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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시작
내가 태어난 곳은 4천 년 역사상 가장 복잡 다난한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조선 땅이었다. 불행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세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다. 조선 사람들이 외국의 지배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 정치적인 결과는 드디어 조선을 폐쇄된 ‘은둔 왕국’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난 때는 1893년 11월 10일, 마침 조선이 고립 정책에서 벗어나 국제 대열에 들어서려던 시기였다. 나는 그 당시까지 외국인에게는 한 번도 허가된 일이 없었던 이북 지방에서 살게 되었다. 백인 어린아이로는 내가 처음이었다. 약 1백 년 동안 금지되어온 기독교 선교가 나의 부모에 의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사실은 종교적으로 억압에서 자유라는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의 부모인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회 소속인 의료 선교단의 일원으로 조선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즈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한 통나무집에서 다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특출나게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신중하고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열일곱 살 때 목수 견습공으로 취직을 했으나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와 죽을 때를 기다렸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덧없이 죽게 된 점을 가장 괴로워했는데 뜻밖에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가장 뜻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아버지는 1883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2년간 교사로 일했다. 그는 학교에서 받은 봉급과 틈틈이 생명보험사의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모아 1885년에는 온타리오 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에 YMCA 지부를 성공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그의 봉사 의욕과 조직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1887년, 그에게 인생의 한 전기가 찾아왔다. ‘해외 선교 학생 자원 운동’의 인도 지역 책임자인 존 포먼 목사가 퀸즈 대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이 때 22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에 참가하겠다는 서명을 했고, 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감리교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메디슨 가 의료 선교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의료 선교회 간부였던 닥터 스톤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뉴욕의 빈민가로 출근했다. 닥터 스톤 내외는 닥터 홀을 매우 사랑하여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 그는 닥터 홀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닥터 홀은 자애로운 의사로서, 불쌍한 사람들의 형제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뉴욕 거리의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상대가 살인자건, 도둑이건, 어떠한 범죄자건 가리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 닥터 홀은 자기의 주인, 예수가 행한 것처럼 날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밝고 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철학적, 신학적인 이론을 캐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상냥함과 사랑을 나눠주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닥터 홀은 조수로 온 로제타 셔우드를 보는 순간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두 사람은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험한 그 지역의 시료원 일을 잘 해냈다. 이듬해 부활절, 닥터 홀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조선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뒤였으므로 취임 후 5년 동안은 결혼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사양했다. 그러나 닥터 홀은 약혼기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기다리겠다고 하여 두 사람은 약혼을 했고, 1890년, 닥터 셔우드는 조선으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닥터 홀은 이별이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에 더욱 감탄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깊은 사랑이 솟아났다.
닥터 홀도 해외 선교사로 나갈 길을 모색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당시 닥터 셔우드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다. “로제타, 난 방금 그토록 바라던 조선으로 임명을 받았소.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깊게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조선에 있다가 안식년 휴가로 이곳에 돌아온 닥터 스크랜턴과 함께 방을 얻어 기거하고 있습니다. 스크랜턴 모자는 당신을 높이 칭찬하더군요.”
닥터 홀을 떠나 보내는 환송은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풍경이었다. 가장 가슴을 울린 송별사는 닥터 홀에게 치료를 받았던 가난하고 병들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한 유태인 환자는 벅찬 감정에 말을 더듬었다. “닥터 홀은 오랫동안 우리를 계속 찾아주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분입니다. 돈을 받지 않고 우리를 치료해주었으며 먹을 것을 가져와서는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주곤 했습니다.” 한 의과대학 학생은 “닥터 홀은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고, 상대방의 장점을 계속 강조하여 실제보다 더 크게 인정해주고 고무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사람이 인정받은 그대로 되었다”면서 진심으로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척을 향한 모험
여자를 치료하거나 기독교를 전하려면 여의사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닥터 스크랜턴은 여성해외선교회에다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달라고 청원했고,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 닥터 메타 하워드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 병원은 스크랜턴 여사가 세운, 조선에서는 첫 번째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한 장소에 있었다. 닥터 하워드는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했고, 그 결과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셔우드는 바로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조선에 왔던 것이다.
