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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통정
시 대 : 고려
생몰년 : ?~1273년(원종 14)
고려 후기 무신으로 삼별초의 난에 참여한 장수.
1270년(원종 11) 배중손이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삼별초를 거느리고 대몽 항전을 전개할 때 장수로 참여하였다. 진도를 거점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삼별초의 항전이 1271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좌절되자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탐라(지금의 제주도)로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였다. 탐라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구축한 김통정과 그 부하들은 이듬해인 1272년부터 활동을 전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한편 일본 정벌의 기지로 탐라를 중요시한 원나라 세조가 탐라 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함에 따라, 1273년 4월 김방경·홍다구 등 연합군은 160척의 배와 수륙병 1만여 명을 이끌고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그러나 김통정은 연합군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70여명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목매어 죽었으며, 나머지 1,300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삼별초의 난은 거병 3년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2. 만적의 난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백성들의 항거운동은 남부지방에 앞서 먼저 수도 개경에서 발생하였다. 최충헌의 집 사노인 만적·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 등 6명이 개경 북산에 나무를 하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신종 원년(1198)에 최충헌 집종,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공사 노예들을 모아 놓고 모의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경인년 이래 고관 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일어났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 빠지게 천역만 하겠느냐!”라고 하니 모든 노예들이 찬성하고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썰어 장마다 정자를 새겨서 표식으로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흥국사 낭하로부터 구정에 이르는 사이에서 일시에 집결해 가지고 북 치며 고함치면 궁중에서도 내수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이며 관노들은 궁중에서 처단할 놈들을 죽일 것인즉 우리들은 성 중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 각자는 자기 주인 놈을 때려 죽일 것이며 종문서를 불태워 버리자! 그럼으로써 이 나라에 다시는 천인이 없게끔 만들면 어떤 고관 대작일지라도 우리들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일이 되어서 모두 모였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으므로 성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보제사로 모이기로 약속한 후 경계하여 말하기를 “일의 비밀을 보장 못하면 성사하지 못하니 누설치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율학 박사 한충유의 집종 순정이 한충유에게 밀고하고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발하여 드디어 만적 등 1백 여 명을 체포해서 강물에 던져 죽이고 한충유에게는 합문 지후 벼슬을 주었으며 순정에게는 은 80냥을 주고 노비 적에서 삭제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그 밖에 잔당들은 모두 다 죽일 수 없어서 불문에 부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2. 변상도
유물명칭 : 관경 변상도
국적/시대 : 한국 / 고려
재질 : 지 / 기타
크기 : 세로 : 133.3 cm / 가로 : 51.4 cm
용도기능 :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화
통일신라 이래가장 성행한 불교는 아미타 신앙이었고, 그 주요 경전은 관무량수경이었다. 이경전이 씌어진 연유가 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낸것을 관경변상도라고 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마갈타 왕국의 빈비사라 왕과 위제휘 왕비 사이에 아도세라는 왕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에게 원혼이 깃들 있다는 점술가의 진언을 듣고 왕 부부는 아사세를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실패로 돌아가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사세는 측근의 꾐에 넘어가 왕과 왕비를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는 비극을 일으킨다. 비탄에 잠긴 왕비가 부처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부처는 그녀에게 극락정토의 16장면을 보여주고 그녀와 시녀들을 모두 구제해 주었다. 그림은 왕비가 유폐된 뒤 구원을 받기 직전까지의 파노라마를 한 장면에 담은 것이다.
