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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빈김씨 신도비(仁嬪金氏神道碑) - 장유(張維)
조선 16대 인조(仁祖)의 명에 의하여 양주(楊洲) 풍양리(豊壤理)에 건립된 인빈 김씨신도비이다. 인빈김씨(1555년,명종 10~1613년,광해 5)는 조선 14대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그 묘역은 순강원(順康園)이다. 그는 명종(明宗)의 부인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서 14살 때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의안군(義安君) · 신성군(信城君) · 원종대왕(元宗大王) · 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君)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다.
이 비석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에는 두 마리 용이 몸을 ‘ㄹ’자로 꼬고 운문(雲文)속에 머리와 앞발을 치켜들어 여의주를 움켜잡고 다투는 형상인데, 하나는 입을 벌렸고 하나는 다문 상태로 조각되어져 있다. 찬자는 조선 후기 문신인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 1587년 선조 20~1638년 인조 16)이며, 서자는 빈(嬪)의 아들인 의창군 광(珖)이다.
전액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전서(篆書)의 대가였던 신익성(申翊聖,1588~1644년)이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인조가 인빈김씨의 신도비를 세우라고 명하는 내용과 후궁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빈(嬪)의 가계도와 광해군대의 정치상황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순강원(順康園) 내에는 빈(嬪)의 묘 앞에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의 묘표(墓表)와 1771년(영조 47년)에 건립된 장방형의 비좌와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능표(陵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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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인빈 김씨(仁嬪金氏)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書) - 장유(張維)
의창군(義昌君) 신(臣) 신광(申珖)은 하교(下敎)를 받들어 삼가 쓰고,
유록대부(綏祿大夫) 동양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東陽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신 신익성(申翊聖)은 하교를 받들어 전액(篆額)하고,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신풍군(新豊君) 신 장유(張維)는 하교를 받들어 짓다.
숭정(崇禎) 6년(1633년, 인조 11) 겨울 11월에 상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봉(封)함을 받고 나라를 다스린지 지금 어언 12년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인빈(仁嬪)의 묘도(墓道)에 새겨서 드러내는 일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는데, 이는 소홀히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대개 그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이제 장차 악석(樂石) 비갈(碑碣)을 세우려 하니, 그대가 명(銘)을 짓도록 하라.”
하였는데, 내가 이 명을 받고는 그저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김씨는 본래 수원(水原)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부친의 휘(諱)는 한우(漢佑)로 사헌부 감찰이요, 모친 이씨(李氏)는 충의위(忠義衛) 효성(孝性)의 딸로서, 가정(嘉靖) 을묘년 2월 갑오에 인빈을 낳았다.
인빈은 어려서부터 기질이 남달랐다. 온순하고 얌전하고 조용하고 침착한 것이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달랐는데, 비록 장난하며 놀 때에도 여자로서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외사촌 언니인 숙의(淑儀) 이씨(李氏)가 명묘(明廟)의 후궁(後宮)으로 있으면서 인빈을 데려다 궁중에서 길렀는데,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의 왕비)가 인빈을 보고는 특이하게 여긴 나머지 선조 대왕(宣祖大王)에게 소속시켜 후정(後庭)에 있게 하였으니, 이때의 나이가 14세였다.
인빈은 내직(內職)을 받게 된 뒤로부터 상을 공경스럽게 모시며 아랫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상(上)의 총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기 몸단속을 더욱 근실하게 하였으므로 궁중(宮中)에서 너나없이 훌륭하다고 일컬으면서 본받을 대상으로 여겼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1573)에 숙원(淑媛)의 호(號)를 하사받고 차서(次序)에 따라 귀인(貴人)으로 신분이 높아졌다.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왕비)가 병석에 눕게 되자 인빈이 직접 약시중을 들면서 밤이나 낮이나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왕후가 세상을 떠남에 미쳐서는 함습(含襲: 죽은 이의 입에 구슬을 물리고 옷을 입히는 것)과 염빈(斂殯: 입관하여 안치하는 것) 등 안에서 행할 예법을 인빈이 모두 담당하면서 대부분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병오년(丙午年,1606)에 인빈(仁嬪)의 작호(爵號)가 올려졌다. 무신년(戊申年,1608년)에 선묘(宣廟,선조대)가 승하하자 인빈이 예제(禮制)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할 정도까지 되었으며, 3년이 지나 사제(私第)로 나와 거(居)할 때에도 호화로운 장식을 일체 멀리하고 웃을 적에도 치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항상 곧바로 뒤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계절의 가절(佳節)이 돌아와 자손들이 혹 예를 갖추어 수연(壽筵)을 베풀어 드릴 때에도 즐거워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인빈(仁嬪)은 계축년(癸丑年,1613년 광해 5) 10월 모일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때의 춘추가 59세였다. 이해 12월 모일에 양주(楊州) 풍양리(豐壤里)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었다.
