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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 외 4편
공 월 천
나는 풀잎 위에 구르는 물방울처럼 떼구르르 구를 듯이 경쾌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녀가 목젖을 약간 뒤로 젖히고 까르르 넘어가며 웃을 때는 영문도 모른 채 내 기분은 좋아지곤 했었다.
조롱조롱 탐스럽게 익은 꽈리 열매를 따서 바늘로 조심조심 속을 파낸 다음 그녀가 입 안에 넣고 혀로 한번 굴려 살짝 깨물기만 하면 또르륵 또르륵 하고 그녀의 웃음과 같은 소리가 났다.
가을이 오기 한참 전에 고백분을 넣고 봉숭아 꽃잎을 짓이겨 채 여물지도 않은 내 작은 손톱을 붉게 물들여 준 것은 언제나 그녀였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바쁜 어머니 대신 손수건을 가슴에 달아 주고 학교까지 따라와 준 사람도 그녀였고, 학예회 날 바다색 무용복을 입고 춤을 추게 된 나를 숯 검댕이 눈썹에다 빨간 입술까지 단장시켜 준 사람 역시 그녀였다.
팔다 남은 자투리 천 조각은 그녀가 재봉틀 앞에 앉기만 하면 어느새 어깨 끈이 달린 앙증맞은 내 여름 원피스로 변하곤 했다.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 내는 손끝 고운 그녀는 혹시 요술쟁이가 변신한 건 아닐까 하고 어린 내가 의심을 품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종가(宗家) 종부여서 일 년 내내 제사 준비에, 젖먹이와 연년생인 자식들 치다꺼리에, 시어머니 시동생의 시중까지 혼자 도맡아 해야 하는 어머니에게서는 늘 땀 냄새와 비릿한 젖 냄새가 났다. 그러나 분통같이 하얀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동동구라분 냄새가 났다. 매화꽃 내음 같기고 하고 잘 익은 복숭아 내음 같기도 한 나글거리는 그 향기가 좋아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내 작은 두 팔을 두르고 킁킁거리며 한참씩 그녀의 냄새를 맡기도 했었다.
그녀가 작은 부엌이 하나 딸린 우리 집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산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유년은 거의 그녀와 함께였다. 그녀 덕택에 나는 아래로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한테 어머니를 빼앗긴 설움을 모르고 자랐다.
인근 시장에 나가 포목점을 하는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쯤 시장이 노는 날이면 언제나 나를 데리고 공중목욕탕엘 갔다. 돌돌 만 수건으로 잘록하고 통통한 내 팔의 때를 밀어 주며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울 때 목을 움츠리고 해실거리며 웃는 나를 보고 재미난 듯이 호홋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목욕탕 천장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웅웅거렸다. 그런 날이면, 여섯 아이에게 물리느라 헤진 러닝셔츠 안에서 축 늘어진 채 출렁거리는 어머니의 젖가슴과는 판이한, 탱탱하고 딱 올라붙은 그녀의 젖가슴 위에 도드라진 검자줏빛 젖꼭지를 나는 자꾸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큰길로 나가는 반대 방향으로 좁은 골목길을 조금 가다 보면 혜화라는 중국 소녀가 사는 집이 나오고 그 집 텃밭인 양배추 밭을 지나고 나면 어린 내 걸음으로도 단숨에 닿을 수 있는 거리의 시장통에 그녀의 포목점이 있었다.
길어진 하루해가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이 무료한 봄날이나, 윙윙거리며 귓가를 맴도는 성가신 파리들 때문에 낮잠조차도 자기 힘든 여름날이면 나는 어머니 몰래 그녀를 찾아갔었다. 그런 때면 그녀는 언제나 반색을 하며 나를 맞아주곤 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고 “아이고 강생이, 여그가 어디라꼬!” 하며 더위에 발갛게 상기된 내 볼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말 상대가 없어 무척이나 심심했던 나는 자꾸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지매! 참말로 내가 이쁜교?”
“하모! 세상에서 내 강생이만큼 이쁜 아이는 한 번도 못 봤데이. 너무 이뻐서 누가 잡아갈라. 집에 갈 때 조심하거레이.”
그때 나는 그녀의 말이 정말인 줄 알았다. 야무지게 생긴 겉보기보다 순하고 얼떴던 나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가 입에 물려 준 왕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한쪽 눈을 감고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오곤 했다. 애꾸눈이면 못나서 아무도 잡아가지 않을 것 같아 꾸민 내 나름대로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바빠서 내겐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어머니 대신 그녀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바람으로 가슴을 콩닥거린 날도 있었다.
그날은 추적추적 종일 비가 왔다. 온종일 방 안에 갇혀 있었고 낮잠도 한숨 잔 터라 초저녁잠이 달아난 나는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전에처럼 그녀의 방으로 쪼르륵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즈음 들어 부쩍 그녀의 방 출입을 막는 어머니 때문에 뽀로통해 있을 때 방 윗목에 어머니가 지난밤에 빌린 그녀네 가위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얼른 가위를 들고 가 조심조심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순간 나는 기함을 하고 말았다. 방문 닫을 겨를도 없이 가위만 떨어뜨린 채 우리 방으로 쫓아와서 훌쩍거리며 서럽게 울기만 했다.
“야가 와 이라노? 어디 아프나?” 하고 어머니가 다그쳐 물었지만 나는 그 주황색 불빛 아래서 벌어진 기가 막힌 광경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이웃집 곰이 아버지가 서로 부둥켜안고 곤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 실제로 본 장면인지 아니면 놀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인기척에 잠깐 잠이 깬 그녀의 놀라는 표정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렇게 나는 첫사랑에게 무참히도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저녁나절, 군침을 돌게 할 만큼 맛깔스런 생선조림 냄새가 그녀의 부엌에서 새어 나와 우리 집 마당에 은근하게 퍼지는 날에는 예외 없이 곰이 아버지가 다녀갔다. 솜씨 좋은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을 둘이 겸상을 하고 먹는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랑을 다시 찾을 방법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났다. 꽃밭 귀퉁이에 심어 놓은 대추나무에서 잘 영근 대추를 우리는 그새 두 번이나 땄다. 그 즈음, 점심상을 물린 어머니와 할머니의 나직한 대화는 어린 내가 듣기에는 여고 시절에 접한 낯선 이국어의 동사 활용법만큼이나 난해했다.
“문간방 새댁 그냥 둬서 되겠는교?”
“시끄럽다. 서방 있는 년도 아니고… 갓 스물에 시집가서 그 아 배태하고 석 달도 안 돼서 지애비 잃었다 카더라. 저거 서방 빨갱이 총에 죽고 핏덩어리 유복자 데리고 지금까지 혼자 사는 거만 해도 장하다.”
“그래도 어머님이 좀 나무라야겠심더. 남 눈도 있고……. 그거보다 아이가 저리 밖에서만 빙빙 돌고 패악이 늘어 아이 버리겠심더.”
