉위했다. 이미 제도들은 그의 발아래 있고, 장군들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즉위 후 60년간 푸미폰 국왕은 빈민구제를 위한 봉사활동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민주주의 세력과 군부세력 사이에서 변덕스레 그네를 타는 이 나라에 안정적인 구심점을 제공해줬다. 그는 민족에 대한 불멸의 사랑을 일관되게 보여줬고, 이것은 연속으로 등장했던 정치가들과 장군들이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이제 82세이고, 건강에 대한 확신도 불가능하다. 궁내청에서는 현재 그가 회복중이고 단순한 가료만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폐렴 증세로 입원한 지난(2009) 9월 중순 이래로 병원에 머물고 있다. 한번도 푸미폰 국왕이 없는 태국을 상상해보지 못했던 많은 태국인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방콕의 병원에서는, 18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국왕의 회복을 바라는 방명록에 서명했다.
이곳의 많은 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말할 때면, 태국이 푸미폰 국왕에 의해 특성화된 가부장적 형태에서 변하기 시작했고, 이제 푸미폰 이후의 국왕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모호한 "왕실모독처벌법"이 어떠한 실질적 논의에 대해서도 재갈을 물려놓고 있다. 이 법은 원래 왕실 가족들을 비판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여 만들어졌지만, 정치인들이 정적을 공격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외국인투자 : 공항점거사태 이후로 경쟁국들에게 토대를 뻿기고 있다
태국의 정치소요는 단기간에 외국인투자를 곤두박질시키며, 경제적으로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뤘다. 투자자들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상당한 복원력을 보여주곤 했다. 타리사 와따나껫 "태국은행" 총재는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녀는 "우리는 작년에 세계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FDI가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감소가 너무 가파르다. 2009년 최초 11달 동안의 FDI 금액은 2,660억 바트(77억 달러)로 2008년 동기에 비해 43% 감소했다. 이러한 감소는 베트남의 13% 감소, 인도네시아의 38% 감소와 비교해서도 감소폭이 더 크다. 분석가들은 베트남은 저가제품들을 만들어 이익을 남겼고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에서 이익을 얻었다고 지적하며, 태국의 감소를 순전히 정치적 탓이라고만 말하는 데도 망설임을 보였다. 또 다른 요소로는 일본의 FDI가 75% 감소하는 등, 태국의 주요 투자국인 EU와 일본이 특히 크게 충격을 받아, 그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태국에 대한 장기 투자자들은 상당히 탄탄한 편으로, 갑작스레 정부가 출현하거나 붕괴하는 것과 국가운영에 군부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데도 익숙하다. 과거에는 이러한 정치적 지각변동이 비지니스 환경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 12월부터 이 경향은 변했다. 당시 수천명의 반정부 시위대(노란셔츠)가 한 주일 동안 방콕의 국제공항을 점거하여, 관광객들과 비지니스맨들의 발을 묶고, 항공운송을 통한 수출통로를 막았다. 당시 "태국은행"은 이 점거사태로 인한 손실을 85억 달러로 추산했다.
분석가들은 그렇긴 해도 태국에 대한 투자매력도가 절대치 면에서 많이 감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쟁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한 수준으로 감소한 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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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국언론이지만, 국왕과 군부관련 표현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읽을 때는 미화된 부분을 머릿 속에서 제외시킨 후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들을 제공해줍니다... 특히 탁신 대 반-탁신 싸움에서 단순히 기득권과 비기득권... 왕당파와 민주파... 중부 및 남부지방 대 북부-북동부 지방... 수구세력 대 세계화세력..... 이런 도식만 갖고는 이 격렬한 싸움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이 잇었는데... "토지개혁"이라는 상당한 물리적 토대가 있음을 알 수 있군요.... 결국 이러한 물리적 토대와 정치적 의식개혁이 맞물리면서 그 충돌양상이 과격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난 반야라춘 총리.... "집도 필요없고, 옷도 필요없고... 밥도 준다.... " .... 한마디 해주고 싶네요.... 씨BAL 놈아 !!.... 그러는 니 샤끄는 방콕에 사는 집 평수 얼마냐???? ...... 참고로 방콕에서 이 정도 급의 인물들.... 최소가 대지 200평 이상에, 최소 건평 30평 정도로 3층짜리 정도 지어놓고 삽니다...... 벤츠 2대 주차는 기본입니다.... 점점 더 확실해지네요... 푸미폰을 정점으로 한 태국의 기득권층들... 정말 나쁜 놈들이라는 것 말이죠... 그리고 한국사이트들에 태국국민들.. 학교에서 교육안해도 자발적으로 존경한다... JOT 까는 소립니다... 아침마다 요앞에 학교들 국왕초상화 앞에서 국기게양식 하는데...
