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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성 아우구스티누스"(1)-한상인 목사(기하성 순복음 총회 "교회사 영성연구"에서 발췌한 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약성경의 종결과 종교개혁 사이의 1400년 동안 기독교사상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고대의 마지막 사상가이며,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다. 그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서방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인정된다.
1. 생애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영어식 명칭으로 어거스틴이나 히포의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 of Hippo)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어거스틴으로 명명한다. 그는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패트리키우스는 로마의 하급관리로 비기독교인이었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부모는 범상치 않은 어거스틴을 16세 때 대도시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면서도 도시의 쾌락에 빠져 17세 때 여인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더욱이 마니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마니교가 덜 윤리적이었기 때문에 계속 마니교에 몸을 담아 쾌락 가운데 살기를 원했다.
20대 후반에 그는 마니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383년에 그는 연인과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갔다. 다음 해 보다 안정적인 자리를 찾아 밀라노에 갔는데, 어머니 모니카의 권유로 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386년 그는 괴로움 중에 기도하다가 정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에서 ‘들고 읽으라’(Tolle lege)는 음성을 듣고 로마서를 펼쳐 들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얼마 후 연인이 곁을 떠났고, 어머니와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말 독신이 되어 헌신의 길을 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수도원적 공동체 생활을 하며, 경건생활과 학문연구, 명상에 전념했다. 히포에서 교회에 다니던 중에 히포의 감독 발레리우스가 그를 보고 그가 교회를 옮기지 못하도록 그를 감독보로 임명했다. 4년 후 감독이 죽고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수도사적 명상 생활을 유지하면서 목회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러면서 많은 저술을 했는데, 이로써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공격하는 동안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함몰하는 문명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천년의 지성’으로 남았다. 그는 소멸해가는 로마문명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2. 대표적 저서
주후 400년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완성하였다. 이 책이 회심 이전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진리를 찾기 위해 겪었던 도덕적 지성적 영적 투쟁들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고백록은 자신의 많은 죄를 인식하고, 자신을 죄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신국론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 The City of God)이라고도 번역된다. 그는 410년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413-427년에 걸쳐 신국론을 저술하였다. 로마의 비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이 기독교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재앙을 만났다고 비난하였는데,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저술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의 전반부(1-10권)에서 그는 하나님이 로마제국을 복음 전파를 위한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융성하게 하셨으나, 이제 그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세상의 다른 왕국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하신다고 하였다.
후반부(11-22권)에서는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대한 중심주제가 언급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살아가면 영적인 축복과 영원한 평화를 추구하는 영적인 인간이 되지만,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면 지나가버리는 땅의 것을 추구하는 왜곡된 인간이 된다. 하나님 사랑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하나님의 도성’이라 하고, 자신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지상의 도성’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 두 도성의 긴장과 대립의 과정이지만, 이 두 도성은 서로 혼합되어 역사의 종말까지 함께 진행해간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에서 두 도성은 분리되어 각각 고유한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지옥으로 나눠질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의 도성과의 관계도 유사하다. 이 세상의 교회에는 거룩한 자들과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 섞여있다. 그것은 마치 노아의 방주에 청결한 짐승들과 불결한 짐승들이 함께 섞여있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교회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모호성과 상대성, 제한성, 타락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인류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졌으며,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직무를 부여받았다. 이를 통해 교회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해준다. 어거스틴은 “내가 교회의 권위를 통해서 감명받지 않았다면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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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성 아우구스티누스"(2)
3. 이단과의 논쟁
1) 마니교
어거스틴은 진리와 무관하게 남을 설득하는 기술을 익히는 수사학보다 진리를 말하는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 마니교를 찾았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통해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마니교에서는 신앙을 문화인과 지성인의 가치없는 활동이라고 조소하였다. 그들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앙은 이성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참된 신앙은 결코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앙은 모든 인식의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단계로 여겼다. 그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나중에 그는 악의 존재는 선신이 악신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주장은 피상적임을 알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오직 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천사나 인간에게 오용됨으로써 악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자기가 잘못 인도하여 마니교에 빠진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마니교에 대한 비판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 펠라기우스주의
영국의 수도사인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지중해 전역을 여행하면서 아담의 원죄는 단지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인류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정하고 유아들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무죄하게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은 원죄와 타락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거룩한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인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시작과 성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반박하였다.
3) 기타
약 312년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도나티즘은 디오클레티안 박해 동안 몇몇 기독교지도자들이 살기 위해 성경의 사본들을 정부에 바친 것을 비판하면서 발생했다. 그들은 배반자들의 성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따로 세우게 되었다. 80년이 지나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을 때, 결국 정치적 교권적 싸움이 되어 도나투스파를 정죄하고 소멸시키게 되었다.
한편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하다. 어거스틴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회의주의는 거짓이 된다.
4. 하나님의 은혜
1)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며 최고선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하나님과 반대방향으로 간다. 인간 조상의 타락은 인간의 행동 방향을 하나님과 정반대로 바꾸어놓았다. 인간은 이런 원죄로 인해 그 의지가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자신이 아무리 원한다 할지라도 영원을 향해 그의 의지를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나 자유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시간의 세계로 자꾸 떨어질 뿐이다. 인간은 실존적 탄식과 절망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로 임한다. 첫째로, 그의 세계 창조와 보존에 나타난다. 세상만물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무(無)로 환원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증거이다. 둘째로 하나님 은혜의 사건은 말씀의 성육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성육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인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 은혜의 역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사랑으로 부어주시고, 또한 새롭고 선한 의지를 재창조해주시는 역사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내재로 인하여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현재 여기(here and now)에서도 영원을 체험하게 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단맛’은 신비한 영적체험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사랑이란 인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종말의 대망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이미 체험한 삶’(already experienced)과 ‘아직 충분히 체험하지 못한 삶’(not yet experienced fully) 사이에서 종말의 완성을 대망하며 살고 있다. 인내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역사 안에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현재 체험한 영원은 미래를 약속하는 보증이요, 미래를 미리 맛보는 체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영원을 향해 소망을 가지고 순례를 계속할 수 있다.
나가는 말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어거스틴의 영성의 샘에서 천년의 지성이 흘러나왔다. 그 지성의 샘물은 개신교의 은혜와 믿음의 기반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한상인 목사(기하성 순복음 총회 "교회사 영성연구"에서 발췌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