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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강
其八은 莫交世俗하야 令他憎嫉이어다.
기팔 막교세속 영타증질
離心中愛曰沙門이요 不戀世俗曰出家니라 旣能割愛
리심중애왈사문 불연세속왈출가 기능할애
揮人世인댄 復何白衣로 結黨遊리오 愛戀世俗은 爲
휘인세 부하백의 결당유 애연세속 위
饕餮이니 饕餮은 由來로 非道心이니라 人情이 濃厚
도철 도철 유래 비도심 인정 농후
하면 道心疎니 冷却人情永不顧어다 若欲不負出家志
도심소 냉각인정영불고 약욕불부출가지
인댄 須向名山窮妙旨호대 一衣一鉢로 絶人情하야
수향명산궁묘지 일의일발 절인정
飢飽에 無心하면 道自高니라
기포 무심 도자고
頌曰
송왈
爲他爲己雖微善이나 皆是輪廻生死因이니라
위타위기수미선 개시윤회생사인
願入松風蘿月下하야 長觀無漏祖師禪이어다
원입송풍라월하 장관무루조사선
반갑습니다. 오늘 3월 5일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자경문>
其八은 莫交世俗하야 令他憎嫉이어다.
기팔 막교세속 영타증질
여기서부터 할 차례죠. 한 700년 전 쯤에 그 당시 수행의 가장 표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야운 스님의 자기 자신을 경책하는 글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경문>을 읽어야 될 것 같고, 또 자주 말씀드리지만 액면 그대로 우리가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 정신으로 우리가 산다는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정신을 배워서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수행자에게는 더욱 더 알맞은 수행정신으로 사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세속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가르침을 접함으로 해서 한번 씩 문득문득 정신이 바짝바짝 차려지는 느낌을 qkewy. 겨울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얼음을 깨고 찬물에 세수를 할 때 그 차갑고 또 쓰리고 그러면서도 아주 시원하면서 정신이 맑게 깨이는 그런 느낌을 분명히 <자경문>을 통해서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출가인으로서 莫交世俗(막교세속)하야
세속과 교통해서, 세속과 사귀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미워하거나 질투를 내게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함께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수행하는 집단 안에서 서로 교류가 이루어지고, 道談(도담)을 논하고, 법을 논하고,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서로 의논하는 것은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서로서로 경책도 되는 아주 좋은 일이지만 출가 수행하는 사람이 세속 사람과 자꾸 사귀어서 어디 어떤 사람과 안다느니, 정치인과 안다느니, 부호한 사람들하고 교류가 있다느니 해서 찾아오고 찾아가고 이렇게 얼기설기 얼켜 놓으면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밉보이게 되는 거죠. 사람의 활동이란 한계가 있는데 같이 사는 내부의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이 적어지죠. 그리되면 서로 서먹서먹해지고 저 사람은 세속에 가서 뭘 하려고 하는가? 자꾸 세속 사람들과 사귀어서 무슨 일을 꾸미는가? 출가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생각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거죠. 참으로 자신에게도 손해이고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손해를 보이는 일이 되겠습니다. 물론 절 집안이라는 것이 옆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간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관여하지는 안습니다만은 눈에 보이고 한두 번 보이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보이게 되면 관여하지는 않지만 마음에 망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심한 경우는 대중 생활의 요체로서 공양을 하는 자기 발우대에 설사 똥을 싸더라도 간섭하지 말라. 이렇게까지 심하게 경책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발우대에 똥 싸는 일이 얼마나 심한 일입니까? 그렇더라도 물에 가서 깨끗이 씻어서 그냥 쓰면 되지 않느냐? 자기 발우대에 똥 쌌다고 해서 그것으로 시비하지 말라. 그런 정도로 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하자면 번뇌를 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죠. 그래서 본문에
離心中愛曰沙門(리심중애왈사문)이요 不戀世俗曰出家(불연세속왈출가)니라
마음 가운데 애착을 떠난 그것이 사문이다. 그리고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출가다. 세속에 살더라도 마음에 어떤 애착 없이 조용하게 아주 담박하게, 고고하게, 탈속하게 그렇게만 산다면 그 사람이 사문이고, 그 사람이 출가야. 어디 있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출가해서 사찰에 산다면 그건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거죠.