“청상에 과부 된 거 불쌍치도 안하나? 젊으나 젊은것이 사내가 여북 기러브믄 그리하까?”
한 자나 되는 담배통에 풍년초 담배를 꾹꾹 눌러 담으며 혼잣말처럼 내뱉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가엾은 그녀 생각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날 오후 내내 할머니의 놋쇠 재떨이는 담배통을 터느라 땅땅 두들겨 대는 할머니 때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곰이 아버지와 그녀의 사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관계였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묵인되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아들이 점점 포악해져 가는 게 문제였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중의 하나지만 곰이 아버지가 오는 날 그녀의 아들은 한 번도 집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이면 악을 쓰면서 우는 사춘기 소년의 목쉰 울음소리에 우리 집 기왓장이 들썩거렸다. 그럴 때면 아들을 나무라는 대신 그녀의 얕은 흐느낌이 주황색 불빛과 함께 늦은 밤까지 방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몸집이 좋은 곰이 아버지는 같은 시장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었다. 곰이 엄마는 그녀의 먼 친척 동생뻘 되는 사람으로 서로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곰이 아버지에게 ‘제부’라는 호칭을 썼다.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는 얼마 후 살림방이 딸린 포목점 하나를 마련하여 그녀가 우리 집에서 독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가, 그녀가 이사를 가고 나 역시 중학교 생활이 시작된 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에 바쁜 나는 차츰 그녀를 잊어 갔다.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에 들렀을 때 어머니한테 놀러 온 그녀와 마주쳤다.
“아이고 내 강생이가 하마 애가 둘이가?”
초로의 그녀는 이전에처럼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얼싸안았다.
아들의 박대에 못 이겨 집을 떠나 서울의 어느 봉제 공장에서 일하다가 며칠 전 내려왔다는 그녀는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이제는 情人을 기다리느라 애태우지 않아도 되겠구나. 남의 매서운 눈총 때문에 주눅이 들지 않아도 되겠구나. 젊디젊은 육신 때문에 밤새워 울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때의 그녀보다 나이를 더 먹어 버린 나는 가엾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몇 해 전 곰이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떴을 때 그녀가 아무도 없는 송도 백사장에서 남몰래 사흘 밤낮을 목 놓아 울더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아니라 곰이 엄마였다. 착하고 무던하던 곰이 엄마는 빈 껍데기만 바라보고 산 세월의 가시를, 심장에 수없이 박힌 질투의 가시를 그제야 하나하나 뽑아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곰이 엄마가 그녀를 용서하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빌었다. 내 기도가 통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겉으로는 여전히 언니 아우 하면서 잘들 지낸다고 했다.
그녀가 어린 나를 살뜰하게 보듬어 주며 사랑을 가르쳐 주었듯이 이제는 내가 욕정도 사랑도 꿈도 모두 기화해 버린 늙은 그녀의 등을 도닥거리며 위로해 주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지척에 있는 그녀를 차마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헌 새털처럼 남루하고 가벼워진 그녀의 모습을 내 가슴 한켠에 간직할 자신이 없어서다. 그랬다간 비 온 날 운동장처럼 온 가슴이 슬픔에 젖어 수시로 질척거릴 것이 불 보듯이 뻔하기 때문이다.
파랑새
벽제에서 돌아온 남편의 눈자위가 부석부석했다. 밤새 마신 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 눈 쌓인 밤에, 신고 갔던 구두 대신 납작한 플라스틱 슬리퍼가 겨우 발에 걸려 있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예까지 저러고 왔을까 싶어서 ‘구두는 어쩌구요?’ 하는 물음이 입술 끝에까지 달려 나와 대롱거렸지만 애써 삼켰다.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것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술기운 탓인지 그를 보낸 아쉬움 때문인지를 살피느라 숨을 죽인 내게 남편은 잔뜩 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져 버리더만. 산처럼 컸던 덩치가 겨우 네 조각 뼈로 남드구먼. 그것조차도 두루룩 갈아 버리니 삶이 한 줌 먼지더군.”
마음 아프게 무얼 그것까지 다 지켜보았느냐는 내 질책에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남편은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부음(訃音)을 전해 들었을 그때의 상황은 조금 묘했다. 음력 정월 초하루였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이사(理事)로 진급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고, 남편이 직장에서 본의 아니게 명예퇴직을 하여 백수 신세가 된 지 육 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벽제 화장장(火葬場)에서 그는 육신이 타서 먼지가 되고 남편은 백수인 자기 설움에 마음이 타서 먼지가 된 듯했다.
남편이 제대(除隊)한 복학생이어서 나이가 다소 위이긴 했지만 그와는 각별한 친구 사이였다. 대포 한잔에 리포트도 대신 써 주고 시험 답안지도 슬쩍슬쩍 보여 주던 은인이었다고 하면 얼른 이해가 될는지.
“당신 덕택에 나 대학 졸업했지.” 그를 보면 남편이 늘 하는 말이었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남편은 그의 의리를 고마워했다. 덕분에 배불뚝이 임부의 몸으로 그와 또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밥상을 차려 대느라 내 신상이 좀 괴롭기는 했었다.
“젓갈 속에 덜 삭은 생멸치 한 마리 꺼내 쭈욱 찢어 쌀밥 위에 얹어 먹던 맛이란 환상 그 자체였지요.” 그는 수년이 흐른 뒤에도 배고프던 시절 형수가 차려 주던 밥상 운운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그때를 들먹이곤 했다. 그는 그리고 남편의 대학 동기들은 나를 형수라고 불렀다.
어쩌다 지방으로 출장을 오는 날 저녁이면 그의 쉰 듯한 걸걸하고 유쾌한 목소리가 우리 집 안에 가득 넘쳐났었다. 그런 때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무용담과 걸쭉한 입담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 유쾌해져서 날이 새는 줄을 몰랐다.
“형수, 어디엔가 파랑새는 있을 겁니다. 내 손으로 파랑새를 꼭 잡고 말 거요.”
술이 거나해지면 그는 산홋빛 부리에 코발트색 깃털이 곱게 달린 파랑새가 마치 눈앞에라도 있는 듯 두 손으로 소중하게 잡는 시늉을 하며 호방하게 껄껄 웃었다. 그러나 마치 날개옷을 잃어버린 천사인 양 아이 둘을 키우며 그럭저럭 늙어 가는 나로서는 파랑새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꿈을 잃어버린 시시한 아낙으로 전락한 내게 어느 곳에도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열일곱 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떠나 버린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 셋을 맡은 가장이 되었을 때의 일도, 차마 고아원에 보내지 못해 갖은 고생을 하며 동생들을 공부시킨 일들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밝았다. 대학 때 정치하는 교수를 따라다니며 오로지 떠벌리는 입심과 뻔뻔한 배짱으로 학비를 면제받아 졸업장을 딴 것을 만담(漫談)처럼 늘어놓으면서도 전혀 비굴해하지도 않았다. 지방 대학 출신으로 대기업의 간부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말할 때도 그건 하늘의 별 따긴데 내가 별을 땄으니 키가 크긴 크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 속에 위트와 해학이 있었다.
