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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아동문학과 《어린이문예》
배익천
1979년은 UN이 정한 ‘세계 어린이 해’다. ‘어린이에게 꿈을, 청년에게 이상을, 집집마다 보람을’ 이런 사시(社是)로 1959년 4월 15일, 우리나라 최초 민간 라디오 상업방송으로 개국(서울 MBC는 1961년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은 그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청년에게 이상을 심어 주고 집집마다 보람도 주었지만,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 주지 못했다고 판단해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문예》 발간을 기획했다. 발행 부서는 부산문화방송 부설 가야문화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당시 조증출 사장이 부산 경남의 향토적 정신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 및 연구사업 지원기관 설립을 목적으로 1979년 5월 1일 발족해 5월 18일 월간 《어린이문예》를 등록했다. 이 무렵 잡지 등록이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의사 출신 조증출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로 서울 MBC 사장을 하고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구소 운영진은 전무가 소장을, 방송총국장, 총무국장, 라디오국장, 보도국장이 운영위원으로, 사무국장은 프로듀서 이수익 선생이 맡았다. 이수익 선생은 부산 사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우울한 샹송』 등의 시집을 펴낸 부산 시단의 엘리트였다. 그리고 편집진으로는 조유로, 선용, 김문홍 선생으로 꾸려졌지만 조유로, 김문홍 선생의 불참으로 선용, 배익천, 천영주로 진용을 갖추었다.
나는 당시 경북 월성군 관내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가족과 떨어져 있던 관계로 얼떨결에 부산 MBC로 오게 되었다. 그 무렵 정진채 선생은 《아동문학평론》이나 《아동문예》를 통해서 내 작품을 좋게 평해 주셨는데, 어느 해 겨울 공재동 선생과 경주에 와서 내 사는 모습을 보니 몹시 측은했던지 부산시교육청 장학사에게도 소개하고급기야는 선용 선생을 통해 부산 MBC에 추천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해 6월 6일이던가 6월 첫 일요일에 면접을 보고 다음 날 불같이 출근했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 중에 가장 몹쓸 선생이다. 첫해 2학년 82명을 맡아 한 해 걸러 그 아이들을 반으로 쪼개어 4학년을 맡았는데 3, 4, 5월 가르치고 멀쩡하던 선생이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대에서 떠난다고 인사하니, 들어온 교실은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살아오면서 제일 미안한 아이들-귀숙이, 미주, 석재, 명순이-지금도 그 아이들 일일이 기억하며 미안해하고 있다. 교장 선생도 얼마나 황당했겠는가만 어쨌든 나는 그 해 6, 7월 봉급을 두 곳에서 받았다. 더구나 MBC 봉급은 학교보다 엄청 많아서 급여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고 갔지만 그 또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출근하자마자 일요일도 없이 거의 밤 10시까지 일해(사실 선용 주간은 남자는 밤 10시 전에 집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1979년 7월 7일, 8월호로 《어린이문예》가 창간되어 7,000부를 인쇄했다. 정가 600원.
《아동문학평론》이 1976년 2월에, 《아동문예》가 1976년 3월에 등록했으니 약 3년 차이를 두고 있다.
《어린이문예》 창간호 필진은 호화로웠다. 이주홍 선생이 축시 「참다운 후원자」를 쓰고, 김요섭, 유경환, 옥미조, 이준관, 주성호, 정한나 선생의 동시, 이원수, 성기정, 임신행, 정목일 선생의 동화를 실었다. 연재물 ‘동심의 고향’에는 박홍근 선생이 「나뭇잎배」에 대해서 썼다. 그 후 박경종 선생이 「눈」, 윤석중 선생이 「졸업식 노래」, 최순애 선생이 「오빠 생각」, 함처식 선생이 「보슬비」, 윤극영 선생이 「설날」에 대해서 썼으며 박화목, 유여촌, 강준영, 김성도, 차보현, 장수철, 김영일, 윤부현, 오규원 등 이미 별이 된 이름들이 모두 《어린이문예》 필자였다.