旣能割愛揮人世(기능할애휘인세)인댄
이미 능히 애착을 베어버리고, 잘라버리고, 사람이 사는 人世, 사람의 세상에 뛰어났을진댄
復何白衣(부하백의)로 結黨遊(결당유)리오
다시 어찌 白衣로, 흰옷을 입었다 해서 세속사람들을 白衣라 부릅니다. 먹물 옷을 입었다고 해서 緇衣(치의)라 그러죠. 스님들의 옷을 ‘검을 치’ 자, 치의라 그럽니다. 속인들을 부를 땐 백의라고 하죠. 속인들과 왜 당유를 맺느냐? 당파를 맺어서 무리를 지어 같이 노느냐?
세속을 애착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饕餮(도철)이다.
도철이라고 하는 전설의 동물이 있어요. 세속적인 것, 속된 것.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아도 다 알죠. 명예나 부나 그런 것을 자꾸 좋아하는 것은 도철이다.
饕餮(도철)은 由來(유래)로 非道心(비도심)이니라
도철은 본래로 도 닦는 마음이 아니다. 도철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탐심만 일으킨다고 하는 전설의 짐승이라고 하죠.
人情(인정)이 濃厚(농후)하면 道心疎(도심소)니
세속 사람이나 누구나 간에 서로 인정이 너무 많다. 사람이 인정이 너무 많다 그러는데 글쎄요... 꼭 필요한 데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사람을 인정으로 자꾸 오고가고 거래를 하면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많죠. 그래서 인정이 농후할 것 같으면 道心이 멀어진다. 도 닦는 마음이 멀어진다는 거야. 사람의 마음에는 한계가 있는데 사람의 情에 자꾸 끄달리고 그러면 도 닦는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도 닦는 마음에 집중을 해야 되죠. 도 닦는 마음에 집중하다보면 저절로 세속적인 인정과는 거리가 멀어지겠죠. 공부라고 하는 것은 덜 익은 것을 익게 하고, 익은 것을 설게 만든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熟 생 생 숙. 익숙한 게 뭡니까? 세속적인 마음씀씀이. 그건 익숙합니다. 그걸 설게 만드는 거야. 설어 익는 건 뭐죠? 우리가 공부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일. 밥이 설익었다고 하듯이. 공부하는 것은 설익었으니까 익게 만드는 것. 그게 공부입니다. 공부하는 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익숙한 것은 설게 만들고, 설익은 것은 익숙하게 만든다. 이런 말이죠. 공부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설어있으니까 그걸 익숙하게 만들어라. 익숙한 세속적인 것은 설게 만들어라. 너무 세속에 밝고 세속과 깊이 맺어져 있으면 십중팔구 도가 제대로 닦여질 리가 없다. 꼭 도 닦는 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뭘 한 가지 골똘하게 성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예술 방면도 마찬가지예요. 서예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어떤 분야든지 그것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를 마음이 있다면 다른 인연들 다 끊어야 되요. 다른 인연들과 오고가고 자꾸 그러면 예술이 깊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冷却人情永不顧(냉각인정영불고)어다
인정을 냉각시켜라. 인정을 냉각시켜서 영원히 돌아보지 말지어다.
若欲不負出家志(약욕불부출가지)인댄
만약에 출가한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할진댄, 그렇죠. 출가한 뜻을 살리려면
須向名山窮妙旨(수향명산궁묘지)호대
모름지기 명산을 향해 서라. 유명한 산을 의례히 큰 산이고, 큰 산은 깊은 산이고, 깊은 산은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죠. 고려 때 더 말할 나위 없죠. 700년전 이 세상의 환경이라고 하는 생각해보면 훤히 알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명산을 향해 가서 미묘한 뜻을 연구하고 연구하되
一衣一鉢(일의일발)로 絶人情(절인정)하야 飢飽(기포)에 無心道自高(무심도자고)니라
한 가지 옷과 한 가지 바루대로 인정을 끊을 것 같으면 주리고 배고픔에 무심하면 도는 저절로 높아지리라. 참 이 구절이 어릴 때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요. 일의일발로 절인정하야 기포에 무심도자고니라. 가사, 승복. 이게 한 가지 옷이라는 뜻입니다. 일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바루대. 그러니까 정말 최소한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진 것 없이, 쌓아두는 것 없이 그것 하나만으로 산다면 세속과 깊이 인연 맺을 일이 없죠. 옷이 뭐 그렇게 쉽게 닳습니까? 또 떨어지면 기워 입으면 되는 것이고. 바루대는 한 번 구해놓고 잘 쓰면 평생 쓰니까, 더 구할 일이 없죠. 구할 일이 없는데 세속과 그렇게 인연 맺을 일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인정을 끊는다. 한 가지 옷과 한 가지 바루대로 인정을 끊어서 주리면 주린 대로,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굶으면 굶는 대로 거기에 아무 동요하는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도는 저절로 높아진다.
