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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의 역사
제임스 르 파누 지음 / 조윤정 옮김
도서출판 아침이슬 / 2005년 6월 / 532쪽 / 25,000원
▣ 저자 제임스 르 파누(James Le Fanu)
비상근 의사이며 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의학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선데이 텔레그래프Sunday telegraph」에 매주 의학 칼럼을 기고했으며,「더 타임스The Times」와「스펙테이터Spectator」,「GQ」등의 잡지에도 글을 썼다. 그는 인간 배아 실험, 환경문제, AIDS, 음식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현대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결혼해 두 아이들과 함께 런던 남부에 살고 있다. LA 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한 이 책은 그의 세 번째 책이다.
▣ 역자 조윤정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지질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옮긴 책으로『사라진 섬 레이즌』,『알파벳과 여신』,『사인 코사인의 즐거움』,『집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예루살렘 성전의 최후』가 있다.
▣ Short Summary
현대의학의 기적은 1941년에 페니실린이 재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짐을 덜어준 것은 페니실린과 그 이후로 계속 발견된 신약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수술용 현미경, 내시경, 인공심폐기 같은 기술적 진보도 현대의학의 기적을 확대시켰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이루어진 이런 현대의학의 성과는 ‘생물학의 미스터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무작위로 수많은 합성물을 만든 다음 거기서 어떤 질환에 치료효과를 보이는 약물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대체적인 신약 생산법이라고 한다. 이런 현대의학의 ‘무지’는 수많은 거짓과 과장된 주장, 의사擬似과학을 낳았다.
저자는 생물공학과 사회이론에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생물학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질환과 생명을 이해하고자 하는 생물공학은 유전자의 복잡한 상호 작용과 고유한 불가해성으로 인해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희망과 약속, 밝은 전망, 낙관론들은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소 퇴색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그것이 의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야만 ‘한계에 다다른’ 현대의학의 혁명이 다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의학의 발전과정뿐만 아니라, 치료혁명이라는 기적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의사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기적이 우연이고, 행운이고, 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현대의학의 개척자들의 존재가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들의 치열한 삶을 생생히 기록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 차례
서론
제1부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
1장 1941: 페니실린
2장 1949: 코르티손
3장 1950: 스트렘토마이신, 흡연,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 경
4장 1952: 클로르프로마진과 정신의학의 혁명
5장 1952: 코펜하겐의 폴리오 유행과 집중치료의 탄생
6장 1955: 개심술 - 마지막 미개척지
7장 1961: 새로운 고관절
8장 1963: 신장이식
9장 1964: 예방의학의 승리 - 중풍의 사례
10장 1971: 소아암의 치료
11장 1978: 최초의 시험관 아기
12장 1984: 헬리코박터 - 소화궤양의 원인
제2부 번영
1장 의학의 빅뱅
2장 임상과학 - 의학의 새로운 이념
3장 신약의 풍요
4장 기술의 승리
5장 생물학의 미스터리
제3부 낙관주의 시대의 종말
1장 치료혁명의 좌초
2장 신약의 빈곤
3장 기술의 오류
4장 위기에 처한 종 - 임상과학자
제4부 쇠퇴
1장 신 유전학의 멋진 신세계
2장 사회이론의 유혹
3장 풀리지 않는 문제
제5부 번영과 쇠퇴 - 원인과 결과
1장 과거로부터 배운 지식
2장 미래에 관한 전망
부록 1. 류머티즘학
부록 2. 정신의학의 약리학적 혁명
현대의학의 역사
제임스 르 파누 지음 / 조윤정 옮김
도서출판 아침이슬 / 2005년 6월 / 532쪽 / 25,000원
서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의학의 역사는 인간이 성취한 인상적인 진보의 시기 가운데서도 두드러진다. 당시는 거의 모든 병에 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심술(open-heart surgery), 장기이식, 시험관 아기도 물론 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사람들은 질병과 때 이른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노화로 인한 만성적 장애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50년은 독특하고도 놀라운 지적 개화開化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치료혁명의 범위는,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로 살펴본 현대의학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감염성 질환의 감소(술폰아미드, 페니실린, 유아면역접종), 외과수술의 확대(수술용 현미경, 장기이식, 고관절 치환수술), 암, 정신병, 심장질환, 불임 치료 등에서 이룬 중요한 진보, 진단기술의 개선(내시경, CT촬영)을 포함하여 몇몇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제1부.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
현대의학의 역사는 1830년대의 어느 무렵에 시작된다. 그 무렵 소수의 용기 있는 내과의들이 사혈瀉血, 하제요법, 복잡한 식이요법 등 사실상 그들이 해온 모든 것이 소용없는 것임을 인정했다. 이 같은 현대의학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을 즈음, 의사들은 잘못된 것을 진단하는 일에 매우 능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병력을 살피고, 진찰을 하고, 피와 소변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했다. 하지만 ‘치료절차’는 이미 내던진 뒤였고, 특효약을 놓아두었던 선반 위는 사실상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인간 질병의 패턴은 그전의 2천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감염성 질환의 문제가 의료행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책의 목적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술하는 것이다. 일종의 사건 연대기로서, 현대의학에서 볼 수 있는 ‘열두 번의 결정적 계기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941: 페니실린
페니실린의 발견은 현대 치료혁명의 열두 가지 결정적 계기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며, 또한 가장 중요하다. 페니실린과 그 뒤를 따라 생겨난 다른 항생물질들로 패혈증, 수막염, 폐렴 같은 치명적인 급성감염증 뿐만 아니라 관절, 뼈 등에 생기는 만성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었다.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항생물질은 거의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주는 과학의 가능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인간적 노고의 대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곧 보겠지만, 페니실린의 발견은 과학적 추론의 산물이 아니었고, 그보다는 오히려 우연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페니실린의 발견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항생물질의 핵심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었다.