인빈(仁嬪)은 천성적으로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묘의 은총을 받은 40년 동안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시종일관 어긋나게 하는 일이 없었으며, 평소에 아무리 다급한 일을 당해도 말투가 달라지거나 안색이 변하는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하녀와 같은 미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좋지 않은 말로 매도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관계가 가깝거나 멀거나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모두 인빈에게 호감을 가졌다.
광해(光海)가 무도(無道)하게 구는 때를 당하여 선묘의 지속(支屬)들이 모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인빈만은 법도 있게 처신하였으므로 광해 역시 경복(敬服)하였다. 그리하여 인빈이 생존해 있던 동안에는 감히 화환(禍患)을 가하지 못하다가 인빈이 일단 죽고 나자, 능창군[綾昌君: 인조(仁祖)의 동생으로 인빈의 손자임]의 옥사(獄事)를 일으켰던 것이었다.
인빈은 4남 5녀를 길렀다. 장남 의안군 성(義安君珹)은 장가들지 못한 채 일찍 죽었고, 다음 신성군 후(信城君珝)는 한성부 판윤 신립(申砬,1546~1592)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바로 원종 대왕[元宗大王: 인조의 생부로서 정원군(定遠君)에서 추존되었음]이고, 다음은 의창군 광(義昌君珖)으로 모관(某官) 허성(許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 정신옹주(貞愼翁主,1583~1653)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정혜옹주(貞惠翁主,1584~1638)는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정숙옹주(貞淑翁主,1587~1627)는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정안옹주(貞安翁主,1590~1660)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정휘옹주(貞徽翁主,1587~1627)는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에게 출가하였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은 처음에 정원군(定遠君)으로 봉해졌는데, 의정부 좌찬성 사맹(思孟)의 딸인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구씨(具氏)를 배필로 맞아 3남을 낳았다. 맏아들은 바로 우리 전하[仁祖大王]이고, 다음은 능원대군 보(綾原大君俌)로서 유씨(柳氏 : 유효립(柳孝立)을 말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아비의 죄 때문에 봉호를 뺏기고 첩이 되었으며, 다음 능창군 전(綾昌君佺)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는데 광해의 시새움을 받은 나머지 무함에 걸려 유배갔다가 죽었다.
광해의 학정(虐政)이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 모후(母后)를 유폐시키고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등 윤기(倫紀)가 끊어지고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우리 전하께서 중외(中外)의 기대를 한 몸에 걸머지고 발란반정(撥亂反正)하면서 대비(大妃)를 받들어 복위(復位)케 하자 대비께서 전하에게 명하여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 뒤 을축년(乙丑年,1625년 인조 3) 여름에 황제가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를 보내 국왕으로 책봉하면서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내려 주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정원군을 추존(追尊)하여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하고 연주군부인을 부부인(府夫人)으로 하였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대원군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여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으로 하고, 부인을 경의정정인헌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로 하고 나서 황제의 조정에 명을 청하였는데, 천자가 조칙을 내려 추봉(追封)하면서 공량(恭良)이라는 왕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이에 상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인빈(仁嬪)의 사묘(祠廟)에 기신(忌辰)과 절일(節日) 때마다 제구(祭具)를 관에서 공급하게 하는 한편 수총(守冢) 15명을 묘소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전하는 왕비 한씨(韓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왕비는 영돈녕부사 준겸(浚謙)의 딸로서 왕세자 모(某)와 다음 봉림대군 호(鳳林大君淏)와 다음 인평대군 요(麟坪大君㴭)를 낳았다.
