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세계 2015년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아버지의 곳간 외 4편
백명철
여든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시각 일급 장애인 등급을 받았다. 농사일은 물론 혼자서는 가까운 이웃 나들이조차 어려웠다. 하루 종일 거실의 의자에 묵묵히 앉아 있거나 방안에 누워 있게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보청기에 의지해서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터에 시력마저 잃었으니 여생을 어떻게 버텨나가실지 바라보는 식구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주말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들판으로 차를 몰았다. 당신의 눈에 익은 산과 들의 흐릿한 윤곽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모를 얼마나 심었는지, 나락은 어떻게 여물었는지 손을 놓아버린 농사일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심초, 바우고개 같은 가곡이나 김삿갓 등 흘러간 대중가요를 불렀다. 나는 왠지 서먹서먹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끄덕이는 아버지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어느 가을철이었다. 들판 길을 달리며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다보니 차안에는 친밀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로 시작되는 고모령 노래가 끝났을 때 잠시 침묵에 잠겼던 아버지가 슬며시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그 때 네 할머니가 참 많이 울었어.”
아버지에게서 듣는 할머니 얘기가 처음인지라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멀찍이 쳐진 새끼줄 바깥에서, 몰려든 아낙네들과 함께 할머니는 연신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대며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집이나 길에서 마구잡이로 징집된 청년들이 입영절차를 밟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였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전황이었다. 마지막 절차에 신체검사가 있었다.
“꼭 사고내기 십상이네. 가서 열심히 농사나 지어라.”
군의관은 고막이 남아 있지 않은 아버지의 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 때 갔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어. 다 운이지.”
밭은 숨으로 잠시 뜸을 들인 아버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득한 기억 속에 쟁여둔 노인의 지난날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미는 것을 나는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어느 날,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는 아버지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공부를 잘 한다고 소문난 친구였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들먹이며 은근히 가입을 권유했다.
“아이구, 귀도 어두운 내가 뭘.”
바깥 활동이 질색인 아버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손을 내저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 친구는 갑자기 사라졌다. 죽었다느니 북으로 갔다느니 소문만 무성했을 뿐 다시 볼 수 없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어. 앞일을 당체 알 수가 있어야지.”
한숨을 내쉬며 이어지는 아버지의 얘기는 참혹했다. 피난길에서 본 배가 불룩한 시신들, 형무소 담장에서 행해진 총살형, 살인도구로 변신한 대나무 창, 이글거리는 한밤의 모닥불 등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전시의 아슬아슬한 나날들이 마을사람들을 제대로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의 좋은 시절을 물었다.
“네 엄마한테 장가갔을 때.”
쑥스러워하는 아버지에게 슬쩍 퉁을 쳤다.
“에이, 그런 것 말고요.”
“그 다음에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나의 신통찮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빨간 고추가 달린 금줄을 대문에 내다 걸 때의 감격, 삼칠일이 지난 후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릴 때의 뿌듯함, 돌 지난 첫 아들과 함께 처갓집에 갈 때 예쁘게만 보이던 열아홉 색시 등. 나는 아버지가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한참동안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쏟아내던 아버지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라고, 네 엄마와 함께 미국 여행 했을 때도 좋았다.”
십년도 더 전, 나는 운 좋게 미국 워싱턴주의 한 대학에 일 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안식년을 이용한 자매대학 방문교수 자격이었다. 세 달 가까이 지속되는 여름방학 때 아버지, 어머니를 초청하여 보름정도 서부지역의 국립공원 관광을 하였다. 브라이스 캐년, 그랜드 캐년, 모뉴먼트 밸리 등 주로 자연경관이 어마어마한 지역이었다. 뒷좌석에서 수시로 꾸벅대는 어머니와는 달리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는 한순간도 졸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거대한 풍광에 온전히 혼이 빠진 듯 했다. 매일 대여섯 시간씩 운전을 해야 했던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에 신이 나서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어째 그리 맛있었겠노.”
더운 여름철에 인디언가게에서 잠시 쉬며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내 머리에 언뜻 떠올랐다.