1941년 2월 12일, 43세의 경관 앨버트 알렉산더는 페니실린으로 치료받은 최초의 환자가 되었다. 2개월 전 알렉산더 씨는 장미나무에 얼굴을 긁혔다. 무척 사소한 상처였지만, 긁힌 자국은 패혈증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곧 고름이 흘러나오는 농양으로 뒤덮였다. 결국 감염 때문에 수술로 왼쪽 눈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제 똑같은 식으로 오른쪽 눈도 들어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에게 페니실린을 투여하기로 결정한 의사 찰스 플레처Charles Fletcher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페니실린 치료는 3시간 단위로 반복되었다. 나는 알렉산더 씨의 소변을 모두 받아,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병리학 실험실에 가져다 주었다. 소변으로 함께 배설된 페니실린을 추출해낸 뒤 이를 환자에게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 그는 매우 좋아졌다. 그의 얼굴과 머리, 오른쪽 눈에 났던 농양도 뚜렷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2월 17일 여섯째 날, 페니실린이 바닥났다. 불가피하게 그의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한 달 뒤 그는 사망했다.
그 사건은 후대의 뇌리 속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박테리아의 악의에 굴복하는 일(장미나무에 긁힌 상처 때문에 죽는 것보다 더 ‘목적 없는’ 죽음은 없을 것이다)에서 벗어나, 과학의 힘을 통해 그것을 파괴시키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초는 그로부터 10여 년 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의 실험실에서 우연히 관찰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레밍은 미생물학자였다. 1928년, 여름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곰팡이(나중에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알려지게 된다)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곰팡이(그는 이를 페니실린이라고 불렀다)의 추출액이 모든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과학자들은 플레밍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플레밍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로널드 헤어Ronald Hare가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것은 1964년이 되어서였다. 포도상구균이 섭씨 35도 정도에서 가장 잘 자라는 반면, 페니실린은 그와는 다른 온도(섭씨 20도)에서 성장하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페니실리움 곰팡이는 흔히 생겨나는 균주菌株가 아니라 아래층의 실험실에서 공기를 타고 올라온 희귀한 균주였다. 아래층의 실험실에서는 균류 전문가인 라투슈가 작업을 하고 있었고, 분명 일부의 포자가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던 페트리 접시에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희귀한 균주가 다량의 페니실린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헤어는 1928년 7월 말 런던의 기상학 자료를 살펴본 뒤, 플레밍이 휴가 중이던 9일 동안 예외적으로 날씨가 서늘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서늘한 날씨가 페니실리움 곰팡이의 성장에 이롭게 작용했고, 그 뒤 기온이 올라가면서 포도상구균의 성장이 촉진되었던 것임이 분명했다.
플레밍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행운을 손에 쥐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페니실린의 임상적 연구를 포기했다. 그 화학물질을 감염성 질환의 치료제로 쓰기에는 너무 독성이 강할 것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 탓이었다. 이것은 ‘의학에서 선입견이 어떻게 상상력의 숨통을 막고 진보를 방해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와 에른스트 체인Ernst Chain이 페니실린의 신기에 가까운 특성을 재발견하기까지는 10년이나 더 지나야 했다. 이제는 플레밍이 실패한 지점에서 어떻게 플로리와 체인이 성공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플레밍 같은 미생물학자의 능력은 박테리아 실험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데 달려 있다. 체인 같은 생화학자의 능력은 좀더 심층적인 수준, 즉 미생물학자의 관찰사실의 기초가 되는 생화학적 기전을 밝혀내는 데 있다. 그는 페니실린을 추출하고 정제할 수 있는 능력(매우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이 있었고, 이를 쥐에 투여했을 때 그것이 분명히 ‘무독성’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1940년 8월 24일「랜싯」지에 이 실험결과가 발표된 후 플로리는 제약회사가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관심을 가지리라 예상했다. 쥐보다 3천 배나 큰 사람은 엄청난 양의 페니실린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려운 시기였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런던 공격을 시작으로, 독일군의 영국 침공이 이어진 것이다. 먼저 영국 공습을 감행한 바야흐로 영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에 플로리는 그의 실험실의 보잘것없는 자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941년 초에 이르러 사람에게 최초로 실험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페니실린이 만들어졌다. 1941년 2월 12일 찰스 프레처가 앨버트 알렉산더의 정맥에 페니실린을 최초로 주사했고, 4명의 환자를 더 치료했다. 연구가 진척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양의 페니실린이 필요했다. 6월에 플로리는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마침내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에 뛰어들 4개의 커다란 제약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들의 공로는 페니실린의 개발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원칙을 만들어냈고, 이 원칙에 따라 이후의 모든 항생물질이 발견될 것이었다.
