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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유일한 유인도, 세어도
서구문화원장 박한준
조사년도 : 2011.5~7월
우리가 살고 있는 서구는 현재 42만의 주민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인천에서 자치구 단위로는 가장 면적이 넓은 지역이고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으며 아시아인들의 축제가 열릴 연희동 용두산 인근의 “2014년 아시안 게임 주경기장” 기공식이 개최(6.28)되고 올 10월이면 한강과 서해가 맞닿는 “경인아라뱃길”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렇게 기반시설 면에서의 성장과 더불어 늘 함께하는 문화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서구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끈임 없는 역사와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역사와 문화 속에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문화는 그 흔적과 자료의 전승도 가치가 있겠지만 선조들의 일상 생활사에 배어 있는 풍습과 풍속의 보존 또한 그에 못지않은 가치 있는 일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하여 계승 발전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서구의 서쪽 끝 바닷가에서 저녁 노을 붉게 타오르는 낙조의 마지막 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에 세어도(細於島,별칭:세루,시루)라는 섬이 자리하고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서천도(西遷島)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곳에 가려면 현재는 동구 만석동(만석부두)에서 출발해 40 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섬이다. 섬의 연면적은 0.408㎢이며 섬의 형태는 가늘고 길게 동에서 서쪽으로 늘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세어도는 서구 경서동 소속의 섬에서 1914년 원창동에 이속된 섬으로 조선시대 삼남 지방에서 세곡을 운반하던 길목에 있어 한양으로 가는 마지막 정박지여서 자연스럽게 인근지역 주민들이 모여들어 한때 60~70호가 있었고 주막도 생겨 섬이 활기찼었다고 한다. 기록상에는 1783년경 세어도에 정박해있던 세곡미 운반선(조선:漕船)이 폭풍으로 침몰했다는 기록과 그 세곡운반선의 정박으로 인해 자연스레 주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831년에 이르러서는 원창동의 최씨 성을 가진 이가 세곡미 저장소 포구장이었으며 이 시기에 강화에서 정씨, 김씨, 이씨가, 통진에서 김포의 채씨가 처음으로 세거를 시작하면서 세어도 개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어도에는 부둣가 인근에 자리한 마을에 26세대의 주택이 있다. 마을에는 1980년대까지 송현초등학교 세어분교가 있었는데 졸업식은 본교에서 했다고 하지만 한때 전성기에는 3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현재는 이 분교자리에 마을회관과 갯벌체험장이 들어섰고 학생들은 모두 육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섬에는 몇몇 주민만이 거주하고 있어 조용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특히 겨울철에는 거의 육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세어도에 남아있는 고유지명으로는 부둣가 인근의 ‘윗말’, ‘아랫말(동끝,서끝)’과 ‘당재(당산)마루턱’, ‘막개(섬중앙)’, ‘논개(섬끝)’, ‘간나지때뿌리’ 등이 있지만 현재는 마을주민이 거의 없으니 그 지명을 아는 이도 많지가 않은 실정이다.
이곳에는 섬의 머리 부분을 비롯해서 세 곳의 얕은 언덕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끝(논개) 서북쪽 지척에는 “작은 세어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섬은 겨울과 봄철에 바람이 세차고 물이 부족하며, 민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고 유속이 빠르다고 한다.
거주 주민의 증감요인으로는 예전에 세곡선이 정박 할 시기에는 활기가 넘쳤지만 구한말 개화기에 배의 규모가 커지고 이 곳을 경유하지 않고 한양으로 직접 운항하게 되면서 어촌 마을로 변하며 차츰 인구수가 줄다가 1960년대부터 10여 년간 세어도의 앞부분(머리부분)인 부둣가 앞쪽 산에서 시작된 채석으로 한때 많은 외지인들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채석장의 시작은 마을주민인 “채성환”씨가 대표가 되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채석한 돌은 주로 연안부두 매립공사에 쓰였고 당시 인부는 300 여명에 이르러 마을이 한때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에도 육지에서 행하던 마을제인 동제(도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매년 정월달에 날을 정해 마을과 가정의 안녕과 평안 그리고 풍어를 기원했다고 한다. 동제는 마을 북쪽 당재에서 유교식 제사 형태의 제를 행했다고 하는데 제물로는 소를 잡고 떡을 하고 조라 술을 담그는 등 일반 제사상 차리듯 차렸다고 한다.
