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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좌(성경의 힘) - 제32강 설교와 교육 3부(교회교육 이대로 좋은가?)
주일낮 주일밤 수요일 계속 이어져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큰 흐름을 타고가는 역사, 대하처럼. 그래서 우리가 대하드라마 그런 것 있죠? 대하드라마중에 드라마가 성경이죠.
그래서 인간이 이땅에 발붙히기 시작해서부터 역사가 끝날때까지 아니면 새하늘과 새땅까지 전체를 한꺼번에 흘러가는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한번하고 다시 돌아와서 창세기부터 다시 돌아와서 다시 두 번째 나훔서까지 하고는 그 교회를 사임을 하는 바람에 중단이 됐는데, 제가 지금 다시 교회를 개척해서 1년반 남짓 되었는데, 창세기부터 이사야까지 왔어요.
그 사역의 한 텀(Term)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교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번 마치면 사역의 한 텀(term) 기간을 정하고 그래서 좀더 빨리 할수 있다면 좋겠어요. 좀더 빨리 할수 있다면 3년 만에 마쳤으면 안 좋겠나.. 제가 가끔 강단을 비우고 성경강좌에 간다든지 아니면 방송국에 간다든지 해외에 성지순례를 간다든지, 어떤 외부의 출강 때문에 강단을 가끔 비우는 수가 생기니까 4년 7개월쯤 걸렸는데, 성실히 자기 강단을 지키고 능률적으로 조금 잘 정리하면 3년정도하면 큰 흐름을 다 설교할수있겠다 싶은데..
그렇게 할때, 지금까지 설교할 때 한두절 정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설교에 짧아도 한 장, 길면 석장에서 다섯장. 한 번 설교때.
그리고 그때는 강해설교처럼 하는것도 아니고 주석설교처럼 하는것도 아니고 본문설교처럼 하는것도 아니고, 그 책을, 그 부분을 쭈욱 그날의 본문을 쭈욱 같이 읽으면서, 그 본문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뜻이 그대로 드러나면 끝나는 겁니다. 성도들을 재미있게 할 이유도 없고, 그냥 그대로 성경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전달되게만 해요.
그렇게 하니까, 한 4년 넘어 걸렸는데, 강단을 비우지 않고 꾸준히 하는분 같으면 3년 내지 3년 반정도면 끝나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해 볼때, 성도들의 믿음이 빨리 자랍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예습하기 좋아요.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설교자가 뭘 어디에 설교할지를 아니까, 읽어올수 있어요. 저는 읽어오라고 그렇게 다그치지 않지만 읽어오는 분이 있을텐데, 읽으면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겠죠? 그 이해 안되는 부분을 예배시간에 와서 같이 읽으면서 설명들으니까 ‘아! 이말이 그말이로구나’ 하고 이해가 된단 말이죠. 집에가서 복습할수 있겠죠. 그러면 예습하고 학습하고 복습, 예습 학습 복습, 예습 학습 복습. 이렇게 하면 성도들의 믿음이 부쩍 자라는 거예요.
제가 그 설교를 처음 시도했던 그 교회에 첫 부임했을때, 부임하자마자 가정을 한번 방문하잖아요. 처음 부임 심방을 가는데, 한 가정에 가니까 여집사님 한분이 자기는 앞으로 교회에 안 나올거라고 해요. 아니 목회자가 새로와서 인사하러 왔는데, 만나자마자 다시는 교회에 안나온다고 하니까 얼마나 섭섭합니까 제가.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목사가 새로 왔다는데 나와보고 마음에 안들면 안나오더라도.. 일단 나와봐와죠’ 그러니까 ‘그러면 나가보죠’ 그래요.
그래서 나왔어요. 나왔는데, 설교를 여기했다 저기했다 하지 않고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하니까 이분이 하는말이, 그 다음 제가 또 심방을 갔거든요. ‘지금은 나올만 합니까?’ 하니까, 나올만 하데요. 왜 나올만 하냐니까, ‘옛날 목사님들은 여기했다 저기했다 해서 도저히 종잡을수 없는데, 목사님은 차근차근 하니까 다 알아듣겠네요’ 그러면서..
그래서 성경 분량이 좀 크고 주제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부분은 우선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싶어서 제목설교를 하죠 보통. 그런데 그렇게만 해가지고는 대개 믿음이 확신이 안 서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맨 근원부터 시초부터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것을 다 알아서 이야기가 나오니까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아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믿음의 질이 달라져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성경적 역사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기초부터 바로 놓이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옛날에는 어려웠는데 지금은 우리 국민들 우리 성도들이 워낙 수준이 높습니다.
수준이 높기 때문에 처음에 조금 준비하기 힘들지만, 모든 설교자들이 아까 우리가 제목설교부터 시사설교까지 20여가지 설교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보다 더 좋고 더 완전한 더 바람직한 설교는 제가 지금 소개하는 대하설교가 아니냐.
그래서 저혼자 하기 아까워서 아쉬워서 모든 목회자들이 한번 다 해봤으면 좋겠다. 모든 한국교회 강단에서 모든 세계 기독교 교회가 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배울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식으로 성경 전체를 바르게 가르쳤다면 이단 사이비나 아니면 무료성경신학원이나 저런 사람들이 설치지 못할거야.