頌曰(송왈) 爲他爲己雖微善(위타위기수미선)이나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비록 작은 선행은 되지만. 대개 그러지 않아요. 누구를 위해서, 누구 집이 어려워서, 누가 곤경에 처해서, 누가 초상이 나서, 누가 아파서 이런 좋은 마음이죠. 그렇지만 비록 작은 선한 일이긴 하지만
皆是輪廻生死因(개시윤회생사인)이니라
이것이 다 윤회하게 되는 원인만 될 뿐이다. 출가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생사를 윤회하는 끈을 끊는다는 것인데 선한 일 좀 하고, 남 좀 돌보고.... 나중에 크게 도통해서 그때서야 중생제도를 제대로 하는 것이지 그렇게 되기도 전에 인정에 끄달려서 누구 집 봐줘야 되고, 초상에도 가야되고, 병원에 위문도 가야되고 이래서는 생사를 윤회하는 원인을 끊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 착한 일도 하지 말라 이거야. 시시한 그런 착한 일은 하지 말라.
願入松風蘿月下(원입송풍라월하)하야
원컨대 송풍라월에 들어가서. 송풍, 소나무에 바람이 휘휘 불고 또 등나무에 달이 척 걸려있는 깊은 산 속. 얼마나 멋진 풍경입니까? 송풍라월! 아주 고송이 있는데 그 고송에 솔바람이 불어가죠. 또 등 넝쿨이 우거진 아래서 위로 달을 쳐다보면 달이 등 넝쿨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長觀無漏祖師禪(장관무루조사선)이어다
무루조사선. 새지 않는, 닳지 않는 그런 영원한 조사의 선을 길이 관할 지어다. 그렇습니다. 장관무루조사선! 조사선이니, 조관이니 하는 이런 표현으로 봐서 틀림없이 고려 말 경의 간화선을 위주로 수행을 했던 스님이라고 봅니다.
其九는 勿說他人過失이어다
기구 물설타인과실
雖聞善惡이나 心無動念이니 無德而被讚은 實吾慚愧
수문선악 심무동념 무덕이피찬 실오참괴
요 有咎而蒙毁는 誠我欣然이니라 欣然則知過必改요
유구이몽훼 성아흔연 흔연칙지과필개
慚愧則進道無怠니라 勿說他人過하라 終歸必損身이
참괴칙진도무태 물설타인과 종귀필손신
니라 若聞害人言이어든 如毁父母聲이니 今朝에 雖
약문해인언 여훼부모성 금조 수
說他人過나 異日에 回頭論我咎니라 雖然이나 凡所
설타인과 이일 회두론아구 수연 범소
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譏毁讚譽에 何憂何喜리오
유상 개시허망 기훼찬예 하우하희
頌曰
송왈
終朝亂說人長短타가 竟夜昏沈樂睡眠이로다
종조난설인장단 경야혼침락수면
如此出家徒受施라 必於三界出頭難이니라
여차출가도수시 필어삼계출두난
그 다음
其九(기구)는 勿說他人過失(물설타인과실)이어다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지어다. 좋은 말이죠. 이건 세속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입니다. 특히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남의 과실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한다든지 하면 나에게 덕 될 일 없죠. 괜히 시간만 뺏기죠. 그리고 口業만 짓구요. 우리가 구업을 삼가야 되는데 사람들이 자꾸 구업을 짓는다구요. 좋지 않은 일입니다. 세속에서도 그렇습니다. 누가 잘잘못하는 것 눈에 들어오고 귀에 많이 들어오죠. 그렇더라도 그런가보다, 그건 그 사람 인생이려니, 그 사람 몫이려니, 내가 언제 그 사람 바르게 살라고 보태준 것 없잖아요. 대통령이 아무리 못해도 대통령 잘 해라고 내가 대통령 나왔을 때 잘 해라고 선거비용 1억이라도 보태준 적 있나요? 그런 일도 없으면서 잘 하느니 못하느니 괜히 시간 낭비죠. 나 자신만 손해를 보는 거죠. 그건 한 예고 이웃이라든지 친구라든지 심지어 형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안통하거든요. 말해봐야 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 스스로 인생이 철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말하면 오히려 빗나갈 수 있습니다.
