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될 일들
이 기 섭( 금계중 10회-총동창회 부회장)
금계중학교 제 10회, 1960년 4월 7일 마음이 부풀어 잠 못 이루던 날, 꿈에도 그리던 금계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입니다. 우리 동기는 70여명으로 남녀가 모두 한반이었습니다.
1940년대는 일제의 압박과 해방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국토가 피로 물들고 온 국민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동기들은 모두 어렵던 그때 태어나 콩잎, 팥잎, 쑥, 송구(소나무 속 껍질), 칡뿌리, 창꽃(진달래), 모메(논밭두렁에 연분홍의 나팔꽃 모양의 꽃이 피는 식물로서 가느다랗고 연한 뿌리가 달단 함), 올미(논에서 나는 큰 콩알만한 크기의 달콤한 뿌리열매), 돼지감자, 밀기울, 술막지, 장떡(쌀가루나 밀가루를 간장에 이겨 만든 떡)에 익숙합니다.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새벽 밥 먹고 소백산 30리길을 지게지고 올라가 나무 한 짐 지고 땔감하고, 팔아 양식을 삼아야하니 사람은 사람대로 곤핍하고 벌목과 화전으로 민둥산이 되어 여름이면 산사태와 수해가 많이 일어나는 등 국가살림이나 가정살림이 무척이나 어렵던 때로 학교 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더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이곳 풍기는 공립인 풍기중학교가 있어 다행이었으나 그래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중학교 진학을 아예 생각지도 못할 때였습니다. 이곳에 우리모교, 금계중학교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 고장의 많은 인재를 배추하지 못 했을 뿐 아니라 당시 배움에 굶주려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국가는 어떻게 했을른지, 또 인재가 귀할 때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가정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하여 설립된 우리 모교가 있었기에 향학열에 불타 잇는 이 고장 출신 학생들이 진학하고 사회에 진출 할 수 있었으며 어려운 국가 형편에도 일익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창학하신 계삼정 교장선생님이야 말로 우리 동문들의 은인이며 애국자라고 곰곰이 생각 해 봅니다. 당시 돈이 많아서도 아니요 개인의 부와 영달을 위해서 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오로지 없어 못 배우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선생님들도 함께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면서 학교를 운영했다고 돌이켜 봅니다. 끼니가 없어 굶어가며 가르치는 선생님도 계셨고, 돌담을 헐어 밭을 일구고 화전으로 연명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우리는 선배님들과 틈틈이 우리 손으로 읍내에서 기왓장을 나르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자동차로 나르면 쉬웠을 텐데... 여학생은 머리에 이고 남학생은 등짐으로 기왓장을 날랐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 멀기도 먼지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대견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일하며 배우는 창학 이념 속에 배우고 자란 우리 동문들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잘 극복하고 사회와 국가에 훌륭하게 진출 했습니다.
그땐 선후배가 얼마나 정으로 뭉쳐졌는지 선배님들과의 관계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이 지역에서는 우리 금계중학교 육상부하면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조영주 선생님의 지도아래 단련된 육상부, 서로가 얼마나 아껴주고 사랑 해 주었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용현, 황두섭, 이승우, 박문혁, 김일환,조진호,김성호 선배님들과 함께 영주군내 초등학교 운동회 시기가 되면 우리는 풍기초등학교, 창락초등학교, 오계초등학교, 안정초등학교 등 각 초등학교 운동회를 주름 잡고 다녔습니다. 100m, 200m, 400m계주, 단축마라톤, 가는 곳, 뛰는 곳 마다 상을 타고 노트, 빨래비누, 양푼, 초롱, 물동이 등을 들고 피곤함도 잊고 의기양양하게 즐거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강하고 모진훈련 속에 단련된 육체와 정신을 이길 팀들이 없었습니다.
