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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 4. 28. 14:12
■ 불천위(不遷位)란?
사후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천위의 제삿날이면 많은 후손과 유림으로 부터 최상의 추모를 받는 이들이 있다.
불천위(不遷位) 인물이다. 유교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불천위를 모시는 가문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최고 영광의 가문이었다. 살아서도 모든 사람의 사표가 되었던 불천위 인물은 사후에도 국가나 사회(유림)와 후손들로 부터 제사 등을 통해 대대손손 추앙을 받았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추앙하며 본받으려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모범을 보였던 불천위 인물들의 가르침과 덕행은 시공을 초월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이런 인물의 삶과 그 문화를 재조명하는 일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수한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불천위 인물이 가장 많은 지역이 경북이다.
●불천위 개념과 종류
최치원· 안향· 이이· 김굉필 등 문묘 배향자 들이 대표적 국 불천위(國不遷位)이다.
불천위제도는 제사문화와 직결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불천위는 말 그대로 사자(死者)의 신위를 4대 봉사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뜻한다.
즉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또는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이다.
명확히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불천위는 일반적으로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결정하는 향불천위(鄕不遷位=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뜻을 모아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문중불천위)로 구분한다.
불천위로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왕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 인물이 불천위에 오르는 경우다. 국불천위가 되는 것은 왕이라도 쉽지 않았던 만큼, 양반 사대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 인물이 죽은 후 그 학행이나 공적이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면, 조정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시호(諡號)를 내리고 후손에게 그를 영구히 모시도록 했다. 제사 때는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고, 그 후손에게 은일(隱逸)로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시호를 받은 사람은 그의 신주가 영구히 사당에 모셔지며 불천위가 되고, 그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어 그 후손이 종가를 이루게 된다. 물론 시호를 받았다고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천위는 국가 주도로 또는 유림의 건의에 따라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불천위(國不遷位)가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향촌의 유림이 자체적 공론을 거쳐 불천위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문중에서도 조상 가운데 훌륭한 인물을 불천위로 모시기도 했다.
일반인 중 국불천위로는 우선 문묘(文廟)에 배향돼 있는 인물을 꼽을 수 있다.
모두 18명으로, 신라의 설 총· 최치원, 고려의 안 향· 정몽주, 조선시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 황· 김인후· 이 이· 성 혼· 김장생· 조 헌· 김 집·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이다. 이렇게 문묘에 배향된 불천위의 상당수가 사화(士禍)와 관련이 있다. 사화 같은 역사적 위기 속에서 그 인물의 됨됨이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불천위 역사
조선후기 불천위 급증 질서문란...
불천위는 고대 중국의 분봉제(分封制)에서 유래됐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에 중국은 각지의 제후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세습시켰다. 당시 최초로 토지를 받고 제후에 봉해진 사람을 태조로 삼아, 종묘에 모시고 불천위로 삼았다.
불천위는 후계자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후계 왕 중에서도 탁월한 공덕을 세운 사람은 불천위로 모셔서 그 공덕을 기리게 했다. 이 같은 불천위 제도는 유교문화권의 동양 각국에도 전파돼 탁월한 공덕의 왕이 불천위가 됐다.
삼국시대부터 종묘가 있었던 우리나라에도 불천위가 있었다. 예컨대 신라 종묘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불천위로 모셔졌고, 고려 때는 건국 시조인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해 개국 직후 나라의 기틀을 잡은 제2대왕 혜종(惠宗)과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제8대 현종(顯宗)이 불천위로 모셔졌다.
조선시대 종묘에는 유난히 불천위가 많다. 본래 불천위는 현재 왕의 5대가 되어 정전에서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永寧殿-조선 시대, 종묘 안에 따로 만든 사당)으로 신주를 옮겨야 할 차례가 되었을 때, 조정 신료들의 공론에 의해 결정됐다.
대체로 예조나 신료들이 불천위로 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면, 왕이 대신·백관들과 상의해 결정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불천위는 다분히 의례적인 행사로 변질되고 남발됐다.
조선시대에는 불천위가 양반 사대부 가문에도 생겨났다. 국불천위는 왕과 마찬가지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아 소수에 불과하고 향불천위도 엄격하게 결정됐으나, 후기에는 향불천위와 사불천위가 급격히 늘어나고 그 구분도 불명확하게 혼재하면서, 권위와 질서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경북에 불천위가 많은 이유
'벼슬보다는 학문 중시' 경북지역 135위로 최다, 안동이 3분의 1 차지...
불천위는 그 행적에 따라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인물, 조선 전기 공신으로 책정된 인물, 문묘에 배향된 인물, 사화와 관련된 인물,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한 인물, 퇴계학맥에 속하는 인물 등으로 구분된다. 경북의 경우 퇴계학맥에 속하는 불천위가 가장 많은 것이 특징이다.