세자는 판서 강석기(姜碩期)의 딸에게 장가들어 빈(嬪)을 삼았고, 봉림은 신풍군(新豐君) 장유(張維)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인평은 어려서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 신성군은 1녀를 두었는데, 전적 안홍량(安弘量)에게 출가하였다.
달성위는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리(貞履)는 현감이고 정리(正履), 신리(愼履)는 학생(學生)이며, 장녀는 진사 김규(金珪)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직장(直長) 이명인(李命寅)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학생 심항(沈伉)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좌랑 권우(權堣)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해숭위는 2남을 두었는데, 지(墀)는 문과(文科) 출신으로 수원 부사(水原府使)이고 구(坵)는 문과 출신으로 수찬이다. 동양위는 5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면(冕)은 생원이고 다음 변(昪)은 진사이고 경(炅), 최(最), 상(晑)은 학생이며, 장녀는 세마(洗馬)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학생 강문두(姜文斗)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생원 김좌명(金佐明)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금양위는 1남 세교(世橋)를 두었는데 학생이다. 전창군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심(淰)은 참봉이고 다음 흡(洽)은 학생이며, 장녀는 진사 이중규(李重揆)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안홍량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발(鈸)과 모(某)이고, 딸은 한이성(韓以成)에게 출가하였다.
서정리(徐貞履)는 1남 1녀를 두었다. 김규는 1남 홍석(弘錫)을 두었는데 진사이다. 이명인은 3녀를 두었다. 심항은 2남을 두었으니 지유(之游), 지영(之泳)이다. 권우는 2녀를 두었다. 윤지(尹墀)는 1녀를 두었는데, 학생 김익겸(金益兼)에게 출가하였다.
신면(申冕)은 1남을 두었고, 변은 1남 1녀를 두었고, 경은 1녀를 두었고, 최는 1녀를 두었다. 홍명하는 1남 1녀를 두었고, 강문두는 1남을 두었고, 김좌명은 1녀를 두었다. 박세교(朴世橋)는 2녀를 두었다. 유심(柳淰)은 2남 2녀를 두었고, 이중규는 1남을 두었다.
내가 삼가 살펴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합응(合應)하는 이치가 은미(隱微)한 듯하면서도 실제로 드러났다고 여겨진다. 인빈이 유순하고 갸륵한 자태를 지니고서 위로 선조(宣祖)의 크나큰 덕을 떠받들며 아름다운 천명(天命)을 맞게 하였는가 하면, 성스러운 아들과 신령스러운 손자를 탄생시켜 중흥(中興)의 빛나는 위업을 달성하게 하였으니, 이렇듯 성대한 일이 이르게 된 연유를 거슬러 찾아본다면, 어찌 그렇게 될 만한 까닭이 없이 된 것이겠는가.
《주역(周易)》에서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 화복(禍福)을 고찰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도와주시니 길하기만 할 뿐 이롭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였는데, 지금의 일을 가지고 징험해 보면 이치란 정말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처음에 명묘(明廟)가 늦도록 후사(後嗣)를 얻지 못하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무척 걱정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이인(異人)이 고하기를 ‘상주(尙州) 이모(李某)의 딸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다.’ 하였다. 잠을 깨고 나서 사람을 시켜 물색해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우연히 만난 어떤 승려가 가르쳐 준 집을 찾아가 마침내 얻어서 후궁(後宮)으로 데려왔으니, 그가 바로 이숙의(李淑儀)이다.
그런데 숙의 역시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나, 인빈이 그야말로 숙의를 통해 궁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 뒤로 계속 후손이 번창해져 오묘(五廟)의 통서(統緖)가 마침내 자리잡히게 되었으니, 문정대비가 당시에 얻은 꿈이야말로 하늘이 계시해 준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이상 본말을 일단 서술한 다음 명(銘)을 아래와 같이 붙이는 바이다.