성당 소속 유치원까지도 예외없이 다 합니다..... 완전 세뇌교육인거죠... 문제는 여전히 탁신인데.... 과연 민주세력이 탁신이란 화두를 넘어설 능력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은근히 드는 생각이.... 만일 그러한 정치적 역량이 없다면.... 국왕마마 사후에... 이 싸움... 정말로 무력충돌을 동반하는 내전으로 갈 확률이 한 5%쯤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네요... 불길.... 씁슬.... 아, 동남아시아!!!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연구자를 찹잡하게 만들고... 알면 알수록... 불안하고 안타갑게 만드는구만요....
탁신 전 총리가 그 동안 푸미폰 국왕을 중심한 기득권 세력의 비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어느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용의 역린을 탁신 전 총리가 건드렸군요.
그것은 인정해야 할듯 합니다.. 하여간 20세기에 토지개혁 없이 그나마 지역 내에서 그 정도 경제규모를 가졌다면, 신기하기도 하고.. 의외로 태국이 이러한 민주개혁과 제도적 정비를 할 경우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디로 갈지 예측 불가네요... 어찌되었든 캄보디아가 처한 현 상황은 독재 대 반독재 구도에서 민주세력이 어떻게든 활동범위를 좀 넓혀야 할 것 같고... 태국의 경우는 가만히 보니..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봉건주의와 공화주의의 싸움이라는... 전선이 보다 모호하면서 전 근대적 싸움이네요..
놀라운 분석력에 속 시원히 구사한 단어까지 울트라 노마드 만세! 겉모습 만으로 세상을 평가한다는 것이 참 어리섞음을 다시 발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논리적인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훈센 총리와 탁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함께 엮을 수 있는지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뭔가 뒤엉켜있는 듯한 구조입니다. 이것이 동남아시아의 수준인가요?
목수 님 중요한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과찬을 해주셔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원래 무식하면 목소리가 큰 법인데, 아직은 우리 카페가 태국에 대한 공부는 초창기라 잘 모릅니다만... 주어진 정보 하에서만 판단하면 좀 기가 막혀서 욕좀 해댄 것입니다... 향후 더 찬찬히 살펴보아야겠죠...
일단은 훈센 파와 탁신 파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 일단은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훈센 파는 분명한 캄보디아의 기득권 독재세력으로..... 제 판단으로는 준-군사정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명시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권을 잡진 않았지만, 향후 정치적 게임에서 정정당당하게 해서 안 되면... 거의 100% 다시 쿠테타를 시도할 집단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들은 제일차적으로는 자신들 집단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그 다음으로는 베트남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거나 좀 떼 주는 외세의존적 성격도 갖고 있고... 마지막으로는 가능한 한 정치적 쇼로서 여타 크메르인 유권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 척 하는... 뭐 그런 성격을 가진 정권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다보니... 막판에서 군부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아주 큰 문제 외에는 ... 우선 눈앞의 이익을 따르고보지, 여론이나 국제적인 평판 이런 거는 신경안쓰는 정권으로 판단됩니다.... 일부 한국인들 중에는 캄보디아가 그래서 더 사업하기 좋을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 큰일 날 소립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당해보시면 알게 될테니,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반면 태국에서의 정치적 싸움은 좀 더 복잡해보입니다. 우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봉건체제의 수혜세력(군부, 재벌, 관료, 풍요로운 남부지방 주민들[말레이시아 국경 3개도만 제외], 토지소유자, 교수나 의사 등 제도권 지식인 등등)은.... 기존의 봉건적 전통과 관행들이 유지되길 바라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푸미폰 국왕이라는 신격화된 중심 아이콘을 만든것 같습니다..... 반면 탁신 전 총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농촌 빈곤층 + 민주화세력 + 세계화세력(여기에는 자유주의 기업가나 금융인들도 일부 포함) + 친탁신(군부나 정치인 중에 탁신과 친한 사람들) ....
