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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필재 김종직과 광주 안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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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廣安족사자료 | 2008/01/09 (수) 15: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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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국안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선산(善山) 김씨로 밀양 사람이며,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맥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연산군 때의 사화에 희생된다. 그와 인연을 맺은 광주안씨가 여러분 있으므로 아래에 소개한다. 정몽주와 길재는 사간공(휘 성)과 친분이 있었고,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서령공(휘 철산)과 생원시 동년이다. 점필재집의 이준록은 그의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과 교우관계를 정리한 기록인데 생원동년으로 서령공이 나와있다. 선대의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호당공(휘 윤손)이 회령판관으로 부임해 갈때 점필재가 전송하는 시를 지어준 것이 점필재 집에 수록되어 있다. 위위주부공파 21세 휘 억수(億壽) 공은 광주안씨 위위주부공파 밀양 입향조로 휘 엄경의 아들(휘 처선의 손자, 휘 완경의 조카)인데, 점필재와 친분이 있어 그가 밀양에 왔다가 같이 놀러갔을 때 지은 시가 있다. 중랑장공파 22세 휘 보문(普文) 공도 광안 밀양입향조로, 그 장남 태만공(휘 覯)은 점필재의 문인이다. 민족문화추진회의 점필재집 문인록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점필재집의 다른 판본 문인록에 올라 있다. 또 휘 보문 공의 동생 휘 효문(孝文)공의 사위 박한주(朴漢柱, 태만공의 친구이자 종매부)공도 점필재의 제자이나, 무오사화때 유배갔다가 갑자사화에 화를 당했다. 점필재 관련 광주안씨들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 아래는 점필재집에 수록된 관련 글들이다. 점필재집은 민족문화추진회(http://www.minchu.or.kr/)에 가면 한국문집총간에는 원문이, 고전국역총서에는 번역문이 몰라있다. ------------------------------------- 이준록 상(彝尊錄 上) 선공사우 제삼(先公師友 第三) ................... 안철산(安鐵山) ...................이상 99인은 선공의 갑오년(1414) 생원 동년(生員同年)이다. ------------------------------------------------------- 점필재집 시집 제6권 [시(詩)] : (휘 억수 관련 시) 손 봉산이 지난번의 운을 사용하여 연아를 지어서 부쳤으므로 다시 화답하다[孫鳳山用前韻作演雅以寄復和] 표양하는 번뇌를 억지로 견제할 수가 없어 / 意馬飄揚莫謾牽 어지러이 벌 나비 따라 해변에 이르렀네 / 亂隨蜂蝶到海邊 제비는 옛 둥지 찾아 진흙이 막 따뜻하고 / 燕尋舊壘泥初暖 고기는 연 줄기 대질러 이슬 방울 기우누나 / 魚觸新荷露未圓 서울에선 오랫동안 조정 반열 차지했었고 / 輦轂久叨鵷鷺列 임천에선 사슴들과 함께 졸기 생각하노니 / 林泉思與鹿麛眠 응천에는 조그만 집에 몸을 붙일 만한데 / 凝川堪著蝸牛舍 누에 칠 뽕도 있고 다닐 적엔 배도 있다오 / 桑可供蠶步有船 푸른 매는 팔에 얹고 누런 개는 손으로 끌고 / 黃犬蒼鷹臂且牽 들 정자 가에서 한가히 여우 토끼 모노니 / 閑驅狐兎野亭邊 포위망 속엔 돼지 뛰어 절벽의 꽃이 떨어지고 / 長圍豕突巖花落 한식이라 까마귀 울어 무덤 나무가 둥그렇네 / 寒食烏啼隴樹圓 병혈의 송어 방어는 모두 배불리 먹었고 / 丙穴鱒魴俱厭飫 와준의 좋은 술에 다 취해 잠이 들었도다 / 窪樽蛆蟻盡酣眠 녹록하게 스스로 하감이 못된게 부끄러워라 / 鹿鹿自慚非賀監 누가 말 타는 것이 배 타는 것 같다고 말했나 / 誰言騎馬似乘船 뒤의 한 수(首)는 어제 짐승을 잡아 신선한 고기를 먹은 즐거움을 서술한 것이다. 이날이 한식일(寒食日)이었으므로, 성주(城主)가 나를 맞이하여 무흘역(無訖驛) 아래로 가서 노루와 돼지를 잡아 저물녘에 만어산(萬魚山) 아래서 술을 마셨다. 