우리가 성경을 너무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잘 모르는 그것을 딱 캐치하고는, 빨리 그들이 무료성경신학원 이런걸 만든거거든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성경을 너무 모르니까. 설교부터 교육 전체가 성경 전체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도 빼지말고 가르치는 것.
우리가 설교자라고 할때, 혹은 전도자라고 할때, 혹은 교육자라고 할때, 교육을 한다고 할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면, 첫째가 정직이고, 둘째가 성실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말씀 맡은자, 말씀 전하는 자, 말 심부름 하는 자의 성실이라는 것은 더하지 말고 빼지말고 누락하지 말고 왜곡하지 말고.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것을 알아듣게끔만 해서 그 말씀 앞에 인격적으로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게하는 것, 이것이 설교자의 사역이 아닌가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저는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 모든 설교자들이 한번쯤은 대하설교, 다시말하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절도 안빼도 한번 다 설교해본다는 것. 큰 영광이요, 또 큰 막중한 책임이기도 하고, 또 보람도, 제가볼때 이제는 제가 다른 설교는 물론 누가 한시간만 설교해달라하면 제목가지고 할 수밖에 없는데, 한 강단을 책임지고 맡았다, 한 교회를 맡았다 할때는 반드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절도 빼지말고 설교할수 있는.. 그런 설교자들이 다 되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마 설교역사를 공부하다가 이런식으로 저와같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안빼고 다 설교한 분이 있었는가 하고 찾아봤는데 별로 찾지 못했어요. 못하고 한 분을 제가 찾았는데, 칼빈, 존 칼빈이라는 분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3장까지 설교했어요.
그 설교한 내용이 주석이 된 겁니다. 그게 칼빈 주석이야. 진짜 자기교회에서 설교한 겁니다. 그게.
우리 목사님들이 아마 칼빈 주석을 한번사서 읽어보시면 우리 한국에서 가장 수준높은 설교하는 것 보다 족히 10배는 수준이 높습니다.
칼빈의 주석을 읽어보면 오늘 한국 강단에서 가장 수준높은 수준보다 10배쯤 수준이 높아요. 그런데 칼빈은 지금부터 500년 사람이니까 500년전 그 당시에 성도들의 수준은, 이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수의 성도들이 글을 모르고 책도 없을때입니다. 그럼에도 그정도 수준높은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반대로 우리 국민들 성도들의 수준이 이만큼 높아졌는데, 설교는 점점 퇴보하고있고 설교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점점 짧아지고 있고, 아예 설교가 그냥 내용도 없고 힘도 없이 짧아집니다. 이른바 열린예배 하는데는 5분 설교하고 10분 설교하고 축도하고 마쳐버리고 이런식으로 하는데, 다시말하면 설교라는 것이 우리 교회에서 별로 힘이 없어져 버렸어요.
저는 지금도 역시 교회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교육인데, 예배시간에 설교를 가지고 교육 다 끝이나는게 아니지만, 교육이 따로 없으니까 예배시간만큼이라도 말씀을 좀 흘러야겠는데 너무 흐르지 않다고 봅니다. 흐르지 않아요. 말씀이 교회까지 왔고 성경책에까지 와서 오히려 설교자에 의해서 말씀이 막혀있는 것 같애요. 정체되고 있는 것 같애요. 물과같이 흘러가야 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컴퓨터를 사다가 여기에다 만약에 윈도즈라고하는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셋업이 안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거예요. 이 컴퓨터 속에 윈도즈라는 안에 기계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운영체제(Operating System)파일이 심어져서 셋팅이 되어야만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죠. 사람 속에 66권의 진리의 말씀이 체계화되어 셋팅이 되어야 돼. 그정도의 어떤 목적 목표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심어가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가 그런 말씀 교육을 너무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하거나 미흡하게 했기 때문에 유럽교회가 이미 다 힘을 잃어버리고 다 주저앉아 버렸어요.
저는 지금도 제가 섬기는 교회 혹은 저와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66권의 말씀을 다 심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66권을 제대로 심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만들어보자. 그렇게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설교를 한다고 할때, 원칙이 있습니다. 원칙이.
설교를 할때 원칙이 있는데, 제가 그 원칙 10가지를 설명하겠는데..
첫째는 더하지 말 것. 하나님 말씀에 자꾸 쓸데없는 것을 더하지 말 것.
어떤분들은 설교하러 올라가면서 온갖 철학자들을 모시고 올라가서 철학자 이름이 난무해요. 강단에서. 별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렇게 해야지 무슨 하이데커가 어떻고.. 스피노자가 어떻고.. 스피노자는 하나님도 안믿는 사람인데 범신론자인데. 마르틴 부버가 어떻고.. 임마누엘 칸트가 어떻고.. 그런 철학자나 신학자 이름을 갖다대면 유식하게 보이는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무 힘이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그런 괜히 사람들의 이론을 더하지 말 것.
두 번째는 누락시키지 말 것. 빼먹지 말 것. 저는 제가 믿기로는 66권중에 필요없는 책은 한권도 없다고 봅니다. 설교자 목회자 하나님 말 심부름 맡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66권의 말씀을 위탁 받았어요. 가르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다 필요해요.
그래서 누락시키지 말고 전해야 하고.