그러나 나도 한번 본 적이 있는 첫사랑인 그녀의 말만 나오면 그의 호흡은 예외 없이 빨라졌다. 결혼식 날 신부가, 대학 4년을 젓가락 한 쌍처럼 붙어 다니던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일 내가 “그때 왜 그랬나요?” 하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너무 사랑해서요.”였다.
“집도 절도 없는 가난뱅이인 나한테 오면 고생이지요. 좋은 가정에서 자란 여잔데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라고 등 떠밀었지요.” 하며 씨익 웃는 그의 깊은 속을 그제야 헤아리고 마음이 아팠었다. 그의 결혼식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군대에 지원을 했고 그 후 여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그의 수다가 상처를 이겨내는 세련된 방법이었음을, 그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통곡을 대신했다는 것을, 벽제로 가기 전 그해 가을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의 임원이었던 그가 편하고 멋진 호텔 같은 숙소를 마다하고 굳이 좁고 초라한 우리 집에 묵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나름대로 해석이 되었다.
그날도 이곳으로 출장을 온 그가 조금은 늦은 저녁상을 앞에 두고 한 번도 밖으로 꺼내 보이지 않던 아내 이야기를 시작으로 삶의 고단함을 털어놓았다. 그를 안 지 이십 수년 만에 처음으로 본 어두운 얼굴이었고 눈물이었다. 직원들 가정사의 애로점이나 혹은 어려움을 당한 지인들의 일상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심성 탓에 늘 분주하게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아내는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다. 어렵게 자란 탓에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해서 늘 비어 있는 주머니 또한 그의 아내가 못 견뎌 하는 한 부분이었다. 직책에 견주어 내려지는 과중한 업무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어 몸에 이상이 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아내와 별거한 지가 10년이 넘었다며 쓸쓸해했다. 나는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몰랐던 나의 우둔함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저 된장 끓이는 냄새가 솔솔 나는 아침, 그 냄새와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너무 큰 욕심이었나요? 지금껏 참 신세 많이 졌소. 형수.”
그날, 그는 내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에게 우리 집이 늘 고향 같았다는 말도 함께였다. 생전 안 하던 소리들을 하기에 마음이 몹시 거북하고 울적했는데 어쩌면 그는 멀지 않은 죽음을 그때 예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인은 심근경색과 무호흡증 때문이래. 화장터에 박 중령도 왔더구먼. 소리 없이 눈물만 쏟더라. 얼마나 하염없이 우는지… 그놈의 눈이 내려서 그런가?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화사하기만 하던지. 내 참!”
한참 후 남편은 쓸데없이 그의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말을 꺼냈지만 나는 내내 파랑새 생각만 났다. 그가 평생 잡고 싶어 목숨까지 걸고 안달을 했던 파랑새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늘 옆에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래서 놓쳐 버린 형체도 없는 꿈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파랑새를 보았나요?’
朴先生과 李孃
눅눅하게 젖어 있어야 할 박 선생(朴先生)의 목소리가 오히려 건조하고 탁했다. 전화선을 타고 오면서 어쩌면 물기가 모두 증발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양(李孃)’의 죽음에 대한 짧은 하소연이었다.
“어디 볕 잘 드는 언덕배기에 묻어 주셔야겠네요.” 금세 박 선생한테서 전염되었는지 내 목소리 또한 탁탁 갈라졌다.
순전히 박 선생의 입으로 이양과의 관계를 전해 들었고 먼발치서 몇 번 보았을 뿐 눈조차 한 번 마주쳐 본 적이 없는지라 이양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애통해할 이유가 나로서는 별로 없었다.
“그냥 묻어 버리기엔 너무 가슴이 아려서 사흘장을 치르기로 했어요. 지가 덮던 이불에 싸서 베란다 한쪽에 두었어요. 일요일 점심나절에 묻으러 가려구요.”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걸 보니 학교에서 막 돌아왔나 보았다. 천애의 고아처럼 막막함이 배어 있는 박 선생의 목소리인데도 사람이 싱겁긴 싶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 선생의 공허와 막막함에 맞닥뜨리면 그때마다 나는 왜 슬금슬금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난해도 그랬었다.
저녁 준비를 할 참으로 푸성귀를 사러 시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는데 무심코 스친 게시판에 색다른 것이 붙어 있어 두어 걸음 뒷걸음질쳐서 들여다본 나는 “세상에!”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정문 옆 게시판엔 가을이 가고 또 다음 가을이 오도록 ‘급매’ ‘전세 놓습니다’ ‘가격 절충’ 이런 따위의 어쩐지 쇠붙이 냄새가 날 것 같은 딱딱한 글씨와 그 아래에 암호처럼 쓰인 연락받을 전화번호 외엔 다른 공고문(公告文)이 거의 붙지 않는 곳이었다. 이내 웃음이 실실 일기 시작했다. 억장이 무너져 있을 박 선생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아니 되는데 싶으면서도 그의 엉뚱하고 기발한 착상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긴 평소에도 좀 그런 구석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공고문을 읽고 온 남편 역시 친구인 박 선생의 걱정보다 먼저 허헛!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4절지 크기의 모조지에 검은 매직펜으로 쓰인 내용인즉 이러했다.
“동 아파트 쭛동 쭛호 이 아무개는 남편과 가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찾아 가출하여 두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한심한 인간이므로 어디에서 마주치더라도 상종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박 아무개―”
한 아파트의 바로 옆 통로에 살고 있는 이 여사의 가출 사건을 우리는 그때서야 알았다. 네모난 공간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도 가두어 버리는 아파트라는 상자더미는 옆집 사람도 아랫집 사람도 얼굴 마주치면 마지못해 눈인사만 할 정도지, 서로 바쁜 마당에 이웃간의 소통이란 한가한 사람들의 마음의 사치 정도로만 여기는 곳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새벽 기도로 시작하여 전도와 봉사 활동으로 일 년 삼백예순날을 거의 교회 일로 출타 중이어서 가족이나 남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사의 편을 들어서 내가 언성을 높인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남편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며 보따리를 싸서 이 여사를 쫓아낸 박 선생의 편을 들어서 남편이 내게 큰소리를 낸 건 더더욱 아니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양극으로 치우쳐 멀어진 그들의 관계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도대체!’ ‘남자는 왜?’라는 논쟁의 주제는 우리 두 사람에게도 잠재되어 있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 인 건 분명했다.
