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의 단상(리코3월호)
당신과 함께 영원히
2003년11월 육사 대강당에서 김충배 육사교장(중장, 육사 26기)이 당신과 함께 영원히(Forever with you)라는 색소폰 연주곡을 배경 음악으로 하고 일종의 영상 편지를 썼다. 그리고 ‘생도들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이야기한 교육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가제목이 붙은 이 글은 신구세대가 반목하지 말고 한 덩어리가 되어 국가발전을 이룩하자는 내용이다. 김유복 예비역장군(육사 7기, 79세)의 기고문(2003년6월호 로터리 코리아)을 조금 수정 보완하여 생도 교육용으로 만든 것으로 가난했던 60-70년대 이야기를 통해 신구세대의 단결을 호소한 강연 내용을 우리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요약 소개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1961년 5.16 혁명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수는 120여개국이고, 당시 필리핀은 국민소득 170달러, 태국 220달러 등이고, 한국은 76달러였다. 우리 밑에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여개국중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1961년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게도 홀대를 받고 다른 우방국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해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한테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분단국가이니 도와 달라고 사정하여 1억4천만 마르크를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 임금을 담보로 하고 빌려 경제부흥에 힘썼었다. 처음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천명이 응모하였고 정규대학 학사 출신이 상당수였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한 경우도 많았다. 독일행 비행기를 탈 때 김포공항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간 어린 여자 간호사들은 독일 시골 병원으로 분산 배치되어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리고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캐는 광부 일을 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악착같은 한국 간호원과 광원들을 보고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서독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행사장에 참석한 500여명의 간호사, 광부 모두 박 대통령 연설 후 눈물 바다를 이루고 애국가를 목메어 다 부르지 못했다. 이 때 박 대통령은 “후손을 위해 열심히 일합시다. 열심히 일합시다” 말만 되풀이 하다가 목이 메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연설 후 돌아오는 차안에서 박 대통령이 계속 눈물을 흘리니까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같이 울며 손수건을 박대통령에게 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새마을 운동 구호가 <잘 살아 보세>이다. 63년부터 76년까지 간호사 13,000여명 광부 7,800여명이 월급 110~160달러를 받았고 한국으로 송금한 금액이 국민총생산액(GNP)의 2%에 달했다. 월급에서 100마르크(당시 약2만5천원)만 남기고 500~700마르크를 한국에 송금했다. 특․야근을 하며 입지 않고 먹지 않고 한국에 있는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말이다. 1964년에 비로소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되었고,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 프라스틱 조화, 곰 인형, 쥐잡이로 수집한 쥐털로 만든 일명 코리안 밍크 등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팔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게 1965년이었으며, 거지나라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고 세계가 감탄했던 때였다. 그 후 월남 파병의 대가로 경제부흥의 주축을 만들었고 중동 건설 붐으로 열사의 땅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오늘의 한국을 일구어 냈다. 그러한 50, 60대 이상의 선배들을 수구 골통으로 몰아붙여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툭하면 반전과 평화 데모다 무슨 시위다 하면서 길거리를 막아 마비시키고 전경들과 난타전을 벌리고 하는 젊은이들은 50, 60대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오늘의 한국의 위상과 풍요로운 현상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하는 행위인지 묻고 싶다. 어떻게 만들어 놓은 오늘의 한국이냐.
서독에서 현지인과 결혼한 한국 간호사 출신 중에 상당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휴가나 해외 여행을 뒤로하고 먼저 자기 집을 장만했다. 다음으로 자식들 공부를 훌륭하게 시켜 좋은 대학을 나오게 하고 석․박사, 교수 등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키도 작은 한국 여자가 결혼 상대자로는 최고라는 말도 있다. 또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도 당신들은 안 먹고 안 입어도 당신 자식들에게는 내색을 안하고 억척스레 우리를 키우며 공부를 시켜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일본, 한국 여자 순으로 모성애가 강하고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매겨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지역갈등이고 신․구간 대립이고 끝내야 한다. 우리가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발전시켜야 되지 않느냐. 현재의 커가는 젊은이들이 우리 기성세대보다 훨씬 낫다. 우리 세대보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데도 바로 우리가 교육을 잘못했다. 한 예로 역사, 윤리, 도덕 교육이 입시 교육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권위와 직책을 앞세우기 보다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자. 당근과 채찍보다는 마음이 우러나와서 따르도록 하는 길을 택하자. 행동지침으로 소아주의를 경계하고 자신보다는 사회를, 사회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하자. 자동차 부품 도금공장 작업장에서는 한 여름 무더운 날 1분도 견디기 힘들다. 수출입 컨테이너 하역 작업도 마찬가지다. 컨테이너 속은 4-50도를 웃도는 한증탕 이상이나 작업자들은 참고 일을 한다. 우리보다 못 사는 해외 산업 연수생으로 온 파키스탄, 인도 사람들이 주로 한다. 바로 3-40년 전의 파독 광원과 간호사처럼 나라가 못 살면 국민도 비참해 진다. 우리의 청소년 교육 과정에 코를 찌르는 도금냄새를 맡으며 땀흘려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을 시켜보는 체험 학습을 시키는 것이 형식적인 봉사활동 점수를 주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 조치원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베트남과 카자흐스탄 산업 연수생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정말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3년만 벌면 귀국하여 점원이 가게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베트남 현지 급여가 월 4-50달러인데 한국에서는 물론 특․야근을 하지만 숙식 제공에 8-90만원이니 고생할 만 하다고 한다. 인도의 원료 합성 기술자도 월5백달러 정도의 급여면 협상 가능하다. 필리핀에서 온 약사도 월 550달러 정도로 근무한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급여수준과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아차 잘못하고 한눈 팔면 필리핀과 중남미 국가처럼 뒷걸음질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자.
모 일간지의 논설주간이 설파한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자. 통곡으로 대신한 애국가를 잊지 말자. 역사를 비트는 非국민이 되지 말자.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당신과 함께 영원히 갈 나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