선생님들과도 정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도 잘 따랐습니다. 어느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중 조영주 선생님께서 “야! 이기섭 내일 소백산 등산가자. 내일 새벽 6시까지 십자거리로 나와!!” 이 한마디로 다음날 선생님과 함께 소백산 등산을 간적이 있습니다. 새벽 6시, 꽁무니에 김밥 하나 덜렁 차고 선생님 뒤만 따라 풍기시내에서 출발하여 창락, 수철, 죽령옛길, 죽령재,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초암사, 순흥을 돌아 저녁 늦게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산행 도중에 선생님께서 지금 큰 짐승이 지나갔는데 봤냐고 물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 없이 선생님 뒤만 열심히 따랐으니 큰 짐승을 볼 리가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산행이라 생각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땐 몸은 피곤했을지라도 상당히 기분 좋고 신나고 아름다운 등산이었습니다.
학생들 간에도 다정다감 했고 웃지 못 할 일, 잊지 못할 일, 오순도순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국어 시간에 틀린 글자 이어 읽기 때였습니다. 조대원(전 대덕전자사장) 학생이 줄 넘어가는 쪽을 잘못보고 ‘아리송 아리송’을 ‘송아리 송아리’로 읽어 크게 웃음바다가 된 것하며, 자전거 귀하던 때의 김진현 학생(전 영주시의회 부의장)의 자전거 빼앗아 연습하기, 전깃불 귀하던 시절 전정국 학생 집에 가서 책상 위 성냥갑에 촛불을 켜놓고 밤늦게 까지 공부하다 졸음에 못 이겨 자다가 책상을 다 태워 버린 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아찔한 일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지성으로 가르쳤습니다. 교장선생님도 미술과목을 담당 하셨고, 송지향 선생님, 김정철 선생님, 최종로 선생님, 명왈흥 선생님, 배인현 선생님, 조영주 선생님, 이 종우 선생님, 서용운 선생님 등 선생님 한분 한분이 1,2,3학년을 돌며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분이 많았습니다. 송지향선생님 같은 경우는 국어 한문 국사 세계사 등 많은 과목을 담당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불평하나 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회초리로 매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화를 마음에 두는 학생이 없었고 부모님들도 이에 항의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 선생님들한테서 배운 많은 동문들이 지금은 정치계, 국가행정 혹은 지방행정, 군(軍), 학계, 금융계, 회사등 각계각층에서 열심히 일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지금도 훌륭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동문들은 모진 세파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훌륭하신 스승님께 열심히 일하면서 배워 사회와 국가에 내놓인 인재들입니다. 어디에 가도 뒤지지 않고 의를 위해선 쓰러지지도 않는 사랑으로 뭉친 강인한 동문들입니다.
졸업 후 1967년 8월 30일,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선후배가 금계중학교에 모여 총동창회를 발족시켰습니다. 그때 매년 8월 15일을 금계중학교 총동창회 날로 정하고 그날만은 동문들이 만사 접어두고 모여 저을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던 동문들은 스승님과 동문들을 찾아 버스로, 기차로, 전세버스를 내어 모교로 모였고, 그날은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어 옛 일을 더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이야기꽃으로 밤새는 줄 모르고 정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우리는 동창회 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환경 변화에 따라 매년 달라진 동창회 날이 현수막으로 나붙고 나서부터 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꼭 금계중학교를 잃은 기분 이었습니다. 다시 그 날을 회복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두서없이 옛 일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모쪼록 우리 금계동문들은 창학이념을 살려 열심히 배우며 일하고 스승님을 존경하고 제자를 사랑하고 동문 간 단합된 모습으로 금계의 자존심을 살리고 우뚝 솟는 기상으로 세계로 힘차게 뻗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총동창회 부회장 이기섭
(10회- 전 영주시 의회 사무국장)
<사진 첨부>
1963년 금계중학교 10회 졸업기념사진(63.02,12)
1962년 자치활동 (기률부)신구 교대의 밤 (10회에서 11회로 인계한 후)
1967년 8월 30일 총동창회 창립 기념사진
- 귀한 글과 사진 자료를 전해주신 이기섭 총동창회 부회장님( 10회 전 영주시 의회 사무국장)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