세 번째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왜곡하지 말 것.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지 말 것.
네 번째는 능률적으로 전하자는 겁니다.
무슨얘기냐 하면 너무 노닥거리지 말고 너무 세월보내지 말고 빨리
인생은 짧고 성경은 두껍고 한데 그렇게 한주일에 한두절해서 어떻게 전하겠어요? 어떻게. 빨리빨리 능률적으로.
그 다음에 효과적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효과적으로 전해야 돼요.
여섯 번째는 품위있게. 설교하는 분들이 모션이 너무 크면 광대 같애요. 무당같아 보이거나 광대같이 보이게 하지말고 차분하게 조용하게.. 여러분 예수님은 그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는 거야.
여러분 진리는 소리가지고 승부나는게 아닙니다. 진리는 조용해도 충분해요. 그래서 차분하고 품위있게 조용하게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품위를 잃어버리면 권위까지 떨어뜨려져 버려요.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수많은 말씀들이 품위를 잃어버리고 권위까지 상실해 버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이 힘이 없어져 버립니다
정말 진리는 조용해도 괜찮습니다. 대개 내용이 없을수록 고함을 지르죠. 너무 고함을 지르면 성도들이 들어내기 힘들어요. 웅변이라는것은 길어야 7분 8분이상 못 듣습니다. 조용하게 하면 한시간 해도 문제가 없어요. 품위있게 전하고,
그 다음에 일곱 번째, 이해하기 쉽게 전해야 됩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성도들이 다 알아듣는지 확인해 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해야됩니다.
우리 교회는 아동부가 어른예배에 같이 참여해요. 그러니까 아동들이 알아들어야 되니까 저는 얼마나 쉽게 하겠습니까. 아동부가 알아들을수 있도록 쉽게해요.
가끔 아이들이 편지가 옵니다. ‘목사님 그런데요 목사님 설교가 조금 어려워요.’
내가 조금 어렵게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죠. 그 다음부터는 조금 쉽게 할려고 노력하죠.
그 다음에 실천하면서 전해야 돼요. 우리가 설교자가 본인이 실천하지 않으면서 설교하면 힘들어집니다.
물론 내가 할수 없다고 성경 읽는 것을 빼면 안됩니다. 내가 할수 없어도 성경을 빼먹으면 안돼요.
나도 내가 설교하면서 설교듣는 입장이 되니까, 실천하면서 전하는게 중요합니다.
그 다음 아홉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분이 그런말 하죠. 우리 설교를 제일 잘 듣는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 제일 잘 듣는분이예요. 하나님은 내 뒤에 듣는거죠. 성도들은 우리 앞에서 듣지만 하나님은 내 뒤에서 듣고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게 바울이 한 말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항상 하나님 면전에서. 그야말로 ‘코람데오’라고 하죠? 코람데오. 일반 사람들이 삶을 사는 것도 ‘하나님 면전에서 산다’ 이렇게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되는데, 설교자는 오죽하겠습니까? 설교자는 ‘하나님이 내 뒤에서 내가 하는 것을 듣고 있다’라고 생각하시고 진짜 듣고 있겠죠.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열 번째,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전해야 됩니다. 설교하는 분이 어떤 사실을 놓고 ‘이렇게 볼수있다고 생각할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해봐. 하하하. 그러면 힘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딱부러지게. 그렇게 선포를 해야돼요. 어정쩡하게 그러면 안돼요.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분명한 것 아니면 말하면 안되고 확신있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평가할것인가? 우리 또 평가 한다고 해서 성도들이 듣고가서 목사님 설교 평가하고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일단 두가지 관점에서 봐야되겠는데,
첫째는, 바르게 하느냐? 바르게 하느냐 하는 것은 텍스트(Text)인 성경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는가? 하는 것이고, 잘된 설교라는 것은 콘텍스트(Context), 상황에 딱 들어맞느냐?
그래서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상황에 딱 바르게 적용되게끔 했다면 그것은 잘 한 설교입니다. 둘다 잘 맞아떨어졌으니까.
그런데, 두가지 기준을 가지고 x, y 축을 만들어서 도표를 그리게 되면, 제일 잘한 설교는 어떤거냐 하면 바르게 하고도 성경말씀을 바르게 읽어내어, 그리고 사람들에게 바르게 적용하게하는.. 그게 최고의 설교예요. 최상의 설교죠.
그 다음에 성경은 바르게 이해를 했는데, 적용면에서 조금 합당치 않게 조금 미흡하게 한 설교인데, 조금 못하는 설교예요. 바른 설교인데 조금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용은 바로 알아놓고 그 적용을 잘못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차선의 설교예요. 차선의 설교. 이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잘못된 설교가 있어요. 성경도 옳게 이해도 안된걸 가지고 대상도 맞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거야. 이것은 하나마나한 설교예요. 무익한 설교예요.
그리고 해로운 설교(최악의 설교) 가 있어요. 마지막으로 네번째. 틀린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하하.
성경을 옳게 읽지도 않고 엉뚱한 소리를 멋들어지게해요. 걸쭉한 입담을 갖고. 이것은 아주 해독을 끼칩니다. 교회에다가. 그래서 틀리는 것 같으면 잘 못해야 되는데, 틀린 것을 잘해버려봐. 이것은 아주 위험한거예요.