이 때 모인 사람은 남 감찰 의(南監察裿), 안 예안 억수(安禮安億壽), 성 남해 수겸(成南海秀兼), 박 참군 종원(朴參軍宗元), 장 참군 정(張參軍鼎)이고, 봉산(鳳山) 및 오 교수(吳敎授)는 모두 일을 칭탁하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로써 자랑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1]병혈 : 중국에 있는 가어(嘉魚)가 생산된다는 동혈(洞穴)의 이름이다. [주D-002]와준 : 돌을 파서 술동이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03]하감 : 당(唐) 나라 때의 고사로서 일찍이 비서감(祕書監)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키는데,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자, 현종황제(玄宗皇帝)는 특별히 그에게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하여 그 곳에서 지내게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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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19권 [시(詩)]
회령에 부임하는 안 판관윤손을 보내다[送安判官潤孫赴會寧]
빠른 걸음으로 한림원과 병조를 거쳐 / 飛步鑾坡與縉雲
이천 리 밖으로 다시 종군을 나가누나 / 二千里外更從軍
원유의 높은 의리는 조정에서 선발했는데 / 元瑜高義朝中選
사로의 맑은 풍도는 변방에 알려지리라/ 師魯淸風塞上聞
예의는 참으로 예속을 도야시킬 만하고 / 俎豆眞堪陶禮俗
용병술은 요기만 진정시킬 뿐이 아니로다 / 韜鈐不獨靜妖氛
임기가 만료되어 황패를 부르는 날에는 / 瓜期苒苒徵黃日
정히 향 머금고 성군 받들기좋을 걸세 / 正好含香奉聖君
[주D-001]원유의 높은 의리 : 원유는 진(晉) 나라 때의 은사 곽우(郭瑀)의 자이다. 전량(前涼)의 장천석(張天錫)이 일찍이 예를 갖추어 징소(徵召)했으나, 곽우는 새를 어찌 새장에 가둘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깊이 은둔하여 자취를 끊었는데, 장천석이 마침내 곽우의 문인(門人)을 구속하자, 곽우가 말하기를 “어찌 은거하여 의리를 행한다면서 문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잠시 나와서 부름에 응했다가 이내 다시 남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에 왕목(王穆)의 태부장사(太府長史)·군사장군(軍師將軍)을 잠시 지내다가 왕목이 그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자, 바로 그만두고 남산으로 돌아와 죽었다. 《晉書 卷九十四》
[주D-002]사로의 맑은……알려지리라 : 사로는 송(宋) 나라 때의 유학자인 윤수(尹洙)의 자인데, 그는 일찍이 범중엄(范仲淹)이 참소에 의해 폄척되었을 적에 급히 상주(上奏)하여, 자신도 범중엄의 당(黨)이니 함께 처벌을 받겠다고 직언을 하였다. 그는 특히 주로 군직(軍職)에 종사하면서 변방의 군비(軍備)에 심혈을 기울였다. 《宋史 卷二百九十五》
[주D-003]황패를 부르는 날 : 한(漢) 나라 때 황패가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어 큰 치적(治績)을 올리고 바로 경조윤(京兆尹)으로 징소(徵召)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漢書 卷八十九》
[주D-004]향 머금고 성군 받들기 : 옛날에 상서랑(尙書郞)이 임금에게 주대(奏對)할 때에 구취(口臭)를 없애기 위하여 계설향(雞舌香)을 입에 머금었던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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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20권 [시(詩)]
밀양에 영친하러 가는 박 참군한주을 보내다[送朴參軍漢柱榮親于密陽]
우리 고향의 문장 뛰어난 포 참군이 / 吾鄕俊逸鮑參軍
급제하여 청포 입고 백운을 향해 가네/ 丹桂靑袍指白雲
절서는 납일이 가까워 빠른 세월이 놀랍고 / 節迫嘉平驚急景
은혜는 양친에 미쳐라 명군의 덕 입었도다 / 恩覃具慶荷明君
노두의 백엽주엔 거품이 응당 움직일 게고 / 壚頭柏葉蛆應動
시내의 매화 가지엔 향기가 이미 감돌겠네 / 澗曲梅枝麝已薰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소식을 묻거든 / 多少柴桑人問我
위하여 북산이문에 부끄럽다고 말해 주오 / 爲言慚愧北山文
[주D-001]문장 뛰어난 포 참군 : 포 참군은 남조 송(南朝宋) 때에 형주 참군(荊州參軍)을 지낸 시인 포조(鮑照)를 이르는데, 두보(杜甫)의 억이백시(憶李白詩)에 “시문이 청신하기는 유 개부 같고 뛰어나기는 포 참군 같았네[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 하였다.
