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캄보디아 불교의 역사
캄보디아 불교사 (상)
History of Buddhism in Cambodia
1. 수완나부미
스리랑까의 사서인 <대사>(大史, Mahavamsa)를 보면, 인도의 아쇼까(Asohka) 대왕이 파견한 전법단(傳法團: 선교단)이 수완나부미(Suvannabhumi: 크메르어로는 "수완나뿜")(역주1)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주1) 여기서 말한 "수완나부미"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은데, 대륙 동남아시아의 한 지역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버어마의 타톤(Thaton) 지방에 있던 몬족(Mon) 왕국이라는 설도 있고, 태국 중부 및 이싼(Issan) 지방이라는 설도 있다.
“연대미상의 싱할리어(스리랑카어) 문헌들을 보면, 불교도였던 위대한 통치자 아쇼까 대왕이 기원전 3세기에 동남아시아의 “수완나부미”(황금의 반도)에 전법단을 파견해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들 자료들은 기원전 274년에 아쇼까 대왕의 도성 빠딸리뿌따(Pataliputta)에서 개최된 경전 결집(結集, Samgiti)대회(역주2) 직후, 2명의 승려 소나(Sona)와 웃따라(Uttara)가 전법을 위해 이 지역으로 파견됐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일 수도 있지만, 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매우 오래 전이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9세기에 동남아시아의 고대 제국들이 흥기하기 이전까지, 아마도 불교는 당시의 주류였던 바라문교(힌두교, 브라흐만교)나 토착적인 정령신앙과 세력을 경쟁했거나 혹은 병존하는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이 초기 시대에 부분적으로는 인도 상인들을 통해 이 지역으로 인도문화가 유입되었다. 최초로 조직화된 크메르 국가 푸난(Funan: 1세기-5세기) 왕조가 출현했을 때, 단지 바라문교나 불교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인도의 사회적 관습과 제도들도 받아들였다."(주2)
(주1) 빌헬름 가이거(Wilhelm Geiger)가 번역한 The Mahavamsa, chapter 12.
(주2) Tully, John. France on the Mekong.
(역주1) "수완나부미"는 빨리어이고, 산스끄리뜨어로는 "수와르나부미"(Suvarnabhumi)이다. 일반적으로 이 맥락에서 "수와르나"는 "황금"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접두어 "수"(su)는 "좋은", "훌륭한"이란 의미이고, "와르나"(varna)는 "계통", "계보", "가문"을 의미한다. "와르나"의 가장 원초적 의미는 "색깔"(color)이란 의미이다. "색깔"을 뜻하는 현대 크메르어 단어 "뽀아"가 바로 "와르나"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크메르어 "뽀아"는 외국인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잘 분석해보면 VARNA가 됨을 알수 있다.
(역주2) 붓다의 사후에 그의 어록을 기록하기 위한 경전결집대회가 수차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방전승(대승불교권)과 남방전승(스리랑카 계통)에서 전하는 결집대회 내용이 그 횟수와 시기, 장소 면에서 다소 다른데, 아쇼까왕 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경전결집대회가 있었다는 것은 양 전승에서 고르게 전하고 있다. 당시에는 필기도구가 부족하여 주로 수백명의 승려들이 모여 의견합의를 본 부분을 운문의 형태로 만든 후, 수백명이 함께 암기하며 운율에 맞춰 노래하듯 합송했다. 따라서 "결집"(Samgiti)을 "합송"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암송의 전통은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문화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고, 그 암송능력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현대에도 간혹 인도에서는 <마하바라따>(힌두교경전) 암송대회가 열리곤 하는데, 얼핏보아 커다란 책 20권 정도의 규모를 한 사람이 암기하는 일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
2. 푸난 왕조
기원전 100년경부터 서기 500년경 사이에 푸난왕조(Funan)가 출현해, 오늘날의 메콩 삼각주(Mekong Delta) 지역에 근거를 두고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이의 교역로를 장악하고 번영했다. 이 왕조는 주로 힌두교를 국교로 신봉하여, 왕들은 위쉬누(Vishnu)나 시와(Shiva)와 같은 힌두 신들의 숭배에 지원을 하였다. 이 시대의 불교는 부차적 종교로서의 위상만 지니고 있었다.