너무 많은 말씀에 피곤을 느꼈는지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침묵에 잠겼다. 차는 천천히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약간 숙인 고개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곁눈질해보니 때때로 아버지의 입 언저리가 올라가거나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하였다. 어떨 때는 침을 꿀꺽 삼키기도 하였다. 궁금해 하는 내게 아버지는 저절로 떠오르는 활동사진을 본다고 하였다. 지난 날 당신의 곳간에 쌓였던 온갖 것들이 생생히 펼쳐진다고 하였다.
육십 평생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의 곳간을 더듬어 살펴보았다. 농이 삐져나오는 어린 아버지의 귀를 고치기 위해 양의원과 한의원을 전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상대방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혼자서 들판을 헤매는 청년의 쓸쓸한 모습도 보였다. 그 곳간 깊숙한 곳에는 오월의 모란처럼 환히 웃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더 깊은 안쪽에는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위하여 연신 입바람을 불며 장작불을 지피는 아버지가 보였다.
내 곳간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판을 치고 있을 뿐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바쁜 체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뒷전으로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또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행한 일들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부모자식간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옆 가게에 차를 세우고 고깔 콘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내 곳간에 채우기 위해서였다.
잊혀지는 이름
어머니가 몸담고 있는 시골 교회가 창립 백 주년을 맞는다며 초대장을 부쳐왔다. ‘백 년’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연혁을 찾아보니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지역출신 신자 서너 명이 분교 교회를 세운 것이 시초이다.’라고 짤막히 기록되어 있었다. 농가 사랑채 호롱불 밑에서 곁가지로 시작했던 교회가 일제와 해방, 남북분단 등의 소용돌이를 넘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수십 년 전 고등학교 시절 나는 또래의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공부보다 교회 학생회 일에 더 열심이었다.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마냥 좋았다. 모임이 있을 때는 근심스런 어머니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밤이나 낮이나 교회로 내달았다.
어느 겨울, 한 주간의 부흥회가 열렸다. 나는 매일 밤 교회에 나갔다가 늦은 밤에 귀가하였다. 부흥 열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른 마지막 날, 어머니는 신자인 이웃 아주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왔다. 아마도 아들에 대한 걱정과 교회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 같았다. 성령의 부름을 받았는지 어머니는 그날 이후 신실한 신자가 되었다. 평신도에서 집사, 권사를 거치며 수십 년 동안 주일을 그르치지 아니했다.
총각시절 객지생활을 하던 나는 간혹 집에 들릴 때 어머니의 성화로 예배에 참석하였다. 깨끗한 나들이옷으로 치장한 어머니는 신자들을 대신하여 기도를 하고 큰 목소리로 공지사항 등을 알렸다. 때때로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깨끗한 봉투에 감사헌금을 넣어 정성스레 바치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은 평소 집에서 본 어머니와는 달랐다.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제대로 대꾸 한번 못하는 움츠린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 저런 활기찬 모습이 숨어 있었을까 의아스럽기조차 했다.
더구나 교회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호칭이 달랐다. 평소 동네 이웃에서 불리던 ‘철이 엄마’나 ‘상주 댁’ 대신 ‘안 집사님’으로 불렸다. 나는 다른 신자들이 ‘님’자를 붙인 깍듯한 경칭을 어머니에게 사용하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생경했다. 당신도 그렇게 불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집사직을 처음 받았을 무렵 내가 장난삼아 ‘안 집사님!’이라고 부르면 쑥스런 미소를 지으며 눈을 흘겼다.
백 주년 기념일은 오월 초순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시골의 어머니에게 왔다. 다리가 불편한 팔순의 노파를 예배시간에 늦지 않게 교회로 모셔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대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데 거울 가장자리에 빼곡히 붙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자식과 손주들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머니의 야유회 사진도 있었다. 목사님을 가운데 모시고 동료 신자들과 함께 미소 짓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뒤에서 무릎에 파스를 붙이던 어머니가 한 마디 하였다.
“저 때는 참 좋았어.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피곤하지 않았지.”