그래서 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정통해야 되고, 설교를 잘할수 있기 위해서는 바르게 아는 것은 성경을 잘 알아야되고, 잘 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사람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콘텍스트(Context), 상황을.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를 완전히 이해할수 있는 그런. 인생을 달관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면서도 잘하는 설교. 이것은 모든 설교자가 목표로 삼아야되겠죠. 이런 설교할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바르게는 하는데 좀 잘 못하는 설교. 이렇게 하는 사람 가끔 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 기량이 좀 아쉽기는 해도 역시 성경을 바르게 알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아요. 저는 이정도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바르지도 않고도 잘못하는 설교.. 무익한 설교이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이 없어요. 그런사람이 설교하면 교회가 점점 성도가 줄어듭니다.
그런데 성도가 줄어드는 이유를 다 아는데, 목사만 모르는 교회가 있어요. 이런 교회가 문제인데, 상당히 있어요. 실제로.
바르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고 이러는수가 있어요. 이런분은 신학을 안해야 할분이 한거야 솔직히.. 그런수가 있어요.
그 다음에 최악의 설교가 뭐냐? 제가 이것을 경계할려고 하는건데, 한마디로 최악의 설교란 뭐냐? 바르지도 않은데 잘하는 설교. 아까 말씀드렸죠? 이것은 성경본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애기를 하는데도 걸쭉한 입담과 그럴듯한 글솜씨 말솜씨를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설교. 이것이 심하면 이단이 되는 거예요. 이단.
그리고 잘못하면 기독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수가 있고, 악한 영향력이 너무 커서 하나님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설교, 이런것들도 있을수가 있어요. 조심해야 되겠죠?
마지막으로 정리합시다.
설교의 자세는 정직하게 해야되고, 성실하게 해야돼요.
그래서 시간이, 만약에 설교할 시간까지 5분만 10분만 남아있어도, 정말 내가 바르게 읽었는지 바르게 이해했는지 이렇게 전달하면 사람들이 알아 듣겠는지.. 끝까지 정직과 성실을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설교에 설교자의 개인 감정이 들어가면 곤란해요.
설교자의 개인 감정이 설교에 실려나오면 그것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제 감정을 털어놓고 그러면 곤란해요.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예배설교에서 책망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가지고 사람을 공격하거나 사람을 책망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의 근본도 잘 몰라서 그래요. 이 다음에 따로 예배학에 대해 공부를 하면 좋겠는데, 그럴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설교를 가지고 누구를 공격하거나 특히, 공격하더라도 김일성이를 공격하는 것 괜찮아요. 그런데 자기 성도를 공격하거나 책망하거나 예배시간에 설교를 가지고.. 이것은 안됩니다. 일절.
이것을 신학교에서 안가르쳤는지 못가르쳤는지 수많은 설교가 자기 교회의 어떤 사람을 겨냥해서 표적설교를 하는거야. 그래서 누구를 질책하거나 아니면 공격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죠.
그 다음에 예배시간의 설교는 너무 길면 곤란합니다. 예배시간 전체 시간이 있기 때문에 너무 길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소원이 개입되면, 감정만이 아니라 설교자의 목적 목회자의 목적 목회자의 소원 이런 것이 설교에 묻어나오면 그 설교는 순수성이 많이 훼손됩니다. 가끔 설교를 들어보면 그런게 있어요.
목회자의 목회 성공주의적 요소가 그 설교안에 들어있는 수가 있는데 이런것은 위험해요. 조심을 해야돼요.
그 다음에 말씀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면 안됩니다. 본문은 읽어놓고 본문과 아무상관없는 어뚱한 소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가끔. 이런 설교는 잘못된 설교입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간증이 설교에 나올수 있지만 절제해야돼요. 너무 자기 간증을 하면 하나님을 자랑해야되는데 까딱하면 자기를 자랑하는 수가 있어요. 그것은 위험한거죠.
이런 것은 괜찮습니다. 간증도 자기가 잘못믿어서 실패한 이야기. 괜찮아요. 너무 많이 하면 곤란하고 조금하면 괜찮은데, 어떻든 그 간증은 절제될 필요가 있어요. 너무 많이하면 안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임질수 있는 설교를 해야돼요. 항상 설교자는 마지막으로 설교 강단에 나갈대 내가 책임질수 있는 설교 내용을 가지고 나가느냐 이런 생각을 꼭 해봐야돼요.
이렇게 기본으로 우리가 설교한다고 할때, 여러분 제가 너무 어렵게 만든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원래 제가 준비한 것은 우리 성도들 누구나가 다 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려운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하고 쉽게 이야기할려고 했는데, 부담을 너무 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설교하시는 분들은 이미 지금하고있는 분이 대부분이니까, 이런 기본자세를 가다듬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해서, 아까 우리가 설교의 목적을 봤잖습니까?