雖聞善惡(수문선악)이나
비록 좋다는 말, 악하다는 말을 들으나
心無動念이니
마음에 움직이지 말지니
無德而被讚(무덕이피찬)은
덕도 없이 칭찬을 듣는 것은
實吾慚愧(실오참괴)요
실로 나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죠. 사실은 이걸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내가 잘 한 것도 없는데 잘 했다고 칭찬 듣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게 복 감하는 일이죠. 그런데 오히려 사실은 내가 조금 잘못했든지,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도 비난을 듣는다든지 욕을 듣는다든지 하는 것은 업장 소멸되는 것이라서 사실은 그게 좋은 거예요. <금강경>에도 그런 말이 있죠.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에 능히 업장을 청정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수행을 잘 하고, <금강경>을 잘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다fms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면 과거 생에 지옥에 들어갈 업인데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불교는 세속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깨달은 사람들의 이러한 이치를 배우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덕도 없이 칭찬 듣는 것은 복을 감하는 일이고, 내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들어야 되고, 설사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오해를 해서 나를 비난한다, 욕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건 내 업장 소멸이라서 진짜 보약이예요. <증도가>에서도 그런 것을 배웠죠. 그게 그야말로 약이라고. 비난의 소리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약이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조사 스님들도.
有咎而蒙毁(유구이몽훼)는
허물이 있는데 비방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誠我欣然(성아흔연)이니라
진실로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다. 지적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아주 기뻐하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欣然則知過必改(흔연칙지과필개)요
내가 그것을 기뻐할 것 같으면 허물을 알아서 반드시 고치게 될 것이고
慚愧則進道無怠(참괴즉진도무태)니라
내가 잘 한 것도 없는데 칭찬을 듣는 것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워할 줄 알면 도에 나아가는데 게으름이 없다. 내가 잘 하지도 못했는데 공부 잘 한다고 칭찬을 하는데 이것 참 큰일 났다고. 내가 게을러서 안되겠다고. 다른 사람의 칭찬과 기대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열심히 열심히 정진해야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진도무태죠. 도에 나아가는데 게으름이 없는 것이니라.
勿說他人過(물설타인과)하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終歸必損身(종귀필손실)이니라
결국 가서는 바드시 나 자신이 손해보이는 데로 돌아온다. 남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나 하면 남은 네 손가락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그런 표현이라면서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이 한 가지면 내 허물은 네 가지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결국 그 한 가지 허물을 지적하다보면 그 허물을 지적하는 그 사실이 벌써 허물이다. 그게 나에게 크게 손해를 보이는 일이다.
若聞害人言(약문해인언)이어든
만약에 다른 사람을 훼방하는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如毁父母聲(여훼부모성)이니
부모를 훼방하는 소리처럼 들어라. 옆의 도반들이 뭔 소리 많이 하죠. 비방 많이 하죠. 같잖다고 하고, 어째 그럴 수가 있냐고 하고, 인간도 아니라고 하고, 배신했다느니 그런 식으로 이야길 하면 자기 부모를 비방하는 소리처럼 들어라.
今朝(금조)에 雖說他人過(수설타인과)나
그리고 오늘 아침에 딴 사람의 허물을 말하나 다른 날에는
異日(이일)에 回頭論我咎(회두론아구)니라
머리를 돌이켜서 나의 허물을 이야기한다. 뭐 내일 아침까지 갑니까? 화장실에 가면 앉아있던 사람들은 화장실에 간 그 사람의 욕을 하는 거죠. 그러다 그 사람이 돌아오고 또 딴 사람이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 간 사람의 욕을 이쪽 사람들과 어울려서 또 하는 거요. 이게 인간들의 어리석은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하는 짓거리입니다. 그래요 그게 사실인걸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고. 여기에는 그래도 오늘아침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이야기하다가 다른 날에는 머리를 돌려서 내 허물을 이야기한다고 아주 느긋하게 잡았지만 뭐 일 분, 이 분 사이입니다.