창간호 표지 그림은 부산 대표 화가인 고 양달석 선생의 그림으로 했고, 《어린이문예》 제호는 고동주 선생이 썼다. 이후 표지 그림은 정용준, 김정, 이규경, 김복태, 강인춘 선생 등 서울의 유명 일러스트와 진강백, 이강윤 등 부산의 유명 화가가 참여했고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 만평을 그리던 하추동, 안기태 선생과 서울의 오원석, 이홍우, 이정문 선생 등의 만화를 실었다. 그리고 오인대, 박춘재, 김만철, 조영제, 김용덕, 최준식 선생 등이 속 그림을 그렸는데 한때는 최준식 선생이 혼자 도맡아 그릴 때도 있었다. 월간 <ILLUST>를 2021년 8월호로 통권 266호째 발행하고 있는 최준식 선생은 부산 공군부대에 복무하고 있으면서 《어린이문예》와 인연을 맺었는데, 한국무지개일러스트 총무로 일하며 ‘열린아동문학관’ 2층에 있는 한국 일러스트 역사에 둘도 없는 명작을 남긴 장본인이기도하다. 김광배, 이우범, 홍성찬, 전성보, 김복태, 강인춘, 김박 선생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의 그림 사인이 있는 액자다.
선용 선생은 《어린이문예》 이전에 부산에서 발간되던 《어린이동산》 주간을 역임한 적이 있다. 어쨌든 선용 선생은 외국어뿐만 아니라 잡지 편집에도 귀재였다. 나야 취재하고 기사 쓰고 교정보면 그만이지만 활판인쇄나 옵셋인쇄나 편집 일은 고난도다. 특히 옵셋인쇄를 위해서는 인화된 글자판을 요리조리 오려 붙여야 하는데 그 일을 조판 담당자 곁에서 일일이 챙겼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80여 쪽 속에 든 내용은 지금 들여다보아도 알차기 그지없다. 1980년 5월호를 보면 18쪽에서 165쪽까지 맨 밑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고, 특이한 것을 한 줄 내용으로 실었으니 세심하고 촘촘함의 극치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이달의 동요’라는 난에 부산 동요작곡동인회 회원들의 작품을 한 쪽씩 실었는데 이것이 아마 오늘의 부산 동요의 밑거름일 것 같다.
선용 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술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1970년대 말 인쇄술은 ‘태화출판사’하면 부산 제1의 인쇄출판사였는데도 기계가 얼마나 느리게 돌아가는지 책이 인쇄될 동안 이삼일 밤샘하며 종이 더미 위에서 자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쇄소에서 나와 대포 한 잔하는 재미로 그 일을 즐겼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냥 한 잔할까로 시작한 일이 몇 병이었을까? 그때 한창 유행하던 정종 잔술 ‘원컵’을 1인 11컵하고, 남포동 양산박인가, 대구집에서 정종 두 주전자, 그리고 맥줏집에서 1인 4~5병. 그게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최고 주량이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귀가했고, 다음날 아홉 시에 출근했다.
《어린이문예》하면 ‘창사 기념 현상 작품 모집’과 ‘아동문학대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문예》 창간 이전부터 시, 소설, 콩트, 라디오드라마 작품을 뽑아 시상하던 ‘창사 기념 200만 원 고료 현상작품모집’을 《어린이문예》가 창간된 1980년부터는 동화, 동시를 포함해 ‘500만 원 고료 신인문예상’으로, 1992년부터는 타 장르를 제외한 동화, 소년소설, 동시, 동요, 동시조 등 5개 부문으로 한 ‘MBC 아동문학대상’을 시상했다.
‘신인문예상’으로 등단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아동문학가로는 강추애, 옥순원, 이은용, 구옥순, 김종순, 최장길, 김영호, 신춘희, 이상문, 오정임, 박숙희, 임형선, 이정혜, 고 김우경, 김진향, 박안숙, 이금옥, 이순우, 이문영 선생 등이 있고 ‘아동문학대상’으로 등단한 아동문학가에는 안성교, 김진우, 신덕엽, 양경진, 류석환, 목해균, 김승태, 김순옥, 천연화, 황경숙, 김시민 선생 등이 있다.
‘아동문학대상’이 중단된 것은 《어린이문예》가 기약 없이 휴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995년 들어 월간에서 격월간으로 바뀐 《어린이문예》는 그해 11, 12월호(통권 193호)로 휴간했다.
-1979년 8월에 창간하여 이번 호로 통권 193호가 되는 《어린이문예》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기약 없이 휴간에 들어간다. 이유가 어디 있든 창간 때부터 편집을 맡아온 우리로서는 아쉬운 마음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리 잡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요즘 어린이들의 마음이라 해도 풍성하게 식탁을 차려주지 못했던 것은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선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간 20여 년 동안 《어린이문예》를 아껴주신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가슴 설레는 일에서부터 눈시울 뜨거워지는 일까지 《어린이문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을 사랑하며, 아끼며, 가슴속 깊이 간직할 일만 남았다. 언제, 누가 《어린이문예》를 다시 말할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이름이길, 빛나는 이름이길, 영원한 이름이길 바라면서.-
11, 12월호 편집후기 일부다.