무녀성(婺女星) 찬란히 내리 비췸에 / 婺曜炳靈
출중한 여성 세상에 태어났도다 / 昭質挺世
난초와 옥돌처럼 고결한 성품 / 蘭芳玉潔
시와 예 익히며 몸을 닦았네 / 明詩服禮
내정(內庭)의 간(諫)하는 말 가까이 하고 / 靑規密侍
역사의 기록 생각하며 몸단속 하였어라 / 彤管自飭
은총받는 자리에서 경척(驚惕)을 하고 / 居寵若驚
신분 높아질수록 절약 모범 보이면서 / 履泰彌約
오직 화기롭고 오직 온순하게 / 惟和惟順
위와 아래를 모두 조화시켰도다 / 協于下上
하느님이 살피시고 / 神之聽之
온갖 복 내리면서 / 百福來嚮
자손들 모두 행복하게 / 錫以祚胤
번창토록 해 주셨네 / 旣蕃且仁
자손들 우글우글 / 螽斯蟄蟄
인후한 공자(公子) 나셨나니 / 麟趾振振
성스러운 아들 후한 복 받고 / 聖子篤祜
신령스런 손자 천명을 받아 / 神孫膺命
종묘사직 거듭 빛나게 하고 / 宗祀重光
인륜 기강 재차 바르게 잡았도다 / 彝倫再正
멀도다 끼친 복록 / 遠矣餘慶
오늘까지 이어져서 / 式至今休
나라나 집안이나 / 于邦于家
후손들 모두 복 받누나 / 本支同庥
울창한 산등성이 / 豐岡鬱蔥
높이 솟은 비석 위에 / 有石崇崇
나의 이 시 새겨 넣어 / 刻此銘詩
무궁한 후대에 알리노라 / 永示無窮
숭정(崇禎) 9년 병자(1636년, 인조 14) 11월 일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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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仁嬪金氏神道碑
有明朝鮮國仁嬪金氏神道碑銘并序
義昌君臣珖奉 敎書
綏祿大夫東陽尉兼五衛郡都摠府都摠管臣申翊聖奉 敎篆
奮忠賛謨立紀靖社功臣 正憲大夫新豊君臣張維奉 敎撰
崇禎六年冬十有一月。上命臣維若曰。自予受封有國。于今且一紀矣。仁嬪墓道顯刻闕焉。非緩也。蓋有待也。今將樹樂石。爾其銘之。臣承命祇慄。謹按金氏本出水原。考諱漢佑。司憲府監察。妣李氏。忠義衛孝性之女。以嘉靖乙卯二月甲午。生嬪。幼有異質。婉娩靚穆。迥出倫類。雖當游戲。不違女則。表姊淑儀李氏。明廟後宮也。取嬪養于宮中。仁順王后見而異之。屬宣祖大王備後庭。時年十四歲。嬪自受內職。承上以敬。涖下以恕。睿眷彌隆。飭身愈謹。宮中翕然稱美。以爲儀則。萬曆癸酉。賜號淑媛。序陞貴人。懿仁王后弗豫。嬪躬侍藥餌。日夕不離側。及上仙。自含襲斂殯。凡禮之在內者。嬪悉司焉。擧無愆違。丙午。進爵仁嬪。戊申。宣廟昇遐。嬪哀毀踰制。過三年。出居私第。屛去華飾。笑不見齒。恒以未卽下從爲隱痛。時節子姓或備禮設壽席。而未嘗以爲懽。癸丑十月某日。以疾卒。春秋五十有九。是歲十二月某日。葬于楊州豐壤里子坐午向之原。嬪天資溫粹。婦德淳備。承宣廟恩渥四十年。自持卑遜。終始不爽。平生無疾言遽色。雖㜎隷之微。不以惡言詬詈。親疏貴賤。各得其心。方光海無道。宣廟支屬。咸惴惴危懼。不保朝夕。