그 눈빛이 아득했다.
예배 시작시간을 넉넉히 앞두고 교회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수십 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이지만 더운 날씨 탓에 멀게 느껴졌다. 현관이 가까워지자 뜻밖에도 안내를 하던 젊은이 한 명이 급한 걸음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 우리를 맞으러오는구나’하며 나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 짐작이 틀린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우리 바로 뒤의 노부부에게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연신 머리를 숙였다. 그것을 보던 어머니는 이 동네 유지의 부모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가쁜 숨을 쉬며 몇 걸음을 더 떼던 어머니가 갑자기 헌금을 준비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곧이어 봉투에 이름은 썼느냐고 물었다. 약간의 돈을 무기명으로 준비한 나는 노모가 또 쓸데없는 간섭을 한다고 생각하며 걱정하지 마시라고 적당히 눙쳤다.
교회 안은 신자들로 북적였다. 복도에서 낯익은 얼굴 두어 명과 악수를 나누고는 어머니와 함께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여러 차례의 찬송과 감동적인 설교가 끝난 후 헌금차례가 되었다. 나는 봉투를 꺼내들고 옛날처럼 바구니가 돌려지길 기다렸지만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의아히 두리번거리는 중에 중앙통로를 따라 한 신자가 검은 소반에 수북한 헌금봉투를 받쳐 들고 단상 앞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헌금은 예배실 입구의 함에 먼저 넣게 되어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형식에 더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꺼내든 봉투를 어떻게 할지를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이름은 썼느냐고 어머니가 또 물었다. 순간적으로 ‘환갑을 넘긴 아들에게 왜 그런 세세한 참견을 하시느냐’는 불퉁스런 맘이 일었다. 어머니는 나의 그러한 기분에 아랑곳없이 빛바랜 가죽 가방을 부스럭거려 볼펜을 꺼내더니 말없이 건네주었다.
예배가 끝난 후 내빈소개가 있었다. 지역유지와 교회발전을 위해 공헌한 몇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일어서서 큰 박수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무엇에 마음을 상했는지 어느새 얼굴이 새치름하게 굳어있었다. 한번 토라지면 여간해서 풀리지 않는 성품이라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팔십 중반인 늙은 여인의 심사를 헤아리느라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공지사항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중에 며칠 전 무심히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푸념이 떠올랐다.
“이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실마리가 잡히자 어머니의 전체 심사가 훤히 보이는 듯 했다.
한 마디로 어머니는 잊혀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이름을 빌어서라도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모처럼 함께 나온 아들은 그러한 맘을 헤아리지 못하고 봉투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제 담당자들이 헌금을 정리하여 방문한 손님들의 명단을 다음 주 주보에 공개할 지도 모르는데 봉투에 이름을 적지 않으면 아들이 왔다 간 것을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어머니의 심사가 이러하리라고 짐작이 된 나는 서둘러 봉투에 이름을 썼다.
“예배 마치자마자 저 앞에 갖다 놓을게요.”
단상을 가리키며 속삭이자 샐쭉했던 노인의 표정이 금방 누그러졌다.
돌아오는 차안, 백미러에 비친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차창을 통한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마른 검불처럼 쇠잔한 몸통에 사정없이 내려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생기(生氣)를 바짝 졸이는 것 같았다. 손때 묻은 너절한 가방에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노년의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차가 대문께 멎었다. 나는 짐짓 장난스레 잊혀져가는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안 권사님! 다 왔습니다.”
간신히 땅에 내려서는 앙상한 손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려 어느 한 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오미사 꿀빵
오미사 꿀빵에 대하여 처음 얘기를 들은 것은 통영 여행 둘째 날이었다.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주인에게 통영의 먹거리에 대하여 물었더니 대뜸 그 빵을 추천했다. 나는 오미라는 이름이 다섯 가지 맛(五味)과 관련이 있는가보다고 지레짐작하며 스마트폰에서 검색해 보았다.
