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장찬(張璨, 1966~)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놀랄 것 같다.
아직 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앳 띤 얼굴의 여인이 자기 자신의 빌딩과 수십 개의 회사와 수억 달러의 개인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니……. 베이징 지엔다(建達) 빌딩에는 다인(達因)그룹의 본사가 있다. 24층의 장찬 총재의 사무실은 항상 꽃향기가 그윽한데 벽에는 다소 비감한 느낌을 주는 글귀가 한 구절 걸려 있다.
"강한 자의 슬픔은 아름답다."(悲哀對强者是美麗的)
문학가의 작업실에나 볼 수 있을 법한 글귀가 왜 여기에 걸려 있을까?
1982년 9월 장찬은 인문계로서는 중국의 최고명문인 베이징 대학 국제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84년 베이징대학 전교연설대회에서 장찬은 최우수상을 탔으며 총학생회의 문화부장까지 지냈다. 그녀는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 여자 대사로 활약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장찬은 대학 3학년 신학기 시작과 함께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대학 측으로 날아온 자신의 제적통지서였다. 그녀를 하룻밤 사이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게 종이 한 조각. 제적사유는 그녀가 1981년 모 대학에 합격하고 그 대학에서 1학년을 다니다가 이듬해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아직까지 그 사실을 대학 측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런 행위는 당시 학칙에 의하면 제적감이었으며 그 학칙으로 제적당한 학생은 단 1명, 장찬이 유일했다.
그녀는 창자가 끊어지도록 소리 죽여 느껴 울었다.
"장찬, 너무 상심하지 말고 다 잊어버려."
절친한 친구 두 명은 실성할 지경에 빠진 장찬을 꼭 붙어다니며 위로해주었다. 절망한 나머지 성미 급한 그녀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걱정도 되었다. 마치 바바오산(八寶山: 중국의 국립묘지, 베이징 시내 서쪽에 있음 ) 장례식장의 고별식에서 통곡하는 유족을 양옆 사람들이 위로하며 부축하는 장면 같았다.
"그 청천벽력의 일로 저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요.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절대 울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책을 찾는 것. 슬픔을 극복하는 길은 무슨 일이든지 열심으로 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하며 지난 잘못을 떨쳐버리는 것이지요."
1986년 7월, 장찬만 제외하고 학과 친구들은 모두 졸업과 동시에 국가중앙기관의 초급 간부로 배치되어나갔다.
3학년 초 제적당한 후에도 그녀는 청강생의 자격으로 남은 2년 동안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고 시험도 치렀고 합격했다. 그렇게 학업을 전부 마쳤다.
그러나 대학 측은 그녀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설명서 비슷한 종이 한 장의 수료장과 졸업 부적격자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D학점의 성적표가 쥐어졌다.
장찬의 졸업기념 앨범에 동기생들은 이런 메모를 남겨놓았다.
"장찬아, 남다른 경력은 남다른 길을 만들어 준단다."
다인그룹 총재인 장찬.
22세 처녀 사장
대학 졸업생을 찾아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힘들었던 중국의 1980년대 시절, 대졸 실업자라는 말이 있을 수가 없었던 시절. 더구나 대학도 보통 대학인 아닌 베이징 대학 4년 장찬에게는 졸업 아닌 수료는 곧 실업을 의미했다.
백수생활 1년이 그럭저럭 지났다. 그 1년 동안 장찬은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다. 작업복 바지차림으로 전자공학과 PC조립에 대한 공부를 독학했다. 비록 대학에서 전공한 국제정치학과와는 관계가 멀었으나 중고등 학교시절 수학과 물리 화학 등 이과과목에 줄곧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그녀였기에 공부할수록 흥취가 더해갔다. 차츰 마음의 평정도 되찾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누군가가 써준 추천서를 가슴에 품고 중구안춘의 스통(四通: 중국의 대표적 전자회사) 회사로 취직하러 가던 길이었다. 개혁개방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각종 전자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1980년대 말, 스통은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독보적 전자 대형 국영회사였다.
버스 안에서 대학시절 남자 선배를 만났는데 그는 장찬을 말렸다.
"스통은 왜 가니, 니가 직접 회사를 차리지 않고?"
"그래 맞아, 직접 회사를 하나 차리지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찬의 머릿속은 뭔가 환하게 펼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자나이 22세, 창업의 어려움은 말할 나위 없었다. 1988년 농가 한 채를 빌려 조립 pc제조 및 판매업체 잉화(英華)전자를 당국에 등록하였다. 순전히 구색을 맞추기 위해 빌린 구형 pc 한 대를 사무실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취직을 말렸던 남자 선배와 또 다른 직원 한 명을 채용했다. 그 선배는 나중에 그녀의 남편이 되었고 좀더 나중에는 장찬과 함께 다인그룹 공동 총재가 된 엔준지에(閻俊吉, 1964~)였다.