그런 목적이 우리 설교자들의 노력과 정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최선을 다할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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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육 이대로 좋은가?>
지난시간에는 우리가 ‘설교와 교육’ 이라고 했었는데 설교부분에 시간이 다 가버리고 교육은 다루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교회교육에 대해서 같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텐데, 제목을 아예 나누어서 교회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 지금 이대로 나아가도 괜찮겠는가? 그런 주제를 가지고 시간을 보낼려고 합니다. 아마 충분히 시간을 보낼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주제라고 생각이 들고요,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는 일반 세상보다 항상 앞서가는 입장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 교육은 세상교육보다 더 밀리고 더 뒤지고 미흡하고 그런 것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아무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 교회 교육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하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별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교육이라고 할때는 사실은 저는 교회교육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 학교까지 다 포함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것을 늘 인식을 하고 저는 목회자로서 사역중에 거의 70%가 교육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예배는 굉장히 열심히 드리는데, 예배에 비해서 교육이 너무 빈약하다고 봐요.
그래서 제는 한나라나 민족이나 한 교회 그리고 가정 개인 할것없이 흥망성쇠가 거의 다 99.9%가 교육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한 나라 한 민족 역사 가정 개인 회사 교회 할것없이 그 전 운명이 그 승패가 교육에 달려있다고 봐요.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교회 성장과 성숙과 성화 역시 교육에 달려있죠. 그리고 교육에 달려있다는 말은 다른말로 교사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 교사의 역사관 세계관 가치관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교육철학이 나오는데 그 사상이라든지 교육철학이라든지 교사라든지 교육 제도 프로그램 전체를 한번 다 점검할려면 두시간으로는 어림도 없고 한 학기로도 모자랄 거예요.
아예 아동 교육학이 있잖아요. 그렇게 해도 모자라는데, 저는 그 넓은 것 다 커버하기는 어렵고 두 시간에 걸쳐서 교회교육에 대해서 조금 돌아볼려고 해요.
여러분 우리가 구약성경을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굉장한 능력을 받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들면 모세라든지 사무엘이라든지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이런분들은 다 굉장한 분들인데, 아무리 구약성경을 봐도 그런 위대한 사람들이 교육에 힘썼다하는 흔적은 거의 찾아볼수가 없어요.
여러분 공감합니까? 엘리야가 교육 별로 한것같지않죠? 아합을 찾아가서 ‘내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거요’하고 도망가버렸지 교육은 무슨 교육.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교육을 한게 없어요.
엘리사도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그런 이름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어려운 일에서도 구원할수 있는가 이런것을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은 했지만 별로 교육은 한것같이 않다 말이죠. 그리고 요나가 가서 니느웨에 가서 그냥 성의없이 하루 외치기만 했지, 그 니느웨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무엇이며.. 이런 것을 학생들 모아놓고 가르치고한 이런게 없어요. 그래서 구약시대에 있어서 그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그 많은 예언자 선지자 선견자 이런분들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있었지만 교육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1000년인데, 1000년 역사가 죄악으로 얼룩져있는, 그런 모습을 볼수 있어요.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그 예수님께서 딱 오시자마자 제일먼저 하신 것이 제자를 부른거야.
그런 것 같애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를 먼저 부르시고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고 시작한거야.
예수님의 사역을 볼때 가르치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 각색 병든자를 고치시더라 하는데, 그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신다 하는데, 아마 예수님 사역 중에 가장 역시 중요한 것은 제자를 삼았다는 거야.
12명을 제자로 삼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도 바로 교육이 지금 거의 전무합니다. 사실은.
지금 현재 교육을 두고 우리가 조목조목 짚어보면, 제가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의 교육의 70가지 문제를 지적할거예요.
한 70가지 지적하다보면 여기에 아무리 교육 열심히 하고 있는 교회도 아 우리 많이 미흡하게 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될텐데..
그래서 어떻든 중요한 것은 저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지상명령도 교육으로 되어 있어요.
성경 한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28장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서 전도해서 신자를 삼으라 한게 아닙니다. 신자를 삼으라한게 아니고 가서 모든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했어요.
여러분 남을 제자를 삼을려면 우리 자신이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 실력도 준비도 없는데 누가 우리 제자 되고 싶어 하겠어요. 그러니까 교사가 되겠다는 분 남을 제자삼겠다는 분들은 부단히 공부를 해야돼요.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실력있는 분을 교사라 이렇게 하지 않고 진짜 실력있는 분은 학자라고 해요. 학자가 뭐예요? 왜이렇게 조용해? 학자가 뭡니까? 배우는 사람이예요. 우리는 그저 학자니까 당연히 가르치지 않겠나 싶은데, 학자가 되어야 교사가 되는 거야.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수 없어요. 부단히 배우고 그리고 가르칠려고 해야되는데, 가르치는것도 없고 지금 진심으로 배우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애.
이 문제를 제가 어설프게 다루지 않고 신학교부터 문제가 있어요. 신학교에서부터 성경을 제대로 안 가르치기 때문에 학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교사는 다 학자가 되어야되는데, 학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가르치는 곳이 없으니까 배울데가 없어요.
제가 첫머리에 처음 메인 타이틀이 ‘설교와 교육’이었는데, 설교 부분은 지난번에 다루었고, 교육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말할 때, 교회교육을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는가? 문제제기를 해서 이야기를 할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말씀도 가서 모든 사람에게 가서 환자를 삼아서 병을 고쳐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전파하라 그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상명령의 키워드 핵심이 뭐냐하면 제자를 삼아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라는 겁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신자에게 세례를 줄려고 했죠? ‘믿습니까?’ 해서 세례주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애요. ‘믿습니까?’ 해서 세례주는게 아니고 ‘제자입니까?’ 물어서 ‘예 제자입니다.’ 그러면 세례줘야돼요.