예상과 달리 ‘오미사’는 전혀 엉뚱한 것에서 유래된 고유명사였다. 오십여 년 전, 해안가 뒤편 허름한 가게에서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간식거리로 꿀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한 맛 때문이었는지 간판도 없는 동네가게의 빵을 인근 사람들은 사먹기 시작했다. 그 후 ‘보기보다 맛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며 조금씩 성장하던 꿀빵은 수년전 ‘맥을 이어온 우리의 맛’으로 대중매체에 소개되었고 곧 통영의 명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미사는 빵집 옆에 있던 세탁소의 이름이었다. 세탁소가 사라진 후 ‘오미사 옆 빵집’은 자연스레 그 이름을 넘겨받았다.
식당을 나서는 아내와 내게 주인은 오미사 꿀빵을 사려면 서두르라고 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만드는 양에는 한도가 있고, 대개 오전 열시 경이면 당일치가 매진된다고 했다. 벌써 열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바빠졌다. 가까운 거리라 걸어가는 것이 오히려 빠를 것 같아 다급한 걸음으로 가랑비가 뿌려대는 거리로 나섰다.
해안가 큰길에는 군데군데 꿀빵 가게가 있었다. 서너 집 건너 한집 꼴로, 얼핏 헤아려도 족히 열 곳이 넘는 것 같았다. 관광객이 많이 지나가는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가게들 입구에는 손님을 유혹하는 전광판이 깜박이고 있었다. 모두 오미사 꿀빵의 후광을 업은 아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너 번의 길을 물은 끝에 마침내 적십자 병원 뒷골목에 자리 잡은 볼품없는 빵집 앞에 섰다.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미닫이문을 열자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이 비닐봉지에 꿀빵 박스를 챙기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 박스에는 꿀빵이 열 개씩 들어 있었다. 우리는 두 박스를 살 수 있었다. 선물을 포함하여 다섯 박스 정도를 사려고 하였으나 남은 것이 그것뿐이어서 아쉬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아 다른 꿀빵 가게에서 세 박스를 더 샀다.
다음 일정은 박경리 기념관이었다. 비가 오는 평일이기 때문인지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생의 연보와 함께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는 사진과 작품, 어록 등이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전시되어 있었다. 깊숙한 곳에는 선생의 전신사진이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방벽과 바닥에 쌓아놓은 책무더기 속에서 의자에 앉아 정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년의 선생 모습이었다. 마주친 눈을 통해 상대방 마음의 심연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재탕은 예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말라는 선생의 나직한 음성이 벽면에 붙은 어록을 타고 들리는 것 같았다.
기념관 뒤편 선생의 묘소에 들린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오후가 기울고 있었다. 여행을 마감하고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었다. 출발에 앞서 출출한 시장기를 달랠 겸 오미사 꿀빵을 차안에서 먹기로 했다.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증이 일며 군침이 돌았다. 골프공보다 두 배쯤 커 보이는 빵의 갈색 껍데기에는 찐득한 물엿이 발려 있고 군데군데 하얀 통깨가 붙어 있었다. 한입 베어 물자 찐득거리는 껍데기의 질감 중에 고소한 팥소의 맛이 느껴졌다. 달지 않았다. 천천히 하나를 먹고나니 하나 더 먹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번에는 오미사가 아닌 다른 꿀빵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빵 맛은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조심스럽게 하나를 먹어 보았다. 확실히 맛이 달랐다. 오미사 꿀빵이 투박하고 깊숙한 전통 간장 맛이라면 일반 꿀빵은 달차근하면서도 밍밍한 왜간장 같은 맛이었다.