雖然(수연)이나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비록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허망하죠. <금강경>에서 잘 배웠지 않습니까?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뭐 남을 칭찬하는 거라든지 기뻐하는 거라든지 비방하는 거라든지, 내 자신의 일이 됐든 딴 사람의 일이 됐든 간에 다 모두가 허망한 거라. 그리고 다 평등하게 허망한 거예요. 칭찬도 결국은 空으로 돌아가고, 비난도 결국은 空으로 돌아가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평등해요.
譏毁讚譽(기훼찬예)에 何憂何喜(하우하희)리오
그러니 나를 비방하고 헐뜯고 또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그런 일에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하겠는가? 不動心! 부동심이 되어야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된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 칭찬과 비방에 동요하지 않으면 남을 그 사람이 비방할 까닭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 움직이지 않으면 남을 비방하는 일이 거의 없죠.
凡夫가 道를 통하지는 못했어도 道人의 경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있어요. 八風驅動(팔풍구동)이라야 도의 경지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 세 해 예 친 기 고 락. 이게 여덟 가지 바람인데 이 여덟 가지 바람 중에 한 가지만 날려보면 그 사람이 바람에 흔들리나 안 흔들리나 그것을 보고 도인이다 아니다, 수행이 됐다 안됐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칭찬과 비방이라든지, 이익과 손해라든지,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든지 이런 관계들입니다. 이 세. 자기에게 이익 보는 거라든지 손해 보는 거라든지 이런 등등. 이런 바람에 동요가 되느냐 안되느냐를 보고 도인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첫째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남의 비방을 하지 말아야 되고, 비방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야 되고, 또 남이 잘 하고 못하는 데 내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돼. 내 마음이 움직이면 그만 비방하게 된다고요. 저절로 비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수행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되지만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다 더불어 사는 거니까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頌曰(송왈) 終朝亂說人長短(종조나설인장단)타가
그 날 아침이 다 하도록 어지럽게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말하다가
竟夜昏沈樂睡眠(경야혼침락수면)이로다
밤이 이슥하도록 혼침에 떨어져서 잠자는 것을 즐기도다. 이게 어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如此出家徒受施(여차출가도수시)라
이와 같은 출가는 한갓 시주의 은혜만 받는 것이라
必於三界出頭難(필어삼계출두난)이니라
반드시 삼계에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에 흔들리지 말라. 남을 비방하고 칭찬하고 그러면 낮에는 남의 장점 단점 이야기하다가 밤 되면 그만 혼침에 떨어져서 세상 모르고 잠만 퍼질러 잔다는 거지. 출가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산다면 시주의 은혜만 잔뜩 짊어지고 죽어서 나중에 시주 집에 가서 소가 되어 은혜를 갚는다. 또는 뭐 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는다는 경고의 예화가 수없이 많습니다. 반드시 삼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其十은 居衆中하야 心常平等이어다
기십 거중중 심상평등
割愛辭親은 法界平等이니 若有親疎면 心不平等이라
할애사친 법계평등 약유친소 심불평등
雖復出家나 何德之有리오 心中에 若無憎愛之取捨
수복출가 하덕지유 심중 약무증애지취사
하면 身上에 那有苦樂之盛衰리오 平等性中에 無彼
신상 나유고락지성쇠 평등성중 무피
此요 大圓鏡上에 絶親疎니라 三途出沒은 憎愛所纏
차 대원경상 절친소 삼도출몰 증애소전
이요 六道昇降은 親疎業縛이니라 契心平等하면 本
육도승강 친소업박 계심평등 본
無取捨니 若無取捨인댄 生死何有리오
무취사 약무취사 생사하유
頌曰
송왈
欲成無上菩提道인댄 也要常懷平等心이어다
욕성무상보제도 야요상회평등심
若有親疎憎愛計하면 道加遠兮業加深하리라
약유친소증애계 도가원혜업가심
其十(기십)은 居衆中(거중중)하야 心常平等(심상평등)
이어다
대중 가운데 살면서 마음이 항상 평등을 유지하도록 하라.