3. 7대실록
고려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친 실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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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6권에 이르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 안에 있던 사관이 불타, 이곳에 보존된 사료들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1013년 9월 수찬관 황주량 ·최충 ·윤징고 등에게 그의 앞 대까지의 7대, 즉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편수관들은 널리 사료를 수집하고, 옛 사실을 알고 있는 고로(古老)들을 탐방 취재하여 1034년(덕종 3) 이를 완성하였다. 고려 최초의 이 실록은 다른 고려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
4. 교장도감
고려시대 교장의 판각을 맡은 관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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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 다녀온 대각국사 의천의 요청에 따라 1086년(선종 3) 흥왕사에 설치하였다. 교장 간행사업은 의천이 불서수집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91년부터 시작되어 송 ·요 ·일본 등으로부터 구해 온 불서로 《교장》이라 하는 1,010부, 4,740여 권의 불전을 조판 및 인행하였다. 현존하는 교장도감 간행본으로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40권 외에 20여 종이있다. |
5. 파한집
목판본. 3권 1책. 규장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260년(원종 1) 저자의 아들인 세황이 엮어 간행하였다. 명유와 학자들의 시문이 인멸될 것을 슬퍼하여 이를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파한집》이라는 제목 그대로 문인의 파한적인 문담이며, 시화 ·기사 ·자작시와 아울러 신라의 옛 풍속 및 서경과 개경의 풍물 ·궁궐 ·사찰 등이 재치 있게 소개되어 있다. 작자가 보고들은 일화와 문우 교제에서 주고받은 문담을 해학적인 수법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고대소설의 태동기에 패관문학으로서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려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이는 한국 최초의 비평문학서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각판(刻板) 잔존본(殘存本)으로 소중한 것이다. 후일 최자(崔滋)는 이 책을 본떠서 《보한집》을 썼다.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중간하였고, 64년에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파한집의 역주본(譯註本)을 발행하였다.
고려 명종(明宗) 때의 문신 이인로가 지은 시화집.
구분
목판본, 시화집
저자
이인로
시대
고려시대(1260)
소장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이전의 고려 치안제도는 중앙의 성내좌우순검사 ·내순검군 ·점검군 ·, 그리고 지방에 양계순검사 등이 있었고 무신정권 때는 야별초도 치안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 오랜 대몽항쟁을 일단락짓고, 개성으로 환도한 다음 1277년(충렬왕 3) 개성의 방도와 야간경비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 몽골의 제도를 본떠 순마소를 설치한 것을 1300년에 확대 개편하여 순군만호부라 하였다. 처음에는 순라군으로 편성된 단순한 치안 기구였으나 차차 변질되어 전토 ·노비에 관한 소송까지도 관장하였으며, 1310년에는 오직 순검업무만 전담하도록 어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더욱 많은 기능을 갖게 되어 문신까지 참여하는 금군 ·근위, 또는 출정군으로도 활동하였고, 형옥까지 담당하여 조선시대 의금부로 발전할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대몽굴복 이후 몽골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이게 되면서 설치된 것이나,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에도 존속되어 치안을 담당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원나라로 달아났던 최유가 공민왕을 폐하고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받들기 위해 몽골군 1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을 때 이성계 등이 순군을 지휘, 무찌른 점으로 보아 이들이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순군만호부는 때로는 정치적 권력에 밀착되어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우왕 때 이인임 ·임견미 등은 순군을 이용하여 양백연 등을 제거하였고, 최영 ·이성계 등은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 역시 순군을 동원하였다. 그 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최영을 비롯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데 역시 순군을 이용하였다. 처음에는 중군 ·좌군 ·우군의 3개 만호를 두었던 것을 후에 개성의 순군만호를 비롯하여 합포 ·전라 ·탐라 ·서경의 만호가 증설되었으며, 기타 지방의 중요한 곳에 33개의 순포를 두었으며, 순군만호부는 이들을 총괄하는 기구가 되었다. 관원으로는 도만호 ·상만호 ·만호 ·부만호 ·진무 ·천호 ·제공 등이 있었으며, 하부 군인으로 도부외 약 1,000명, 나장 약 500명이 있었다. 1369년 사평순위부로 고쳐 제조 1명, 판사 3명, 참상관 4명, 순위관 6명, 평사관 5명을 두었으나 우왕 때 다시 순군만호부로 환원되어 조선에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강화되어 국왕의 측근에서 신왕조의 안전을 위협하고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한성부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402년(태종 2) 순위부, 1403년 의용순금사, 1414년 의금부로 개칭되었으나, 1453년(단종 1) 치안업무를 담당하던 의금부 관할의 도부외 병력을 축소함으로써 의금부는 사실상 치안업무를 담당하지 못하게 되고, 대신 최고 사법기관으로서 봉교추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 전기에 절도 ·난동 ·풍기 등의 단속을 관장한 치안기관.