“역시 차이가 있네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하였다. 많은 꿀빵 가게가 오미사의 명성을 좇아 겉모습이 흡사한 빵은 만들었지만 연륜에서 배어난 독특한 그 맛은 따라 잡지 못한 듯했다. 문득 ‘재탕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오미사 꿀빵은 이따금씩 맛으로 먹어보는 간식이기에 그것을 예술품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오십여 년 동안 이웃의 사랑을 받아 온 것을 보면 남모르게 쏟아 부은 장인의 정직한 고생과 노력이 스며있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재탕의 길은 걷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굳이 큰길가의 빵가게를 마다하고 뒷골목 허름한 오미사 가게를 찾는 것은 얄팍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긴 세월에 걸쳐 제 모습을 지켜온 고집스런 그 맛에 박수를 보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시운(時運)
서너 달 전부터 고시촌에 기거하며 취직시험 준비를 해온 아들은 가을이 깊어가자 점점 불안해하는 눈치다. 차가위지는 날씨에 두툼한 이불을 갖다 주려해도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기에 밤이라야 만날 수 있다. 늦은 밤, 이불보따리를 건넨 내 손을 아들이 덥석 잡는다. 초조함과 절박함이 배어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까?’ 잡은 손을 토닥인 후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수십 년 전 내 모습이 다가온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곧바로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일 년간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미리 받아 입도선매된 경우였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졸업한 친구들 대부분이 두 서너 곳의 회사로부터 입사 확정통고를 받아놓고 어느 곳이 더 좋을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칠십년 대 중반,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우리나라의 산업계는 일할 사람이 부족해 쩔쩔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특출한 능력이 없는 지방대학 출신의 내가 그처럼 쉽게 취직이 된 것은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할밖에 없다.
입사 사 년 차 봄, 사급사원에서 삼급으로 승진 발표가 예정된 날이었다. 우리 부서의 대상자는 나를 포함하여 함께 입사한 일곱 명이었다. ‘누가 떨어질지?’ 일곱 명 모두 다 승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과장의 일차 경고에 우리들은 이미 정신이 어질어질한 상태였다. 아침 일찍 인사과 회의실로 들어간 과장은 두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다음 해에도 기회가 있으니까 설사 떨어져도 크게 낙담할 일은 아니라고들 했지만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찜찜하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입사당시 신입사원 여섯 명과 함께 설계부서로 배속되었을 때 나는 같은 처지의 동료가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좀 못하더라도 두리뭉실하게 묻혀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친구가 되어 점심식사후의 여가마다 옥상에서 족구를 했다. 때로는 늦은 밤까지 호기롭게 술집을 전전했다. 밤 바닷가 모래바닥에 벌렁 누워 여자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나 둘 결혼을 했고 승진을 앞둔 즈음에는 모두들 가장이 되었다. 사원전용 아파트에 앞뒷집으로 살림을 차린 우리들에게 승진여부는 이미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승진대상자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마침내 과장이 회의에서 돌아왔다. 항상 장난스런 미소를 띤 얼굴이 그날은 딱딱하게 굳어 보였다. 그는 우리들 중 한 명을 상담실로 불렀다. ‘이제부터 한 명씩 부를 모양이지.’ 눈이 마주친 옆 동료가 가는 한숨을 쉬며 소곤댔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불려갔던 친구가 눈을 내려 깐 채 황급히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다음 차례를 기다렸지만 과장은 뜻밖에도 남은 우리 모두를 불렀다. 그는 떨어졌고 우리는 붙었다. ‘아아, 다행이다.’ 나는 환히 웃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심 안도의 쾌재를 질렀다. 떨어진 친구 때문에 대놓고 웃지를 못했지만 승진한 우리들은 퇴근길 술 한 잔을 하자고 눈을 껌벅거렸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승진 며칠 후부터였다. 탈락한 친구가 앞만 바라본 채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집요한 공략 끝에 어렵사리 말문을 연 그는 한마디로 ‘창피하다.’고 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기가 싫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말도 했다. ‘다음 기회’를 운운하는 승자의 얄팍한 온정이 오히려 그를 열불나게 하고 더 비참하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 승진시기인 사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며 새롭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화기 만당한 사무실의 꺼풀 밑에 은밀히 흐르는 경쟁의 무자비한 강물이 보였다. 그 강물은 너무 깊고 물살이 세서 나는 도저히 제대로 건너갈 것 같지 않았다. 명문대 출신 선수의 짱짱한 수영솜씨에 비해 내 것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경쟁이 없는 따뜻한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어느 날 전문대학에 교수로 있는 친구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왔다. 자리가 있으니 올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서울에 있는 두 친구에게 의향을 물었으나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면서 빨리 결정을 하라고 재촉했다. 당시에는 기업체의 임금이 교직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산업계에는 젊은이의 야망을 북돋우는 역동성이 있었다. 졸업 때도 교직으로 간 친구들을 ‘좀생이’라며 은근히 얕잡아 보았다. 그 좀생이를 떠올리며 즉답을 망설이는 내게 ‘여기서는 네 일만 하면 되. 네 방이 따로 주어진다고.’ 독방이 주어진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더 이상 가리지 않고 원서를 냈다.