割愛辭親(할애사친)은 法界平等(법계평등)이니 若有親疎(약유친소)면 心不平等(심불평등)이라
애착을 베어버리고 어버이를 떠난 것은 법계에 평등이니, 출가한 사람들은 바라문교라든지 힌두교라든지 출가수행이 근본으로 되어있는 종교인들은 똑 같죠.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구요. 법계에 평등하다는 거요. 若有親疎(약유친소)면 그런데 다 그렇게 집 떠나와서 남남들끼리 사는데 만약에 거기에 친한 사람이 있고 또 성근 사람,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면 心不平等(심불평등)이라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평등하게 똑같이 대해줘야 된다는 거지. 그런데 그게 어렵죠. 그저 조금이라도 코드가 맞거나 마음이 통하면 개인적으로 빌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고, 조금 자기와 의사가 안맞으면 경계하고 경원시하는 예들이 많죠.
雖復出家(수부출가)나
비록 다시 출가했다 하더라도
何德之有(하덕지유)리오
무슨 덕이 있겠느냐? 德이라고 하는 것은 得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큰 덕은, 우리가 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얻는 게 있다는 거야. 덕이 있는 사람은 뭐든지 얻습니다. 돌아오는 게 있습니다. 덕은 득야라하는 표현이 있거든요. 얻는 게 없다는 거요. ‘얻을 득’자로 봐도 좋습니다. 덕이 있으면 얻는 게 있으니까 무슨 얻을 게 있겠는가?
心中(심중)에 若無憎愛之取捨(약무증애지취사)
마음 가운데 만약에 미워하거나 사랑하고 또 거기에서 취한다 버린다는 것이 없을 것 같으면
身上(신상)에 那有苦樂之盛衰(나유고락지성쇠)리오
몸 위에 苦樂의 성쇠가 있을 수 없다. 고와 락과 성하고 쇠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벌써 모든 것이 평등하다. 그 평등은 전부가 空으로 돌아간다. 空으로 돌아가니까 평등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이 그 본질이 공적한 평등의 경계에서 인연에 의해 이런 현상이 드러났을 뿐이죠. 그러니 그게 본질이고 본모습이라. 그러니 거기에 성쇠도 없고 고락도 없다는 것입니다.
平等性中(평등성중)에 無彼此(무피차)요
평등한 성품 가운데 피차가 없고 너니 나니도 없고, 본래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이고
大圓鏡上(대원경상)에 絶親疎(절친소)니라
크고 둥근 거울위에는 친소가 없다. 거울에 서면 남자가 서도 비춰주고, 여자가 서도 비춰주고, 도둑놈이 서도 비춰주고, 선행을 잘 하는 사람이 서도 비춰주고 다 비춰 줍니다. 거울이 그렇듯이 우리 마음이 거울과 같이 번뇌가 텅 비어 버리면 어떤 사람이든 거기에 분별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보내주는 그런 대원경과 같다는 깨달음의 마음, 깨달은 사람의 마음을 대원경에다 비유를 합니다.
三途出沒(삼도출몰)은 憎愛所纏(증애소전)이요
이 삼악도에 나왔다 빠졌다 들락날락 하는 것은 오직 미워하고 애착하고 사랑하는 그것 때문에 얽힌 것이다.
六道昇降(육도승강)은 親疎業縛(친소업박)이니라
삼악육도- 지옥, 아귀, 축생 거기에 인도, 천도, 아수라를 더하면 육도가 되죠. 거기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친하다, 성글다, 나와 가깝다, 멀다하는 속박 때문에 생긴 것이다.
契心平等(계심평등)하면
마음을 평등한 데 계합할 것 같으면, 마음의 평등함, 마음은 평등합니다. 그 평등한 마음. 이렇게 봐도 좋아요. 마음의 평등한 도리에 계합할 것 같으면
本無取捨(본무취사)니
본래 취하고 버릴 게 없나니
若無取捨인댄
만약에 버리고 취할 게 없을진댄
生死何有(생사하유)리오
생사인들, 죽고 사는 것이 있을 까닭이 있느냐? 그게 도의 경계죠. 있으면 <자경문>을 이렇게 엄하고 철저하게 쓰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읽어보면 상당한 도의 경지에 오른 분임에 틀림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頌曰 欲成無上菩提道(욕성무상보리도)인댄
무상보리도를 이루고자 할진댄, 가장 높은, 이 세상에서 높다 높다 해도 이 깨달음의 길보다 더 높은 게 없죠. 그래서 가장 높은 보리의 도를 이루고자 할진댄,
也要常懷平等心(야요상회평등심)이어다
또한 요컨대 항상 평등한 마음을 품을 지어다. 평등한 마음을 내용을 알고 보면 안품을래야 안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너도 空하고 나도 空하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그게 내가 없다는 소리 아닙니까? 너도 없다는 소리예요. 모든 게 없는 그것이 결국은 본질이고 본성인데 똑같이 평등하거든요. 똑같이 그렇거든요. 그러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이 몸 갖고 더불어 살지만 마음은 텅 비고 그래서 차별하지 말고 평등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아주 기본적인 조건이다.