아이들이 커서 저들 인생대로의 길을 떠나 버린 뒤 둘만 오롯이 남은 가정인데 빨간 전기밥솥에 안쳐 놓은 밥만 없다면 이 여사의 존재는 박 선생의 곁에는 전무(全無)한 상태니까, 집이라고 들어와도 말 한마디조차 받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 좋은 박 선생도 그 허허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허구한 날 벽만 쳐다보고 있자니 심심하고 막막하여 어깨가 저절로 아래로 축축 처졌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엄연히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요, 나가서 헛된 짓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버림받은 가여운 어린 아기들의 부모가 되어 주기도 하고, 병든 노인네들의 말벗이 되어 주고 자식이 되어 주기도 하는 봉사 활동이 무에 잘못되었느냐? 당신은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는 성한 사람이 아니냐?’ 이 여사 역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을 터였다.
어느 것이 암까마귀고 어느 것이 수까마귀냐 하면서 싸움이 잦아지고 급기야는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 보아도 잘못한 사람도 없고 잘한 사람도 없으니 해답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오려니 하고 기다렸지만 두 달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자 박 선생이 홧김에 공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관객도 관람료도 없는 그들의 지루한 경기는 박 선생의 케이오 패로 끝이 났다.
“다 이해하마. 밥솥에 밥만 있으면 족하다. 돌아오기만 해 다오.” 전국을 수소문하여 빌고 또 빌어 이 여사를 정중하게 모시고 온 박 선생은 여권 신장(女權伸張)이 커트라인도 없이 제 맘대로 높아진 게 현실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 여사가 돌아온 한참 후, 우리는 손바닥만한 치와와종인 애완견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박 선생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일찍 퇴근한 날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진회색 타월 하나를 목에 두른 채 목욕탕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거의 애완견을 안고 다녔다. 반백의 머리에 뭉툭하게 생긴 그의 외모하고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왜 하필이면 ‘이양’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는 박 선생만이 아는 일인지라 우리는 그저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듯이 똘망똘망하고 조금은 교만해 보이는 그 작은 애완견을 주인이 부르는 대로 ‘李양’이라고 불렀다. 그 즈음 박 선생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고 전에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 이유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부재중인 이 여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듬뿍 받아 줄 이양이 있기 때문이란 걸 우리는 그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능히 알고도 남았다.
“아이고! 고거, 고거 참. 얼마나 애지랑을 피우는지! 내가 오는지 어째 알고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좋아서 살살 까무러쳐요. 누가 나한테 가까이만 와도 질투가 나서 캉캉거리며 앙탈을 부린다우. 내가 요새는 이양 때문에 사는 맛이 난다니까.”
기다려 줄 대상이 있다는 것이, 사랑을 받아 줄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건지 이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일이었다. 박 선생에게 이양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교직원 회식이 있던 금요일 저녁, 술 한잔을 하고 귀가를 한 박 선생이 귀를 파르르 떨며 좋아라 반기는 이양의 두 눈썹 사이를 “애고 요 녀석!” 하면서 검지로 꼭 눌렀는데 그만 그 자리에 픽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손가락이 급소를 눌렀나 보았다.
개한테 사흘장이 어울리기나 한 건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떨어진 마른 잎처럼 건조한, 찢어져 구르는 전단지같이 외로운 초로의 남자가 가여워서 내 목소리가 바싹 말랐다. 하필이면 마지막 몸을 털어내고 있는 이 가을 산자락에 정(情)을 묻고 또다시 허무를 견디어야 할 박 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휑하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차며 웃을 일이지만 점점 세상에 발붙일 입지가 좁아지고, 말 붙일 상대가 줄어들어 외로워지기 시작하는 예순이 지난 그렇고 그런 남자들의 허무와 고독의 블랙홀이 얼마나 몸서리쳐지도록 깊고 어두운지 그들이 아니고야 어찌 알랴!
그렇다고 고독이라는 기차가 어디 박 선생만 태우고 황혼으로 갈 것 같은가? 그리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 선생도 김 선생도 허무의 카리스마에 휘둘리어 동승할 것만 같은 예감이니…….
나는 박 선생이 하루빨리 이양을 잊고 또 새로운 이양을 만나 외로움을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금 행복한 얼굴이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그의 옆자리가 이양(李孃)이 아닌 이 여사(李女史)이면 더욱 좋겠다.
소멸을 꿈꾸며
늦가을이긴 해도 11월은 어린 우리들에게 오싹하리만큼 추웠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폐허처럼 황량했고, 누렇게 말라 가는 플라타너스 잎의 버석대는 소리에 더욱 스산하던 그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폐병을 앓던 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아무리 슬픈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심보가 고약한 것이 탄로 날까 봐 침을 찍어 바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을 따라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순자의 집으로 갔다. 시장 통 어물전 뒤에 대문도 없는 가난한 단칸방 앞에서 순자의 어머니는 아이가 입던 옷가지와 책가방을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화장했심더. 조금만 더 댕기믄 졸업인데 망할 기집애 학교 졸업이나 하고 가지.”
길 위에 구르던 낙엽보다 더 푸석하고 늙어 보이는 순자의 어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선생님께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타닥타닥 튀면서 타는 불더미를 작대기로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만 했지 울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그 타는 냄새에서 비로소 순자의 소멸(消滅)을 느꼈다. 늘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나던 순자의 옷이 타고 그 아이도 소멸(燒滅)되었다. 그제야 나는 무말랭이처럼 언제나 새들새들했던 순자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태우면 없어지는구나. 그래! 모든 건 타면서 연기처럼 사라지는구나.
며칠 후, 옷을 태우고 있는 순자 엄마의 꿈을 꾼 듯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부엌으로 통하는 샛문 앞에 앉아 어머니가 사진을 태우고 있었다. 사진이 화르륵거리며 사그라지자 어머니는 물이 담긴 하얀 사발에 재를 툭 털어 넣고 후르륵 마셔 버렸다. 초록 무늬가 각지게 새겨진 그릇이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재를 마시는 어머니의 모진 마음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몇 달 만에 집에 오신 아버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지만 깨어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태워 마셔 버린 사진이 낮에 서랍에서 몰래 훔쳐본 그 사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깨무느라 숨통이 다 막혔다. 소리 없이 우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건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나는 알게 되었다.
군부대에 음식을 납품하는 통조림 회사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언변과 수단이 보통이 아니셨기에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작은 동네만 한 큰 배를 두 척이나 샀다.
4월이면 연평도 쪽으로 조기잡이를 갔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대구나 명태를 잡으러 삼척이나 속초 쪽으로 가는 배를 관리하기 위해 아버지는 몇 달씩 집을 비우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종갓집 살림살이를 억척스럽게 이끌어 가셨다. 그러나 알뜰하게 대식구를 보듬은 수고는 아랑곳없이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오래 전에 상처(喪妻)했다고 했으니 자네만 없어지면 될 것이네.” 하는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던지신 것이었다. 약혼 사진이었다. 검은 치마 저고리에 하얀 동정이 눈부시게 어울리는 사진 속 그녀는 젊고 세련되어 있었다. 물론 검은 폴로티셔츠 속에 살짝 보이는 와이셔츠의 깃이 멋스러워 보이는 아버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어머니와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고 그리고 다정해 보였다.
