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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 서문 중]
아아, 정치는 그릇과 같고 사람은 도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제가 그 혼을 잃고서 어디 보존될 수 있겠는가.
도와 그릇을 함께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함께 키워 나가는 자도 나이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아는 데 있다. 그런즉 나를 알려고 할진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嗚呼라 政猶器하고 人猶道하니 器可離道而存乎며, 國有形하고 史有魂하니 形可失魂而保乎아. 並修道器者도 我也며 俱衍形魂者도 亦我也니 故로 天下萬事가 先在知我也니라. 然則其欲知我인댄 自何而始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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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만에 국제도서전 참석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 참석한 뒤 조선활자 책 특별전 코너에서 직지심체요절 영인본을 살펴보고 있다
박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접한 것은 아마도 2013년 6월 19일에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인 것 같습니다. 당시 도서전에 참여했던 증산도 부스에서 김행 대변인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환단고기]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관상은 굉장한 귀격입니다. 봉황의 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여장부로 보여집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일등공신인 소서노에 비견될만 하다고 할까요.
박근혜 대통령 "역사는 혼과 같다" 단군세기 인용 대일 메시지
■ 박근혜 대통령 광복절 메시지 직접 경축사 준비 관여 김성환기자 2013.08.16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고려 후기 문신인 이암이 말한 구절을 인용, 대일메시지를 전달해 눈길을 끌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고려 말 대학자 이암 선생은'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國猶形) 역사는 혼과 같다(史猶魂)'고 하셨습니다. 만약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가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유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우리의 단호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인용한 구절은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내용. 단군세기는 이암이 경기 양주의 천보산에 올라갔다가 태소암에서 고서를 얻어 읽고 엮은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조선 연대기로, 환단고기에 수록돼 있다. 인용문이 주목을 받는 것은 박 대통령이 직접 이번 경축사 준비에 세밀하게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연설문 초안은 조인근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 각 부처와 청와대 수석실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까지 수 차례 직접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듭하면서 최종 경축사를 완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8ㆍ15 광복절을 맞아 관심이 집중됐던 대일 메시지에 이 구절을 인용한 것도 짧고 강한 메시지를 일본에 전달하기 위한 박 대통령의 의중이 깔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단군세기가 실려 있는 환단고기가 수십 년간 정통역사학계에서 위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인용이 자칫 논란이 될 소지도 있다.(*) |
밑에 강단의 좌파사학자 하일식이 환단고기를 인용한 박대통령의 광복절 축사가 잘못되었다네요. 이암이라는 분에 대한 논문이 인터넷만 찾아봐도 넘쳐나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폄훼하고 있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인데 앞으로도 자기들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겁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자국의 없는 역사도 자작하여 가르치는 판국에, 버젓이 과학적으로 또는 유물로도 진실이 증명되어지고 있는 [환단고기] 무조건 부정하는걸 보면 참으로 희한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런 학자들의 대다수는 기독교 신자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건지, 아니면 다분히 정치성향 때문에 일단 대통령을 폄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건지, 또는 자기가 지금까지 연구해 온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질까봐 그런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반박은 밑에 있습니다.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인용한 박대통령
미이어오늘 2013.8.21
<-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연세대 교수
고려말의 대학자 이암?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 가운데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내 눈길을 끌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 가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이런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에 대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 있고 성의있는 조치를 기대합니다.”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 앞에서 “신체의 일부는 독도, 영혼의 상처는 왜곡된 역사를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고 한다. 직설적 표현보다는 완곡한 비유법을 사용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얼핏 수긍이 가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기교를 섞은 수사의 바탕에는 상식을 벗어난 인용이 있었다.
대통령이 ‘고려 말의 대학자’라고 한 이암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홍건적 토벌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겁이 많다고 해 교체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경까지 들이닥친 홍건적을 피해 경상도로 피난한 공민왕을 수행해 1등 공신이 되기도 했다. 이암은 글씨에 뛰어났고 서화에 능했다. 그래서 이제현이 지은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의 글씨를 썼다.
문수원은 춘천 청평사의 고려시대 이름이다. 그러나 이 비는 일찍이 소실돼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내용이 ‘익제난고’에 실려 있고, 이암의 필적을 알 수 있는 탁본 일부가 ‘대동금석서’에 전해질 뿐이다. 이런 정도의 자료만으로는 이암이 대학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광복절 축사에는 박은식을 인용했어야
이암이 유명해진 것은 ‘환단고기’ 덕분이다. 환단고기의 일부인 ‘단군세기’가 이암이 지은 것으로 주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근대적 용어가 많이 나오는 점 등으로 학계의 사료비판을 거쳐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로 일찍이 판명된 상태이다.
광복절 축사에 인용된 것은 단군세기 서문은 “나라는 형(形)과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으니 형을 잃고 혼이 보전될 수 있겠는가” 하는 구절이다. 학계에서는 이 문장을 ‘한국통사(韓國痛史, 박은식, 1915)’의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를 본딴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환단고기가 만들어진 시점도 1915년 이후로 보는 것이다.
이번 광복절 축사는 참모들에게 자료를 받아 대통령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작성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랐다. ‘고려 말의 대학자’라는 근거 없는 수식어가 그랬고, 원조인 박은식이 안중에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박은식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고,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이 탄핵된 뒤에 대통령을 지낸 분이다. 그렇기에 국토와 역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려면 그를 인용함이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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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판밖에 유명한 두 가문이 있는데 용인 이씨와 고성 이씨입니다. 용인 이씨는 환인이래 전래되어온 한민족의 선맥(仙脈)을 잇게 해준 공덕이 있는 가문이고, 경남의 고성 이씨는 한국의 9천 년 국통맥을 바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가문입니다. 특히 고성 이씨는 이암은 물론이거니와 이맥 이기 이유립으로 이어지면서 [환단고기]가 이땅에 찬란히 빛나게 해준 대단한 가문입니다. 지금은 잘 모를지라도 사실 민족의 모든 사람들이 고성 이씨 가문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요.
박은식을 베낀 것인가? 박은식이 베낀 것인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은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이라는 책에서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하고 사유혼하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나오므로,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발간 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적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박은식은 '나라는 형, 역사는 혼'이라는 개념을 [한국통사] 서문에서도 분명히 옛사람의 말이라 밝히고 있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다.(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98페이지)
이암은 누구인가?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의 25세 충렬왕 때 경상도 고성에서 고성 이씨 이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암은 10세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에 들어가 학동초당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고조선 초대 단군 때 쌓은 참성단에 올라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이암은 외래풍이 뒤덮고 있던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려는 큰 뜻을 품어 “어두운 우리 동방의 거리에 누가 밝은 등불을 비출 것인가. 우리 동방 세계의 편안을 위해 지금 내가 나서리”라는 시를 지었다.
이암은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62세에 공민왕에 의해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에 임명 되었다. 이암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공민왕을 보필하기 시작한 그 다음 해 원에 반발하여 일어난 한족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이 최고 사령관으로 명하여 급파한 인물이 바로 이암이다. 이암은 서북면병마도원수가 되어 4만 명의 적을 물리쳤다. 이후 강감찬에 비견된다는 전남 곡성 출신의 명장 정세운 장군을 추천하고 그가 홍적적을 대파하는데 조언 역할을 하였다. 6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단군세기 완성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이암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실을 갖춘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또한 서체가 여말선초의 국서체가 될 정도로 최고의 명필가였다. 평생 재물과 권세를 탐하지 않고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켰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지어 고조선 2096년 역사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만고의 명문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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