닥터 홀이 도착하기 몇 주 전은 닥터 셔우드에게는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했다. 이 무렵 치료된 환자 수는 1년 전에 비해 3배나 더 많았다. 한편 학교에서는 계속 심리학과 약물학을 가르쳤다. 닥터 셔우드는 어린 조수들에게 인체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의 골격을 교습 자료로 쓸 구상을 했다. 무심결에 동료 선교사에게 지난 봄에 남산의 성 밖에서 주운 사람의 해골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선교사들은 놀라서 주의를 주었다. 왜냐하면 전에 “외국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고 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이 해괴한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긴박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부딪힌 가장 미묘하고 심각한 문제는 전통적인 조상 숭배의 관습이었다. 초기 카톨릭 교도들이 처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조상 숭배의 관습을 포기해야 하는 점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힘든 투쟁이었다. 닥터 셔우드는 양반집에 왕진갈 때면 안마당에 세워진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보곤 했다.
1891년 12월 15일, 닥터 홀이 탄 배가 부산에 도착했다. 닥터 셔우드는 약혼자에게 병원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표정에 닥터 홀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너무나 또렷이 비쳤다. 닥터 홀은 결혼 날짜를 정하기를 원했다. 그는 아펜젤러 부부가 여름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가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집이 빌 것이다. 그는 셔우드에게 이 기회를 이용해 결혼하자는 뜻을 비쳤다.
한편 닥터 홀의 선교회에서는 새로운 선교 기지를 찾기 위해서 닥터 홀과 존즈 선교사를 이북에 전진기지를 탐사하도록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서 허가만 한다면 선교 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만주와 접경지인 의주까지는 함께 여행하고 거기에서 서로 갈라져, 닥터 홀은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홀은 매우 힘들긴 했으나 조선 사람들로부터 매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평양이 조선 내륙의 선교기지로서는 최적지라고 보았으며,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은 후에 증명되었다. 그는 평양이 왜 최적지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첫째, 이 도시는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으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가 된다. 또한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거기에다 인구가 10만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라 번성할 여지가 있는 도시다. 이외에도 이곳은 서울과 북경 간을 연결하는 도로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 교통도 용이하다. 그리고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다.”
결혼식은 6월에 거행되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홀 내외는 아펜젤러 씨의 빈집에다 신혼 살림을 꾸몄다. 그런데 얼마 후 셔우드 홀은 계속 서울여성병원에서 근무하도록, 닥터 홀은 평양 선교 기지 개척 담당자로 임명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도 내지에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다는 금령이 발효 중이었고 기독교 포교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존재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 일을 수행하는 데는 의사가 가장 적격자였다. 홀 내외는 이 임무가 지금은 힘들어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앞에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93년, 잠시 서울에 들렀던 그는 평양에 가옥을 구입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노블 목사와 동행했다. 닥터 홀이 임명받은 구역은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300킬로미터에 걸친 지역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노블 목사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에서의 여행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교사의 진정한 모습을 시험하는 이상한 고통과 시련이 많다. 이런 시련을 대하는 닥터 홀의 모습은 감명 깊었다. 그는 마치 편한 기차 여행이라도 하는 것같이 어려움을 즐겁게 대처해 나갔다. 특히 평양 시료소에서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 알게 된다. 그는 조선인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를 보러온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으러왔다.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왔건 떠날 때는 참으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간직하고 갔다. 한번은 평양에서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가진 어느 관리의 영향으로 군중들이 들고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적개심이 어떻게 터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했을 때, 나는 닥터 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미세스 홀도 남편이 없는 서울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한때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릴리언 해리스 기념 병원의 원장을 지냈으며 몇 개의 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학교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김점동은 특별히 뽑힌 학생으로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가 홀 부인의 언청이 수술을 본 다음부터 반드시 의사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김점동의 세례명은 에스더였다. 후에 내지로 들어가 닥터 홀과 합류하여 일하게 될 경우 그녀는 에스더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연례 회의에서 닥터 홀과 그의 아내 셔우드 홀에게 평양 개척의 임무가 떨어졌다. 홀 내외는 감사해 했다. 선교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닥터 홀이 서울로 와서 모금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고 용기를 준 사람들은 선교사의 자녀들이었다. 닥터 홀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이 어린이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직접 청원을 드렸고 곧 응답이 왔다. 기도회가 끝나자 버티가 반짝이는 은화 1달러를 가지고 내 방에 왔다. 그 다음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윌라가 10센트를, 뒤이어 오거스터 스크랜턴이 50센트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 꼬마들이 가져온 돈은 총액이 불과 1달러 60센트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하나님은 이 아이들의 선물을 늘려 8개월 후에는 1,479달러 99센트가 모금되게 해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평양의 좋은 장소에 병원과 시료소를 갖게 된 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해 가을, 닥터 홀은 또 하나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 항상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던 참이었다.