산스끄리뜨어로 새겨진 서기 375년경의 한 비문을 보면, 푸난에 이미 불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국왕 꾸안딘야 자야와르만(Kuandinya Jayavarman: 478-514)은 불교를 육성하고, 산호에 조각한 불상을 모신 전법단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했다.(주3)
586-664년 사이에 "왓 쁘레이 위어"(Wat Prey Vier)에 건립된 또 다른 산스끄리뜨어 비문에는, 형제지간이었던 두 명의 불교승려 라따나바누(Ratnabhanu)와 라따나싱하(Ratnasimha)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측 문헌들은 5세기 후반 캄보디아에서 불교가 매우 번성했다는 것과, 자야와르만(Jayavarman) 왕이 중국 황실의 한 기념식에 인도 승려 나가세나(Nagasena)를 사신으로 파견한 일을 기록했다.(주4) 서기 450년경 이후로는 불교가 확실하게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7세기에 이 지역을 여행한 중국의 구법승 의정(義淨: I Ching) 역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3) Gyallay-Pap, Peter. "Notes of the Rebirth of Khmer Buddhism," Radical Conservativism.
(주4) Dawson, Philip. The Art of Southeast Asia. |
3. 첸라왕조
푸난왕조를 이어 이 지역에 성립된 첸라왕조(Chenla)는 500-700년경 사이에 존속했다. 첸라의 영토는 메콩 삼각주에서 시작되어 메콩 강과 떤레 삽 강 주변의 평야를 따라 이어졌다.
"13세기 중국의 사가 마 투안린(Ma Tuan-lin, 馬端臨)의 <문헌통고>(文献通考)에 따르면, 4-5세기의 푸난에는 1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여기서 비구와 비구니들이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마 투안린은 중국 황제가 이 시기 푸난에서 2명의 승려들을 초빙해 산스끄리뜨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502-556년에 작성된 <양서>(梁書, Liangshu)는 535년 루드라와르만(Rudravarman) 왕이 인도 승려 구나라따나(Gunaratana)의 인솔 하에 승려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 사절단이 야자수 이파리에 기록한 대승경전 240부를 가지고 546년에 중국에 당도했다고 한다. 루드라와르만 왕이 중국 황제에게 12척(3.7 m) 길이의 붓다의 모발을 보내달라고 한 것을 보면, 붓다의 유품에 대한 신앙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주5)
첸라 왕조에서 이미 불교는 쇠퇴하고 있었지만 삼보 쁘레이 꾹(Sambor Prei Kuk)에서 발견된 서기 626년경의 비문이나,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 상 조성을 기록한 791년경의 시엠립의 비문들을 보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메콩 삼각주 지역에서 발견된 전-앙코르 시대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산스끄리뜨 경전에 기반을 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stivada) 종파가 이곳에 존속했음도 알 수 있다.(주5)
600-800년 사이에는 크메르 양식의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많은 수의 대승 보살상들도 이 시기부터 조성되는데, 이 보살상들은 힌두교(Hinduism)의 시와신이나 위쉬누 신상들이 이미 조성되어 있던 지역들을 따라가며 조성됐다. 현재 인도네시아 발리에 남아있는 따 쁘롬(Ta Prohm) 사원에서 보내온 비문을 보면, 불(Buddha: 붓다), 법(Dharma: 진리, 가르침), 승(Sangha: 승단)이 번창했다고 적혀있다.(주4)
(주5) Ray, Nihar-Ranjan. Sanskrit Buddhism in Burma. |
4. 앙코르 제국
힌두교적인 신왕(神王) 숭배에서 대승불교적인 불왕(佛王) 숭배로 이행한 것은 아마도 점진적이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시와 및 위쉬누 신 숭배는 점차로 보살 숭배의 형식 속에 혼합되어 갔다. 바라문교도에게 익숙했던 시와 및 위쉬누 신 숭배는 붓다와 관세음보살을 숭배하는 종교적 행위에 방법론적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앙코르 제국(크메르 제국)의 진정한 최초의 황제는 자야와르만 2세(Jayavarman II : 802-869)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왕"(神王)이라 선언하고, 오늘날의 앙코르와트(Angkor Wat)에 가까운 롤로우(Rolous)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다. 8세기 중엽부터 9세기 초엽 사이에는 불교를 신봉하던 인도네시아의 사일렌드라(Sailendra) 왕조가 캄보디아 지역에 위성정권을 세우고 종주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연유로 자야와르만 2세는 자바(Java)의 왕궁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수마트라(Sumatra)를 방문하기도 했다. 크메르 전승에 따르면,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오자마자 스스로를 "신왕"으로 칭하고 시와(Shiva) 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국 내의 대승불교에 대해 지원을 했다.(주6) 자야와르만 2세는 캄보디아로 돌아온 후 연속해서 다음과 같은 3곳의 수도를 건설했다.
(1)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
(2) 아마렌드라뿌라(Amarendrapura),
(3) 마헨드라빠르와따(Mahendraparvata).