이렇게 복합적인 세력이 망라된 것이 친-탁신 세력으로 보입니다... 즉 탁신 전 총리가 푸미폰 국왕과 반대쪽에서 이렇게 복잡한 세력을 규합해내는 아이콘으로 보입니다..... 다만 친-탁신파 전체를 엮는 공통적인 틀을 탁신이라는 인물 외에 하나 더 찾아보자면..... 사람(국왕)에 의한 권위 부여가 아니라... 법률과 제도에 의한 권위부여 및 사회질서의 유지.... 이것을 들 수는 있을듯 합니다..... 그래서 제가 태국정치의 갈등을 봉건주의 대 공화주의(민주주의가 아님)의 싸움이라고 불러본 것입니다.... 일단은 현재 이 싸움은 친탁신(프어타이당+붉은셔츠) 대 반탁신(민주당+노란셔츠)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
훨씬 더 복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러한 복잡성은 아마도 일단 친탁신파가 승리한 이후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데 훈센과 탁신.... 이 동맹관계는 (1)훈센과 탁신의 개인적 친분.. (2)"적의 적은 동지"이기 때문... (3)탁신이 개인적으로 캄보디아의 대규모 투자자라는 점... (4)아피싯 정권에 비해 덜 민족주의적인 탁신정권이 들어서면, 캄보디아로서는 외교적으로 손해는 안봄(특히 쁘레아위히어 사원 분쟁이 결정적).... 뭐 이런 성격을 갖다보니.... 훈센 정권과 친탁신 세력의 연합으로 보기보다는... 훈센 총리와 탁신 전 총리의 개인적 인연이 더 큰 기조로 보입니다.... 물론 당장 탁신을 지원해주니...
우선 당장은 친탁신 세력들 전체가 당분간은 훈센 정권에 대해 큰 반감은 안가질 것입니다만... 만의 하나 친탁신 정권이 출범하여.. 태국내에서 봉건세력의 힘을 많이 걱는 시점이 되었을 때.. 또 이야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인도차이나 정치인들의 변화무쌍한 정치적 행보와... 때로는 권모술수를 보면서.... 인도차이나 정치 엄청나게 복잡하고... 머리들도 좋구나 ... 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인간사라는 것이 권력투쟁을 시작하면... 이 정도 이합집산과 시나리오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정치만 보다가 보면 복잡하고 현란해 보입니다만..... 한국정치인들에 비해 인도차이나 정치인들이 처한 상황과 가용한 정치적 도구나 권모술수 장치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즉 자국 내에도 다양한 정파들이 있지만, 바로 이웃나라들이 또 여러 나라이고.. 이에 개입하는 강대국들도 역학관계가 복잡하고 말이죠....
한국 정치인들은 고작 동원가능한 정치적 도구라는게... 미국 아니면 북한 정도이고... 좀 더 과거에는 국내의 지역감정 정도였죠.... 그러니 최근 한국 정치사에서 최고로 현란했던 것 중 하나가 과거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연합, 즉 민자당으로의 3당통합(혹자는 야합으로도 부름) 정도가 최고의 쇼였습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정치인들은 한국정치인들보다 가용한 정치적 도구들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아마 이런 환경을 조성해준다면, 한국 정치인들도 틀림없이 이 정도 현란하게 움직일 겁니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정치적으로 가용도구들이 많았던 해방정국(1945-1950)을 생각해보시면, ...
당시에는 한국정치도 현재의 인도차이나 정치 몾지 않게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요즘도 정치권만 좀더 벗어나면 한국사람들도 이보다 더한 복잡성으로 움직입니다.... 가령 거대기업 내의 기업내 정치라든가... 대학내에서 총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학문권력의 싸움.... 종교계 내부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싸움.... 지역공동체의 아파트재개발조합에서 벌어지는 내분 등.... 이들은 정치인들보다 경계면에서 보다 복잡한 동원 도구들이 있어서, 오히려 복잡합니다... ^ ^
하여간 훈센 정권과 친 탁신파를 하나로 합쳐서 보긴 어려울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아피싯 총리를 얼굴마담으로 하고 실제로는 푸미폰 국왕이 대빵인 태국 봉건주의자들 .... (2)탁신을 얼굴로 하는 친-탁신파 연합세력.... (3)훈센 정권.... 이 3자의 입장과 이익이 모두 제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항상 이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항상 3가지 입장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