평양에서의 수난
홀 부부의 아기,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셔우드가 태어난 지 3주가 되었을 때 닥터 홀은 다시 평양으로 떠나야 했고, 1894년 5월에는 온 가족이 배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현지 기독교인들 몇 명이 그들을 마중나와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백인 여자와 백인 아이를 처음 본 주민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홀 부인은 평양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많은 구경 인파에게는 담이나 대문도 소용없었다. 몇 사람씩 방으로 들어와 우리를 구경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감사 밑에 있는 젊은 관리는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아내를 이곳에 머물게 한다면 외국인들이 하나씩 계속 평양에 들어오게 되어 결국에는 평양은 외국인들이 다 차지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하루는 저녁 기도를 한 다음 평화스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경 기독
교 신자들인 오씨와 이씨가 찾아와서 우리를 깨웠다. 그들은 믿음이 강한 김창식이가 감옥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창식이는 닥터 홀이 서울로 돌아가고 없을 때도 이곳에 남아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창식이는 매를 맞고 칼을 쓴 채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관리들은 “닥터 홀에게는 감히 매질을 할 수 없으므로 대신 창식이를 가두고 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닥터 홀은 평양감사와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에 감옥에 있는 창식이를 보고 왔다. 창식이는 수갑(칼)을 너무나 조여놔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닥터 스크랜턴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총영사와 외무대신을 통해 서신을 보내도 조선 왕비의 친척인 평양감사는 전보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차례의 압력으로 석방된 창식이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마루에 쓰러졌다. 오는 도중에 사람들로부터 줄곧 돌맹이를 맞으면서 왔다는 것이다. 사법관이 계속 예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라고 명령했으나 창식이는 못 하겠다고 거절했고, 그 때문에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닥터 홀은 창식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 고난 받은 신앙인을 볼 수 있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귀한 은혜라고 말했다.
노블 목사도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업무를 다 제쳐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를 했다. 각자 이 위기가 자신들과 깊이 관련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이 두 사람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닥터 홀로부터 “모두 석방됐음. 창식. 심한 상처를 입었음”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교사들은 신앙인 닥터 홀 내외가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깊고도 엄숙한 사실을 실감했다. 이제 새로운 장이 펼쳐진 것이다. 오랜 시련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평양에서 닥터 홀의 첫 신자가 된 사람은 오석형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 중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사람들 중 하나로 앞을 못 보는 어린 딸이 있었다. 홀 부인의 환자로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당시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홀 부인은 오씨의 딸 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고안했다. 그녀는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장님들은 이 세상에서 쓸모없다는 세간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맹인 교육이 시급했다.