마을원로(최영식,7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제를 지낼 때 제물로 소를 택하는 이유는 세어도의 생김새가 동·서로 길게 뻣어 있어 마치 뱀처럼 생겨 돼지를 제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하는데 이는 돼지가 뱀의 천적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곳의 동제날이 정해지면 25일간 마을에서는 부정한 행위를 금하고 외지인의 섬 방문과 주민의 외지 출입도 금하면서 언행과 행실을 자중하며 제의를 준비했다고 한다. 동제에 사용할 물은 북쪽의 자연샘에서 정갈하게 길어 술을 담그고 음식을 장만했다고 한다. 동제를 지내던 곳인 당재에는 흙담으로 집을 짓고 초가를 올린 당집이 있었고 당집 안에는 항아리와 삼신(신령)초상이 걸려 있었지만 이를 증언해준 예순에 가까운 마을 주민이 어린 시절의 일이고 평소 당재 인근에는 거리를 두어 정확히 그 그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다른 분의 증언에 의하며 동제날 하루 전 당집의 접시에 기름을 담아 불을 밝히고 다음날 그 불이 꺼지지 않으면 섬이 길한 일이 생기고 꺼지면 흉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마을의 공동묘지는 당재 뒤편에 마련되어 있었고 상여집은 당재 밑 남쪽계곡에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상여집에 보관해둔 상여를 이용했는데 상여는 당집이 있는 당재를 돌아 마을 뒤쪽의 공동묘지를 향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도 2000년도를 끝으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서구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당집이 있는 당재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 그곳에 있는 소나무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고 어린이들은 접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곳 당재의 소나무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예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잡풀이나 잡목 하나 없이 파란 솔이끼만 있어 한여름에도 이곳만은 시원했으며 마을주민 모두가 신성시 한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마을의 공동제사였던 동제는 20여 년전(1990년말)부터 중단되고 있다고 한다.
당집이 있는 당재에는 지금도 소나무 군락이 현존하는데 그동안 소나무의 수가 많이 줄고 몇 해전 태풍(곰파스)으로 인해 일부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200여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들 중 가장 큰 것은 밑둥의 둘레가 234㎝나 되고 높이가 20여 미터에 이른다.
예전에는 이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마을주민들이 즐기기도 했다고 하는데 태풍으로 인해 그 나뭇가지가 훼손되어 아쉽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소나무는 모두 33그루로 오늘도 크고 작은 옛 사연을 간직한 채 당재를 지키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도 정성으로 가꾸고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곳에는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는 수호목들이 있는데 부두에서 마을을 오르는 언덕 좌측의 단풍나무과(고뢰쇠나무) 고목은 동네 주민들이 “김첨지 나무”라는 별칭으로 보호하며 훼손하거나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내력을 알고 있는 주민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나무 역시 200여 년의 수령을 간직하며 마을 동편을 지키고 있다.
다만 마을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봄철에는 새우와 준치를 잡고 여름에는 농어와 숭어를 잡는데 배가 출어하여 만선을 하고 무사하게 돌아올수 있도록 이나무 밑에 술과 떡을 마련하고 고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또 육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이곳 마을회관 좌측 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나무둘레가 280cm정도에 전봇대 만큼의 높이로 한여름이면 풍성한 그늘을 제공해 주며 마을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 고욤은 가을 첫서리가 내리면 그 맛이 달아 예전에 어린이들이 많이 찾던 간식이기도 했지만 이곳의 고욤나무는 열매가 없다며 마을 주민들은 아마 숫나무가 아닌가 싶다고 전하는데 봄이면 연녹색 꽃을 피우기는 한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몇 해 전만해도 부둣가 인근에 오래된 고목(살구나무)이 있어 가지에 그네를 매고 탔었다고 하는데 관리소홀로 없어졌다고 전한다.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20여 분 걷다보면 예전에 민가가 있었다는 자리에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의 둘레는 250cm를 넘는다. 세어도 전 지역에서 식수로 사용했던 자연샘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봄이면 어김없이 고사리가 돋아난다고 한다. 고사리는 섬 전지역 중 이곳에서만 자생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잡목(굴피나무)을 헤치고 10여 분을 더 북쪽으로 가다보면 섬의 끝부분에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강화도가 눈에 들어오는데 백중사리나 바닷물이 많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걸어서 강화도를 오갈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벼랑끝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몇십년을 지내고 있는 엄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모습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봄이면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엄나무순을 채취해 반찬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섬 끝에서 북서쪽으로 위치한 작은 섬을 만날 수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그 섬을 “작은 세어도” 라 부르고 있다. 그 섬은 무인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며 수령은 큰 세어도의 소나무 수령 정도일 것이라고 하는데 본섬에서 물이 빠지면 걸어서 왕래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밖에 세어도에 자생하는 나무들은 단풍나무, 진달래, 굴피나무 등이 있고 특히 참나무(상수리나무·도토리나무)가 많이 있는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많이 열려 예전에는 주식대용으로 충분하리만큼 그 양이 많았다고 한다.