若有親疎憎愛計(약유친소증애계)하면
만약에 친한 사람, 먼 사람, 미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道加遠兮業加深(도가원혜업가심)하리라
도는 더욱 더 멀어지고 업은 더욱더 깊어지리라. 출가해서 도 닦는다면서 업만 잔뜩 더 깊이 쌓아두면 잘못 되도 너무 잘못된 거죠. 또 부처님과 인연이 되어서 한 마디라도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높은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래도 뭔가 근묵자흑이라고 먹 가까이 해서 검은 물이 튀어서 옷이 검어지듯이 우리가 부처님과 조사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고 이 말세라도 이런 공부를 함으로서 정신이 바짝바짝 나고 겨울에 찬물에 세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한번 씩 가짐으로 해서 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이 되어야겠죠. 도가원혜업가심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도는 더욱 더 가까워지고 많아지고, 업은 더욱더 얇아지고 가벼워지고 나아가서 업은 텅 비워져야 바람직한데, 반대로 도는 얇아지고 업은 깊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정신을 우리 마음에 새김으로 해서 이 순간만이라도 나의 인생은 아주 말쑥하고 푸른 가을 하늘과 같은 텅 빈 삶이 안되겠는가 생각합니다.
일생이라고 하는 것을 필름으로 제작했다 했을 때 우리가 공부하는 이 순간 30분이라면 30분, 40분 짜리의 필름은 어떤 색깔일까? 이런 것을 나는 가끔 생각해 봐요. 우리가 100년을 살았다 그러면 100년짜리 긴 필름인데 우리 일생이 별별 색깔과 별별그림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 가끔씩 말쑥한 가을 하늘과 같은 순간이 그래도 있고 이것이 더욱 더 잦아지고 많아진다면 아주 보람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자경문>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문녹취:불퇴지님)
첫댓글 마음 가운데 애착을 떠나는 것이 사문이요, 세속을 그리워 하지 않는 것이 출가다.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비록 작은 선행이기는 하나, 다 이것은 生死의 윤회에 원인이 될 뿐이다.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라.잘못한것이 없는데 비난을 듣는것은 전생의 업을 소멸시키는 일이다.8풍에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道人이다.모든 것이 다 허망하니(칭찬,비난도 모두 空이다.) 나를 비방하고 칭찬하는 일에 무엇을 근심하고 기뻐하겠는가?
마음 가운데 만약 미워하거나 사랑하고,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몸위에 고락의 성쇄가 있을 수없다.평등한 성품 가운데는 너와 내가 없으며 크고 둥근 거울 위에는 가깝고 먼것이 없다.있는 그대로 비출뿐이다.삼악도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오직 미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요 육도(지옥,아귀,축생,인도,천도,아수라)에 들락날락 하는 것은 친하다,멀다,하는 업 때문에 속박되는 것이다.마음의 평등한 도리에 계합할것 같으면 취하고 버릴것이 없나니 만약에 취하고 버리것이 없을것 같으면 生死인들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무상 보리를 이루고자 할진댄 항상 평등한 마음을 품을지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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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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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없는 끝을 봅니다. 예전에 초발심자경문 공부를 했는데 새삼스럽네요..... 문자에만 매달려 실체를 보지 못함도 새삼 느껴집니다. 마지막 강의를 시작으로 다시한번 공부해야겠습니다.ㅎㅎ
_()()()_ 나 자신에 있는 부처님을 찾고 찾고 찾아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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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_
고맙습니다
가르침을 잊지 않고 새기고 싶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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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九(기구)는 勿說他人過失(물설타인과실)이어다 -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지어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대각합장()()()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입조심 사문 출가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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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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