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센티의 무티에추가 뛰던 1970년대 내내 아시아의 탑 자리를 번번이 놓쳤던 한국.
그 무티에추가 은퇴를 했고, 드디어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19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 게임.
한국도 풀전력은 아니었습니다. 10년 동안 대표팀의 백코트를 이끌던 김동광이 아시안 게임 직전에 은퇴를 했고, 센터 조동우가 간염으로 팀에 합류하질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감독 자리를 누구나 꺼려했기 때문에 대표팀 감독 경험이 없던 방열 감독에게 지휘권이 주어졌습니다.
뭐가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대표팀이 금메달 전력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그런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대회는 열렸고, 한국은 필리핀, 북한, 인도를 누르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준결승에서도 숙적 일본과 만나 박수교 선수의 결승골로 1점차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안착했습니다.
이충희, 박수교, 이 두 선수의 득점력은 한국팀의 상수였습니다. 그러면, 중공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누가 변수 역할을 해줄 것이냐가 관건이었죠. 그가 바로 신산, 신선우였습니다.
신선우 선수는 189센티의 센터로서 맥스 버티컬이 무려 90센티에 달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못받고 혹사당하면서 무릎연골이 다 닳아 없어졌고 여러번의 수술 끝에 간신히 재기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조동우가 빠진 전력에서 점프력을 잃어버린 한 센터의 활약 여부가 바로 한국팀의 변수였던 것입니다.
1. 스틸에 이은 빠른 속공 패스
경기 시작하자마자 강한 완력으로 공을 뺏어내어 박수교에게 연결, 이충희가 가볍게 골을 넣습니다.
2. 환상적인 피벗 플레이에 이은 어시스트
마치 빌 월튼처럼, 하이 포스트로 나와 본인이 돌파를 하거나 스핀 무브를 통해 오픈맨을 찾아 공을 넣어주는 능력. 이게 신선우의 장점이었고, 수비하던 상대팀 센터진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전법이었죠. 워낙 풋워크가 좋은 선수였어서 수비 타이밍을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3. 풋백 레이업
박수교 특유의 턴어라운드 점프슛(저 당시엔 박수교의 저 슛을 "트위스트" 슛이라 불렀습니다)이 미스되고 그 공을 낚아채 부드러운 핑거롤로 성공시키는 신선우. 신선우 선수는 점프슛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으나 핑거롤 기술은 매우 뛰어났던 선수입니다.
4. 마치 포인트가드처럼 속공을 이끄는 센터
여유롭고 부드럽게 임정명에게 A패스 찔러주는 신선우.
5. 또 다시 피벗 플레이로 찬스 만들어준 센터
페인트존 안에서 장신 수비들에게 둘러싸여도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6. 찬스만 나면 돌파 레이업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핑거롤 기술이 뛰어나서 어느 위치에서나 부드러운 레이업이 가능했던 선수.
7. 스핀 무브에 이은 왼손 레이업
몇 개의 영상만 봐도 중공 센터진이 얼마나 애를 먹는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8. 그 유명한 "수교야, 들어가" 플레이
이충희-신선우-박수교 현대 3인방의 콤비 플레이.
마치 스테판 커리, 드레이먼드 그린, 클레이 탐슨, 3인방의 플레이를 보는듯 합니다.
9. 속공 상황에서 노련하게 파울 얻어내는 모션
신선우 선수는 이 경기에서 영리하게 얻어낸 8개의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10. 신선우 투 이민현
후반전 숨막히던 접전 속에 신선우가 만들어준 찬스를 대표팀 막내 이민현이 잡아 슛 시도. 안 들어간 볼을 이민현이 다시 풋백으로 성공시키며 점수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귀중한 플레이입니다.
11. 후반전 5분 남기고 신선우의 어시스트를 받은 이충희의 깨끗한 슛
5분 남기고 한국이 77 대 72로 이기고 있던 상황. 신선우의 스크린과 어스스트를 받은 이충희의 슛으로 한국팀이 7점차 리드를 잡는 순간입니다.
12. 신선우 투 신동찬 - 결정적인 플레이
중공의 추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경기 종료를 얼마 안 남기고 턱 밑까지 쫓아왔으나, 신선우가 신동찬에게 완벽한 찬스를 만들어주며 다시 점수차를 벌릴 수 있었고, 결국 한국은 리드를 안 내준 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신선우는 이 날 (저의 스탯 기록에 의하면) 16득점, 10리바운드, 13어시스트, 3스틸, 1블락샷을 기록했습니다.