구분
치안기관
설립목적
야간경비
주요활동/업무
절도 ·난동 ·풍기 등의 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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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7권 4책. 1439년(세종 21) 간행. 초간본은 저자의 아들 종성이 흩어진 시문 중 저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한시 13편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소장 및 제자들의 기록 등에서 수집하여 편찬 ·간행하였고, 1533년(중종 28) 현손 세신이 교정, 1584년(선조 17) 류성룡이 교정을 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예문관에서 임고서원의 유생 및 영천군수 황여일과 더불어, 또 1659년(효종 10) 후손 유성이 각각 중간하였다. 속집은 1769년(영조 45) 숭양서원에서 각각 중간한 바 있다. 내용은 권1∼2에 시 251수, 권3에 잡저 ·습유 ·유묵, 권4에 연보, 권5에 전 2편, 권6에 행장, 권7에 부록으로 서 ·기 등 저자에 대한 타인의 글 28편, 권8에 발문 4편, 권9에 포은선생집 신증부록 등 14편이 각각 실려 있다. 서에는 1409년(태종 9)에 쓴 변계량의 시고서, 1437년(세종 19) 하륜 ·박신의 시권서, 1438년 권채의 시권서, 1585년(선조 18) 노수신의 시집서, 1659년(효종 10) 송시열의 중간서 등이 있다. 또, 포은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를 한역한 것도 실려 있는데, 원가에 충실하고자 6구로 나누었고, 문체도 순 한시투에서 벗어나 이두를 섞어 표기하였다. 한편, 이 책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박남철 ·박이양 등이 《신편포은선생집》으로 발행하고, 1960년 성균관대학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간행한 《여계명현집》에도 들어 있다. |
고려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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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충렬왕 때 설치하였는데, 관원으로 정5품의 사 1명, 정6품의 부사 1명, 정7품의 승 1명이 있었으나, 공민왕 때 사는 종5품관, 부사는 종6품관, 승은 종7품관으로 하고 주부 1명을 종8품관 중에서 임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호조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 와우산 아래에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수 1명, 주부 1명, 봉사 1명, 부봉사 1명을 두었다가, 후에 영 1명, 직장 1명을 각각 증원하고 부봉사를 없앴다. 1896년(고종 33) 폐지되었다. |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2호로 지정되었다. 1274년(원종 15)과 1275년 2회에 걸친 몽골의 일본 원정 때 합포(마산)가 몽골원정군의 근거지였는데, 이때 몽골군이 군마의 음료수확보를 위해 판 우물로 추정된다. 1932년 일본인 고적단체가 '몽고정'이라 쓰인 비석을 세우기 전까지는 고려정이라 불렀다. 7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추산동 등 인근 주민의 공동우물로 사용되며, 물맛이 좋아 간장공장 등에서도 사용한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물.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경남문화재자료 제82호
지정일
1983년 12월 20일
소장
한국철도공사
소재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118
시대
고려
종류/분류
우물
몽고정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騶山洞) 중앙에 있는 우물의 비석. 경남문화재자료 제82호.
10. 흥국사
1376년 홍산싸움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1380년 8월에는 진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 ·최무선 등이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순찰사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워졌다.
1380년(우왕 6) 9월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倭寇)를 격퇴시킨 싸움.
느낀점 : 고려의 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역사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이미 많은 용어들을 사용한 것을 보고 앞으로는 숙제를 더 부지런하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출처 : 다음 역사 원형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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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이부족하군요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안에는 모두다 채워주셔야 되지 않나요?
내용이 3번까지 밖에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