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변호사(전 국회의원)
1. 서론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는 얼마전 전 교육부 장관 13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교육인적자원부에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실시할 것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그 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한자조기교육에 관한 논란이 전국으로 뜨겁게 번져나가고 있다.
한자조기교육을 주장하는 일이나 그것을 반대하는 일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각 사람이 자신의 의견이나 소신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보장된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사회가 성숙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일수록 각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경우의 책임이란 자신의 주장을 양식의 논리 위에서 전개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지금 일고 있는 한자조기교육론은 합리성과 양식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보기보다는 감성과 편견의 터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우선 위 총 연합회가 내세우고 있는 기초적인 명분론을 살펴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ꡒ우리말의 70%이상이 한자어인데도 국민이 한자를 제대로 알지 못해 국가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ꡓ
ꡒ우리말의 70%이상이 한자어ꡓ라는 주장의 정확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백보를 양보해서 그 주장이 맞다고 치더라도, 한자를 알지 못하게 되면 ꡒ국가경쟁력이 저하된다ꡓ는 단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책임한 독단론에서 나온 편견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2. 한자조기교육론의 명분
한자조기교육론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다른 이유 두어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한자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려운 글씨가 아닐뿐더러 기본한자 1,500자만 습득하게 되면 한자로 쓰여진 고전 중 97.72%를 이해할 수 있다ꡒ
우선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한자가 배우기 쉬운 글자인가 하는 점을 살펴본다. 한자가 얼마나 배우기 어려운 문자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중국의 문학자이자 사상가인 노신(1981-1936)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는 중국의 지배계급인 사대부들도 한자의 장벽을 넘기기 위해서는 10년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대부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자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1993. ꡒ문예문답ꡓ).
그 결과 특권계급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10년, 20년의 시간을 들여서도 한자를 끝내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중국에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1934. ꡒ신문자에 대하여--질문에 답한다ꡓ
그의 결론은 이렇다. ꡒ한자가 망하지 아니하면 중국이 망한다. 한자를 위해서 우리를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 한자를 희생시킬 것인가. 나는 우리를 위해서 반드시 한자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ꡒ (1934. ꡓ한자와 라틴화ꡒ)
모택동 전 주석은 ꡒ중국이 서기 위해서는 불도저로 한자를 밀어 엎어야 한다ꡓ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자의 상황이 이렇다고 하면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한자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ꡒ기본 한자 1,500자만 습득하게 되면 한문고전 97.72%를 이해할 수 있다ꡓ라는 한자조기교육론자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 ꡒ한국은 ꡒ한자문화권ꡓ으로 불리워지는 ꡒ동북아ꡓ제국 중의 한 나라이므로 한자를 상용해야 한다.ꡒ 그런데 이 주장은 전혀 터무니없는 편견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옛부터 ꡓ말의 문화권ꡒ이란 것은 있었으나 ꡓ글자의 문화권ꡒ이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예컨대 ꡓ영어문화권ꡒ 또는 ꡓ라틴어문화권ꡒ이란 것은 있지마는 ꡓ로마문자문화권ꡒ은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ꡓ한자문화권ꡒ이란 아예 존재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ꡓ한자문화권ꡒ에 속하는 것으로 주장되어 온 나라들의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한자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알려진 나라들은 각각 ꡒ중국어문화권ꡓ ꡒ한국어문화권ꡓ, 또는 ꡒ일본어문화권ꡓ에 속해 있기는 하나 ꡒ한자문화권ꡓ에 속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나라들은 각각 자신의 모국어문화권 안에서, 필요에 따라서, 한자를 사용해 왔을 뿐 그 나라들 자체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것이 아니다.
3. 한자통용의 제한
마지막으로 속칭 이 한자문화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한자를 사용하게 되면 한, 중, 일 3국은 서로 자유스러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한 마디로 말해서 ꡒ천만에, 결코 그럴 수 없다ꡓ라는 것으로 된다.
우선 중국측의 상황을 살펴보자.중국은, 전술한 바와 같은, 정치권, 문화권의 지도자들의 ꡒ한자망국론ꡓ으로 말미암아 수천년동안 중국문화의 중심핵 구실을 해온 한자는 폐지되고 새로운 간체자(間體字)를 만들어 내었다.
중국이 만들어 내 간체자는 가히 문자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새로운 글씨이다. 새로 만든 간자체와 원래의 한자를 비교해 보면 이들이 같은 문자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글자로 보인다.
그 중의 중요한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본다.