페니실린의 발견에 뒤이은 초창기에 화학적으로 약을 합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플로리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말했듯이, 필요한 것은 많은 미생물들 가운데서 다른 박테리아들을 파괴할 수 있는 소수의 미생물들을 골라낸 뒤 강력한 항생성분을 확인하는 일이 전부였다. 따라서 항생물질이 흔히 현대의학의 승리라고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과학자들 스스로 최초의 원칙을 통해 항생물질을 발명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 항생물질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보통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와는 다르게, 페니실린과 그 뒤를 잇는 여러 항생물질의 이야기는 질병의 정복에 관한 과학과 합리주의의 승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플레밍에게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지닌 항균적 특성의 발견을 가져다준 비정상적인 기온은 정말로 엄청난 우연이었다. 그리고 항생물질의 대량생산을 가져온 중요한 결정(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 대학 실험실을 페니실린 공장으로 바꾸고자 했던 플로리의 결심)은 이성에 대한 의지의 승리였다. 한편으로, 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몇몇 미생물에게 이런 복잡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고,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1952: 코펜하겐의 폴리오 유행과 집중치료의 탄생
사람들이 결국 중환자실(집중치료실)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어떤 경우, 환자는 열 가지 이상의 장비에 몸을 맡겨야 하는 수도 있다. 심장박동측정기, 현관 내의 가스농도를 측정하는 기계, 혈압측정기, 인공심박조율기, 투석기 등이 그것이다. 이 기계들은 하나하나가 놀라울 뿐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기계적 마술의 중심에는 단 한 종류의 장비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그 장비는 폐 속으로 산소를 불어넣는 인공호흡기다. 오로지 산소만이 심장을 뛰게 하며, ‘시간을 벌어’ 조직이 치유되고 손상된 복잡한 인체기능이 회복되도록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리작용에서 차지하는 산소의 절대적인 역할은 최대 2백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산소가 중증환자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1952년 코펜하겐에서 유행한 폴리오(회색질척수염, 척수성소아마비라고도 한다)로 인해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1952년 가을 코펜하겐의 블레그담스 병원 19호 병동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신기한 광경에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 두 줄로 정렬된 70개의 침상 각각에는 폴리오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이 목에 낸 절개부를 통해 빈 플라스틱 튜브를 기관氣管에 꽂은 채 누워 있었다. 이 튜브는 다른 긴 튜브에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고무부대가 달려 있었다. 각 침대의 곁에는 젊은 의학도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몇 초 간격으로 고무부대를 쥐어짰다가 폈다. 튜브를 통해 아이의 폐에 산소를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폴리오가 퍼져 있을 무렵 1천5백 명의 의과 대학생들은 16만 5천 시간 동안 고무부대를 쥐어짜며 “최선을 다했다.” 이런 결과로 폴리오의 희생자들 가운데 사망률이 90%에서 25%로 떨어졌다. 이런 치료법은 그 규모 이외에는 놀랄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무부대를 눌러’ 튜브를 통해 산소를 주입하는 기술은 오랜 세월 동안 수술실에서 흔히 행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보조호흡assisted ventilation이 중증환자의 치료에서 중심적인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1952년 코펜하겐에 재앙적인 폴리오가 발생하고, 이로써 커다란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오염된 음식 또는 물을 통해 체내에 들어오며 창자벽을 통해 흡수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여기서 퍼져나가 근육의 운동을 관장하는 척수의 신경을 마비시킨다. 폴리오는 대부분의 경우 여름에 발병했기 때문에 ‘여름의 역병’이라고 불렸다. 운이 따르면 마비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아이에게는 그나마 약하고 축 처진, 소용없는 사지라도 남게 된다. 1931년 하버드 대학교의 내과의사 필립 드링커Phillip Drinker가 하나의 해결책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철폐(iron lung, 철제 호흡 보조장치)로, 이것을 이용하면 폴리오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여 환자의 신경이 회복되고 호흡기 근육의 힘이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척수를 타고 올라가 호흡기 근육뿐만 아니라 뭔가를 삼킬 때 관여하는 근육에까지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1951년 9월 코펜하겐 대학교는 제2회 국제폴리오학회를 개최했다. 마취의사 비오른 입센Bjorn Ibsen의 의견에 따르면, 아이들은 두뇌에 미치는 폴리오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죽는 것이 아니었다. 부적절한 호흡방식과 두뇌에 불충분한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야기되는 말기적 증상(혈압상승, 열, 축축한 피부) 때문에 죽는 것이었다. 그의 해법은 극단적이었다. 철폐호흡기를 없애고, 올바른 호흡방법으로 모든 폴리오 환자들에게 기관절개술을 시술하는 것이었다. 기관을 절개한 뒤 손으로 직접 산소를 공급해야 했다. 이것만이 폐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코펜하겐과 덴마크 동부의 모든 폴리오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내과 과장인 라센은 입센의 이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지만, 속는 셈치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의학의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결과적으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입센은 12세의 소녀 비키를 골랐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비키를 철폐호흡기로 되돌려놓았을 때, 불충분한 호흡이 혈중이산화탄소의 양을 증가시켜 다시 온도와 혈압이 올라갈 것이었다. 그런데 입센의 이론대로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뒤 입센이 호흡부대를 쥐어짜자 그녀의 상태는 다시 호전되었다. 그 결과로 입센보다 라센 자신이 이제 정력적으로 이 새로운 치료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앞에 등장했던 의과 대학생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인간의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는 것은 초보적인 기술에 속했다. 어쨌든 이 결과는 중대한 영향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해법이 두 가지 차원에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직접적 원인은 적절한 호흡장치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적절한 호흡장치는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시간을 벌어주어’ 호흡기 근육이 힘을 회복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1952년 당시에는 이 두 가지 가설이 모두 명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입센이 호출되었던 것이다. 마취의는 수술실에서 매일같이 의도적으로 쿠라레(신경근육의 이음부를 막는 독)로 환자의 호흡기 근육을 마비시킨 다음 인위적으로 호흡을 유지시킴으로써 그와 동일한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946년 마취의 T. 세실 그레이가 쿠라레를 투약한 1천 명 이상의 환자에 대한 관찰사실을 보고했다. 세실 그레이는 근육이 쿠라레에 의해 완전히 마비되는 경우 마취의가 상황을 통제하고 환자에게는 인공호흡을 하게 함으로써 수술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역사적인 조망에서 입센은 부적절한 호흡이 낳는 모든 결과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해법의 본질은 단순히 한 분야(마취약)의 전문적 지식을 다른 분야로 옮겨놓는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큰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수술실을 나온 후 일정 기간 계속되는 보조호흡이 생리적 기능의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더없이 중요했다. 그러나 많은 외과의들은 이에 관한 제안에 냉혹하게 반대했다. 수술 후의 인공호흡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을 암시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싹틀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 개심술 같은 큰 수술을 할 때 인공호흡을 받은 환자들은 다시 ‘자발적으로 숨쉬는 환자들’의 병실로 되돌아갔다. 결과적으로 환자들은 수많은 의학적 합병증이 생기고 이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혁신적인 수술과 관련된 외과의들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수술 뒤에 적절한 인공호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일한 원리가 외과 환자에게 적용된 것은 코펜하겐의 폴리오 유행이 인공호흡을 연장하면 생명을 살릴 기회가 커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해로부터 3년 뒤인 1955년에 와서였다. 여러 이유로 폐의 기능이 손상되었을 때, ‘튜브를 끼우고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 인체조직에 산소를 공급하는 적절한 단 하나의 방법이라는 게 오늘날에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의 집중치료의 성공이 이 단 하나의 행위에 달려 있다. 이렇게 되는 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얼마나 이상한가!
