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에 주목하라-시의 운율
시란 인생의 어떤 집중적인 포인트를 문자의 율동으로써 표현하는 사업이다. 그렇다면 집중적인 포인트에 있어서의 몸짓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극히 격렬한 것일까, 극히 완만한 것일까. 생각건대, 이상의 두 가지는 모두가 시의 근본적인 운율의 속성으로서 필요할 것 같다. 뿐만이 아니라, 이밖에도 시의 운율은 더 많은 속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가령 일례를 들면, 무용에 있어서의 극치를 말하는, 죽음과 같이 정지해 버리는 저 완전생명의 상태라든지......
그러나 조선의 고가(古歌)나 민요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몸짓은 격렬이 아니라 일종의 완만이다. 거의 전부가 4.4조나 3.4내지 3.5조로 흐르는 이 단조하고 청승맞은 운율은 이를테면 저 가야금의 진양조나 피리 소리와 같다.
늘어진 흰 옷을 입고 느릿느릿 스름길로 내왕하는 사람들의 입김과 몸짓을 그것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조용히 견디고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촌부(村婦)들의 모습까지가 눈앞에 선연할 정도다.
(......) 그러나, 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어떠한 기성 사상에의 편승도 거부함과 동시에 어떠한 기성 운율에의 편승도 거부하는 데서만이 제 몸짓을 가질 수 있는-그러한 문학이다. 물론, 전통적 토대로서 시는 고체(古體)의 율려(律呂)를 디디고 서야 한다. 하나, 이 고체에 현재의 율동의 지향이 모조리 덮여버릴 정도로 시인이 무력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대(前代)나 망령의 몸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우리'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시의 운율을 덮어놓고 무시하는 무지와 아울러 우리가 또 경계해야 할것은 '닐리리'의 가락에의 무조건 항복이다.
실밥
-김왕노
니까노르 빠라도
나를 가봉하고 재단하여 짤라낸 자투리거나 실밥이었다
가브리엘 마르게스, 루신, 가와바다 야스나리, 입센, 테드 휴즈도 세이머스 히니도, 토마스 하디도 귄터 그라스도
서머셋 모음도 내 청춘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숙,영,민 그 이름도 내 젊은 날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뒷문 가에 봄비처럼 서성이며 울다 간
이름이었다 실밥이었다
흐린 날 걷던 소나무 숲도 내 가슴 안쪽에서 은하수로 흘러간
그리움도 실밥이거나 자투리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나의 실밥이었다
먼 훗날 나마저 우주를 가봉하고 재단하여 버린
실밥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을 나는 실밥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스모그
-300볼트용 커넥터
박상순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고등어가 내게 말하길, 낙엽들이 내게 말하길, 지하철 공사장 내게 말하길, 그 속에는 길이 있고, 내가 걸었고, 그 속에는 네가 있고 너를 향해 내가 있고, 그 속에는 고등어가 있고 낙엽이 있고 공사장이 있고, 눈썹 아래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올리던 내 손이, 손가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커넥터가 되었다. 나와는 정말 관계가 없는, 멍청한, 바보같은,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 커넥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네게 말하길, 나는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리하여 나는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눈이 있고,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길이 말하길, 그 속에서 네가 말하길, 내 손가락이 내 손에게 말하길,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에 있고, 두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뿐이다.
미당이 "문자의 율동"이라 표현하는 리듬은 시의 심미적 분위기를 구성하고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의 핵심요소다. 리듬은 빗방울 소리나 심장의 고동, 호흡, 신체의 운동 등 자연의 반복성과 생명의 표현에서 느껴질 수 있지만, 시는 그런 자연의 변화나 규칙적인 순환성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묘미를 얻는다. 그러한 창조적 재구성은 물론 미당이 지적한 바, 그 어떤 "기성 운율에의 편승도 거부"한다. 리듬은 주로 언어의 분절이나 음상의 차원에서 표현되지만, 행과 연의 공간의 비율적 안배처럼 시의 형식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미당은 "시의 운율을 덮어놓고 무시하는 무지와 아울러 아무런 미적 충격도 일깨우지 못하는 '닐니리'의 가락에의 무조건 항복"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들마다 리듬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김왕노 시인의 시에서 리듬감은 시행이나 연 나눔 등의 표면적인 데서 드러난다기보다 음상과 착상법 그 자체에 숨겨져 있다. 김왕노의 <실밥>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무엇보다 재치 있는 어법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이다. 드르륵 드르륵하는 재봉틀 소리처럼 "니까노르 빠라도" "가브리엘 마르께스, 루신, 가와바다 야스나리, 입센/ 테드 휴즈도 세이머스 히니도, 토마스 하디도 긘터 그라스도/서머셋 모음"과 같은 화자의 정신을 가봉질한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이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감을 창조한다. 더욱 참신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가봉"하고 버려진 "실밥"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리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밥을 만들어내는 바느질 자체가 리듬감 있는 반복행위이며, 그런 반복적인 스침을 통해 만들어가는 '나'라는 존재는 "만남"의 리듬이 탄생시킨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리듬은 어휘의 활용을 통해 시 전체의 내용과 조화를 확보하며, 시적 정서를 환기시킨다. 때로 리듬은 소리와 의미가 일체화되어 있는 언어의 속성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정서나 분위기를 전달하며 시의 암시성을 높이는데 기여 하기도한다. 박상순의 <스모그-300볼트용 커넥터->가 바로 이러한 경우라 할 것인데, 그의 시는 시어와 문장을 특이하게 퓨즈처럼 접속하여, 세계라는 의미의 폐쇄회로에 대한 잔혹한 감각을 일깨운다. 숨막히는 "스모그"처럼 시적 언어의 생태로서 주어져 있는 의미의 "연결기"는 시인의 "손"안에 있는 상상의 도구임과 동시에 , "나"조차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로 만드는 의미의 순환회로를 암시한다 할 수 있다. 그 무서운 일관성과 무모순의 체계에 틈을 새기고, 상상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화자의 언어는 "고등어가 있고 낙엽이 있고 공사장이 있"는 곳으로 뻗어가지만, 긍극적으로는 모든 의미의 연동장치인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시는 단단히 연접되어 있는 의미의 관절들을 문장과 행, 호흡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세계라는 의미의 통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언어, 존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차갑고 낯설게 여겨지는 이 시의 독특한 호흡은, 의미회로의 한 분자로 포획되어 있는 존재의 장소를 섬뜩하게 감각하게 한다. 이 시의 구성과 호흡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리듬은 시인의 언어마저 흡수해 버리는 크고 완강한 의미의 틀과, 그 의미의 매질(媒質)이 되지 않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전달해 주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에서 옮김-
첫댓글 리듬에 주목하라 시를 써야 시가 되느리라... 비오는 오늘, 시를 쓰기 위해 리듬 타듯 빗속을 걸어 보겠습니다 쓰고....
좋은 분위기로 어떤 느낌이 다가오리라 는 ...
리듬이라 하였습니까? 그러고 보니 태풍, 비, 폭우,천둥,벼락 ,고요,어둠, 밝음, 모두 자연의
리듬이었습니다. 아~아. 시조가 바로 삶의 리듬을 묶어 놓은 것이었구나?...^오버^
우일님, 전 위의 표현이 너무 맘에 듭니다. 삶의 리듬을 묶어 놓은 것이 시조라는^^ 설우님, 저 스크랩 해갑니다. 감사해요*^^*
시의 운율을 탄다면 그대로 가락이 되어 덩실거려 지는 것이겠죠.. 그렇게 갈려고 달구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설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