평양의 상황은 차츰 안정되어 갔으나 셔우드와 홀 부인은 동양에서 외국인들이 흔히 걸리는 장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닥터 홀도 작년 겨울 평양에 왔을 때부터 계속 기침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 즈음 스크랜턴 부인이 영국 총영사 가드너 씨의 강경한 지시를 받고 닥터 홀 가족을 서울로 데려가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남쪽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평양의 군대를 수송하고자 보낸 배 편으로 제물포 항으로 떠났다. 동학 반란군들은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을 향해 진군하면서 “학정을 없애라. 서양인과 일본인들을 몰아내라”고 외쳐대며 정부의 진압군들을 패주시켰다. 조선 국왕은 청국에 원조를 간청했고, 이에 청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에 아무 통고도 없이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도 조선 정부를 돕는다는 구실로 역시 군대를 파견했다. 홀 가족과 일행은 한강 입구에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감리교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어느새 군대병원같이 되어버렸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밀려왔다. 전쟁의 처참함이 현실로 나타났다. 닥터 스크랜턴은 그해 여름에 닥터 홀의 노력을 이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 닥터 홀은 의사, 간호사, 약제사, 안내역까지 혼자 다 맡고 있다. 진찰실이 가득 차 정신이 없던 어느 날 그가 했던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한평생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닥터 홀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사랑과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친절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무기임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이 비결로 현실에서 기적을 낳듯 치료 효과를 낳는다.”
동학군들은 북쪽에서 청국군, 남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분쇄되었다. 이 난리는 청국과 일본이 서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두 나라는 벌써부터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조선을 통치하려고 노려왔던 것이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이것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은 전승국으로 부상했으며 청국군들은 평양에서 패주하여 물러갔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한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급변은 조선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10월 1일, 닥터 홀은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장로교 목사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이 여행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닥터 홀은 평양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봤다. 그의 기독교인 동료들은 들것 나르는 일을 맡아주었다. 그는 학교(학생 13명으로 시작한 광성학교)를 다시 열고 조선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매일 밤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계속된 강행군으로 닥터 홀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닥터 홀과 함께 있었던 모페트 목사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난해 여러 번 평양을 왕래하면서 너무 심한 혹사를 당해 그의 건강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우리들은 말라리아를 앓았다. 닥터 홀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우리는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까지 가도록 조처되었다. 우리는 대동강을 따라 65킬로미터 쯤 내려가서 약 6백 명의 병든 군인들을 실은 배를 탔다. 군인들은 이질이나 각종 열병을 앓고 있었다. 닥터 홀은 열이 내린 것 같다가 다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어두워질 무렵 강화도 건너편 지점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배가 암초에 걸려 거의 다 뒤집히게 되었다. 우리는 닥터 홀을 해안으로 옮겨놓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조선집 오막살이에 그를 눕혀두고 돛단배를 찾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배를 구해 느린 항진 끝에 서울에 닿은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홀 부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닥터 홀이 병든 몸으로 도착한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11월 19일 월요일 아침, 왕진을 가려고 약을 챙기고 있는데 그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급히 아들을 안고 뛰어나갔다. 그는 병이 너무나 중해 혼자 서지를 못했다. 그는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그 다음날 밤 그는 갓난아기처럼 용변을 가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수요일 아침에는 연필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노블 씨에게 이번 평양 일로 쓴 비용을 항목별로 알려주었다. 그 외의 다른 회계 기록은 그의 기록책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지경에서도 공무에는 철저했다. 공무가 끝나자 그는 “이제 죽든 살든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하나님의 뜻이 날 원한다면 더 오래 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되어가면서 목의 근육까지도 기능을 잃어갔다. 다섯 명의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으나 그는 우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갈 때마다 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들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애썼다. 그는 내 뱃속의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가 ‘아주 튼튼한 것 같아요. 셔우드 때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움직여요’라고 대답하면 미소를 짓곤 했다. 목요일 아침, 그는 무엇을 쓰려고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했으나 너무나 힘이 없어 글을 쓰기가 불가능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좌절감은 그의 가슴에 벅차도록 담겨 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점인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슬픈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사-랑-하-오’라고 겨우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그는 꼬마 셔우드를 데려와 달라고 했다. 그는 사랑하는 눈으로 셔우드를 바라보았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라고 불려졌던 그였는데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것은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는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닥터 홀, 그의 믿음은 이처럼 어린아이의 믿음 같이 항상 순수했다. 그는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편안히 잠들 듯 죽음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편안히 잠자기 위해. 나는 그의 두 눈을 감겼다. 그러나 그의 눈이 다시는 나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하고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아직도 밝고, 너무나 맑아서 마치 살아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나는 내 방에 가서 셔우드를 안고 와서는 하나님께서 그와 나에게 약속해주신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닥터 홀이 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날짜로 기록된 노블 씨의 회고록 끝 부분을 보자.