제천에서 영어 선생을 한다는 젊은 과수댁과 살림을 차린 지는 이미 여러 해가 되는 듯했다. 객지에서 고생만 하고 일 년에 두어 번밖에 집에 올 시간이 없는 바쁜 남편을 위해 새벽이면 정화수를 떠 놓고 무병장수하기만을 빌던 어머니로선 어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그보다 더 처참했을까? 그러나 배반의 아픔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모성애였을 것이다. 여섯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이혼이 아니었고 그들 사이를 소멸(消滅)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날 어머니의 행동은 사진을 태워 재를 마셔 버림으로써 그들 사이가 소멸(燒滅)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주술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꼭 그렇게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녀가 아니랄까 봐 소멸에 대한 어머니와 나의 의견은 그렇게 일치하고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속초로 떠날 때 막냇동생을 들쳐 업은 어머니가 무작정 따라나서자 우리 집은 적막에 휩싸였다. 할머니와 삼촌이 계셨지만 모두들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내가 중학교 시험을 보는 전날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공작 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색종이나 풀, 가위 같은 준비물이 필요할 때라 시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내 속은 시든 검은콩처럼 딱딱하게 말라 갔다. 딸아이의 시험 따윈 안중에도 없는 아버지나 어머니 때문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짝홀짝 울면서 내가 결심한 것은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져 버리는 일이었다. 시험 보는 전날 밤늦게야 돌아온 어머니는 이튿날 내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엿가락 몇 개를 건네셨다. 나는 시험을 치를 중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입에 대지도 않은 엿을 동강동강 허리를 잘라 길바닥에 하나씩 뿌렸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만이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러나 간절한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며칠 뒤 나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내 마음속은 큰물 지나간 자리처럼 온갖 쓰레기와 흙탕물로 엉망이 되었으며 예전처럼 복구되기까지는 참으로 긴 시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물에 휩쓸려 온 흙이나 굴러 온 돌들로 마음속 지형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말았다. 그 뒤 나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순자처럼 죽으면 육 년 동안 개근한 성실함도 졸업장도 다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고, 엿의 효력도 믿지 않았다.
그 뒤 어머니의 주술(呪術) 탓인지 우리 집은 표면상으로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개운한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여자는 돌아서면 옛 연인을 잊을 수가 있지만 남자는 평생 첫사랑이나 연인을 가슴에 품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그 뒤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한 채 오직 성심을 다해 아버지를 섬기는 어머니를 보면서 가슴속에 떡하니 다른 여자 하나만 품고 사는 듯한 아버지가 미울 때가 많았다.
봄이 왔다. 여느 해보다 꽃샘추위가 심해 움튼 꽃의 새싹이 얼기도 했다. 길고 긴 불신(不信)의 겨울이었지만 봄은 조용히 그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내 사춘기 중학교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 이야기를 여태껏 간직하고 있자니 지난 세월이 너무 길어 힘에 부친다. 그리고 아버지는 연로하시다. 그렇다고 훌훌 떨쳐 버리기엔 가슴속에 옹이처럼 깊고 여문 흉터로 남아 있어서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기억 속 수많은 길 어느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언제나 아버지와의 소통(疏通)을 방해하던 그때의 일을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 까집어 보임으로써 아버지와의 완전한 화해를 모색하고 싶은 심정에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에 찌든 아내와 자식들을 포함한 대식구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식하고 말이 통하는 젊은 그녀를 만나 위로도 받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웃이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정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느냐며 그분을 동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에 따뜻한 이해와 위로를 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그분이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용서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논리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바래어 바싹 건조해져 있는 내 흉터는 아주 작은 불씨 하나에도 불이 붙어 활활 타 버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묻어 둔 상처의 소멸(燒滅)을 위해, 아버지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의 소멸(消滅)을 위해 이제 따뜻한 불씨를 보듬고 아버지에게로 가고 싶다.
엽서 한 장에 담긴 풍경
방문 앞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새하얀 저고리를 걸치고 발아래 구름을 잔뜩 몰고 오셨다. 때늦은 점심 요기를 할 요량으로 반찬 두어 가지를 얹어 소반 앞에 앉았다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수저를 든 채 와락 선생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오랫동안 참으로 그리웠던 터라 가슴이 알싸했다. 고향 집 꽃밭 모퉁이에 피어 있던 박하꽃잎 내음이 났다.
허기진 삶에 떠밀리어 차마 찾아뵐 여유조차 없었다고 변명하면 믿어 주실까? 동글동글 굴러다니던 꼬맹이 제자를 허름한 중년 여자로 둔갑시킨 마술 같은 세월의 힘에 놀라진 않으실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설레며 끌어안은 두 팔 안에는 구름 한 덩이뿐이다. 허망하여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저만치 마당에서 창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으신다. 그리고는 부챗살같이 손가락을 펴서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손을 흔들며 구름 위에 둥둥 떠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동안 이렇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두서없이 조잘거리면 ‘우리 올챙이가 사는 것이 여의치 않았구나.’ 예전처럼 별명을 부르며 내 여윈 등을 토닥여 주시리라 믿었는데 저렇게 홀연히 사라져 가니 서운하고 야속했다. 등에서 배 쪽으로 한 줄기 시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눈을 떴다. 모로 누운 아래쪽 베갯잇이 젖어 있었다.
오래 전 마흔이 되던 해, 초등학교 동기 모임을 결성한다며 친구들한테서 분주하게 연락이 오가던 때였다. 사는 것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던 나는 주눅이 들어 어디서나 당당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동기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육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육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다섯 분을 모시고 조촐한 사은 행사를 준비했다.
그날 모임 장소에 우리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다. 아니 오실 수가 없었다. 두어 해 전에 이승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한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나는 날벼락을 맞은 듯 머리도 마음도 얼얼했다. 지지난밤 꿈이 떠올랐다. 어림짐작으로 ‘예순이 조금 넘지 않았을까?’ 여겼기에 상상조차 못한 소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교직을 그만두고 이태 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이외엔 그 어떤 것도 더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다른 반 친구들이 서로의 담임선생님을 얼싸안고 떠들썩하게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어찌나 부럽고 시샘이 나던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별이 눈물처럼 출렁거리는 초겨울 밤을 이슥토록 이리저리 헤맸다. 가문 마음에 이는 흙바람으로 자꾸 코가 매웠다.
