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 목(Ta Mok)과 마찬가지로 소 핌(So Phim) 역시 1940년대 프랑스에 대항하여 캄보디아 독립을 위해 싸웠던 군사조직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의 지도자 출신이었다. 그는 1920년대 캄보디아 동부의 소작농 집안에서 출생했다(종종 1925년이라고 인용한 경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음).
1951년 8월 소 핌은 베트남의 지원을 얻어 창설한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 혹은 PRPK)의 창설 멤버 5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54년 "제네바협약"(Geneva peace accords)을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료되자, 그는 당을 이끌 4인의 임시위원회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이후 노로돔 시하누크 (Norodom Sihanouk)의 정부가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을 탄압하고 그 간부들을 반역 혐의로 체포하자, 소 핌과 일단의 지지자들은 함께 프놈펜으로 간 후, 심정적으로 좌파에 동조하고 있던 공공사업부(Ministry of Public Works) 고위 관료 똣 포은(Toch Phoeun)의 배려로 모두 목수로 일을 하였다(Short, 2007, p.157 참조).
1960년 소 핌은 "캄푸치아공산당"(CPK) "상임위원회"의 예비위원이 된 후, 3년 후 정위원이 됨과 동시에 당서열 4-5위의 고위 지도부의 반열에 올랐다. 1960년부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소 핌은 캄푸치아공산당 동부구역의 수장이었다. 소 핌의 외모에 대해서는 "둥근 얼굴에 다부진 체격, 검은 피부에 곧은 검정 머리카락, 그리고 키 180 cm의 장신"이라고 전한다(Kiernan, 1996: pp.89-90). 또한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따 목과 마찬가지로 고집스러운 인물로, 격노했을 때는 동료를 권총으로 위협할 정도로 다혈질이었다고 한다(Short, 2007: p.231).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인기가 있었고, 당 내에서는 -- 그다지 어울리진 않지만 -- 온건한 인물로 알려졌다(Chandler, 1991: pp.296-373).
("크메르의 세계"가 추가한 사진들)

좌측사진은 서기장 폴 포트(좌)와 함께 한 소 핌(우)의 모습이고, 우측사진은 1970년 서방기자 클라우드(Claude: 우)가 크메르루즈에 구금되었다 일주일만에 풀려나면서 가진 석방식에서 촬영된 소 핌(좌)의 모습이다. 당시 클라우드는 단 일주일만 구금되었었는데, 사실상 북-베트남이 그녀를 심문했고, 석방 시에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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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은 당시 종군기자 Aalin Grant가 Pythia Press에 보낸 기고문에 첨부한 것이다)
무슬림인 짬 족(Cham)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 바로 그가 담당했던 동부구역에서 발생했다. 이 진압은 특히 껌뽕 짜암(Kompong Cham) 도에서 크메르루즈 지배에 반발한 짬 족 반군의 반란에 뒤이어 발생했다(Kiernan, 1996: pp.262-277).
1978년 계속되는 크메르루즈의 국경 침범과 베트남 영토 내 잔학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베트남 국방부장관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이 파견한 대규모 베트남 병력의 저지에 실패하자, 폴 포트(Pol Pot)는 -- 아마도 잘못된 판단으로 보이는데 -- 소 핌이 하노이 정부와 공모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폴 포트는 동부구역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지시한다. 소 핌은 처음에 폴 포트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후 가족 및 소규모 지지자들만 데리고 피신했다. 그리고 폴 포트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생포되여 그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이들도 살해되고 만다. 이후 동부구역의 수장은 누온 찌어(Nuon Chea)로 교체되었다(Chandler, 1993, p.196; Kiernan, 1996, pp.392-400; Sher, 2004).
(참고문헌)
- CHANDLER, David, 1992, Brother Number One: A Political Biography of Pol Pot, Boulder, Colorado: Westview Press.
- CHANDLER, David, 1993, The Tragedy of Cambodian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 Kiernan, Ben, 1996, The Pol Pot Regime. Race, Power and Genocide in Cambodia under the Khmer Rouge, 1975-79,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 SHER, Sacha, 2004, Le Kampuchéa des "Khmers rouges" : essai de compréhension d’une tentative de révolution, Paris: L’Harmattan.
- SHORT, Philip, 2007, Pol Pot. Anatomie d’un cauchemar, Paris: Denoël. |
첫댓글 많은 인물들이 식민지 때는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독립 후는 정권장악을 위한 처철한 투쟁,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어지면 토사구팽 당하고,인물 개개인을 이해 하기가 힘이 드네요.
사실 캄보디아의 식민체제가 지형과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을 요즘은 많이 하게 되네여. 가령 한국이나 베트남은 독립 이후에 길쭉한 지형의 영향으로 일단 남북으로 갈라져서 한쪽씩 좀 정리를 한 후에, 이후 남북이 한판 붙어 결판을 내던가(베트남의 경우), 아니면 장기적 대치국면으로 전환되든가(한국) 했죠. 그런데 캄보디아는 평야가 많고 그냥 정사각형은 아닐지라도 둥글렁한 지형이다 보니 분단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지녀서, 쉽게 판도 정리가 안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네여.
그런데 또 동북, 서북, 서남쪽으로는 일부이긴 하나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 있어서, 어느쪽이든 좀 세가 약해진 쪽이 이곳으로 들어가 반군활동을 하면, 평야지대(프놈펜)에 주력 정권을 잡은 세력에게 상당히 엿(??)을 먹일 수 있는 지형적 구조도 갖고 있는데, 이 지형들의 역할은 이미 20년 이상 걸친 여러번의 전쟁에서 효과가 입증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정리까지 아주 오래 걸린 것 같네여. 즉 한국이 남북대치로 특히 긴장감 있는 시대를 보낸 동안, 캄보디아는 그 시간 전체를 내전을 치르면서 보낸 것이죠.
한편 반군들이 이용했던 변두리 산악지대 덕택에, 현재의 캄보디아군도 사실상 공군력 해군력 이런 정규적 전투력은 포기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어느 쪽이든 캄보디아에 쳐들어 오면, 우리는 특수부대들만 산악지대로 옮겨 한 10년 이상 엿먹일 각오가 되어 있다... 모 그런 것이 현재도 캄보디아군대가 사용하는 국가방위 개념인듯 해보이더군요. 물론 그런 사태 이전에 가능한한 주변국들과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이 제1차 전략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