일요일.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를 커다란 조선식 관에 넣고는 아름다운 한강의 둑으로 가서 매장했다. 그곳은 잠들기에 평화로운 장소다. 그가 생명을 바쳐 일한 조선 땅, 먼저 간 사람들 사이에 묻힌 것이다.
에디스 마거리트
1894년 11월 27일, 서울의 배재학당 강당에서 닥터 홀의 추도식이 있었다. 이 행사를 지낸 뒤 홀 부인은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뉴욕 주 리버티의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홀 부인은 임신 7개월째였다. 에스더 박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자 홀 부인은 의학 공부를 미국에서 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해 그 청을 응낙했다.
1895년 1월 18일, 셔우드의 누이동생 에디스 마거리트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닥터 홀이 생존해 있었을 때 이미 정해두었던 것이다. 홀 부인은 계속 일기를 썼다.
꼬마 에디스는 내가 태어났던 이 집에서 파란 눈을 떴다.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이사야서 43장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나는 너와 함께 있느니라 나는 동쪽에서 너에게 씨를 갖다줄 것이며 서쪽에서 이를 거두어줄 것이니라”고 적혀 있다. 셔우드가 저 멀리 극동에서 태어난 지 단 15개월도 못 되어 누이동생은 16,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서쪽,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난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로 느껴진다.
홀 부인은 고향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게 되었고, 에스더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현재의 존스 홉킨즈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서양 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홀 부인은 ‘평양 기금’의 나머지 돈은 닥터 홀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우는 데 쓰여지기를 원했으며, 1897년 2월, 홀 기념 병원은 평양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개원되었다. 홀 부인은 이 병원을 세우는 데 보탤 모금을 하면서 『윌리엄 제인즈 홀, M. D.의 생애』를 출간했다. 홀 부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또 하나의 숙제는 조선의 맹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던 일이었으므로 뉴욕 맹인 교육학원의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가 개발한 ‘뉴욕 포인트’의 점자 구조를 배웠다.
홀 부인은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편이 시작한 일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다. 1897년 10월, 홀 부인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감리교의 여성해외선교회는 보구여관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1890년 홀 부인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착한 날도 대비 조씨의 상중이었는데 이번에는 왕비 민씨의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홀 부인은 이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을 다시 조선 땅에 오게 한 남편의 죽음이 더욱 뚜렷이 회상되었다. 그 해 감사절, 그녀는 차분한 심정으로 일기를 썼다. “우리는 오늘 가마를 타고 그이의 산소로 갔다. 11월 24일, 그가 묻힌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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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으로 돌아왔던 그 해의 겨울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만 네 살이 되었고 에디스는 세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에디스는 아름답고 소중한 보물이었다. 어느 정도로 어머니의 위안이었던가는 어머니의 일기가 증명한다.