다른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릴 만큼 유독 내게 정을 주던 분이셨다.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자리가 잡히면 꼭 찾아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힘든 시간만 가는 것이 아니라 놓쳐 버려서는 안 되는 귀한 것들도 모두 함께 시간 속으로 흘러갔다. 버젓하게 출세하여 선생님을 일찍 찾아뵙지 못했던 내 처지가 가엾고 서러웠다. 그 서늘한 충격의 여운은 오래 지속되었다.
나날이 겉모습이 도시화되어 가는 고향을 보면서 왠지 실향민같이 느껴졌던 내게 선생님은 마지막 남은 고향의 풍경 중 하나였다. ‘언젠가는 찾아가리라. 그래서 그 그늘 아래 앉아 내 삶의 노곤함을 털어놓고 위안받으리라’ 하고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혀 놓은 고향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 후, 늘 그 자리인 고향에 살면서도 선생님의 부재로 나는 완전히 실향민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삶은 그 어떤 것도 성급히 단정 지어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장롱을 정리하던 중 처녀 적 쓴 일기장 갈피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백마 탄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처럼 사십 년을 훌쩍 넘기고도 그 모습 그대로 잠자다 깨어난 엽서 한 장이 너무나 신기했다.
- 무료하던 차 너의 편지를 받고 몹시 반가웠다.
긴 겨울 방학을 건강하게 잘 보내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구나.
곧 개학날이 다가와 똘망똘망한 너희들의 눈망울을 다시 대할 것을 기대하니 마음이 벅차구나.
아무쪼록 국민학교의 마지막 방학이니 뜻 깊게 보내거라. -
선생님이 보내 준 엽서였다. 낡은 종이 위의 글씨가 마치 마술에 걸렸다 풀린 것처럼 하나하나 살아 움직였다.
물오른 꽃대에 조롱조롱 지천으로 피어 있던 샛노란 배추꽃 사이로 나비가 어지러이 날던 봄날의 실과 실습장이 보였다.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누워 버린 어항 속 금붕어를 묻고 차마 돌아서지 못해 울먹이던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달리기에서 단 한 번도 3등 안에 들지 못해 해마다 운동회 날이면 늘 기를 펴지 못했던 내가 손님 찾기에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나는 듯이 결승 테이프를 끊었을 때의 그 감격스러움이 되살아나 목이 메었다. 그때 팔뚝에 퍼렇게 찍힌 1등이라는 도장을 아마 나는 일주일 넘게 씻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잊고 있었을 때는 내 안에서 무용지물에 불과했던 기억들이 내가 떠올려서 그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뜨거워졌을 때는 아스라한 향기를 품은 천만 송이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고향은 손바닥만 한 작은 엽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울하거나 무료한 날 어쩌다 엽서를 꺼내 볼 적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나직이 드리워져 머물다 천천히 흩어지던,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고향의 풍경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었다. 시간에 푹 절여진 낡은 풍경하며 그 매캐하고 정겨운 냄새까지도.
시공을 넘는 관계와 거리 공존의 미학
- 공월천의 ‘타자 반추형(他者反芻形) 수필’
한 명 수
마음속으로의 여행은 물러남이자 귀환이 될 것이고, 동화처럼 “저리로 그리고 다시 이리로”의 여행일 것이며, 독거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간 사회로 복귀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존 둔(John S. Dunne)
1. 공월천의 수필을 읽는 맛은 작가의 안내를 받으며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즐거움과 작가의 자기 성찰의 세계를 공유함으로써 자신을 비추어 보는 즐거움에 있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과 환경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타자들에게서 반추되고 걸러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안내와 해설에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만드는 매력 또한 지니고 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전에 지도 그리기(mapping)를 시도한다. 자신이 보고 체험한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그 타자와 나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 둘 것인가, 그들을 통하여 마침내 정제된 나의 이야기는 어디쯤에 그려 놓는 것이 효과적일까 등등, 작가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이야기 지도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3D라는 것이다.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담긴 입체형 지구본과 같다.
작가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관점은 현재이고, 현재의 이야기를 과거의 경험이나 인물, 현상과 물상들에게 던져 그들에게 부딪쳐 되돌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수필을 ‘타자 반추형(他者反芻形) 수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반추하기 위해서 작가는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타자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먼 시간을 농익혔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선한 눈빛으로 그것을 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혹은 일정 기간은 ‘고독의 홀로 시간’을 불러 자신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자신을 단련시킨 작가는 자신을 객관화하면서도 결코 감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오늘을 살면서도 어제를 잃지 않고, 먼 시간 전의 자신을 지금의 자신과 분명히 구분하면서도 결코 단절하지 않는 ‘자아의 거리’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2. 「유년의 추억」, 「엽서 한 장에 담긴 풍경」, 「소멸을 꿈꾸며」에 나타나는 시간 여행의 거리는 약 45년에서 50년 정도이다. 반세기 정도의 물리적 거리와는 달리 작품 안에 등장하는 ‘나’는 언제나 현재이다. 작가는 과거시제를 사용하지만 작품을 엮어 나가는 공간은 현재이며, 5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의 ‘나’가 50년 전의 ‘나’를 지금의 움직임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의 또 다른 ‘나’를 생성한다. 그의 작품 안에는 관찰자인 ‘나’(A), 그의 관찰 대상인 또 하나의 ‘나’(A1), 그리고 타인에게 보이는(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려 온) ‘나’(A2)가 있다. 그리고 A가 관찰하는 인물과 사건, 상황, 배경(B) 등이 있다. 위 세 작품에서는 A1이 B를 체험하지만, 그것을 내면화시켜 재해석과 결단의 과정을 밟는 것은 A이고, 그 과정 안에서 생성된 A2가 투명 인간처럼 존재한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우리는 공월천의 수필에서 A2의 존재 방식을 통하여 그 명제에 합당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유년 시절에 자신의 어머니보다도 더 살뜰한 사랑을 보여 준 그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유년의 추억」에서 A1은 그녀에게서 받은 ‘배반한 첫사랑’의 젖은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50년이 지나 “욕정도 사랑도 꿈도 모두 기화해 버린 늙은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는 존재, 그녀를 마음에 간직할 자신이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그녀가 마음에 남아 있는 존재, 슬픔이 너무 커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A와 A1의 거리는 전혀 변화가 없다. 「엽서 한 장에 담긴 풍경」에서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엽서 한 장 안에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고향 마을과 추억들이 현재화되어 있다. A의 말대로 “마술에서 풀린” 현재, “기억들이 천 만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현재,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이” 충만한 현재의 60세 A1이 12세의 추억을 현재화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소멸을 꿈꾸며」에서는 아버지가 외도를 하였지만 “그분이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용서되지 않는” 마음이 50년 세월 동안 A1의 내면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A1은 아버지의 허물을 숨기려 하지 않고, 겸손이 동반된 당당함으로 그것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아버지를 용서하고자 하는 존재, 오랜 세월 마음에 묻어 둔 상처를 소멸시킴으로써 아버지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성숙한 존재로 나타난다.