1978: 최초의 시험관 아기
전후시대에 부상하는 의학의 명성은 의학이 실질적으로 이룬 성취뿐만 아니라 이런 성취 가운데 일부가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심장이식이나 시험관 아기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취는 의학적 문제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아니라 대개 우연이나 행운, 또는 기술적 진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루이스 조이 브라운Louise Joy Brown의 탄생을 이끈 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실이다. 루이스 조이 브라운은 ‘체외수정’으로 임신된 최초의 시험관 아기였다. 체외수정(in vitro fertilization, IVF)의 ‘in vitro'는 '유리관 안에서’를 뜻하며 ‘in vivo'(생체 안에서)와 구분된다. IVF는 엄청난 과학적 진전처럼 보이지만, 자궁관(난관)이 막힌 여성을 위한 일종의 정교한 배관작업 이상은 아니었다. 이런 여성의 난자는 난소에서 자궁으로 이동하여 남편의 정자와 수정하지 못한다. 이런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분명했다. 난소에서 난자를 빼내 남편의 정자와 합친 다음 시험관을 이용하여 자궁경부를 거쳐 수정된 수태물conceptus을 자궁 안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수태물은 자궁벽에 달라붙을 것이다. 어쨌든 나머지는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사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IVF의 과학적 중요성에 관한 이런 냉정한 견해 때문에, 이런 일을 가능케 했던 사람들의 노고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분야의 개척자 밥 에드워즈Bob Edwards의 노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인간 난자의 수정에 관한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발생 초기 단계를 관찰하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마침 임신촉진제의 이용에 관한 연구가 꽃을 피우고 있던 시기와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척 자주 그런 일이 생겨나긴 하지만 보기 드문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번 경우는 복강경이었다. 복강경을 이용하면 큰 수술없이 난자를 난소에서 꺼낼 수 있었다. 복강경 덕분에 IVF는 실제로 가능한 시술이 되었다. IVF가 왜 전후 의학의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그 절정을 이룬 사건에 관해 얘기해 보자.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라는, 세상을 놀라게 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각각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리더 밥 에드워즈, 그의 동료인 올덤 종합병원의 산과 전문의 페트릭 스텝토Patrick Steptoe, 패트릭 스텝토의 아내 쉬나 스텝토, 브라운의 부모 레슬리 브라운과 존 브라운이었다.
밥 에드워즈의 외로운 투쟁은 196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그동안 중요한 발전은 여성의 생식호르몬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네 가지의 주된 호르몬이 이에 관련되어 있다. 처음의 두 가지는 뇌의 밑 부분에 있는 뇌하수체에서 분비된다. 이것은 난포(여포)자극호르몬 FSH과 황체형성호르몬 LH이다. FSH는 난포나 난자의 성숙을 자극하는데, 이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LH는 성숙한 난자가 난소에서 자궁관으로 나아가게 한다. 다른 두 호르몬은 난소에서 분비된다. 성숙 중인 난포에서 생성되는 에스트로겐과 배란 뒤 난포의 잔여물(황체)에서 생성되는 프로게스테론이 그것이다. 이 모든 호르몬은 1920년대에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은 1930년 시카고 대학교의 별 볼일 없는 실험실 연구원이었던 도로시 프라이스에 의해 규명되었다. 사실 이것은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 가운데 하나였다. 1967년 3월 스텝토는 복강경의 수많은 장점을 기술한 학술논문「부인과학의 복강경 검사법」을 출판했다. 에드워즈는 복강경이 수정에 필요한 인간의 난자를 찾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1968년 1월 6일 공식적으로 왕립의학학회의 회의에서 만났다.
밥 에드워즈가 IVF의 개발에 관여하게 되는 과정의 두 번째 단계는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마지막 7년은 임신을 성공시키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실망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1971년 12월 첫 번째 불임 환자(쉬나 스텝토)가 IVF를 시술받았다. 마침내 1975년 여름휴가 때 에드워즈는 페트릭 스텝토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임신 검사 양성. 긴급 통화 요망. 페트릭.”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과는 자궁외임신으로 드러나 자궁관에 남아 있는 태아를 외과적으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부가적인 의료적 처치 없이 가능한 한 자연적인 과정에 가깝게 시술을 시도했다. 이 마지막 방법이 마침내 성공을 가져왔다. 레슬리 브라운은 1977년 11월 이런 새로운 치료법으로 처치를 받은 두 번째 여성이 되었고, 곧이어 다른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어쨌든 10년 동안의 노고 끝에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1978년 7월 출생한 루이스 조이 브라운과 1979년 1월 출생한 앨리스테어가 그들이다. 이 두 명의 살아 있는 아기에 집약되어 있는, 10년에 걸친 연구의 놀랄 만한 특징은 결국 매우 간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루이스 브라운의 탄생에 뒤이어 거의 곧바로 IVF 치료의 바퀴가 전속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981년 호주의 앨런 트라운센은 네 차례의 성공적인 임신에 대해 보고했다. 그들은 임신촉진제 클로미펜을 써서 ‘수확할 수 있는’ 난자의 수를 증가시키고, HCG를 병용하여 배란을 촉진시켰다. 이 방법은 다른 몇 가지 변화와 함께 1980년대를 통하여 IVF 시술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통탄할 만한 일이지만, 스텝토와 에드워즈는 1971년에 그들이 시도했던 원래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실수’가 과학연구의 본질적인 문제를 예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상 과학연구는 진보를 바라며 미지의 경제를 두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스텝토와 에드워즈는 그들의 방법이 옳은지 알기가 어려웠다. 너무도 성급하게 원래의 치료법을 바꿔 프리몰루트(프로게스테론 보충제)를 이용했고, 그리하여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실패를 하게 되었다. 모두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과학적 성과의 두 번째 측면 -인간적 측면- 이 중요해진다. 미지의 것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좌절을 겪는 순간 과학자들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와 용기’다. 스텝토와 에드워즈에게 주어진 보상은 7년간 그들이 기울인 노력으로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그 후 20년간 4만 회의 임신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제2부. 번영