경북지역에 학문(유학)으로 인한 불천위가 특히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영남 사림은 장기간 권력에서 밀려나 있게 되면서 중앙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향촌을 기반으로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벼슬의 고하로 인물를 평가하던 기호사림과 달리 학문으로 인물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성향의 영남 선비들은 다투어 글을 읽었고, 학문을 통해 삶의 철학과 원칙을 습득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학문을 격려했으며, 아는 것과 행동을 고집스러울 만큼 일치시키려 했다.
이런 성향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더욱 강화됐을 것이다. 3대가 벼슬을 못해도 학행이 뛰어나면 선비로 대접받았고, 이런 풍토는 끊임없이 학문적·정신적 문화를 지향하게 했다.
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선비들이 이런 환경에서 특히 향불천위를 통해 독자적 세계를 확립한 것은 중앙정치에 대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런 문화가 낳은 경북지역 불천위 인물의 삶이기에 현대에도 불천위 문화가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잘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불천위 현황에 대해 아직 정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것 같지만, 최근 경북도의 지원으로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북지역 불천위는 135위에 이른다. 이 중 안동지역이 가장 많아 3분의 1을 차지한다. 모두가 제대로 된 불천위냐에 대한 논란은 있다.
●불천위 제사는...
불천위 제도는 불천위 제사에 의해 실질적으로 유지된다. 불천위 제사는 불천위 조상의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불천위대제(不遷位大祭) 또는 불천위기사(不遷位忌祀)라고도 한다. 제사의 절차는 가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통상적으로 일반 기제사의 절차에 준한다.
불천위 제사에는 지방의 유림이나 유지도 참여하기 때문에 종손이 주재하되, 문중의 후손뿐만 아니라, 유림에서도 제관이 선정된다는 점이 일반 기제사와는 다르다. 요즘은 대부분 문중 후손들만 참례하는 것이 현실이다.
제사를 앞두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재계(齋戒)라 하는데, 이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런 재계를 통해 몸과 마음이 순수하고 밝은 상태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상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제사에 쓰는 제반 기구인 제구는 오직 제사에만 사용하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 깨끗이 씻어 두어야 함은 물론, 다른 용도로는 쓰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빌리거나 팔지도 말아야 한다. 제수도 다른 기제사와는 달리 최대한 정성과 솜씨를 발휘해 성대하게 준비한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과정과 절차는 기제사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그것은 16세기 이후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고착화된다.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과정과 절차가 공식적인 제사의 절차로 인정받았고, 각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런 전통은 그대로 계승돼 경북 종가 대부분 주자가례에서 규정하는 절차와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가문이 처한 상황과 시대에 따라 절차와 내용은 조금씩 바뀌어 왔다.
●불천위 위패를 모시는 공간
불천위 위패(신주)는 그 대상에 따라 종묘(宗廟)와 문묘(文廟), 가묘(家廟)에 봉안된다.
종묘는 왕이나 왕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문묘(조선시대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세워짐)는 유학의 종통을 세우고 정신적 지주가 된 인물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종가의 사당인 가묘는 뛰어난 공적이나 학덕으로 그 집안의 종통을 잇게 한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종택의 불천위 사당은 4대 봉사(奉祀)의 대상인 신주가 있는 일반 사당이 아니라 별묘를 세워 따로 모시기도 하고, 4대 신주와 함께 모시기도 한다.
종가는 통상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행랑채 등으로 이뤄진 주거공간과 입향조나 불천위 신주를 모시는 사당공간으로 구분된다.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특별히 '부조묘(不祧廟)'라 부르기도 한다.
가묘는 고려 말부터 설치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일반화되었다. 불천위 사당은 대부분 정침(正寢: 가옥의 본채)의 동편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가례 규정에도 정침의 동쪽에 위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동쪽은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고, 해가 뜨는 방향이니 조상이 가장 먼저 햇볕을 받도록 하려는 뜻에서 잡는 위치라 하겠다.
한 집안에 한 사람 이상의 불천위 위패를 두지 못했던 조선 전기의 원칙에 따라, 불천위 위패를 서원에 봉안한 경우나, 따로 사당을 지어 봉안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불천위 신주는 밤나무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땅 속 씨앗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밤나무처럼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불천위 제사 순서
불천위 제사는 일반적으로
◇사당에서 신주를 제청으로 모셔오는 '출주(出主)’
◇사당에서 가져온 신주를 교의에 모시고 개봉한 다음 참사자 전원이 신주에 인사를 드리는 '참신(參神)'
◇향을 피워 천상의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지하에 있는 백을 모셔와 혼백(魂魄)을 일치시키는 의례인 '강신(降神)'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현재 대부분 종가는 출주하기 전이나 출주한 뒤 참신하기 전에 메와 갱을 제외한 모든 제수를 올림)
◇술잔을 올리는 초헌· 아헌· 종헌
◇신에게 식사를 권하는 '유식(侑食)'
◇식사하는 동안 잠시 문을 닫고 기다리는 '합문(闔門)',
◇신의 식사가 끝난 뒤 문을 열고 들어가 차를 올리는 '계문(啓門)'
◇절차를 끝내고 신을 보내드리는 '사신(辭神)' 등 순서로 진행된다.