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하는 과정을 생각해 볼 때, A1은 스스로를 용서함으로써 ‘용서하는 A2’의 모습을 그려낸다. A1과 A2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지만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3. 「파랑새」에서는 50대 중·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 시간을 거슬러 약 30년의 시간을 회상하는 A1,「박 선생과 이양」에서는 50대 중·후반에서 2, 3년 정도의 시간을 회상하는 A1이 있다. 남편 친구의 죽음과 그에 대응하는 남편을 반추하는 A1은 ‘날개옷을 잃어버린 천사’의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마냥 행복의 파랑새만을 가슴에 간직하며 산 것은 아니다는 것과 보통의 여성들이 겪게 되는 생활의 어려움)와 내면세계의 건조함과 현실에 바탕을 둔 삶의 치열한 현장을 ‘파랑새의 부재’로 대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련한 그리움이나 긍정적인 미련처럼 파랑새의 존재를 묻고 있는 A1은 “이상을 향하여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인간” A2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박 선생과 이양」에서 A1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박 선생 부부의 삶을 통하여 부부 사랑의 아름다움과 건강한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유지하려는 모범적인 존재, “예순이 지난 그렇고 그런 남자들의 허무와 고독의 블랙홀이 얼마나 몸서리쳐지도록 깊고 어두운지”를 인지하고 알려 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위 두 작품에서 보여 주는 A1의 삶의 자세는 결혼 생활에서 얻은 중요한 깨달음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단정하고 잘 정제된 A2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A1과 A2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모습이지만 A는 여전히 관찰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4. 공월천의 수필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는 A1이 성장하여 A2가 되는 심리적 과정을 A로부터 안내 받지만, A와 A1의 거리가 합일되어 A만 나타나는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과 A와 A1의 시·공간적 거리는 작가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언제나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매우 탄력적으로 연결된 점이다. 작가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내공으로 A1이 겪은 삶의 체험을 바라보는 그 눈이 매우 세련되어 있고, 절제와 인내의 긴 터널을 통해 길러진 삶의 깊이가 타인의 터치(touch)를 함부로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유추하며 즐기도록 그에게 일정한 거리도 부여해 준다. 하지만 이 거리는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홀로 살아야 했던 ‘독거’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가 펼쳐 놓은 상황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시간의 연결 고리를 잘 엮어 보면 그림 맞추기와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 하나는 공월천의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자기 성찰의 결과들을 종합적으로 서술했다기보다는 읽는 이가 A의 마음이 되어 스스로 결론짓거나 판단해야 하는 간결한 결말, 혹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의 함축성을 띤 결말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그 초점은 A와 A1, A2와의 거리, A와 읽는 이와의 거리를 컨트롤해 보는 맛, 다시 말하면 A에서 해석들을 읽는 이가 분석하여 A1의 내면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즐거움이다.
필자가 받은 5개의 수필 중에서 울림이 가장 큰 것은 「소멸을 꿈꾸며」이다. 부모의 이야기이면서도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지배한 의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A와 A1, A2의 거리가 가장 가깝게 제시되어 나머지 작품들에 비해 작가 자신의 육성이 가장 많이 배어 있다는 것과 이전에 공월천에게 주어졌던 형식상의 비판들을 극복하고 비상할 수 있는 창작 의식의 강도가 가장 높고 밀도 있는 집중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작가가 보여 준 그 의식의 가능성은 A와 A1, A2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거리의 경계를 허물거나 아니면 그 한계를 극복하여 더 나은 작품 생산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멸’은 사멸(死滅)을 내포하는 개념으로서 ‘다른 것의 사멸은 다른 하나의 생성’을 의미하는데, 그 어떤 하나의 소멸은 다른 것의 생성을 전제로 한다. 소멸과 생성의 과정은 변화와 변천의 과정이다. 작가의 ‘존재자적 현실’은 시공(時空) 속에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A, A1, A2 등의 다른 자아들로 나타나는 도정(道程)은 분명 소멸과 생성이라는 두 개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관점은 A의 관점이고 두 번째는 A1의 관점이다. 이 두 개의 관점이 시간 거리를 두고 있다가 조금씩 좁혀지고, 마침내 두 개의 관점이 하나로 모아지고 다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시간과 공간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삶이 생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공월천의 수필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두 개의 ‘나’가 하나의 ‘나’로 모아졌다가 다시 두 개의 ‘나’로 존재하는 ‘관계와 거리의 미학’에 기초한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존 둔(John S. Dunne)의 말처럼 그의 수필은 물러남과 귀환, 독거와 복귀의 순환 과정에서 나온, 수필의 새로운 장을 보여 주는 ‘마음과 정신 여행’의 산물이다. 참으로 근자에 맛보는 ‘편안한 긴장감’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수필 패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수필 세계가 많은 이의 공감을 얻을 때, 그의 수필 세계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새로운 비상을 향한 결단과 실행은 작가의 몫이다.
내 문학의 씨앗
공 월 천
지난겨울에 동화구연을 배웠다.
새록새록 커 가고 있는 손녀딸과 외손자에게 그래도 조금은 말이 통하는 할미가 되고 싶은 욕심에서다. 내친김에 올봄엔 자격증까지 땄다.
시립도서관에서 운영하는 ‘금요일의 동화나라’에 이야기 할머니로 봉사를 다니게 되면서 나는 다섯 살 또래 햇살반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났다. 환한 오렌지 빛깔 텐트 안에서 봄 햇살처럼 따사롭고 고운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먼 옛날이야기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한 평 반 남짓한 텐트는 마술에 걸린 듯 부풀어 올라 부웅부웅 방 안을 떠다닌다. 그럴 때면 거짓말처럼 조동댁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정이 담뿍 담긴 우리 할머니 조동댁의 운율이 실린 목소리.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집채만 한 커다란 새가 마실에 떠억 나타났제. 새박딱딱 고지박딱딱 후유우우-
어느새 조동댁의 나이가 돼 버린 지금에도 나는 가끔씩 어린 가슴을 콩다콩거리게 하던 그 큰 새의 환영을 본다. 바람에 널어놓은 이불홑청처럼 희디흰 날개를 펄럭이며 새박딱딱 고지박딱딱 후유우우 하고 휘파람 같은 울음을 우는 새. 그래, 그건 조동댁이 내 마음의 텃밭에 뿌린 문학의 씨앗이다.
해거름, 온 식구가 평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을 때쯤 우물가 화단에서 재깍재깍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꽃. 그 노란 잎이 착착 열리는 생명의 소리에 홀린 듯 밥숟가락을 든 채 어김없이 꽃 앞에 서 있던 김방우 씨.
아이구, 얄궂어라! 이 시간을 우째 이리 알고 필꼬?