임상과학 - 의학의 새로운 이념
1935년 1월 13일, 조지 5세 왕은 런던 서부의 해머스미스 병원을 방문했다. 그곳은 영국 의과대학원을 위한 장소로 선정되었다. 영국 의과대학원은 ‘의학지식의 진보를 위한 전문가 양성과 의학연구의 진흥’에 전념할 영국 최초의 기관이었고, 말 그대로 ‘빛나는 단체’였다. 하지만 의과대학원이 설립되고 머지않아 전쟁의 위험이 닥쳐왔다. 대부분의 병원 인력은 다른 곳에 전출되었고, 이 곤란한 상항에서 뒤에 남은 ‘최소한의 스태프’ -존 맥마이클John McMichael, 쉴라 셜록Sheila Sherlock, 에릭 바이워터스Erick Bywaters- 는 커다란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의과대학원에 의해 요약ㆍ대표되는 의학의 스타일, 즉 ‘임상과학’이 다음 25년간을 지배할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의 연구를 좀더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에릭 바이워터스는 1941년 3월「영국 의학 저널」에서, 공습의 피해로 사지에 압궤손상을 입고 집에서 실려온 민간인 환자들에게서 ‘그전까지 보고 되지 않았던 특정한 증후군’을 발견했다고 기술했다. 바이워터스의 논문이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새로운 증후군이 보고된 방식에 있었다. 환자가 신부전으로 죽기전까지 겪었던 변화에 대해 가장 상세한 과학적 관찰기록을 제공했다. 그 같은 보고서를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이런 연구 프로젝트들이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중요성은 이런 것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자를 보살핀다는 주된 임무와 함께 이런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품고 있던 지식에 대한 어떤 열정과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이 열정은 의학을 바꿀 새로운 이념 -임상과학- 의 규정적인 특성이다. 이런 의학의 철학이 전전戰前시대의 철학과 얼마나 다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전전시대의 두 인물을 비교해봄으로써 이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인물은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의 ‘토미’ 호더 경Lord 'Tommy' Horder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토머스 루이스 경Sir Thomas Lewis이다. 호더 경은 런던의 모든 전문의가 부러워하는 성공의 최고 정점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의료고문 역할을 했다. 정교한 의학적 검사법이 없었던 시대에 호더는 정확한 진단을 내렸으며, 거의 절대적으로 ‘임상적 방법’이라는 것에 의존했다. 이를 통해 그는 환자의 병력과, 검사에서 나타난 신체적 증상으로부터 무엇이 안 좋은지를 추론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술의 외관에 얽매이지 않은 전통적인 치료법이었고, 그 본질적인 특징은 의사와 환자의 인간관계였다. 호더 경이 부자와 유명인사들을 돌보고 있을 때, 토머스 루이스 경은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지하실에서 새롭게 발명된 심전도를 이용하여 불규칙한 심장박동의 여러 다양한 종류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수천 개의 심장에 대해 기록해야 했다. 이 작업은 ‘정말로 방대한 책’에 집약되었다.
젊은 루이스는 당대의 지도적인 생리학자들의 영향력 아래서 태어났다. 2백 년 동안 생리학자들은 동물들의 배를 가르고 심장이나 신경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조사했다. 이제 임상과학의 이름으로 정확히 똑같은 방법이 환자들에게 적용되었다. 호더의 ‘임상적 방법’이라는 의학에는 진보가 없었다. 임상과학은 이와는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조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임상과학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지식이었고, 이로부터 질환에 대한 ‘더 나은’ 이해 그리고 아마도 ‘더 나은’ 치료법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루이스와 소수의 다른 이들이 취하고 있었던 견해였고, 1935년 해머스미스 병원에 의과대학원이 설립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존 맥마이클은 임상과학이라는 루이스의 개념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켰다. 그것은 작지만 결정적인 진전이었으며, 임상과학이 진정한 의미의 급진적인 출발이었음을 다른 무엇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 1943년 12월, 토머스 루이스가 의장으로 있었던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한 회의에서 맥마이클은 자신이 수행하고 있던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혈액손실에 뒤따른 혈압의 저하를 측정하기 위해 카테터(속이 비고, 유연성 있는 관으로 혈관이나 체강에 삽입되어 액체를 빼내거나 주입하는 데 쓰인다)를 심장에 삽입했다. 이것은 루이스가 보기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임상과학의 개념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상과학이 진보하려면, 내적 한계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고 기술적인 실행 가능성의 경계를 끊임없이 넓힐 수 있어야 했다. 루이스가 그의 제자 맥마이클의 공격적인 실험연구에 대해 어떤 식으로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건 간에 의학적 진보가 가속화되면서 그것은 거듭하여 정당화되었다. 이에 따라, 1944년 실신과 관련된 맥마이클의 실험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여 앨프레드 블레일록은 팔로사징(tetralogy of Fallot, 선청성 심장병. 청색증이라고도 함)이라는 선천적인 결함을 교정하기 위해 최초로 ‘청색증 아기’를 수술했다. 이것은 몇 년 뒤에 개심술의 성공을 낳았다.