다시 보세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앞에 뭐예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라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무시한 것 같죠? 하나님 말씀을. 그렇죠? 그냥 신자만 되면 예사로 세례를 줄려고 했는데, 앞으로는 신자만 안되고 ‘제자되기를 원합니까?’ ‘제자가 되겠습니까?’ 물어봐서 세례를 주도록. 그래서 앞으로 아마 우리 샤론교회에서는 세례받기가 조금 어려워질겁니다. 제자가 되어야 세례받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가르치지 않은 것을 지키게 할수 없어요. 가르쳐서 제자를 삼아서 그리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됩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그 ‘너희’라는 사람은 누구냐하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그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여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말고 하나님이 함께하도록 해봐요. 어떻게하면 함께하는거요?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그리고 가르쳐서 지키게 하면 그런사람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할 것을 하면.. 하나님이야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애가타는 분이야.
우리가 엉뚱한짓 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지금 여러 가지 많은 문제앞에 봉착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 문제는 인식을 하는데, 대안을 거의 내놓지 못해요. 그 대안이 뭐냐? 교사예요. 교사.
지금 우리 일반 교회학교 교사 이런식으로 수고는 참 많이 했어요. 했는데, 교육이 너무 안된거야. 교사부터. 그러니까 교회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이런 상태로 가서는 앞으로 한국교회는 거의 희망이 없다는 거야.
제가 교회교육 문제를 나중에 심도있게 해서 각론에 들어가면 70여가지를 지적해보면, 정말 우리가 교회 교육을 너무 등한히 소홀히 했다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기독교 교육하면 교회학교 영아부 교육부터 시작해서 신학대학까지 광범위한 영역인데, ‘오늘날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하는 말은 신불신간에 교회 안팎에서 다 해요. 지금 세상이 교회를 염려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은근히 ‘개신교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염려를 많이 해요.
제가 신문을 거의 인터넷판 신문을 중요한 신문을 거의 다 보는데, 거의 신문마다 기독교 염려하지 않는 신문이 없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 개신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는데, 인식도 못하고 한국 기독교의 어른이 없어요. 어른이 있어도 인정도 안해주고. 그래서 정말 그런 것은 위기라 할수 있겠죠?
그런데 누구도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있고,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해도 괜찮겠는지 우리가 깊이 생각할 일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교육의 어제와 오늘, 다시말하면 교회 교육의 과거, 그리고 오늘 현실, 미래. 미래에 교회교육은 어느 방향으로 갈것인가? 우리 교회교육의 전망이 있는가 하는것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짚어 나가보겠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근원이 어디에서 발단 하느냐?
1.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제가 신학을 7년가까이 했는데도, 거기에서 66권중에 한권도 제대로 배운 책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성경을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성경강좌에서 가르치는 것은 전부 거의 독학으로 혼자 공부하다시피 한 것이고, 신학교에서 배웠다 한것은 거의 없어요. 신학교는 마치 성경을 이미 다 알고있는것처럼 간주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 학부 온사람이 성경 아느냐? 66권중에 단 한권도 아는게 없죠. 그저 성경종합문제 몇백문제 풀면 상당한 실력을 이미 갖고 있는걸로 간주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한권도 바르게 배운게 없는거예요.
2. 사회가 안정되어 불안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도 열정도 식어졌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민주화되고, 안정되면서 불안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되니까, 하나님께 대한 열심도 없고 기도도 좀 느슨해져버리고 복도 받을만큼 받아서 복주셔도 그만이고 안주셔도 그만이고.. 주실테면 주시고 마실테면 마시고.. 꼭 하나님께서 복 안주셔도 살만합니다. 점점 배가 부풀러지는거죠.
3. 교회가 저출산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저출산. 출산율이 그렇게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제가 알기로는 저혼자서 조혼론 다산론을 한결같이.. 저는 20년전이나 30년전이나 현재나 앞으로 10년 20년 후나 똑같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런데 그동안 전혀 우리기독교가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기독교 미래를 어떻게 어둡게 하는가? 한번도 각성한적이 없어요. 최근에 와서 그것도 사회가 걱정해요. 오히려. 대통령이나 무슨 국무위원 국회의원은 걱정하는데 교회는 아무 걱정도 안하고 있어요. 이것도 얼마나 교회가 준비없이 세상을 맞이하는가? 이 급변하는 세상을 아무 준비없이 맞이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가 큰 책임이 있습니다.
4.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화 되어 왔다.
그 다음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이 너무 세속화에 빠졌어요. 세상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세상적이야. 거의 아마 롯의 딸들이나 롯의 아내와 비슷하게 너무너무 세속화에, 세상적 욕망에 목이마른,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른게 아니라, 세상것에 대해서 너무 목말라 한다는거야. 이렇게까지 세속화되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보내는것도 그냥 세상에서 좀더 좋은 명문대학 나와서, 좀더 좋은 직장에서, 좀더 돈 더벌어서, 좀더 윤택한.. 몽땅 세속화입니다. 몽땅. 이렇게 된다면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5. 기복적인 신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설교나 교육이나 이런것들이 어떤 집회문화가 다분히 기복적이야. 그래서 ‘기독교’가 아니고 ‘기복교’. 우리 지금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고 기복교. 그냥 축복축복밖에 모르는.. 복받기위해서 믿는다. 사실은 믿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그 자체만해도 최고의 복인데, 그 추구하는 복이 너무, 그 복자체가 물질적이고 현세적이야. 이 기복신앙으로 기울어져 갔다는거야.