(간체자는 우리 컴퓨터로 쓸 수 없어 못 바꿨습니다)
(1) 의 → 義 (2) 운 → 雲 (3) 예 → 藝
(4) 건 → 電 (5) 억 → 億 (6) 술 → 術
(7) 중 → 衆 (8) 종 → 從 (9) 용 → 龍
(10) 비 → 飛 (11) 업 → 業
결국 인구15억의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자, 즉 간자체는 한자를 혼용하고 있는 다른 어느 나라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한자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자가 동북아 3개국이 공용하는 문자라는 억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글자들이 어떻게 해서 같은 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간자체를 쓰는 중국사람들은 원래의 한자로 쓰여진 자기나라의 고전도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은 15억을 웃도는 중국사람들이 한자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다 중국사람들은 간자체 외에 또 다른 새 한자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예컨대 ? (핑펑) ? (카)-(카드란 의미) 같은 글씨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동양권 문화의 공통문자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사람들이 한자로 영어를 표기하고 있는 방법은 이 문제를 푸는데 또 하나의 열쇠를 우리에게 준다. 버스를 ꡒ巴士ꡓ로, 택시를 ꡒ托士ꡓ로 표기하는 것이나, 골프를 ꡒ高夫ꡓ로, 초코렛을 ꡒ超克力ꡓ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자의 뜻글?기능과는 전혀 무관한 소리글로서의 한자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hot dog을 ꡒ熱狗ꡓ로 표현하는 것은, 이와는 전반대로, 소리글과는 전혀 무관한 뜻글로서의 한자의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다.영미사람들도 hot dog이 개 또는 개고기와 전혀 무관한데, 왜 hot dog이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사람들이 hot dog을, 한자로 직역하여서, ꡒ熱狗ꡓ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같은 한자를 공용한다고 해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사가 반드시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는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통 한자를 그대로 쓰고 있는 대만사람 하나가 일본에 와서 택시를 탔다고 한다. 그는 차에 오르자 마자 운전석 옆에 붙어있는 글씨를 읽어보고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ꡒstop, stop"하고 소리쳤다.
놀란 택시기사가 차를 세우자 그 대만사람은 벼락같이 차문을 열고 쏜살같이 뛰어 나갔단다.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일로 어리둥절하게 된 택시기사가 파출소에 가서 알아 낸 경위는 다음과 같다.
대만인 여행자가 택시를 타자마자 본 것은 한문으로 씌여진 인사문이었다. 한자로 쓰여진 글이니 대만인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거기 적혀 있던 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ꡒ每度有難ꡓ (항상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글은, 대만사람의 눈에는, ꡒ차 탈 때마다 사고가 나게 되어 있음ꡓ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번에는 일본관광객이 중국에서 겪었다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이 일본사람은 식당주인에게 ꡒ乞馳走ꡓ라는 글이 적힌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ꡒ馳走ꡓ라는 말은 일본말로 ꡒ맛있는 음식ꡓ을 뜻한다. 그래서 위 일본관광객은 ꡒ먹을 것을 좀 주시오ꡓ라는 뜻으로 ꡒ乞馳走ꡓ라고 쓰여진 쪽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든 식당주인의 눈에는, 그 말의 뜻이 다르게 비쳤다. 그는 그 쪽지를 ꡒ도망하시오ꡓ라는 뜻으로 읽은 것이다. ꡒ馳ꡓ는 ꡒ달릴치ꡓ자이고, ꡒ走ꡓ는 ꡒ다라날주ꡓ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황급하게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의 한자어휘에 관한 이해의 차이를 살펴본다. 일제때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보낸 아버지가 있었다. 학년말 시험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ꡒ공부 잘 하고 있느냐?ꡓ라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아들로부터 온 답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ꡒ出來物이 出來하여 勉强이 出來無입니다.ꡓ 한문에 통달한 아버지로서도 도무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ꡒ出來物ꡓ은 우리말의 ꡒ종기(腫氣)ꡓ에 해당한다. 일본말의 ꡓ出來ꡒ는 ꡒ밖으로 드러나다ꡓ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본말의 ꡒ勉强ꡓ은 우리말의 ꡒ工夫ꡓ 에 해당한다. ꡒ出來無ꡓ는 우리말로 ꡒ할 수 없다ꡓ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들은 ꡒ종기가 나서 공부가 제대로 안됩니다ꡓ라는 답전을 아버지께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답전은 아무 쓸모없는 일본식한자의 나열에 불과했던 것이다.
4. 결론
한자는 훌륭한 문자이다. 한자가 걸어온 긴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한자가 담당해온 문화적 역할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 속에는 인류의 지혜가 깃들어있고 우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거기다가 예술적인 아름다움마저 함께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경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글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자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한자가 너무 어려운 글씨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는 너무나 긴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한자를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한문 혼용을 위한 수준의 한자라고 하면 동양 3국이 서로를 이해하는 문화적 도구로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자가 동북아문화권의 공통문자라는 이유로 한자조기교육을 주장하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자는 외국어처럼 필요한 사람만 열심히 하고 우리말글을 살리고 빛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일찍이 이 원고를 주셨는 데 중국 간체자를 내 컴퓨터로 써 넣을 수
없어 인터넷에 올리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간체자는 빼고 올린다.
변호사 업무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세상일에 바쁘신 중에서 초등학교
한자 교육 걱정하시고 글을 써 내게 주셔서 든든했고 너무 고마웠다. 마음속으로 인사올린다. 회보 34호에 실었다. 이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