이들 중 하나인 아마렌드라뿌라(현재 번띠 미언쩌이 도에 있는 번띠어이 츠마[Banteai Chmar] 사원)는 불교의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주 신으로 모신 도시였다. 이로부터 그의 왕국에서 대승불교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나갔다. 스리위자야(Srivijaya) 지역에 퍼져나간 대승불교는 그 형태 면에서 벵갈 지방에 있었던 불교 왕조인 빨라(Pala) 및 북부 인도에 있었던 날란다(Nalanda) 대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대승불교였다.
“마가다의 날란다 사원은 빨라왕조(750-1060)가 후원하는 대승불교의 이론적 중심지였다. "시와 신앙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불교"(Shivaist interpretations of Buddhism)는 "딴뜨라적 신비주의"(Tantric mysticism)가 결합된 형식이었는데(이는 아리안족[Aryan]이 인도로 들어오기 전의 인도 북동부 지역의 토착적 종교 형태이다), 곧 마가다 전역과 동남아시아의 반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자바 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9세기 후반에 롤로우 인근을 지배했던 야쇼와르만 1세(Yashovarman I : 889-910)는 이러한 날란다의 절충주의에 영향을 받은 "시와 신앙 혼합적 불교신앙"(Shivite Buddhist)을 갖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계자들(특히 자야와르만 7세)은 쉬와신은 물론 위쉬누신과 브라흐만신을 숭배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가계가 바라문(사제) 계급에서 유래했음을 재확인하곤 했다. 특히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II)는 불교를 심도있게 연구하기도 했다."(주4)
사일렌드라 왕조는 자바 섬에 환상적인 불교사원인 보로부두르(Borobudur: 750-850) 사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캄보디아에서 이뤄진 후대의 전설적인 앙코르 건축 계획에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 점은 앙코르와트(Angkor Wat)와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 두드러진다.
앙코르 시대 캄보디아 불교의 주요한 특징은 대승불교였는데, 이 불교는 딴뜨라적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자바 및 수마트라, 깜보자(Kamboja: 현재의 캄보디아)에서 딴뜨라불교(Tantrayana)가 성행했다는 것은 인도와 관련된 대승불교 및 시와교(Sivaism)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9세기 무렵의 비문을 보면, 이미 자야와르만 2세의 왕궁에 밀교경전(Tantric texts)의 교설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11세기의 비문은 "빠라미 딴뜨라"(Tantras of the Paramis)(역주3)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분명 밀교의 신격인 헤와즈라(Hevajra) 상이 앙코르 톰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수많은 비문들은 여러 국왕들이 바라문 스승(guru, 구루)의 지도 하에 "대-비밀수행"(Vrah Guhya)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와교 문헌들은 딴뜨라의 교설이 시와교 교설 속으로 서서히 혼입되어 들어왔음을 기록했다. (중략)
하지만 밀교가 대단한 중요성을 획득했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였다. 이곳에서 대승불교와 시와신 숭배는 딴뜨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 시기에는 양 종교 사이에 절충적 모습들도 형성되었다. <상향까마하야니깐>(Sang Hyang Kamahayanikan)은 산스끄리뜨어 경전에 대한 고대 자바의 주석서로, 대승불교 및 만뜨라승(Mantrayana)(역주4)의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주6)
앙코르 제국이 세력을 확대해나감에 따라, 불교 역시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887-889년 사이에 요사와르만(Yosavarman) 왕은 여러 불교 사원들을 창건했다. 이 사원들은 우주의 신비주의적 축이라 할 수 있는 메루 산을 만달라 형태로 표현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원은 앙코르 사원군 근처에 있는 "프놈 껀달"(Phnom Kandal: "중심 산"이란 의미)이다.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II : 944-968)는 불교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 그는 시와교도로 남긴 했지만, 불교도였던 까윈드라리마타나(Kavindrarimathana)를 재상(영의정)에 기용했다. 라젠드라와르만 2세의 아들 자야와르만 5세(Jayavarman V) 역시 시와교도로 남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재상이었던 끼르띠빤디따(Kirtipandita)로 하여금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육성토록 하였다.(주6)
(주6) O'Murray, Stephen. Angkor Life.