신동찬-박수교 백코트였으나, 실질적인 팀의 플레이메이킹은 이 센터의 손에서 이뤄졌습니다. 노련하고 유능한 리딩 가드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상대팀 진영까지 볼을 운반한 것도 신선우였고, 신선우가 박수교나 신동찬에게 공을 넘겨 주면 신선우가 다시 하이포스트에서 공을 건네받고, 박수교, 이충희, 신동찬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점에서 오픈 찬스를 기다리는 식이었죠.
신선우가 특별했던 점은, 8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센터는 골밑에서 궂은 일을 하고 스크린이나 서주는 역할이 고작이었는데, 그런 기존의 센터들과는 격이 다른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포인트 가드보다 공을 더 많이 소유했고, 하이 포스트로부터 패싱력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던 올라운더였고, 자신이 맡은 상대팀 센터를 꽁꽁 묶어버리는 수비력은 물론, 패싱 레인까지 차단하며 많은 스틸까지 유도해내는 빅맨이었습니다. 신선우는 단 10점만 득점하고도 경기를 장악했다는 소리를 듣던 특별한 센터였고, 그의 이런 장점이 모두 나왔던 경기가 바로 이 82년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BQ가 너무나 좋았고, 순간적인 재치나 센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여유로움과 침착함... 그는 말 그대로 신산(神算)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현대팀 수장이었던 방열 감독의 지략 또한 대단했습니다. 중공을 꺾기 위해 토너먼트 내내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수비법을 들고 나와 중공 팀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런앤 점프(Run & Jump)와 매치업 존(Match-up zone), 그리고 2-3 존 디펜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투 아웃 쓰리 백(Two out Three Back)이라는 다양한 수비를 선수단에 주문했던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수비 방법은 모두 일반적인 수비법이 아니었습니다. 런앤 점프는 선수들 체력이 심하게 사용되는 쉽지 않은 압박 수비 방법이었고, 투 아웃 쓰리 백 역시 상대 코트부터 압박을 하는 체력과 공간 협업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비법이었죠. 그나마 매치업 존 정도가 선수들이 이해하기 쉬울 정도였고요.
그리고 공격은 속공이 아닌 이상, 무조건 30초 룰을 다 쓰는 지공작전을 폈습니다. 성미가 급한 중공 선수들이 수비하다가 짜증이 날 정도로 경기 내내 지공작전만 썼습니다. 24초 동안 공 돌리다가 마지막 6초에 슛을 쏘는 전법을 고수했는데, 그 때마다 이 현대 3인방이 슛을 성공시켜줘서 이런 기적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금메달의 업적은 위대한 감독, 위대한 선수들이 합작해낸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첫댓글 왜 저런 위대한 농구인들이 현대에 와서 후배들 앞길을 망치기만 하는지 ㅠㅠ
농구만 잘하지 인성은 바닥이니까요...
와... 정말 훌륭한 칼럼입니다!!! 박사님의 모든 칼럼이 그렇지만 이 글은 정말 우리 회원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네요.
인기 게시물로 올라가서 다음 메인에 걸려 있어야할 퀄러티네요. 농구대잔치 원년부터 현대빠인 제게는 <응답하라 1982> 같은 느낌입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Doctor J 어렸을 때 성씨와 운동 종목간에 관계가 있구나 하고 믿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그런 편향을 만든게 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김씨 타선과 배구의 "강만수/강두태" 농구의 "신동파 / 신선우 / 신동찬" 선수들이었습니다(신동파 선수 플레이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요). 그런데 신선우 선수가 이렇게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몰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센터가 감독을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은데 신선우 감독은 센터였군요? 박사님 덕분에 또 새로운 사실 배워 갑니다~
네, 분명히 포지션은 센터였는데 소프트웨어는 포인트가드였습니다.
이 경기 라이브로 본거 같은데. 남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는 정말이지 기뻤었죠. 마지막에 박수교였나 신선우였든가 공을 확 뿌리던 기억이 나네요
잘 봤습니다 박사님
저 당시 방송사 측에선 이 결승전을 한국이 이길 것으로 보질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로만 중계해줬고 경기 이긴 다음에 밤 11시던가... 밤중에야 녹화 방송을 해줬습니다. 약간 편집된 방송분이었는데 경기 자체를 편집한 것 같진 않았고, 작전타임이나 중간중간 경기가 멈췄을 경우만 잘라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공 뿌린게 박수교, 그리고 그 공을 쳐낸 선수가 이민현 선수죠.