[주D-002]백운을 향해 가네 : 백운은 어버이를 뜻함. 당(唐)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의 법조 참군(法曹參軍)으로 있을 적에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자기 고향 쪽에 흰 구름이 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우리 어버이가 저 구름 밑에 계신다.”고 말하면서 어버이를 생각하며 탄식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3]북산이문에 부끄럽다 : 끝까지 은거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 남제(南齊) 때에 공치규(孔稚圭)가 주옹(周顒)이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북산이문을 지어 그를 책망한 데서 온 말이다.
-------------------------------------------------- 문인록에 태만공(안구)이 수록된 점필재집은 국립중잉도서관 고서 DB에 올라 있다. 佔畢齋先生集:幷年譜 附錄 彛준錄 <br>
저 자 명 金宗直 著 간 사 년 1892 분류기호 KDCP 3648 청구기호 古3648-10-412-1-10 첫부분 "년보"의 "문인록(門人錄)" : p.102 安覯 ------------------------------------------------------ 서울 유형문화재 제86호 열조통기 <권 5>(列朝通記 <卷 五>) pp.54-55 에는 김종직의 학맥과 문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출처 : 국가기록유산 http://www.memorykorea.go.kr/)
宗直之學 得於其父叔滋 叔滋受於吉再 吉再受於鄭夢周 淵源有自矣 <<東儒錄>> 門弟子中 以道學名者 金宏弼 鄭汝昌 兪好仁 朴漢柱 以節義文章孝行 鳴於世者 有南孝溫 金馹孫 曺偉 李鐵均 李宗準 洪裕孫 李穆 李冑 權五福 李守恭 李黿 李季孟 權景裕 姜謙 洪瀚 表沿沫 金訢 柳順汀 崔溥 姜景叙 茂豊副正摠 鄭希良 姜渾 安覯 任熙載 康伯珍 李承彦 元槩 郭承華 姜訢 此外指揮蹊逕成名者 亦多 不能盡記 <<五休子遺稿>> 《열조통기(列朝通紀)》는 조선 후기의 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고조선에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이어 그 이후인 조선의 역사를 체계화하기 위해서 엮은 책이다. 五休子는 安覯의 현손 안신(安[王+{訊-言}])으로, 문집 오휴당집(五休堂集)에는 김종직의 전기가 실려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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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점필재 선생은 유학자로서 시인이며, 지리학자입니다, 유학자로만 밀양에서 홍보하는 것은 선생의 공을 낮추는 무지라 봅니다, 선생은 2000여수의 시를 지었고, 중국의 고승들과도 교류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감수했습니다
밀양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밀양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어떤 책에 보시면 <이준록>을 <이존록>으로 오기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밀양문화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도 답이 없군요
이준록 이든 이존록이든 현재사람들이 해석함에 틀리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바로잡기도 힘듭니다. 한가지 참고사항은 박한주공이 사화로 희생되자 그 부인인 광주안씨가 문중에 읍소하여 그 시신을 광주안씨 총본산이 있는 함안 선왕동 봉산재 선산의 아래에 묘를 모십니다. 그리하여 그후로 매년 향사에 이분도 모십니다. 안씨부인은 너무나 슬픔에 젖먹이를 두고서도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시니 두분의 금슬이 어떠 하였을까.....
그러나 사화이후에 묘를 쓴 것이 발각되면 연좌죄로 당할까 봐 족보의 기록에도 이상하게 표현하였더군요. 박한주공보다 약 백년전에 돌아가신 분의 묘소를 박공의 묘소 후록에 있다라고 표현하였더군요. 그렇게 해서 오래된 무덤으로 인식하게 하였지요. 우리 광주안씨 족보에는 그렇게 비틀어서 암시하여 후손들에게 통분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알린 경우가 더러 보입니다. 충절을 지키면서도 멸문지화를 안 당하려 애쓰신 선조님들의 지혜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그 묘소의 항공사진과 족보의 기록을 올리겠습니다. 우리가 한 시대를 살아가듯이 당시의 살얼음판 생애를 살아가시면서도 올곧게 충의와 효와 부덕으로 슬픈 일생을 살아가신 분들의 뜻과 한을 짚어보면서 후손은 가슴이 아픕니다. 시대에 영합하여 잘 살아간 성씨 문중들은 오늘날에도 조상의 후광으로 역사의 비틀림을 계속 승계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을 문제삼으면 소송사태와 청년무뢰배들의 습격도 서슴치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경우도 더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