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연구가 전문의의 삶에서 오는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야심을 가진 의사들이 유일하게 바라는 출세는 존 맥마이클의 선례를 따라 연구자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의과대학원은 영국에서 선도적인 의학기관이 되었으며, 의학의 진보에 관한 놀랄만한 낙관적 신념 속에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후의 의학적 업적에 관련된 임상과학의 공헌은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분위기에서는 더없이 어려운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가능했다. 임상과학의 유산 가운데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소홀히 여겨진 한 가지 측면이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경우, 소아백혈병 치료의 초기 시절이나 신장이식의 ‘암흑기’에 개척자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지 깨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고난과 그들의 개입으로 인한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임상과학의 길을 계속 열어갔다. 그들은 왜 계속했을까? 진보를 위한 요구조건으로서 의사들이 실험을 행해야 하는 필요성은 일종의 타락한 과학주의를 낳았다. 그럼에도 이 의학적 비정함은 의학의 경계를 밀고 나아가야 했을 때 피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었다. 임상과학의 이념은 일종의 정서적 차단을 장려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개척자들은 실험적 치료를 계속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약의 풍요
이제 의사가 처방할 수 있는 치료약이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의학의 역할에 대한 의사들의 인식도 크게 변화되었다. 1930년대에 의사 자격을 얻은 의사는 치료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허무주의자’일 때가 많았다. 그는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런 게 생겨날 수 있다는 데 회의를 품곤 했다. 그렇다면 1930년대에는 소수였던 약들이 지금에 이르러 어떻게 그렇게 많아진 걸까? 어떤 과학적 진보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과는 다른 생각이다. 전후시대 의학의 결정적 계기에 대한 설명에서 거듭하여 보았듯이 어떤 형태의 약이든 우연히 발견되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배양접시에서 우연히 박테리아의 기묘한 모양을 보게 되면서 페니실린이 발견되었다. 필립 헵치도 류머티즘관절염에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코르티손을 우연히 발견했으며, 앙리 라보리가 외과 환자들에게 ‘행복감에 넘친 안정’을 발견함으로써 클로르프로마진이 발견될 수 있었다. 1930년대부터 1980년까지 발견된 사실상 모든 범주의 약들이 행운, 운수, 우연에 따른 관찰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화학물질인 약은 세포의 화학적 조성에 간섭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 놀랍게도 치료혁명의 기간 동안 세포의 작용에 관한 지식은 사실상 전무했다. 치료혁명의 추진력이 세포의 화학작용이나 그것이 약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나올 수 없었다면, 그것은 등식의 다른 변, 즉 약의 화학작용에서 나와야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화학은 고도의 정교한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치료혁명은 ‘선례’로 시작되었다. 이 선례란 어떤 화학물질이 어떤 질병상태에 특정한 효과를 보인다는 우연한 관찰결과였다. 그러면 화학자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화학의 풍요로운 성과 덕택에 선례가 되는 하나의 화학물질에서 문자 그대로 수천 가지의 관련 화합물을 합성해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실험이 뒤따랐다.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또는 이와 같은 조건의 동물)에게 화학물질을 투여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다. 화학적 변형물의 범위는 엄청나게 방대했기 때문에 세포 수준에서 무엇이 잘되었는지 혹은 합성된 화학물질이 어떻게 제대로 작용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곧 어떤 하나의 화학물질이 잭팟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화학은 정교한 학문이고,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하는 방법은 뛰어난 기술과 창의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원래의 ‘선례’가 오로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전후시대의 치료혁명은 주요한 과학적 통찰력에 의해 점화된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세부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합성화학이 치료약을 마구잡이식으로, 무작위적으로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 의사와 과학자들의 깨달음이었다. 이런 생각은 분명 통상적인 믿음과 다르다. 이것은 최초로 치료혁명을 일으킨 화학물질의 이력을 살펴보면 잘 드러날 것이다. 이 약은 1933년 독일의 화학자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 덕에 알려진 술폰아미드sulfonamide이다. 1927년 화학 회사 바이엘은 도마크를 연구이사로 임명했다. 그는 합성염료에 감염성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항균적 특성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는 간단한 지시를 받았다.
도마크의 연구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 4년간 -1932년까지- 은 ‘특별히 고무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 뒤 프론토실prontosil이 등장했다. 프론토실은 적색 염료로 원래는 가죽에 색깔을 입히는 데 쓰기 위해 합성되었다. 1932년 12월 도마크는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두 집단의 쥐를 대상으로 표준적인 실험을 실시했다. 프론토실을 투여받은 쥐 집단은 살아남았지만, 대조군은 죽었다. 도마크는 2년간 이 실험결과를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지만, 1933년 개인적 경험을 통해 프론토실이 인간에게도 효능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손에 피부 감염증이 번진 네 살짜리 딸아이를 프론토실로 치료했다. 1935년 도마크가 쥐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나서 몇 달 지나지 않아,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박테리아를 죽이는 프론토실의 치료적 효과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염료로서의 화학적 특성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효과를 나타내는 성분은 그 염료에 결합해 있는 화학물질이었고, 곧 술폰아미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술폰아미드는 이처럼 우회적인 방식으로 발견되었다.
이제 합성화학이 의학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황ㆍ수소ㆍ질소ㆍ탄소ㆍ산소 원자로 구성된 단순한 화합물에서 시작되었다. 질환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약의 의도적 제조를 위한 지적 토대를 제공하기에는 너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물 발견은 아마 다른 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의학에서 화학의 활용이라는 전망이 완벽히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요인이 필요했다. 그것은 생산의 자본주의적 방식이었다. 제약회사들도 술폰아미드, 항생물질, 코르티손의 발견에서 교훈을 얻었다. 이런 약물의 잠재적 시장이 워낙 거대했고, 하나의 발견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워낙 엄청났기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연구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손을 뻗을 수 있는 모든 화학자들을 채용했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잠재성은 사실상 무한한 것처럼 보였다. 이를 위한 산업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전 과정은 더없이 잘 진행되었다. 물론 이것은 투자에 대한 수익의 보장이 없는, 위험이 큰 투기적 사업이었다. 치료혁명의 동력은 의학과 생물학보다는 자본주의적 창조력과 화학의 시너지 효과에 훨씬 더 많이 기대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매년 1백 개 이상의 신약이 『약전藥典』에 새로이 기재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도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
제3부. 낙관주의 시대의 종말
치료혁명의 좌초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이전 4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의학의 놀랄 만한 진보는 그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소아암 치료를 목표로 한 계속되는 노력과 점진적 발전은 마침내 결실을 낳기 일보 직전이었고, 개심술과 신장이식에서 얻은 경험은 심장이식이라는 더없는 기술적 성취를 이룬 상황이었다. 물론 새로운 중요한 발전이 일상적인 의료행위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한 세대의 의사들이 고유한 기술을 터득해야 했으며, 또 이런 기술을 개량하고 개선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1970년대는 전후 치료혁명의 잠재력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치료범위의 확대로 전혀 새로운 4개의 전공분야가 생겨났다. 위장병학(소화관), 내분비학(호르몬), 종양학(암), 임상약리학(약)이 그것이다. 병원의 규모는 1970년부터 계속하여 커져갔다. 병원에서는 소아암, 신부전, 심장질환 같은 병의 치료법에 관심을 가지고 전문의들을 채용했다. 병원에는 새롭게 만들어진 중환자실 덕분에 신부전을 앓는 중환자나 큰 외상을 당한 사람들을 고칠 수 있는 시설과 전문지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간 질환의 전 범위를 다룰 수 있는 지적 에너지 그리고 자원과 함께, 의학은 고도로 정교한 작업이 되었다.