그 이후 선용 선생과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 선용 선생은 퇴직하고, 나는 FM 제작부 PD를 하면서 ‘목요음악감상회’도 진행하다가 2000년 5, 6월호로 복간되면서 혼자 《어린이문예》를 만들었다.
복간을 축하하면서 박홍근 선생은 부산 ‘어린이문예’에서 전국 ‘어린이문예’로 라고, 유경환 선생님은 ‘부산 쪽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정진채 선생은 ‘부산의 자존심 회복과 희망찬 내일을 기약하는 또 하나의 쾌거’라 했고, 공재동 선생은 ‘부산의 문화적 혁명’이라고 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선보일지 기약 없던 《어린이문예》가 새천년 새봄에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어린이들 앞에 섰다. 여울 가에 놀던 피라미 새끼가 큰 고기가 되어도 그 여울에는 변함없이 어린 피라미가 놀 듯 그 시절 《어린이문예》를 즐겨 읽던 어린이들이 빠르게는 고등학생이 되었겠지만 《어린이문예》를 읽은 어린이들은 그냥 그대로 여울물 어린 피라미처럼 은빛 몸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오월, 새 천 년의 오월에 다시 이런 글을 쓰게 되다니 기쁘다. 정말 기쁘다. 이 마음은 고마움에서 우러나는 마음이다.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2000년 5, 6월호 복간호 편집후기다. 나는 늘 짧은 편집후기를 동화 한 편 쓰듯 썼다. 그래서 마지막과 시작이 지금 읽어도 혼자 절절하다.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지만 정말 두 번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할 분은 당시 부산MBC 김영 사장이다. 김영 사장은 경북 영주 태생으로 안동 사범을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한 이주홍 선생의 가장 따뜻한 제자다. 이주홍문학상 제정에도 밑돌을 놓고 퇴직할 때까지 마음줄을 놓지 않았으며, 금강공원의 ‘해같이 달같이만’ 시비도 함양에서 돌을 가져와 세웠다.
권오삼, 정하나, 권용철, 강윤제 선생과 사범학교 동기여서 일찍부터 아동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필로 등단해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내면서 가끔 동시도 썼다. 2000년 복간 때는 이사였지만 이듬해 사장이 되면서 정말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복간도 김영 사장의 발의에 의해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재임 시 권오삼 선생이 한국동시문학회 회장일 때는 동시문학회 세미나를 부산에서 개최하게 했고,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여름 세미나와 한국시인협회 전국 행사도 부산에서 개최해 풍성한 협찬을 했다. 그 무렵 나는 홍보심의부 소속으로 부산 MBC 부설 ‘(사)문화도시 네트워크’ 사무국장도 겸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매일 아침 사장실을 드나들어 샘 많은 사람의 눈총도 많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부산아동문학인협회 회원들을 버스 가득 실어 내 고향 영양 여행을 시켜준 분도 김영 사장이다.
김영 사장 재직 시 그렇게 잘 굴러가던 《어린이문예》가 2004년 그분이 떠나자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2010년부터는 1년에 한두 번 들쭉날쭉 내다가 2021년 올해부터 부산은행과 함께 두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어린이문예》를 내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일의 물꼬를 터준 이순영 선생과 문화도시 네트워크 류시호 사무총장의 수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창간 이듬해부터 시작한 ‘어린이문예대상’도 시상은 한 번이지만 1년에 2번 모집한다니 어린이들에게는 참 좋은 일이다. 초창기에는 경남까지 포함해 수천 편이 응모할 만큼 인기 있는 문예상이 입시 제도 변경 후 점점 희미해지는 ‘글짓기 대회’ 때문에 인기가 덜하긴 하지만 ‘어린이문예대상’은 상장과 함께 자기 글과 사진이 새겨진 전국 유일의 기념패를 부상으로 받는 가히 가보적인 상이다.
한창 들쭉날쭉하던 2013년에 나는 이런 글을 회사에 보낸 적이 있다.
-(전략) 1년에 두 번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참, 아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보지도 않는 책을 왜 만드느냐’는 생각은 어린이들에게 사탕만 주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산 MBC에서 좋은 책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배부하는 그 자체가 숭고한 교육 정신이며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는 홍보가 아닐까요? 1년에 제작비가 4천만 원 든다고 할 때 이 금액이면 좋은 대학을 나온 신입사원 한 명을 뽑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 신입사원이 아무리 일을 잘한들 《어린이문예》만큼 부산 MBC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요?