예전부터 세어도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수였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물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예전에는 여덟 곳에 샘을 마련했는데 그중 세 곳만이 자연샘(옹달샘)이 있어 마을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 세어도 중앙길이나 해안가 징검다리를 걸어 한참을 아낙네들이 오고 갔다고 하는데, 현재도 해안가에 남아있는 과거의 징검다리는 썰물일 때만 이용됐었다고 한다. 현재도 식수로 사용되는 우물의 물은 부족한 상태이다. 다만 생활용수로 쓰고 비상시에 화재예방용으로 사용할 물은 당재에 마련된 정수장의 저수조와 자연수를 보관시키는 담수시설뿐이다.
이 섬에서는 해안가 마을이나 섬에서처럼 봄이면 산나물이나 해안가 해초를 나물로 해 먹고 있는데 섬의 동쪽 편에서 많이 자생하는 ‘개주알나물’을 봄에 채취해 데쳐서 초고추장에 무쳐 먹기도 하고 밥 지을 때 밥이 뜸이 들 때 쯤 넣고 쪄서 간장에 비벼 먹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어촌마을로 여러 종의 물고기를 잡지만 농어가 대표어종으로 알려져 있다. 농어는 6월 첫물부터 나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요즈음에는 그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농사는 농지가 적어 반찬거리 정도의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나마 얼마 전부터는 노루나 고라니의 개체수가 늘어 밭농사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60여 마리의 노루와 고라니를 처분해 개체수를 줄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섬 곳곳에는 고라니나 노루의 서식지로 보이는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섬의 중간지점을 조금 지나면 1900년대 중반에 인삼을 재배하던 삼밭의 흔적도 남아 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앞에 1970년 초에 3년여동안 벼농사를 짖던 허씨성을 가진 이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물이 부족하고 염분이 많아 실패를 했고 1970년대에 이 섬에서 조림지를 조성하여 밤나무, 미루나무, 오동나무, 아카시아를 심었다고 전한다.
이상에서 세어도의 어제와 오늘에 이르는 생활사와 풍물, 풍습 등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세어도에 전해지는 일화 중에 “세어도 앞머리 일대에 모래가 쌓이면 세어도 주민들이 부자가 된다” 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세어도 인근에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생기고 여러 곳의 간척지 사업으로 인해 둑이 생기면서 세어도에 모래사장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세어도는 개발의 흔적이 적어 조용하고 한적한, 낭만적인 섬으로서의 여유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민들의 생활이 불편함을 겪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현대 문명의 발전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 도시인들은 바쁜 일상에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향유의 욕구와 갈망으로 자연을 찾고 여유와 휴식을 기대하는데, 섬주민 대다수가 육지에 나가 생활하고 있지만 육지에서 가까운 이곳 세어도에 섬주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붉게 솟아오르는 희망의 동편 태양이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일몰의 붉은 노을을 고스란히 머금고 숱한 세월을 지켜온 세어도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기차게 살아가며 삶을 영위 할 수 있게 될지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기일수록 좀 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배려와 개발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번 훼손된 자연은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과 경제적 부담이 크다는 점이 고려되었으면 하는 염원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