삶의 고단함도 시집살이의 애환도 몽땅 잊은 채 오직 달맞이꽃잎이 열리는 그 순간의 신비로움에 빠져 황홀해하던 내 어머니 김방우 씨. 그래, 그 모습 또한 내 글쓰기를 있게 한 한 알의 밀알이다.
척박한 땅이라 오랫동안 발아(發芽)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천명하고도 여섯 해를 넘긴 어느 날 기적처럼 싹 하나가 돋더니 열매까지 달았다. 달콤하지도 튼실하지도 않은 못난 열매 하나가 가슴 저미도록 대견하다. 전혀 예상치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더욱.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메마른 땅에서 발아를 도와준 자양(滋養)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니고 있기에 힘겨워 꺼내 버리고 싶은 상처들?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지는 것에 대한 슬픔?
허하고 허해 결코 차지 않을 것 같은 속내를 채워 보려고 마구잡이로 읽어 대던 종류를 알 수 없는 책의 무게? 그래도 늘 바닥이 나 버리던 지적 허영심?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갔다 싶은데 내 기억 어디엔가 남아 있어 복잡하고 성가셔서 툴툴 털어내 버리고 싶은 군상(群像)의 사연들이었을까?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로는 모자라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가 되기로 했다. 핵가족화로 인해 단절되어 있는 조손 세대 간의 문화를 소통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사업이 있다. 이야기를 통해 유아 인성 함양과 우리네 조상들의 문화를 전승하자는 취지다. 슬며시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되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솥뚜껑 운전이나 해야 될 것 같았던 내가 예순이 되어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연수를 가고 교육을 받고 난리다. 신선한 충격이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유의 사항은 생각보다 간단하지만은 않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그대로 실감나게 들려주기만 해야지 교훈이나 훈시(訓示)를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 스스로가 찾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내가 쓴 글 속에도 교훈적이거나 무거운 메시지는 없는 편이다. 사실 나는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잘 모른다. 다른 사람이 쓴 철학적인 언어들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공감이 가지 않아 그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때론 소통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와 나의 무지함에 절망한다. 그래서 딴엔 나 같은 독자들을 배려한답시고 지적 추리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쉬운 말로 쓰려고 한다. 작가의 의미 부여나 해석이 주제로 부각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나는 그저 내 맘속 풍경을 조곤조곤 옮겨 적을 줄밖에 모른다. 주로 타임머신을 타고 유년의 세계로 날아가 동영상으로 다시 보는 수준이다. 혹자(或者)는 내 수필이 일인칭(一人稱) 소설(小說)을 읽는 느낌이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동시대를 산 사람 몇은 아득한 날의 그 거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그때로 잠시 돌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 한마디로 족하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고 또 보잘것없는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 남루한 풍경을 스케치한다.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 내 상처가 읽는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텍스트로 삼거나 교훈이 되길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다. 지식의 양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의 얄팍한 변명일 게다.
이달 월례교육 시간에는 숙제 검사를 받았다.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래동화 몇 편을 내주고 완벽하게 외워 구연을 하는 거였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들 앞에 선다는 건 왠지 쑥스럽고 떨리는 일이다. 누구의 앞에 서 본 경험이 적은 여느 할머니들의 마이크 잡은 손이 굿판에서 내림대를 잡은 것처럼 와들와들 떨린다. 황혼의 순수가 마냥 흐뭇하다.
드디어 내 차례다. 몇 날 며칠을 수도 없이 외우고 동화구연도 배운 터라 나름 자신 있게 해냈다.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연구원님의 평가는 그리 호평(好評)이 아니었다. 완벽한 동화구연이어서 할머니답지 않다는 지적이다. 대사를 캐릭터에 완벽하게 이입하여 연기를 한 것이 오히려 감점(減點)을 받았다. 그럴 때 아이들은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목소리의 기교로 강력하게 다가왔던 주인공의 이미지만 떠올리게 되니 그저 소박하게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만 전하라 한다. 조금은 어눌하지만 진심과 사랑이 담긴 이야기를 원한다. 아차! 싶다.
물이 뚝뚝 흐르듯 세련된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문장으로 자연이나 사물을 옮겨 놓은 수필 한 편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터질 듯이 매료된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귀를 한껏 쫑긋 세워도 보고 듣지 못한 것들이 찬란하게 글로 쓰여져 있을 때 나의 미련스러움이 아쉬워 무릎을 친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쓰지 못할까? 그러나 그 비탄의 심사는 잠시, 며칠이 지나면 그 아름다운 언어는 간 곳이 없다. 가물가물하다.
참 아름다운 구절이었는데, 참 적절한 비유였는데,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이야기가 있는 수필’을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야기를 어설프지만 있는 그대로 쓴다. 이것 또한 말도 안 되는 내 개인의 취향이다.
버릴 수 없는 것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연수를 받는 중 뜻밖에 소중한 선물 하나를 받았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 주신 건데 나는 아직 이렇게 기발하고 쓸모 있는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다.
제가 할머니들께 드릴 것이 있어요. 마음에 차고 다니는 휴지통입니다. 힘든 일, 기분 나쁜 말, 아니꼽게 쳐다보는 시선, 욕심 모두 여기다 버리세요. 하도 많아서 휴지통이 철철 넘치면 우짜꼬?
그때는 강물에 부어 버리세요.
하이고, 그거 참 좋은 선물이네. 지저분하던 내 맘이 억수로 깨끗해지겄다.
그 후로 나는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누군가가 내게 험담을 하면 쪼글쪼글 뭉쳐서 넣고,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쓸데없는 걱정도 빡빡 찢어서 넣고, 화가 나면 그 화도 꾸깃꾸깃 구겨서 넣는다. 휴지통이 가득 차는 날 나는 강가로 간다. 그렇게 강물에 떠내려 보낸 쓰레기에 더는 미련을 갖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차마 버릴 수 없는 게 있다. 지우고 지웠는데도 끝내 남아 있는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들이다. 반올림하여 무려 230개. 내 자유를 구속하는 절대군주다. 이제는 좀 편안해지는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걱정이, 눈을 뜨면 해야 할 일들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그 모두가 전화로 전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여유로움을 빼앗아 가는 그놈의 숫자들. 그러나 아직은 차마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남아 있는 내 생의 무료함과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줄 암호이거니와 내 안의 풍경에 사는 주인공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겨울을 보내고 춘삼월이 오면 나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을 만나러 간다. 황량한 내 마음의 밭에 싹이 돋게 한 내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유능한 농사꾼이 되고 싶다. 원컨대 내 이야기 한 자락이 별이 되고 씨앗이 되어 아이들 마음에 문학의 싹이 트게 되기를.
아 참! 이참에 동화 속의 삽화 같은 예쁜 동화수필 한 편을 써 보면 어떨까?
버려지지 않는 욕심이여!
버릴 수 없는 이 가당찮은 희망이여!
언젠가, 모두 들어내 버리고 가벼워지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 적이 있던가?
2011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