(역주3) 빨리어 "빠라미"(Pāramī)는 산스끄리뜨어 "빠라미따"(Pāramitā)와 동의어로서, "완성" 혹은 "완성시킴"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업"을 정화시키는 수행의 방편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문 대승불교권에서는 "바라밀"(波羅蜜) 혹은 "바라밀다"(波羅蜜多)로 번역되었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6바라밀의 교리로 정착되었지만, 그 범주구분에는 10바라밀 등 변형들이 존재한다. 흔히 대승권에서는 초기불교의 수행방법을 계, 정, 혜 3학에 있다고 하고, 대승의 수행방법에는 6바라밀이 있다고 일반화되었고, 상좌부불교에는 없는 교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도 "빠라미"의 범주들이 존재하며, <불종성>(佛種姓, Buddhavamsa) 같은 문헌에서 10 빠라미를 가르치고 있다.
(역주4) "만뜨라"란 일반적으로 "신비로운 힘을 갖는 언어"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문"(呪文)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단순히 주문을 외우는 행동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여러 종교적 수행체계들이 함께 하여 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접미사 "야나"(yana)는 "수레"란 의미로, 바로 "대승" 혹은 "소승"이라 할 때의 "승"(乘)에 해당한다. 오늘날 크메르어에서 탈것의 명칭에 자주 사용되는 "여운"이란 말도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적절한 선행 번역어를 찾을 수 없는 관계로 일단 "만뜨라승"으로 번역해놓았다. |
4.1. 수랴와르만 1세
자야와르만 7세만 제외한다면, 수랴와르만 1세(Surayvarman I : 1002-1050)야말로 불교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인용각주 필요) 그는 원래 지금의 태국 남부에 있던 시 탐마랏(Sri Dhammarat) 왕국 출신이다. 그는 크메르 왕위에 대한 따밀-말레이계(Srivijaya) 찬탈자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크메르인이므로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말레이반도(끄라반도)에 있던 불교왕국 땀브라링감(Tambralingam)의 왕이었다. 그는 궁정 전통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시와와 라마(Rama)를 숭배했지만, 실제로는 대승불교에 헌신적인 왕이었다.
수랴와르만 1세는 대승불교의 강력한 옹호자였지만, 재위시에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 소승불교)가 출현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실로 비문들은 그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지혜를 구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최고 제사장(purohitar)이라 주장하는 "쉬와까이왈랴"(Sivakaivalya) 가문의 전통을 폐지했던 것이다. 그의 사후에 추존된 묘호(廟號)는 "니르와나빠다"(Nirvanapada) 즉 "열반에 드신 이"(깨달음을 얻은 이)라는 의미이니, 이는 곧 그가 불교도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 할 수 있다."(주6)
4.2. 자야와르만 7세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 재위 1181-1215)는 가장 위대한 크메르 불교 군주였다. 그는 국교로 정한 불교를 흥기시키기 위해 지칠줄 모르고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60세 정도의 노년이었고, 국왕에 즉위하기 전에도 오랜 기간 명상과 딴뜨라 수행에 매진한 터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얼마남지 않은 기간에 크메르 백성과 불교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업들을 추진했다.

(사진) 파리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에 보관되어 있는 자야와르만 7세의 두상. 많은 학자들이 바이욘의 얼굴상들을 자야와르만 7세를 모델로 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1177년, 베트남 중부에 위치해있던 참파 왕국(Cham)이 침입해들어와 수도인 앙코르를 약탈하고 많은 상처를 남긴 터여서, 그가 즉위할 무렵(1181년)에는 전운과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자야와르만 7세는 대승불교도였고 스스로를 "법왕"(法王, Dharma-king), 즉 "보살"(菩薩, bodhisattva)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임무는 봉사와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도 종교적 해방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였다.
학자들 사이에선 어찌하여 크메르 왕가가 이 시기에 들어와 갑작스레 힌두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포용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일반적인 학자들은, 수도인 앙코르가 참파에 약탈당하자 자야와르만 7세 및 그 백성들이 힌두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참 왕국은 힌두교도였고, 시와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아마도 크메르인들은 본능적으로 적들이 섬기는 신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자야와르만 7세는 예전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멈추고, 보다 공개적으로 불교전통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치세는 이전의 힌두교 전통과 확연한 선을 긋고 있다.
서기 1200년 이전의 크메르 사원들을 보면, 그곳에 새겨진 예술품들이 대부분 힌두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연꽃에 앉아 있는 위쉬누 신이나 <우유 바다에서 불생음료 찾기>(Churning of the Sea of Milk: 乳海攪拌)와 같은 주제들이 차지했다. 하지만 1200년 이후의 작품들을 보면, 불교의 <본생담>(Jatakas)이나 붓다의 생애와 같은 장면들이 <라마야나>(Ramayana)와 같은 주제들을 이어받아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하게 된다.