에디스는 병자들, 특히 병난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낮잠을 잔 뒤에 에디스는 시료소를 자주 찾아왔다. 밤에는 “하나님, 모든 조선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세요. 머리에 뭐가 났고, 눈이 아픈, 병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세요”라고 간구했다. 이빨을 뽑는다든지 종기가 나서 절개를 해야 할 경우에도 셔우드는 잽싸게 도망가 버리지만, 에디스는 다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다. 어느 날 오후 에디스가 병원에 찾아왔다. 그때 나는 한창 수술 중이어서 아이가 왔는지도 몰랐다. 수술 도중에 피가 튀어서 내 얼굴에 묻었다. 그러자 에디스는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엄마의 얼굴을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의사가 될 것으로 믿는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오랫동안 갈망해온 평양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5월 1일, 우리는 평양에 도착했다. 이 날은 전에 갓난아이였던 내가 평양에 도착했던 그날로부터 꼭 4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집이 준비될 때까지 노블 씨 가족과 함께 기거하기로 되어 있었다. 에디스는 마당에서 흰 민들레꽃을 한 줌 따들고 집안을 뛰어다녔다. 우리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린 것이다. 에디스가 가장 심했다. 병이 난 3주일 동안 에디스는 구토와 통증이 너무나 심해 아편까지 썼지만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에디스가 우리를 떠난 후 쓴 어머니의 일기는 지금도 나를 울린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얼굴…. 나는 흰 민들레꽃을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에디스는 좋아서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앉고 천천히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잠시 후 크게 뜬 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엄청난 슬픔이 우리에게 닥쳤다. 우리의 첫 슬픔, 닥터 홀이 우리 곁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보석같이 귀하고 우리의 위안이었던 에디스가 다시 우리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말하자 셔우드는 첫 마디에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라고 했다. 에디스에게 마지막 단장으로 고운 흰 옷을 입힌 뒤 나는 셔우드를 데리고 갔다. 셔우드는 이미 영혼이 떠난 육신뿐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셔우드는 클로버 꽃을 꺾어 에디스의 손에 놓아주고는 수줍어하면서 에디스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셔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후에 어떤 차가운 것을 대하면 “오, 이건 꼭 에디스의 이마같이 차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랑하는 딸이 아빠의 산소에 묻히기를 원했다. 성실한 김창식은 함께 살아서 보지 못했던 딸을 아빠 옆에 묻기 위해 관을 서울로 운반해갔다. 에디스가 가는 여로는 아빠가 생전에 자주 왕래하던 길이다.
서울의 아펜젤러 목사가 에디스의 장례식을 치른 뒤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지금 자기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수습하고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는 병원 일로 바쁘게 지내느라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 가
족을 위해 단장된 평양의 집은 여성치료소와 한 지붕 밑에 있었다. 여성치료소는 1898년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에 어머니는 평양 감사로부터 자기 아내가 병이 났으니 왕진을 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몇 번의 치료로 고통에서 벗어나자 조 감사는 기뻐하면서 어머니에게 달걀 100개와 닭 3마리를 보내왔다. 얼마 후 치료소를 열게 된 어머니는 감사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광혜여원이라 지어주면서 자기 아내가 이 치료소의 착한 사람들에 의해 병이 나은 것처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에서 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어머니는 일상의 의료 사업 외에도 마음에 깊이 품고 있었던 여러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어머니는 에디스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린이 병동을 세우고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이라 이름지었다. 에디스 마거리트 기념 병동에 등장한 또 하나의 명물은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물탱크 저수장이었다. 이것은 평양에서 처음 보는 깨끗한 물의 공급원이었다. 오염된 물은 이질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질은 에디스의 목숨을 앗아갔다. 어머니는 특히 식수에 신경을 썼다. 적극적으로 대동강 외의 좋은 수원지를 개발하려 했다.