@Doctor J 그랬군요
기억이 엉망진창이네요
역시 남농구는 관심이 별로 없었나봐요 ㅜㅜ
신산이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도 이 경기는 기억납니다. 남농 금메달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죠. 조동우가 빠진 골밑을 189센치의 시선우가 지켜야 했던, 다행이 중국의 골밑이 무티에츄 은퇴 후 2m에서 2m5정도로 비교적 스몰라인업(?)이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신선우는 천하의 허재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올라운드플레이어의 원조였던 선수입니다. 조동우 혼자서 외롭게 지키던 그나마 조동우도 부상때문에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짧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으로 얼굴보니 반갑네요 왼쪽부터 방열 감독님 옆에 (뒷줄)이민현, 신동찬 박수교 박종찬 안준호 임정명
아랫줄 신선우 이장수 박인규 이충희 이영근... 조명수선수는 안보이는 듯
조명수 선수가 사진을 찍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박종천 (O)
@Doctor J 박종천이죠^^. 조동우와의 영원한 게임 시작 점프볼 라이벌
@리오타 이경재 감독의 인터뷰 중 : "무티에추 2m35, 일본의 오까야마 2m25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국내선수가 조동우였네. 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말이지. 맨발이 197cm였어. 거기다 윙스팬이 2m5...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서 영양 상태가 좋아 신체 밸런스가 특별했지. 또 100미터를 12초에 달리는 런닝 능력도 매력적이었고. 점프력도 뛰어나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덩크가 그 친구의 전매특허였지."
너무나 원시적인 당시 선수관리 때문에 신선우, 조동우, 이런 선수들이 롱런하지 못한 게 참 안타깝습니다.
@Doctor J 조동우 선수와는 동농에서 몇차례 함께 농구했었는데 그때도 엄청나셨습니다
@이사장 👍👍
위 선수들을 신생팀인 현대와 삼성이 각각 반띵해갔고 이민현만 양보해서 기업은행으로
저 시대에도 일단 몸이 잘 만들어져 있네요
웨이트 트레이닝이 전혀 체계적이지 않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는데도, 오히려 70~80년대 선수들의 피지컬이 엄청 좋았습니다. 정말 무식하게(?) 운동하고 몸 만들고 했었던 것 같아요. 조동우, 임정명, 신선우, 박인규, 박수교, 김동광, 이민현, 조명수, 다들 몸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Doctor J 예 글과 댓글 감사합니다
저한테는 그냥 현대 걸리버스 감독님이셨는데 굉장히 특별한 유형의 언더사이즈 센터셨군요. 결정적 플레이 짤에서 선수들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키만 작았지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엄청났네요.
와. 영상감사합니다.
이런 선수인줄 알고 감독일때 봤으면 좋았을텐데@@
단신센터였는데 슛은 없었나요?
미드레인지 점프슛이요? 그건 별로였습니다. 저 당시는 센터가 외곽슛을 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Doctor J 그것까지 앞서나가진 못했군요ㅎㅎ 잘봤습니다.
신산 신선우..
그의 플레이에서 강한 허슬이 느껴집니다.
와...센터였다니 ㄷㄷㄷ 당연히 가드 아니면 스포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중고교 시절부터 은퇴하는 순간까지 올라운더 센터였습니다. 부상 전엔 점프력과 힘이 엄청 좋아서 단신이었어도 빅맨 역할을 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고요.
허재가 가장 닯고 싶어했던 우상이었습니다. 허재가 왜 그토록 리바운드와 패스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Doctor J 닥터 제이님께 또 배워갑니다
저랬던 신산이 감독으로 이상민-추승균-조성원-맥도웰-재키존스를 만났으니 얼마나 신났을지.. 그시즌 끝나고 재키존스를 SK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3연속 우승 가능했을텐데.. 그래도 감독으로도 대단했지만.. 그때의 이조추맥키 라인업이 진짜 쉴세없이 몰아치는 파도같았는데 두고두고 아쉽네요 물론 저는 대우팬이어서 뼈속깊이 그때의 현대걸리버의 막강전력을 기억하고 있지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