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은 자기 마음대로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미디안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기가 오래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제서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원자를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미디안 진영으로 보리떡 한덩이를 보냅니다. 이 보리떡이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여룹바알이라는 기드온의 본질은 보리떡입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파하고 있을 때에 안드레에게 이끌려온 한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립니다. 이 보리떡 5개가 주님의 손에 붙들리자 5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중에서도 인터넷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인터넷에서 저를 부르는 별칭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는 '보리떡'이고 하나는 '팔푸이'입니다. '팔푸이'는 만삭되지 못하여서 난 자와 같은 자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별칭을 자주 쓰느냐하면 실제 저는 '팔푸이'같은 부분이 많습니다.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기는 하는데 어슬프게 하는 일도 많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반장은커녕 분단장도 한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팔푸이'같은 제 모습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사용을 하시니 얼마나 많은 '장'자가 붙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들어서 쓰신다는 성경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교회 안의 사역과 교회 밖의 사역(인터넷 사역)입니다. 두 가지 모두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 동안은 집사로 앞으로는 장로로 교회를 섬기겠지만 집사가 되나 장로가 되나 사역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동안은 제가 가장 역점을 두고 하던 사역이 찬양사역입니다. 찬양인도는 쉽게 말하면 길을 닦는 것과 같은 사역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 보다, 먼저 찬양을 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는 찬양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에 찬양은 성도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 충만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옆 사람 눈치보면서 할 때도 있지만, 찬양은 눈치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기도의 내용은 다 틀리지만 찬양의 가사는 다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찬양 자체를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님'이라는 말씀이 있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할 사역은 담임목사님의 목회를 돕는 것입니다. 목회를 돕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목회를 돕는 것은 훼방 놓지 않으면 돕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다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로는 목회자가 아니며 장로는 평신도입니다. 목회의 영역은 목사가 그리고 목회 외적인 영역은 평신도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장로교 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목회의 영역은 목사가 알아서 하고 그 외적인 영역은 평신도들이 알아서 하되, 서로간에 보고만 잘되면 된다고 봅니다. ' 크고 중요한 일은 논의를 하는 것이 좋겠지요.
앞으로 밀알교회의 부흥은 제자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성도 개개인의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결과로 동시에 수적인 부흥도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목회자의 열심이나 영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평신도의 변화입니다. 좋은 평신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교회는 어떤 목회자가 와서 목회를 할지라도 목회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교회 봉사의 주체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는 예배만 드려 가지고는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소그룹이 모여서 말씀을 가지고 실생활에 적용을 시키면서 진지하게 말씀을 연구해야만 삶과 신앙의 변화가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변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정말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 컬컬하고 답답한 심령을 가지고 계십니까 ? 아니면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인격 때문에 고심을 하십니까 ? 그렇다면 제자반 모임에 열심을 내어 보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시고 한없이 무한한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하여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찬양을 들을 수 있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인터넷을 잘 이용하면 은혜생활을 곱빼기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거리가 제한되어 있지만 인터넷은 거리의 제한이 없습니다. 인터넷에서의 기독교 문화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교회의 홈페이지들을 보면 내용이 텅텅 빈 교회의 홈페이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성도들을 교회의 홈페이지로 끌어 모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교회의 홈페이지나 성도가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가 많아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 홈페이지는 교세에 비하여 상당히 운영이 잘되는 편입니다.
인터넷은 은밀한 공간입니다. 은밀한 공간이기 때문에 죄 짓기 쉬운 공간이란 말입니다. 교회의 홈페이지들이 좋아지지 않으면, 성도들이 늘 인터넷을 접하면 죄짓기가 쉬워지지만 은혜생활을 하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얼마나 많은 음란사이트가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음란 대화방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런 곳에 출입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를 개탄하기 전에 교회의 홈페이지나 성도들의 홈페이지가 좋아지면 됩니다. 밀알교회 홈페이지는 매일 새로워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교회 성도들로부터 외면 당합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교회 홈페이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들이 교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의 친교모임인 '쉴만한 물가'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로 모이는 곳입니다. 방황하던 영혼들이 '쉴만한 물가'에 와서 은혜 받고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시험에 들어서 참 힘든 생활을 하였었는데 '쉴만한 물가'에서 발견한 글들을 보고, 다시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간증을 들을 때에는 '정말 하나님께서 인터넷을 통하여서 역사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낍니다. 일반 사역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사역 역시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와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역시 저를 위하여서 많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교회의 운영의 원리를 많이 발견하였습니다. '쉴만한 물가' 대표시삽으로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때로는 담임 목회자의 마음을 많이 이해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면서 예수를 믿는 자는 의인이라는 칭의가 주어집니다. 죄인이면서 의인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 좋게도 나쁘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나의 생각과 중심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때에, 참으로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일을 맡기는 자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꾸 제직회하자, 당회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직회도 중요하고 당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목회는 목사가 가장 잘 압니다. 제직회원이나 당회원들은 목회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배의 지휘권은 선장에게 있는 것처럼 목회의 지휘권은 담임목사에게 있습니다. 이를 제가 인터넷에서 정확하게 발견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유명합니다. 거지는 이름이 없으며 거지의 이름은 알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하던 부자도 천국에 가면 이름이 없고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사람의 이름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없다는 말입니다. 저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의 온 가족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부자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 시편49편 17절에서부터 나옵니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아멘) 저는 이러한 부자와 같이 살기 싫습니다. 또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을 살기도 싫습니다. 비유적으로 나사로를 부자에 비해서 의롭다고 한 것이지 거지가 어찌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 저는 사명자입니다. 사명자는 구원받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야합니다.
저는 모태에서 나오기를 적신으로 나왔습니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때에도 적신으로 갈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정도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게 얼마나 물질을 맡기실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긴 물질이 영원히 저의 것이 될 수 없으며 저의 후손들의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저의 아이들이 장성하여서 독립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
팔푸이 같고 보리떡 같이 부족한 저이지만 저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담임 목사님의 목회를 돕게 하시고, 성도를 섬기게 하시며, 인터넷에서는 전도편지와 상담사역을 통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사역들은 앞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봉사의 형태와 양식은 조금씩 바뀔 수 있지만 근본 취지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평생의 사역이요 사명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과 주의 종과 성도들을 섬기는 사명자가 되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