손님이 그녀의 가게로 찾아와 원하는 성능과 가격대의 pc를 대략 말해주었다. 그녀는 엔준지에와 함께 각처를 헤매면서 부속품 일체를 구해가지고 왔다. 그렇게 구해온 부속품으로 그들은 새벽 2, 3시까지 밤잠을 안자고 조립을 하였다. 소파나 방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들은 죽자 사자 일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돈을 번 것은 남들이 버린 폐품창고에서 주어서 조립한 것들이다.
선양의 한 폐품창고에 인쇄지판, 프린터, 프린터 잉크 등을 주어서 조립하고 깨끗이 씻어 되팔았는데 한 번에 5만 인민폐를 벌여들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그 돈으로 그녀는 한 번 크게 돈을 벌 마음을 굳혔다. 모교에서 가깝고 지금은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우는 중구안춘에다 최초로 서양식 레스토랑 '홍거즈'(紅格子)을 개업하였다. 중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서양음식을 중국특색적으로 개조해내는 데 모든 지혜를 다 짜냈다. 중국인도 외국인도 줄을 이어 찾아 들었다. 또 그 옆에다 두유와 꽈배기를 주메뉴로하는 스넥코너를 열었다. 장찬은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꽈배기를 튀겼다.
장찬은 맨주먹으로 창업하던 경력을 회고한다.
"그 시절 육체적으로 피로했으나 정신적으로는 행복했어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단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만 관심이 있었지요.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정말 흥분되고 언제나 새벽처럼 신선하고 신나는 일이었어요."
장찬의 남편이자 다인그룹 공동총재인 엔준지에.
속전속결
장찬의 눈길은 때마침 눈부시게 타오르던 pc시장에 초점이 맞춰졌다.
1992년 7월 그녀는 '다인'(達因)이라는 피시관련 무역업체를 하나 차렸다. 훗날 다인그룹의 모태가 된 이 회사의 이름은 영문 'DYNE'(역학에서 힘의 최소단위)이라는 발음에서 따왔다. 다인은 매우 작고 매우 가볍고 매우 약한 것. 그러나 바로 극소이기에 극대의 다이내믹한 발전 공간이 펼쳐질 수 있다.
장찬은 이렇게 말한다.
"다인의 첫 글자 D는 곡선과 직선이 완전한 미의 결합을 이룬 알파벳이다. 사람은 바깥은 곡선의 원만을, 속은 직선의 엄격을 지녀야 하고 인생의 도로는 직선도 곡선도 있어야 세상사의 곡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회사 명칭을 지었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왜 하필이면 D인가 라고 의문을 하나 던져본다. 알파벳 중 곡선과 직선이 조화를 이룬 게 D 하나뿐일까. 혹시 그녀가 졸업을 못한 대신 받은 D학점의 대학 성적표에 대한 복수심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좀 우스운 상상을 해본다.
장찬은 과연 장찬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놀라운 실천력으로 다인이 최소에서 최대로 커진다는 이치를 증명해나갔다. 1992년 다인은 컴팩(COMPAQ)의 수많은 중국대리상 중의 하나였으나, 93년 다인은 컴팩의 중국시장 총대리상이 되었다. 그해 일본의 엡슨(EPSON) 프린터와 새로운 PC부속 중국 독점 판매계약을 맺었다. 1994년 다인은 컴팩PC의 중국 내 판매량 10만대를 초과시켰으며 엡슨 프린터를 중국 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프린터 기종으로 만들어놓았다. 사업에 관한 한 장찬은 욕심이 한이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나 깨나 어떻게 해야지 자신의 사업을 더욱 크고 넓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였다.
1993년 부동산 가격이 중국에서 폭증할 때 그녀는 낯선 부동산업으로 투신했다. 베이징의 펑타이(豊台) 구에 두 동의 고급빌라를 건설했다. 분양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그녀는 과감히 800만 위안의 거액을 들여 타이완의 부동산 전문판매 회사를 위촉하기도 하였다. 결국 분양 공고 두 달 만에 분양률 80퍼센트에 이르는 대성공을 보았다.
1966년 다인그룹은 피시 모니터 생산공장을 건설하였다. 2001년 그 공장 생산 모니터의 수출량은 2억불, 국내 판매액은 5억 위안으로 장찬 자신도 예상치 못한 좋은 실적이었다.