그러나 의학의 극적인 진보가 전쟁 후 갑자기 시작된 것처럼,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거의 이와 비슷하게 의학의 성공은 갑자기 끝으로 치달았다.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은 몇 가지 사건들은 의학적 진보의 행진이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듯했다. 1978년 영국 의과대학원의 임상 약리학과 교수 콜린 돌러리Colin Dollery는, 록 칼링 연구기금을 수상한 자신의 연구서 제목을『낙관주의 시대의 종말The End of an Age of Optimism』로 붙였다. 그렇다면 왜 '낙관주의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는가? 다음 해 제임스 윈가든James Wyngaarden은 미국 내과의사협회의 회장 강연에서 '위기의 처한 종 - 임상연구자’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강연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는 “의대생과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 의학연구에 대한 관심이 오랫동안 감소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윈가든의 말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수여하는 교육자격 획득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년 뒤 전후 치료혁명의 거대한 거점이었던 제약산업마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명한 과학 저널「네이처」의 편집자에 따르면, ‘신약의 빈곤’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새로운 약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의 신규 화학물질New Chemical Entities, NCE를 분석해 보자. 그 가운데 3분의 1만이 ‘적절한 치료효과'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불길한 징후는 또 있었다. 거의 100년 동안, 의학의 최근 발전 상황에 뒤처지고 싶어하지 않는 내과의, 외과의, 가정의들은 『의학연감 The Medical Annual』을 구독했다. 이 책은 매년 최신의 의학적 혁신에 관한 정보를 요약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1983년, 『의학연감』의 구성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 책에는 더 이상 최신의 의학정보를 제공하려는 열망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책은 빈약하고 매력 없는 구성으로 마침내 폐간되기 전까지 몇 년을 버텼다. 따라서 콜린 돌러리가 '낙관주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선언하고 나서 5년 동안, 미국 내과의사협회 회장이 임상과학자들을 ‘위기에 처한 종’이라고 선언했고, 「네이처」는 ‘신약의 빈곤’을 언급했으며,『의학연감』은 전후의 의학적 업적을 고지하는 역할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전후시대 의학적 발전의 대들보로서 임상과학, 의약화학, 그리고 기술적 혁신이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이다. 전후시대의 중단 없는 성공은 종말에 다다랐다(지금까지 전후시대 의학의 역사에 찾아온 이 전환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 분명히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4부. 쇠퇴
1970년대에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반이 확립되어 치료혁명의 쇠퇴로 인한 지적 공백상태를 메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1980년대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역학과 유전학은 이를 이끈 서로 다른 전문분야로, 그전까지 전후시대 의학에서 주변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사회이론Social Theory'으로 무장한 역학은, 암, 심장질환, 중풍 같은 대부분의 흔한 질병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방식‘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건강한 식단으로 바꾸고 환경오염물질에 노출되는 상황을 줄이면 이런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전학은 ’신 유전학New genetics'으로 불리게 되었다. 놀라운 몇 가지 진보는 몇몇 질환에서 이상 유전자의 발견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척했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설명방식은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인간의 성장에 미치는 본성(유전자)과 양육(사회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라는 각각의 고유한 영향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의학의 지적 공백상태를 신속하게 메워나갔다는 사실은 경험론적 치료혁명의 쇠퇴를 증언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역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주장이 유효한지 의심해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신 유전학의 멋진 신세계
신 유전학은 각각의 성격은 뚜렷하지만 서로 겹쳐지는 세 가지 영역, 즉 유전공학, 유전자 선별, 유전자 치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신 유전학의 영역은 한동안 의학의 지적 추진력이 되었고,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이며 뛰어난 해답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모든 열정과 흥분, 연구에 들인 수백만 시간과 수만 편의 논문, 신문에 실린 엄청나게 많은 기사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이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신 유전학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진 것일까? 신 유전학은 정확히 제때에 등장해 1970년대 말 낙관주의 시대의 종말이 남긴 지적 공백상태를 메웠다. 다음으로, 신 유전학은 진지한 과학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수많은 신약을 만들어낸 의약화학의 무작위적 방법보다 훨씬 더 진지했다. 그렇게 진지했기 때문에, 신 유전학이 관련 유전자를 정확히 찾아내 혼란 질환의 ‘궁극적 원인’을 밝혀내리라 기대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신 유전학의 가능성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과장되었다.
