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조는 시골 구지에서 나고 자랐다. 구불구불한 냇물과 황금빛 들판, 그리고 지게를 지고 밭을 오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어린 시절을 채웠다. 그에게는 유난히 마음을 끌었던 친구가 있었다. 구경희.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 딸이었고, 정조보다 한 살 어렸다.
처음엔 그냥 동네 친구였다. 하지만 함께 논두렁을 뛰어다니고, 감나무 밑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어느 날, 정조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경희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조 오빠, 나중에 우리도 결혼할까?”
어느 날 경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정조는 얼굴이 빨개져서 엉겁결에 “뭐, 뭐래!”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는 부모님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대구로 중학교를 보내기로 했다.”
정조는 어리둥절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다고? 여기에 있는 친구들은? 경희는?
이별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출발 전날, 정조는 경희를 불렀다.
“나… 대구로 가.”
경희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입술을 꼭 깨물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나 기다려 줄 거야?”
정조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다림이 뭔지, 사랑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그날 밤, 정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감나무 잎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정조 오빠, 나중에 우리도 결혼할까?”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구지의 첫사랑, 그리고 대구의 새 사랑
고정조는 대구로 떠나는 날, 기차 창밖으로 구지를 바라보았다. 마을 어귀의 감나무, 노란 들판, 그리고 어딘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구경희. 그러나 기차는 멈추지 않았고, 구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대구의 생활은 낯설고 복잡했다. 구지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높은 건물들, 시끄러운 거리,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처음엔 모든 게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조는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수현.
수현은 활기찼다. 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과 장난기 어린 말투가 정조를 사로잡았다. 같은 반 친구로 만나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정조는 어느 순간 경희보다 수현을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정조, 너 진짜 촌놈 맞아?”
수현이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뭐?”
“맨날 구지, 구지 하더니, 이제는 말도 서울말 따라하네?”
정조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이었다. 구지에서 살던 때보다 이제는 대구에서의 생활이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경희의 목소리도, 얼굴도 흐릿해져 갔다.
시간은 흘렀고, 정조는 더 이상 구지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가끔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오래된 꿈처럼 느껴졌다. 그의 곁에는 이제 수현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조는 문득 깨달았다.
구경희와의 약속 같은 건 없었다는 걸.
기억 속의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녀도 이미 새로운 세상 속으로 나아갔을까?
하지만 그걸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정조는 그저 수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촌놈 아니라니까.”
그러면서, 구지의 첫사랑을 가만히 마음속에서 덮어 두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성장
고정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도 수현과 변함없이 함께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주말이면 성당에서 규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규수는 수현의 성당 친구였고, 밝고 따뜻한 아이였다. 때로는 정조와 수현의 다툼을 중재해 주기도 하고, 함께 공부하며 서로를 응원해 주기도 했다.
그해 여름, 성당에서 하계 수련회를 떠났다. 정조는 학원 일정 때문에 가지 못했지만, 수현과 규수는 들뜬 마음으로 떠났다. 하지만, 며칠 후 날아온 소식은 끔찍했다.
물놀이 도중, 규수가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오열했다. 정조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같이 학원에서 문제를 풀던 규수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장례식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매주 주말이면 천주교 공동묘원으로 갔다. 규수의 사진이 걸린 묘비 앞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기도했다.
"규수라면, 우리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을 거야."
어느 날, 수현이 말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수는 늘 그들을 응원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책을 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학원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 서로 기대어 눈을 감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묘원에 가는 길에, 정조는 수현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수현이 놀랐지만, 이내 손을 꼭 맞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규수의 부재를 함께 견디고 있다는 걸.
시간이 흘러, 대학 입시 결과가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날, 두 사람은 다시 규수를 찾아갔다.
"우리, 해냈어."
수현이 묘비 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정조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규수가 없는 자리에서 맞이한 대학 합격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함께하는 것 같았다.
정조와 수현은 그렇게 사랑도,
다시 만난 이름, 규수
고정조는 정년퇴직 후 문화센터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좋았다. 젊은 시절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이제는 성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하루하루 보람을 느꼈다.
어느 날, 새로운 수강생들이 등록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출석부를 넘기며 이름을 불렀다.
"김규진 님."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성이었기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한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조는 순간 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어딘가 규수를 닮아 있었다. 정조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규수와 관계가 있으신가요?"
그녀는 놀란 듯 정조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규수의 누나예요. 혹시… 고정조 씨?"
그제야 모든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린 시절, 규수와 함께했던 시간들.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날들. 그리고… 그날의 여름.
정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말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규진도 미소를 지었다.
"규수가 생전에 많이 이야기했어요. 수현 씨랑 정조 씨랑 정말 좋은 친구들이라고요."
정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메었지만, 그는 차분히 말했다.
"저희도 규수를 많이 그리워해요. 지금도요."
그날 수업이 끝난 후, 정조와 규진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규수에 대한 기억들.
"규수가 있었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예요. 정조 씨가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된 걸 보면요."
정조는 미소 지었다.
"규수가 늘 응원해 주었으니까요."
그날 밤, 정조는 집으로 돌아와 수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수현 역시 놀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조만간 함께 찾아갈까? 규수한테."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말, 두 사람은 다시 천주교 공동묘원으로 향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다시 만난 것처럼, 그날따라 규수의 미소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여전히 너를 기억하고 있어."
정조는 묘비 앞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규수의 부재가 여전히 아프지만, 이제는 미소 지으며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