而嬪處之有方。光海亦敬服。終嬪之世。不敢加以禍患。嬪旣卒。而綾昌之獄作矣。嬪育四男五女。男長曰義安君珹。未娶夭。次信城君珝。娶漢城府判尹申砬女。次卽元宗大王。次義昌君珖。娶某官許筬女。女長曰貞愼翁主。適達城尉徐景霌。次貞惠翁主。適海嵩尉尹新之。次貞淑翁主。適東陽尉申翊聖。次貞安翁主。適錦陽尉朴瀰。次貞徽翁主。適全昌君柳廷亮。元宗大王初封定遠君。配連珠郡夫人具氏。議政府左贊成思孟之女。誕三男。長卽我殿下。次綾原大君俌。娶柳氏女。坐其父累。奪封爲妾。次綾昌君佺。少有儁才。爲光海所忌。被誣以謫卒。光海昏虐日甚。幽囚母后。毒痡萬民。倫紀斁絶。宗社將危。至天啓癸亥。我殿下因中外之望。撥亂反正。奉大妃復位。大妃命殿下承大統。乙丑夏。皇帝遣太監王敏政,胡良輔。冊封國王。賜誥命冕服。初追尊定遠君。爲定遠大院君。連珠郡夫人。進府夫人。久之。追上大院君尊號曰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夫人曰敬懿貞靖仁獻王后。請命于皇朝。天子下制追封。賜王諡曰恭良。於是上命有司仁嬪祠廟。每忌辰節日。官供祭具。又置守冢十五名于墓所。殿下聘王妃韓氏。領敦寧府事浚謙之女。誕生王世子某。次鳳林大君淏。次麟坪大君㴭。世子聘判書姜碩期女爲嬪。鳳林娶新豐君張維女。麟坪幼未婚。信城君有一女。適典籍安弘量。達城尉有三男五女。男曰貞履。縣監。正履,愼履。學生。女適進士金珪。次適直長李命寅。次適學生沈伉。次適佐郞權堣。次幼。海嵩尉有二男。曰墀。文科水原府使。丘。文科修撰。東陽尉有五男四女。男曰冕。生員。昪。進士。炅,最,晑。學生。女適洗馬洪命夏。次適學生姜文斗。次適生員金佐明。次幼。錦陽尉有一男世橋。學生。全昌君有二男二女。男曰淰。參奉。洽。學生。女適進士李重揆。次幼。安弘量有二男一女。男曰鈸,曰某。女適韓以成。徐貞履有一男一女。金珪有一男弘錫。進士。李命寅有三女。沈伉有二男。曰之游,之泳。權堣有二女。尹墀有一女。適學生金益兼。申冕有一男。昪有一男一女。炅有一女。最有一女。洪命夏有一男一女。姜文斗有一男。金佐明有一女。朴世橋有二女。柳淰有二男二女。李重揆有一男。臣維竊觀天人合應之理。似微而實顯。以仁嬪之柔嘉懿範。上承宣祖盛德。克迓天休。篤生聖子神孫。光啓中興赫業。跡其所以臻斯盛者。夫豈無自而然哉。易稱視履考祥。又曰自天佑之。吉無不利。以今驗之。理有不可誣者。猗歟休哉。始明廟晩而無嗣。文定大妃憂之甚。一夕夢異人告之曰。尙州李某有女子。納之則吉。覺而使人物色之。不能得。忽遇一僧指其所居。遂得之納于後宮。是爲李淑儀。淑儀竟無子。而仁嬪實因淑儀得進。厥後嗣續昌大。五廟之統。卒有所歸。文定當日之夢。殆天之啓衷乎。臣旣敍次如右。系之以銘曰。婺曜炳靈。昭質挺世。蘭芳玉潔。明詩服禮。靑規密侍。彤管自飭。居寵若驚。履泰彌約。惟和惟順。協于下上。神之聽之。百福來嚮。錫以祚胤。旣蕃且仁。螽斯蟄蟄。麟趾振振。聖子篤祜。神孫膺命。宗祀重光。彝倫再正。遠矣餘慶。式至今休。于邦于家。本支同庥。豐岡鬱蔥。有石崇崇。刻此銘詩。永示無窮。<끝>
崇禎九秊丙子十一月 日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