왜 신 유전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자. 신 유전학의 의학적 적용범위와 관련하여 첫 번째 분명한 제약은 유전현상이 인간의 질병에 특별히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한 유전병은 오로지 소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것마저도 사실은 흔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암 같은 성인병에서 유전현상의 영향은 극히 얼마 안 되는 환자에게로 국한된다. 신 유전학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만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유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한히 복잡하고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었다. 신 유전학의 실제적 적용은 유전자의 본질과 관련하여 너무나 단순한 개념에 의존한다. 그것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향한 정보의 흐름으로, DNA가 RNA를 만들고 RNA가 단백질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DNA가 ‘우두머리 분자로서, 만물의 청사진이다’라는 설명은 생동감이 넘치지만, 유전자 자체는 세포 전체의 맥락 안에서 다른 유전자와 상호 작용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회이론의 유혹
과학적 의학에서 낙관주의 시대가 끝나고, 신약의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임상과학자들이 위기에 처한 종이 되었지만, 갑자기 신 유전학과 사회이론이 등장하여,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사회공학은 사망의 원인을 제거하고, 유전자 조작은 다른 모든 것을 고치리라 예상되었다. 새로운 연대는 대단하게 시작되었다. 일상생활과 질환의 연관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넓히기 위해 대규모적인 프로그램의 형태로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계속된 조사로 이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위험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담배, 알코올, 섹스, 음식 같은 모든 인간적 기쁨에 대해 추방선고가 내려졌고, 공기와 물은 발암물질이 가득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하고 병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지만 사회이론은 완전히 틀렸다. 왜냐하면 사회이론의 요소는 모두 불가피한 생물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거나 이것과 모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이론과 생물학의 법칙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 사회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한 분야의 과학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과학 분야는 바로 역학이다. 전후시대 의학이 이룬 성과는 본질적으로 경험적이며 기술적이었다. 따라서 1970년말이 되자 치료 가능성은 변화되었지만, 의학은 40년 전에 비해 흔한 질병의 원인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병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현상, 즉 병이 왜 시간에 따라 증감하는지, 왜 일부 지역에서는 흔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드문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는 의학 분야가 역학이다. 하지만 역학은 병인의 탐색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역학적 연구는 하기가 쉽다. 어떤 질환에 걸린 사람들의 집단을 택해, 그런 질환이 없는 사람들의 집단과 생활을 비교한다.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병인’으로 삼을 수 있고, 그러면 무지의 공백상태는 신속하게 메워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그 문제란, 인간은 매우 적응력이 강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적절한 원인일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법칙은 과학자들의 틀린 이론을 수용하기 위해 바뀌지는 않는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사회이론의 모순들이 좀더 일반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1995년「사이언스」지는 ‘역학은 한계에 직면했다’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식사, 생활방식, 환경과 질환의 미묘한 연관성을 찾으려는 연구는 끊임없는 불안을 낳았다. 하지만 확실한 연관성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대중들은 ‘헤어드라이어에서부터 커피까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수많은 잠재적인 발암인자들’에 노출되어 왔고, ‘왔다 갔다 하는 추錘가 불안이라는 유행병을 낳았다.’ 사회이론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질병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동시에 질병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사회이론에 의해 의료행위는 무용하다는 신화가 창조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사회이론은 효과가 없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지난 20년간 이루어진 두 가지 위대한 프로젝트로서 신 유전학과 사회이론의 실패는 현대의학의 쇠퇴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과학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분자생물학과 역학은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지만, 이 둘은 동일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신 유전학의 매력은 환원주의에 있었다. 이를 통해 질환이라는 현상을 유전자와 유전자 산물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사회이론의 매력은 그 단순성에 있었다. 질환에 관한 사회이론의 설명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질환을 간단하게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전망은 빗나갔다. 대체적으로 유전자는 질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사회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인간은 외부환경의 사소한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사실 때문에 유효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의학이 미지의 결정적인 생물학적 병인을 알아내는 목표에서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제5부. 번영과 쇠퇴 - 원인과 결과
미래에 관한 전망
현재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일 경우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첫 단계는 오류를 깨닫고 그것을 폐기하는 것이다. 현대의학에서라면, 사회이론의 지적 허풍과 신 유전학의 지적 과장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이론으로 인해, 이제 신뢰할 만한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의학의 권위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따라서 긴급한 개선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행해지는 대부분의 의학적 조언들이 순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신 유전학의 지적 과장이 제기하는 문제는 좀 다르다. 신 유전학은 적어도 유전에 관한 과학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이유로 수십 년간 분자생물학자들은 무한히 복잡한 유전자와 단백질 정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현재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 유전학은 의학연구를 환원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생물학의 미스터리’를 조사해 질환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위쪽, 바깥쪽, 때로는 옆쪽에서 보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죽여야 할 용(전설 혹은 허풍, 지적 과장)은 또 있다. 그 이름은 놀랍게도 진보, 아니면 그보다는 진보의 이데올로기다. 가장 진보적인 두 가지 이데올로기로 과학과 자본주의는 전후시대의 놀라운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숙고해 보면 적어도 의학은 과학적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거나 아니어야 한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하지만 그래 왔다). 의학의 지식기반은 지난 50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증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의 관심사 -의사들이 하는 일- 는 오늘날이나 고대 그리스 시대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의학이 ‘혁신에 대한 강조와 함께 새로움의 충격에 전적인 존경을 바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보 이데올로기부터 살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이 ‘새로움에 대한 집착’은 과거의 지혜를 무시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번영기에 꽃을 피웠다. 그때는 새로운 것은 진정으로 새로웠고 또 중요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자, 진보에 대한 몰두는 다른 모습을 띠고 대중과 의사들로부터 의학의 현 상황을 감추는 구실이 되었다. 사람들이 과거를 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학이 가져올 미래의 가능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의학은 이제 지식의 근원으로서 통계자료에 의해 ‘증명된’ 것만을 인정한다. 따라서 경험에서 나온 지식은 통계적 기법과 임상시험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명히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의 형태에 비해 신뢰할 수 없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통계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이야말로 줄곧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임상시험은 의료행위에서 종종 불거져 나오는 복잡한 문제들에 답을 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기대에 어긋나게, 과학적 진보주의로 인해 의학은 가장 위대한 자산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실제적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과,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제약회사들은 현대의학에 대해 똑같이 유해한 영향을 미쳤다. 제약회사들은 자본주의 기업으로서 혁신의 요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제약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명확한 구분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낙관적이고 앞을 내다보는 진정한 진보는 언제나 환영받아 마땅할 테지만, 이데올로기적 필요에 의해서라면 진보는 무지와 몽매, 거짓, 부패를 낳을 뿐이다. 지난 50년은 과거 2천5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전통에 있어 한 시기일 뿐이다(매우 영광스런 시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큰 성과가 있던 시기였다). 이제 의학을 전통 안에 되돌려놓을 때가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시대를 뛰어넘는 식견과 양식의 미덕이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 관계를 회복시켜 현재의 불만족스런 상황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의사는 인간 이해의 지적 한계와 의학적 진보의 실제적 한계를 순순히 인정한다. 이렇게 의료행위의 핵심적인 교의를 재확립한다면, 미래에는 의사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후회하는 경향이 줄어들거나 대중들은 확실히 자신의 건강에 대해 염려할 이유가 줄어들 것이다. 한편 의학의 진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고, 이에 따라 의료비용이 악순환적으로 증가하는 일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의학에 대한 현재의 불만은 해결되고, 의학의 성공적인 미래 또한 보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