사신례가 끝나면 신주는 주독(主櫝:위패를 넣어두는 괘)에 모시고 다시 사당에 안치한다.
●불천위 제사의 변천
제례에서 구체적 절차나 과정을 생략하거나 바꾸는 시도는 쉽지 않다. 반면 시간과 공간 등 제례를 진행하는 기반 조건은 변화가 용이한 편이다. 경북의 종가들도 환경과 시대변화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사 시작시간 = 제수를 올리는 '설소과(設蔬果)' 시간이 기준이다.
주자가례에는 기일의 새벽에 제수를 진설한다고 되어 있다. 대체로 자시가 되면 제사를 지내도 되는 것으로 판단,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설소과를 시작한다. 경북 종가 대부분 그 시간에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 어려움과 종가의 유지·발전을 위한 선택 등을 이유로 시간을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복종택, 탁영종택, 묵헌종택, 오봉종택 등에서는 기일 저녁 8시~9시에 지내고, 옥천종택의 경우처럼 양력으로 환산한 기일(8월15일) 오전 11시~오후 1시에 지내는 파격적인 경우도 있다. 불천위 제례 시간의 이같은 변모는 문중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의미나 영향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제례시간을 이렇게 바꾸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관의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생활 위주의 전통적 삶이 파괴되면서 후손들이 대부분 외지로 흩어짐에 따라 제관의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시간을 바꾸면서 제사에 대한 관심도 늘고 참석하는 제관의 숫자도 훨씬 늘었다고 한다.
기일을 양력으로 바꾸고 대낮에 지내기로 한 옥천종택의 경우는 혁신적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갈수록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제사 장소 = 제례공간도 변화하고 있다. 불천위 제사는 통상 사당이 있는 종택의 정침에서 지낸다.
이와함께 사랑채, 제례를 위해 만든 제청이나 사당 등에서 지내는 경우도 다수 있다. 최근들어 종손이 종택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
면서, 종손이 있는 곳에서 제사를 모시기도 한다.
종손이 종택만 지키며 살 수가 없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종가의 고민거리다. 제관의 많고 적음 등 환경에 따라 사랑채에서 사당 등으
로 장소를 옮긴 경우도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경제적 여건, 종교 문제 등으로 불천위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유명무실한 불천위
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불천위 제사의 꽃 "도적"
불천위 제사의 제수는 일반 제사에 비해 성대하게 마련하고 최대한 정성을 들인다. 제수 내용은 기제사 때와 대체로 비슷하나, 특별히 다른 것은 익히지 않은 고기를 쌓아 올리는 도적(都炙:'炙疊'이라고도 함)이다. 불천위 제사에서 제사상의 꽃이라 할 정도로 중요시하는 제물이 바로 도적이다.
불천위 제사에서 날고기 도적(都炙)을 쓰는 습속은 '혈식군자(血食君子)'라는 데서 유래한다. 예기(禮記)에 '지극히 공경하는 제사는 맛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고 기와 냄새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피와 생육을 올린다'고 했다.
이러한 고래의 습속에 따라 종묘나 향교, 서원의 제사에서는 날고기를 사용한다. 불천위 인물이 향교의 문묘나 서원의 사당에 배향되는 훌륭한 인물인 만큼, 불천위 제사에도 날고기를 쓰는 것이다. 혈식, 즉 날고기를 받을 정도의 훌륭한 군자인 '혈식군자(血食君子)'에 대한 제사이기 때문이다.
날고기를 쌓아 도적을 만드는 데는 법칙이 있다. 비늘 있는 고기(鱗), 털 있는 육지 고기(毛), 날개 달린 고기(羽) 등을 골고루 쓰는데, 맨 아래에는 생선류를 놓는다. 그 위에 쇠고기 등 육지 고기를, 맨 위에는 날개 달린 고기를 올린다. 보통 닭을 사용한다.
서애종가에서도 맨 위에는 닭을 올렸지만, 학봉종가와는 달리 문어도 어물로 썼다. 하지만 닭 아래에 문어를 쌓았는데, 문어를 아래에 넣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높이 쌓아야 하는 도적은 생물이기 때문에 쌓기가 쉽지 않아 나무꼬챙이로 꿰어 균형을 잡기도 하고, 또한 다른 제수와는 달리 남자가 장만한다.
도적을 높이 쌓기 위해 가장 하단에는 북어포 등과 같이 힘을 잘 버틸 수 있는 건어물을 까는 것이 보통이다.
불천위 제사상에는 이 도적과 떡을 가장 높게 쌓아 올리는데 도적은 서쪽에, 떡은 동쪽에 놓는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