6. 그리스도인의 삶에 품위가 없었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품위가 떨어졌어요. 오늘 우리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품위있게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까운 일본은 기독교인의 수가 우리의 1/10 밖에 안 되요. 일본에서는 어떻든 기독교인이다 하면 일단 한수준 높은걸로 당연히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품위있게 믿으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교육을 책임지는 분이나 목사님들은 성도의 생활을 품위있게 만들어가야 돼요.
그리고 집회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찬양이나 설교나 교육도 품위를 잃지 말도록.
여러분 품위를 잃어버리면 권위도 날아가버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는 교육이 잘못되어 품위도 없고 권위도 없다는 거야.
교회가 품위나 권위를 한거번에 다 잃어버리니까 맛을 잃어 버린 거예요.
7.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시간이 없어요. 기독교인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개 성경가르치는 것은 아버지가, 어려서는 어머니가 하다가 이만큼 머리가 굵어지면 아버지가 할 일인데, 아버지들이 안 믿거나 믿어도 시원찮게 믿거나 제법 믿는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가르친다는 엄두를 못 내요. 그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자기 자녀들에게 앉았을때에든지 일어날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항상 이 말씀을 자기 자녀에게 가르쳐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예사로 무시해버리고, 아버지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그런 문화가 없어요.
그냥 교회학교 교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런 정도로 미뤄버리는데, 그렇게 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됩니다.
8. 부흥회 사경회 세미나에 심도가 없다.
그 다음에 여덟 번째는 부흥회 사경회 세미나 이런곳에 가보면 내용도 없고 깊이가 없습니다. 심도가 없어요. 그런 집회라는 것은 평소배우던 것이 너무 얇아서 심화과정이 되어야 할 텐데, 더 천박해요 내용이. 집회문화가 더 천박한거야. 너무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집회를 통해서 어떤 성도의 신앙을 좀더 깊이 좀 차원을 높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더 천박한 얘기밖에 안돼. 그러니까 부흥회 사경회 세미나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너무 내용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오늘 실제로 성도들이 교회 집회에 대해서 별로 기대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평소 주일 저녁예배때 500명 나오는 교회 같으면 집회하면 300명 밖에 안나와요. 더 적게 나와요.
그만큼 우리 앞으로 교회에서 어떤 집회를 이끌어가실분들은 충분히 준비해서 좀 심도있는 깊이있는, 좀 내용이 있고 비중이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해야돼요.
9. 설교자의 설교에 일관성이 없다.
그 다음에 설교자들이, 지난번에 말씀드린건데, 설교자의 설교가 아무 계획없는 설교예요. 대부분이.
그리고 조금 어느정도 틀을 짠다 하는 분들이 겨우 교회력에 맞추어서 설교 계획을 세우는데, 사실 카톨릭에서 나온 겁니다. 교회력의 대부분들이. 거기다가 쭈욱 교회력을 짜서 하는데, 그렇게 해봐도 여전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배울수는 없습니다. 그 설교가지고는. 일관성도 없고, 교회력이 1년에 명절 몇 번있는 거기에다가 앞뒤로 맞추어서 설교하는데, 그 설교가지고는 성경 보이지 않는 거예요.
10. 설교자의 과잉해석이 진리를 흐리게 한다.
그 다음에 때로는 설교자들이 성경해석이 너무 과잉해석. 이 과잉해석이라는 말은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 바리새인들처럼 율법학자 서기관들처럼 지나치게 성경을 과잉해석하기 때문에 본래 뜻을 흐리게 만드는 그런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설교하시는분들 깊이 각성을 해야돼요.
11. 교회학교 공과책이 일관성이 없다.
그 다음에 교회학교 공과책, 보통 총회 교육부에서 발행하는 공과책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 공과책이 오경부터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그리고 복음서 이렇게 해서 계시록까지 쫘악 어떤 일관성이 있어서 교회학교 아동부 중고등부 12년 배우면 66권 다 배운다는지 이런게 있어야될텐데..
전혀 일관성이 없고 주제별로 교육부 총회 교육부 책임 간사가 바뀔때마다 주제가 바뀌는..
이런 식의 교회 총회에서 내려오는 공과책이 일관성이 없어서, 저는 오래전부터 총회에서 내려오는 것 사양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학교 공과책은 성경이 공과책이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르쳐요.
12. 계절학교 편성이 잘못되어 왔다.
그 다음에 계절학교. 보통 우리가 여름성경학교라든지 지금은 가끔 겨울성경학교도 하는데, 그런 계절학교의 편성이 너무 잘못되어 있어요. 온통 새노래 몇 개 율동배우는데 시간 다 빼앗아버리고, 그 안에 성경을 가르치는 내용은 없잖습니까? 여러분 ‘여름성경학교’라고 타이틀은 그렇게 붙여놨는데, 여름성경학교만큰 성경 안가르치는 학교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예 성경을 안 가르칩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교육이 너무 부실하다 못해 아예 전무하다고 봐야돼요. 전무한거야. 이것 지금 교육이 되는게 아닙니다.