"보살 왕"(bodhisattva king) 자야와르만 7세는 생불(生佛, living Buddha) 혹은 보살로 여겨져,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이승으로 온 화신이라 생각되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위상을 현대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Dalai Lama)와 유사한 역할로 생각했다. 자야와르만 7세를 형상화시킨 조각상들은 그를 고행과 명상을 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깨달음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상수도와 병원, 사원과 객관(여관) 등의 공공시설을 대규모로 건설하기도 했다. 돌에 새겨진 비문들은 왕이 "자기 자신보다는 백성들의 병으로 인해 고통받았으니, 이 고통은 그 개인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공적인 고통이었고 국왕으로서의 고통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다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선함을 위한 깊은 연민에 가득차, 대왕은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존재의 바다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선업의 덕으로써 건져내겠노라. 또한 내 뒤를 이어 캄보디아의 왕이 되는 자들은 선행에 굳게 발을 딛고.... [그 관점에서] 왕비와 신하, 그리고 친구를 얻어야 할 것이며,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세상을 열어야 할 것이로다."
자야와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심오한 정신적 변화가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었다. 신왕(神王) 숭배의 전통은 승가(Sangha: 승단)와 승려를 숭상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그 이전에는 엘리트 바라문 사제들과 신왕을 위해 엄청난 노동력과 막대한 자원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자야와르만 7세의 치세에는 이러한 자원들이 도서관, 요사(사원의 숙소), 기반시설 등을 세우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되었고, 더 많은 양이 일반인들을 위한 "낮은 곳을 향한"(earthly) 사업들에 투여되었다.
자야와르만 7세의 왕사(王寺)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 내의 바이욘(Bayon) 사원은 벽면을 개방한 최초의 사원으로서, 신왕이나 바라문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개방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었다. 바이욘 사원의 회랑에는 신이나 왕들의 영웅적 무용담 대신 낚시와 식사, 도박과 닭싸움 등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자야와르만은 바이욘 사원을 그의 걸작으로 여겨 "신부"라고 생각했다. 한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화분과 보석으로 치장된 야소다라뿌라(Yosadharapura)의 도읍, 이 좋은 가문의 딸은 열정을 바쳐 ....... 국왕과 혼례를 올렸으니, 그의 보호의 최상의 연단에 자리하여, 어떠한 부족한 점도 없는 예식을 치뤘도다."
국왕과 백성이 치른 이 신화적인 결혼식의 의미에 대해, 비문은 계속해서 "우주를 관통하는 행복의 출산"(procreation of happiness throughout the universe)이었다고 적고 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직접 감독하여 시공한 건축물들에서는 딴뜨라불교(밀교)의 상징주의가 가득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바이욘"(bayon)이란 말은 "조상님의 도구"(ancestor yantra)를 의미하는데, 딴뜨라불교에서 수행에 사용하는 지리학적 형상을 지닌 중요한 상징체계이다. 바이욘 사원의 중심에는 "붓다-무짤린다"(Buddha-Mucalinda)의 상이 놓여져 있었다. 이 조각상은 7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뱀이 붓다의 머리 위에 닷집처럼 드리워져 수호를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이곳의 붓다는 바로 자야와르만 7세의 얼굴을 모델로 한 것이다.(인용각주 필요)
자야와르만 7세가 건설한 또 다른 사원들에는 쁘레아 칸(Preah Khan) 사원과 따 쁘롬(Ta Prohm) 사원도 포함된다. 한편 자야와르만 7세 자신은 대승불교도였지만, 그의 치세에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서서히 세력을 증대시켰음도 분명하다.
"스리랑카에 기반을 둔 상좌부불교는 11세기에 딸링(Taling: 몬족) 승려들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또한 13세기에 동남아시아 도서부로 수입된 이슬람교와 함께, 이들 양 종교는 민중들 사이의 대중적 종교운동으로 확장되어 갔다. 태국의 롭부리(Lopburi)에서 발견된 비문과 같은 증거 말고도, 수완나부미(Suvannabhumi) 지역의 종교적 성향이 변하고 있었다는 또 다른 징후들이 포착된다. 크메르 승려들이 자야와르만 7세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는 따말린다(Tamalinda)는, 1180년에 버어마 승려가 인솔하는 순례단에 참가해 스리랑카로 건너가 빨리어(Pali) 경전들을 공부했다. 그후 1190년에 크메르 제국으로 돌아와 궁전 내에서 스리랑카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또한 1296-1297년 사이 약 1년간 앙코르에 사신으로 파견됐던 중국의 주달관도 상좌부불교의 승려들이 크메르 제국 도성에 상당수 출현했었음을 기록했다."(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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