학교에서 연구실 장의자에 처음 앉았을 때 너무 황홀하여 얼떨떨했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두 다리를 쭉 뻗어 앞 탁자위에 올려놓아도 뭐라고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너무 좋았다. 비록 강의실을 베니어판으로 구분하여 만든 조잡한 방이었지만 맘 편히 혼자 있을 수 있으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 어찌 이런 복이’ 비록 전문대학이었지만 석사, 박사도 아닌 내가 교수가 된 것은 역시 시절을 잘 만난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십년만 먼저 태어났더라면 딱 아버지의 세대이다. 교수는커녕 일제와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던 와중에서 틀림없이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옛날의 우리들보다 외국어도 잘하고 컴퓨터를 공깃돌 다루듯 잘 다룬다. 업무처리능력이 우리들의 열배는 될 듯하다. 하지만 상당수가 취직을 못해 비좁은 쪽방에서 한숨짓는다. 때로는 ‘될 대로 대라’는 자포자기의 용기로 그들을 받아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맨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시운의 덫에 빠져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니 착잡하기만 하다. 빨리 쌀쌀한 가을과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목련이 질 때
저무는 햇살아래 목련꽃이 지고 있다. 아직 흰 꽃잎을 바람에 나부끼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꽃송이도 더러 있지만 많은 꽃잎들이 짙은 갈색을 나타내며 생기를 잃고 있다. 땅바닥에는 이미 말라서 오그라든 꽃잎들도 수두룩하다. 청순한 꽃봉오리를 본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불과 며칠 사이에 칙칙한 몰골의 낙화가 되었으니 그 처지가 안쓰럽다. 흩날리는 꽃잎을 좇아 서성이는 발길에 수십 년도 더 전의 한 여인이 다가온다.
초등학교 사 학년 봄날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니 키가 훤칠한 웬 여고생이 함박웃음 띤 얼굴로 나를 맞았다.
“어머, 벌써 이렇게 컸어?”
동그란 눈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반짝였다. 허리가 잘쏙한 까만 교복에 양 볼이 사과처럼 붉게 빛났던 그 여학생을 나는 주눅이 들어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뒤이어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가 그녀를 작은 이모라고 소개했다.
그 전해 겨울, 느닷없이 역병이 시골마을을 덮쳤다. 우리 집에도 갓 돌이 지난 동생이 제대로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죽었다. 작은 거품 방울이 삐져나오던 아기의 코와 입을 빨며 제발 눈을 뜨라고 몸부림치던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오금이 저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사라졌고 동생을 제때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어머니의 자책이 자나 깨나 되풀이 되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묵묵히 아픔을 견디는 아버지에게 거센 원망을 쏟아 내기도 하였다. 산 넘어 먼 곳에 살던 외할머니는 서너 달이 지나도록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머니에게 이모를 대신 보냈다.
점심을 먹은 후 이모는 우리 동네를 한번 둘러보고 싶어 했다. 앞내의 징검다리도 건너고, 상여를 보관하는 뒷내의 으스스한 초가 창고도 둘러보았다. 마지막에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도 들렀다. 마침 동네 형들이 휴일을 맞아 축구를 하고 있었다. 실밥이 터진 낡은 가죽공을 좇는 형들 중에는 맨발도 많았다. 나는 이모에게 내가 좋아하는 토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운동장 가를 돌아 구석진 곳에 있는 토끼장으로 가는 데, 몇몇의 형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내며 연신 우리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모는 눈을 내려 깔고 내손을 낚아채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맞잡은 이모의 손이 뜨거웠다. 토끼장 옆 학교 사택 담장 너머에는 막 꽃망울을 터뜨린 목련 가지가 응달진 구석을 환히 밝히며 따스한 봄바람에 한들거렸다. 넋 놓고 꽃을 쳐다보는 이모의 목덜미에서 교복의 흰 칼라가 나풀거렸다.