부산 MBC 맨이라면 거의 알고 있을 횟집 <방파제>는 《어린이문예》 보다 100여 쪽 더 많은 《열린아동문학》을 발간하고 ‘열린아동문학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이 땅의 아동문학을 위해 경남 고성에 ‘동시동화나무의 숲’을 만들고 ‘열린아동문학관’을 짓는데 2년간 7억여 원을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부산 MBC가 만드는 《어린이문예》와 방파제가 만드는 《열린아동문학》으로 인하여 부산은 아동문학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창간 때부터 참여한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간곡히 청컨대, 부디 계간으로 계속 발행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루 여섯 번 방송을 통해 듣고 보는 《어린이문예》 발행 소식, 그 자체가 부산 MBC의 속살이 아닐까요? (하략)-
몇 며칠을 다듬고 다듬어 써 보냈지만 《어린이문예》는 2013년부터 두 번도 아닌 1번으로 뭉개다가 2021년을 맞은 것이다.
자, 앞으로 돌아가자.
1979년 7월 7일 《어린이문예》 창간 8월호를 7,000부 찍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주 낙관적으로 부산과 울산에 총판을 두고 서점에 배포했지만, 다음 호인 9월호가 나올 때까지 책은 1,000권도 팔리지 않았다. 속수무책인 회사를 뒤로하고 9월호 편집을 하다 말고 우리가 일선으로 나갔다. 선용 선생을 주축으로 한 부산아동문학가들 속으로. 그래서 우리는 회사에서는 편집주간, 편집장이었지만 학교에 나가면 〇〇화장품, 〇〇우유 아줌마와 함께 매월 책 가져다주고 수금해오는 판매원이 되었다. 참, 고맙고 고마운 우리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선생님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부산 MBC 할배가 만든다고 해도 《어린이문예》는 없을 것입니다. 한 때는 타지역 아동문학가들이 지역 MBC를 나무라고 부산을 부러워했습니다. 이제 박선미 선생 체제로 새롭게 시작한 《어린이문예》는 부산아동문학과 함께 굴러갈 부산의 튼실한 글수레입니다. 박선미 선생은 차분하면서도 올곧게, 그러면서도 힘있게 수레를 끌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구에게나 전국 최고의 원고료로 청탁하는 《어린이문예》에 기다렸다는 듯이 최고의 작품 주시고, MBC 백일장에 심사하러 오라면 구름처럼 몰려가시고, 문예대상 작품 모집하면 옛날의 어떤 학교처럼 라면 상자 가득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부산 MBC와 부산은행, 어느 한쪽도 망하지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30년이 넘는 세월이 정말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부산에 오지 않았다면, 그 아름다운 아이들 울리지 않고 시골 학교 교장도 했겠지만 그래도 여러분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공재동 선생처럼 좋은 술 동무가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제 목소리 기억하시지요?
정진채 선생님, 곽종분 선생님, 최영희 선생님, 강현호 선생님, 김영호 선생님, 최만조 선생님, 김상남 선생님, 공재동 선생님, 손수자 선생님, 손월향 선생님, 김종순 선생님, 구옥순 선생님, 배소현 선생님, 배홍태 선생님, 백영현 선생님, 김석기 선생님, 성성모 선생님, 안수휘 선생님, 권수환 선생님, 민홍우 선생님, 노금섭 선생님, 김용석 선생님, 윤옥자 선생님, 김종완 선생님, 서하원 선생님, 이상문 선생님, 김문홍 선생님, 김재원 선생님, 백승수 선생님, 조명제 선생님, 강기홍 선생님, 이우철 선생님, 이국재 선생님, 박원돈 선생님, 강추애 선생님, 이상철 선생님, 이판근 선생님, 이근숙 선생님, 김진향 선생님, 그리고 시조 쓰시는 오승희 선생님, 박옥위 선생님, 주성호 선생님 사모님인 박기남 선생님, 경남의 이은용 선생님, 임신행 선생님, 윤일광 선생님!
생각나는 대로 그리운 목소리로 불러봅니다.
고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함께 《어린이문예》를 만들었던 선용 선생님, 천영주님, 이양숙님, 김영수님, 양재성님, 천종태님, 이재규님!
고맙습니다.
(2021년 부산아동문협 연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