13. 교회 교육이 흥미위주로 흘러왔다.
그리고 일부,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교회교육이 흥미 위주로 흘러가요.
여기에도 상당수의 교사들이 앉아 있는데, 물어봅시다.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피로 맺힌 이 성경을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아이들과 교사가 울어본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하나님의 피눈물로 기록된 이 성경을 가르치다가 아이들 끌어안고 울어본적이 있냐고?
그냥 흥미위주. 흥미위주로 하다보니까 애들의 교회에 재미있다는거야. 재미있는줄 알겠는데, 재미가 없다는거죠.
지나치게 오락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아이들을 붙잡아 보겠다는 건데, 그런 아이들이 전혀 재미있어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흥미위주로 흘러가고 있어요.
14. 교회학교 교사들의 자질에 검증이 없었다.
그 다음에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학교 교사의 자질에 대해서 검증이 없어요. 아니 일반 세상의 어린이집 교사, 유치부 교사, 초등학교 교사, 중등학교 교사. 그 교사 임용될려면 부단히 공부하고 일정 고시를 쳐서 임용고시를 합격해야 교사가 되는데, 그런 정도 그 세상의 그런 수준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그정도로 검증을 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왕자들, 만왕의 왕이되신 하나님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이 아무 교사 자격 검증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저는 앞으로 몇몇분과 의논중인데, 교회학교에서 교사가 될려면 적어도 이정도는 문제를 풀어야 된다. 이정도는 어느정도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1000문제 주제를 빼내어서 객관식 하나도 없고 전부 주관식으로. 그것을 다 풀어서 최소 90점이상 나와야 임용고시에 통과하도록. 정교사가 될려면. 그 정도로.. 아니면 우리가 지금 어떤 어린 생명들의 일생이 아니라, 영생을 좌우하는 그런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분이 교사인데, 이렇게 교사를 물렁하게 길러서 (되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4부에 계속...)
[정리]
◎ 설교의 원칙
1. 더하지 말고 전해야 한다
2. 누락 시키지 말고 전해야 한다
3. 왜곡하지 말고 전해야 한다
4. 능률적으로 전해야 한다.
5. 효과적으로 전해야 한다
6. 품위 있게 조용하게 전해야 한다.
7. 이해하기 쉽게 전해야 한다.
8. 실천하면서 전해야 한다.
9.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전한다.
10.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 설교의 평가
- 바른 설교 : 성경본문(TEXT)에 성실한 설교이다
- 잘된 설교 : 대상과 상황(CONTEXT)에 맞아야 한다.
- 이 두 가지 기준을 X축 Y축으로 삼아 영역을 나누면 크게 네 가지 영역이 나타난다.
- 따라서 크게 네 종류의 설교가 있다.
(1) 바른 설교 + 잘하는 설교 = 최선의 설교
: 모든 설교자가 목표로 삼아야 할 설교.
(2) 바른 설교 + 못하는 설교 = 차선의 설교
: 설교자의 설교 기량이 좀 아쉽기는 해도 좋은 설교라 할 수 있음
(3) 틀린 설교 + 못하는 설교 = 무익한 설교
: 무익한 설교이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이 없다
(4) 틀린 설교 + 잘하는 설교 = 최악의 설교
: 성경 본문과 전혀 상관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걸쭉한 입담과 제법 그럴 듯한 글 솜씨로 수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생명을 노략질하는 설교, 품위를 떨어뜨리는 설교, 악한 영향력이 너무 커서 하나님 나라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설교
※ 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먼저 성경(TEXT)에 정통해야 하고,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시대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설교자의 자세
1. 정직하게 전해야 한다.
2. 성실하게 전해야 한다.
3. 개인적인 감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4. 예배 설교에서는 책망을 해서는 안 된다.
5. 예배 설교는 너무 길이 않아야 한다.
6. 설교자의 소원이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7. 말씀의 주제에서 벗어 나지 않아야 한다.
8. 개인적인 간증은 절제 해야 한다.
9. 책임질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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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교육의 허실
- 기독교 교육의 영역 : 교회학교 영아부 교육 ~ 신학대학의 교육
- 위기에 봉착한 기독교 교육, 그 누구도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
- 교회는 사회로부터 멸시를 당하32고 있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
◎ 교회 교육의 어제와 오늘
1.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2. 사회가 안정되어 불안이 사라졌다.
3. 교회가 저출산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4.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화 되어 왔다.
5. 기복적인 신앙으로 기울어졌다.
6. 그리스도인의 삶에 품위가 없었다.
7.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
8. 부흥회 사경회 세미나에 심도가 없다.
9. 설교자의 설교에 일관성이 없다.
10. 설교자의 과잉해석이 진리를 흐리게 한다.
11. 교회학교 공과책이 일관성이 없다.
12. 계절학교 편성이 잘못되어 왔다.
13. 교회 교육이 흥미위주로 흘러왔다.
14. 교회학교 교사들의 자질에 검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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