열 마리가 넘는 토끼들이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구석구석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한 마리의 토끼가 다른 한 마리를 뒤좇더니 냉큼 등에 올라탔다. 뒤이어 엉덩이를 들썩이며 온 몸을 바르르 떨다가 금방 옆으로 나자빠졌다.
“에그, 조것들이!”
등 뒤에서 이모가 쿡쿡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모는 어머니와 하룻밤을 잤다. 숨죽은 웃음소리와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아버지와 함께 누운 옆방까지 밤늦도록 들렸다. 다음날 이모는 점심을 먹고 서둘러 어머니와 함께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나도 함께 배웅하고 싶었지만 동네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앞내 징검다리에서 헤어졌다. 침울한 우리 집에 잠시 신선한 바람이 머물고 간 듯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다시 또 오겠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지만 ‘형편에 따라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건승으로 대답했다.
중학생시절, 사춘기였을까. 산수유, 개나리가 노랗게 세상에 봄을 알려도 목련이 피기 전까지 내게는 봄이 오지 않았다. 목련은 마치 새색시처럼 바깥의 술렁거리는 봄기운에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두 빛 꽃받침을 밀치고 빼죽이 봉오리를 내밀었다. 곧 이어 온 몸을 벌린 무성한 흰 꽃잎들이 살랑대기 시작하면 내게는 어김없이 흰 칼라 검은 교복을 단정히 입은 이모의 붉은 입술과 뜨거웠던 손, 가쁜 숨결이 다가왔다. 그것은 겨우내 움츠러졌던 내 마음을 간질이며 며칠간씩이나 나를 뿌연 안개가 낀 봄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하였다.
나이가 사십 줄에 들어선 어느 봄날, 어머니의 권유로 이모의 병문안을 갔다. 타지에서 생활한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모는 위중한 상태였다. 불과 일 년 만에 본 이모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놀랄 만큼 수척했고 거무스름한 안색에 병색이 완연했다.
“아들 장가보낼 때 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이종 사촌을 쳐다보며 이모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헐렁한 환자복이 검버섯이 점점이 박힌 앙상한 손에 걸쳐 있었다. 서늘한 감촉의 그 손을 잡은 내게 오래전 토끼장의 뜨거웠던 손이 생각났다. ‘고생, 고생하다가 이제 좀 살만한데…’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가만히 두드리며 병실 창문에 비친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 해 겨울, 이모는 세상을 떠났다. 여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넘어 늦가을에 기어코 아들의 혼사를 치른 후였다. 결혼식 당일에도 이모는 끝까지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목련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뾰죽한 열매의 싹이 보인다. 그 싹을 틔우려고 목련 꽃잎은 혼신의 힘을 다 했으리라. 냉기를 품은 봄바람에 추한 모습으로 변색되는 아픔을 견디며 암술과 수술이 잘 수정될 때까지 악착같이 가지에 붙어 있었을 것이다. 저녁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살랑대는 흑갈색 꽃송이 사이에서, 이십 여 년 전 쉰을 갓 넘긴 나이에 먼 길을 떠난 이모가 미소 짓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조심스레 주워 점차 검버섯이 짙어지는 내 얼굴에 대어 본다.
백명철
경북 김천 출생
영남이공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정년 퇴임)
에세이포럼 14,15,15기 수료
『에세이스트』신인상
첫댓글 백교수님 축하드립니다. 많이 많이요.
백명철 선생님 수필세계로 등단하심을 축하드림니다.
같은 식구가 되어서 기쁩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