베이징 대학 제적 여학생의 한은 성공을 향한 몸서리치는 독기로 전환되었을까. 사업을 구상하고 또 매진할 때 장찬의 두 눈에는 푸른빛의 광기가 번쩍인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바둑이다. 그런데 바둑도 속기파요 말씨도 속사포였다.
어느 기자가 장찬에게 성공의 비결은 뭐냐고 물었을 때 충분히 상냥하고 약간의 응석도 깔려 있었지만 속사포를 쏘아대는 듯한 빠른 템포로 말했다.
나의 성공의 비밀은 스피드. 중후장대가 아니라 경박단소로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입니다. 대학시절 필수 교과과정이었던 '손자병법'은 지금도 틈틈이 읽지요. 사실 저의 성공방법과 전략은 대부분 손자병법에서 차용한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저의 개성과 사업에 그리고 제가 처한 환경에 가장 활용하기 알맞은 것은 바로 속전속결의 전략전술이지요. 잘 들어보세요.
"전쟁은 속전속결을 근본으로 삼는다. 오래 버틴다고 잘 싸운 것이 아니라 이겨야 잘 싸운 것이다(故兵貴勝 不貴久). 속전속결은 많은 것을 절약하므로 무엇보다도 신속을 귀하게 여긴다."
그렇지요 군사상의 전쟁도 상경계의 경쟁도 짧게 하는 게 최고지요. 어떤 경쟁이든지 속전속결이 좋아요. 길게 끌면 이기는 쪽도 지는 쪽 만큼 피해가 있기 때문. 적당한 걸 얻었으면 그때가 끝낼 시기이니까요.
0과 無의 힘
IT, 제약, 부동산업체를 비롯하여 산하 4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다인그룹 총재 장찬의 개인재산은 1.37억 달러. 2001년 말 현재 중국 부호서열 40위에 랭크되었다. 중국 여성 부호 순위로는 제 2위. 앞서 말한 1부에서 말한 양광그룹 CEO, 양란 다음자리이다.
장찬은 양란과 마찬가지로 결코 자신이 총명한 여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사업이 바쁘더라도 그녀에게는 영원히 중단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다. 독서와 학습이다. 1997년 하반기에 다인그룹은 베이징 대학원에다 국제금융 석사과정을 창립했다. 그 1기 입학생의 대부분은 다인그룹 계열사의 사장들이었다. 다인그룹 총재 그녀도 베이징 대학 수료 11년 만에 국제금융 석사과정에 등록했다.
지금까지 장찬은 단 한 번도 자기가 성공한 기업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론과 실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터득해나가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성공'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장찬은 TV를 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대우그룹의 파산! 장찬이 존경하던 생존 인물 중 한 사람은 맨손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그룹으로 일궈낸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었다. 1993년 장찬이 아직 미니버스를 몰던 때 그녀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승용차도 독일의 벤츠보다 한국의 대우차였다. 그런데 그 대우 회장에게 긴급수배령이 떨어졌으니. 더욱이 스위스인가 프랑스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니,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 뉴스였다.
장찬은 그때부터 대우그룹과 김우중 회장을 다인그룹과 자신의 타산지석으로 삼기로 했다. 한 직업인 또한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수신과 제가에 먼저 힘쓰라는 공자의 말씀을 명심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꿈이다. 꿈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꿈은 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분투를 아끼지 말라. 어느 정도의 재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수적인 것은 분명한 목표와 굳센 의지다. 일단 어떤 목표를 정했으면 전력을 기울여 절대 포기하지 말고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밀고나가야 한다. 성공의 그날까지 완강하게 버텨나가야 한다. 그 다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비록 한 방울 한 방울 각 방면으로부터 받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당신은 언제라도 다시 0에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밤 장찬은 몇몇 친한 여자 동창생들과 만나 다음날 새벽 5시가 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의 꽃을 피웠다. 제일 친한 친구가 말했다.
"너는 언제라도 다시 0에서 시작할 수 있느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찬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친구로서 격려는 해주지 않을망정 더러운 소리로 저주까지 하다니 당장이라도 절교 선언이라도 외치고 뛰쳐나오고 싶었다.
중구안춘 내에 있는 한 전자상.
그러나 지금 장찬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말은 특별히 좋은 충고였다.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0에서 다시 출발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최고로 강한 숫자는 0이고 강한 한자는 無자다. 0과 無, 이 앞에 더 이상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첫댓글 達因이라 한자로는 달인이데 중국어를 몰라서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