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앙(士昻), 호는 동담(東潭). 본관은 청주(淸州).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병학(兵學)에도 밝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사재감참봉 등을 거쳐 죽산(竹山)·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다. 94년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을 받아 특별히 훈련도감낭관에 임명되었으며, 명(明)나라에 왕래하면서 각종 무기의 새로운 기법 등을 그려 책으로 엮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근원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은거생활을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 3등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한교(韓僑)는 자가 사앙(士昻)이요 호는 동담(東潭)이니,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5세손 직장(直長) 수운(秀雲)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따라 배웠으며, 학문을 논한 왕복 서한이 있다.
천문, 지지(地誌), 복서(卜筮), 병략(兵略) 등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력 계사년(1593)에 제독 이여송이 평양성엥서 왜노(倭奴)들을 대파하니, 선조대왕께서 제독 영문에 행차하시어 전후의 승패의 다름을 물었다.
이여송이 말하기를, "먼저온 북변의 장수는 항상 북방의 오랑캐를 방어하는 전법을 익히었을 뿐이어서 싸움에 불리 했으나, 이번에 와서 구사한 병법은 척계광장군의 『기효신서』의 왜병을 방어하는 바로써 전승을 거둔 것입니다"하였다.
상감께서 척계광 저서를 보기를 청하였지만, 이여송이 비밀이라 하여 내놓지 아니하였다. 상감께서 역관에게 밀령을 내려 이여송의 휘하에서 구득하게 하였다.
상감께서 재상 유성룡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책은 알기 어려우니 경이 가히 본받을 만한 방법을 강해하라!" 하시었다. 유성룡과 종사관 이시발 등이 토론하여 이어서 한교를 적극 천거하였다.
한교는 일개 서생으로써 낭관(훈국랑)이 되어 질문 하는 것을 전장(專掌)하였다. 먼저 참장 낙상지(駱尙志)는 유성룡에게 권하기를, 뛰어난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기 전에 군사를 조련하는 법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유성룡은 말을 달려가 행재소에 아뢰고 70여인을 불러 모으고, 낙상지는 장하(휘하) 10인을 다스려 교사로 삼아 장창, 검, 낭선 등을 밤낮으로 연습하였다.
유성룡이 논사(탄핵)를 입어 곧 휴직하게 되었다. 유성룡이 백의로서 남쪽으로 돌아가려 할 즈음에 상감께 아뢰기를, "신이 비록 나라를 떠나더라도 오직 한교만은 그대로 쓰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갑오년(1594)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상신(相臣: 재상) 윤두수로 그 일을 통령케하고 한교로 하여금「살수제보」(殺手諸譜: 삼수병[포수, 사수. 살 수]중 살수는 창.칼을 들고 접전을 하게되며, 이들이 사용하는 병기의 사용법에 대한 제기록)를 번역하게 하였다.
유성룡을 잠시 잊고 윤두수로 도제조를 대신하고, 조경을 대장으로 삼고, 이덕형을 유사로, 당상관 신경진, 이홍주를 낭속으로 삼아 백성을 모집하여 큰돌하나를 능히 들거나 1장(약 3미터)을 능히 넘는자를 병사로 선발하여 10여일 만에 수천명을 얻어서 척계광의 사(射: 활쏘기), 포(砲: 총포), 감(쪼갬 즉 창칼)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가르치고, 파총초관을 설치하여 부분적으로 수개월씩 무예를 이루게 한 후 각 도에 교사를 보내 기법을 훈습(訓習: 훈련하고 익힘)하도록 하였다.
을미년(1595)에 유격을 청하여 교련하였다. 호대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삼수군(三手軍: 포수, 사수, 살수)을 가르쳤다.
무술년(1598)에 한교가 또 유격 허국위(許國威)에게 창법을 질문하고 다시 이를 번역하였다.
허국위는 호가 원진(元眞)이고, 진강인으로 무진사(武進士: 무인 진사)가 되었다. 흠차통령복영유격장군으로 보병 1,160명을 거느렸다. 무술년(1598)에 우리나라에 왔다가 기해년(1599)에 돌아갔다. 문사(文詞: 문장과 시문)에 능하였고, 기개와 의리가 있었다.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친했는데, 양호가 참소를 입었을 때 허국위(유격)는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인솔하고 상관에게 근본을 아뢰어 구하였다.
한교는 처음에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하다가 방문을 받아 천거되어 훈국에 들어가고, 또 도원수의 부름을 받아 참모관으로 군부에 출입한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그 공로로 장악첨정, 죽산부사, 의흥현감을 역임하였다. 계해년(1623)에 정국공신이 되어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지고 호조참의를 제수받았다.
갑자년(1624)의 난(이괄의 난)때 호위부장(임금을 호위하는 부사령관)을 배수받아 곡산부사로 나갔다가 그만두고, 광진나루 위에 집을 짓고 병을 빙자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을축년(1625)에 서쪽에서 변란이 또 일어날 것과 예방지책을 상소하였다. 정묘년(1626)에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그후 몇 달만에 오랑캐(청나라 군사)들이 과연 대거 침입해 오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탐복하였다.
저서로 『홍범연의사칠도설(洪範衍義四七圖設)』『가례보해(家禮補解)』『소학속편(小學續編)』『심의고증(深衣攷證)』
『무예제보(武藝諸譜)』『신서절요(新書節要)』『조련도식(操鍊圖式)』등이 있다.
참의 안방준과는 좋은 사이로, 그가 일찍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사앙(士昻: 한교의 호)의 저서는 옛 현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밉게 보여서 원수처럼 배척받아 그 책들이 장차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 더욱 애석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