그 당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그간 묻어두었던 내면의 깊은 슬픔과 싸우셨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는 어머니가 그 때 에디스와 이야기를 주고받듯 써온 일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에디스가 떠난 지 2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에디스를 잃은 슬픔이 날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진단다. … 엄마가 이렇게 감상적인 것은 아마도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더 훌륭한 영적인 체험을 갈망하고 있다. 나의 이삭을 제단에 바치면서 하나님께 최대의 봉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를 맡겼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 가신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이 시련의 뜻을 알고자 노력했다. 한 번도 이에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는 식별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교훈이 점점 희미해져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요즘은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보다 더 내 인생의 아픔이 깊게 느껴진다. 가장 두려운 시련이다. 엄마는 지금껏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못된 엄마의 마음을 치유시켜주신다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더 많은 일에 열중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성취한 여러 일들로 보아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이끌어주셨던 것이 확실하다. 어머니는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자 곧 맹인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오씨의 딸 봉래를 데리고 점자를 이용해 교육을 시작했는데 후에 봉래는 특수 교사가 되어 시각장애자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계속 커져서 청각장애자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여섯 살이 된 나에 대한 교육 문제가 숙제로 제기되자 어머니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여러 선교사들이 합세해 미국에서 교사를 구했고 이렇게 해서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었다. 1900년 6월에 문을 연 이 학교의 첫 입학생은 4명이었다. 그 해에는 에스더 박이 미국에서 의학석사를 받아 귀국한 해이기도 했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의료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나는 에스더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감미롭고도 선율있는 목소리로 내게 소설이나 시를 낭송해주곤 했다.
은둔 왕국의 백인 소년
내가 열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내게 경제적인 자립심을 길러주어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병원 신축 때 실제적인 경험을 얻었으므로 건설업이 내가 할 수 있는 적당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조선에 파견된 두 선교사 가족들이 살 집이 필요했다. 이들의 집을 짓는다면 선교사들을 돕는 일도 되고 내 사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작업에 들어갔다.
1906년 8월, 평양의 선교사들은 원산의 의료 선교사인 닥터 하아디를 초청하여 모임을 갖기로 했다. 닥터 하아디는 아버지가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왔던 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버지가 세운 평양의 교회에 와서 그는 조선말로 특별 예배를 인도했다.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거나 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의 가슴을 열어 듣는 이들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맞닿게 직선적이고 성실하게 설교했다. 나는 그날의 설교에 감동했다. 그 내용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말씀에 있다.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피하고 상을 받아 천국에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산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알아 듣지 못한다.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해주시는 그 힘에 있는 것이지, 반드시 내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시대를 통해 가장 놀랍고 귀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이 말씀을 음미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다. 기억하라.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진다.
닥터 하아디의 설교는 어린 내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그 즈음 나는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그날 예배 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새해가 되면 언제나 새 설계를 세우곤 했지만 작심삼일로 끝나곤 했다. 내 의지만으로는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할 게 자명했다. 그러나 닥터 하아디의 설교에서 영적인 힘을 얻어, 마음이 열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새 결심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다. 닥터 하아디는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고, 1907년에는 조선에 ‘대부흥’을 일으켰다. 그 시기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왔다. ‘은둔 왕국’의 새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백인 소년도 있었다. 그가 바로 ‘나’였다.
1910년, ‘우리들의 의사’라고 불리워졌던 에스더가 10년간 병원과 성경학교에서 봉사하다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조선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요양원 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에스더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녀를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가 사랑한 수많은 동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을 세우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4년 전 닥터 하아디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준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높은 이상과 고상한 동기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실천하기에 미흡하다.”
시베리아-유럽 횡단 여행
어머니는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전 세계 선교사 회의에 조선 지역의 공식 대표로 임명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행은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내 나이 열여섯,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갖춘 때였다.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육로 여행을 계획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과감한 행로였다. 우리가 탄 만주 철도는 노일 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완공한 것으로, 기차가 산맥을 통과할 때의 흥분과 스릴은 대단했다.
우리는 날짜에 맞춰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큰 회의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대표들로 꽉 찼다. 회의는 선교 활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모트 박사가 주재했다. 그는 1897년 어머니에게 나와 동생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일하라고 조언해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개인적인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는 일부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와주었다. 선교 회의는 정말로 감명 깊었고 고무적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우리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여행의 종착지는 매사추세츠주의 마운트 허몬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이곳의 마운트 허몬 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드와이트 무디가 창립한 이 학교는 ‘학생 자원 운동’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마운트 허몬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에게 “아들을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내 앞에는 학업, 그리고 적응이라는 두 과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났고 성장기를 보낸 조선과 미국 생활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어머니가 안식년 휴가를 끝내고 조선으로 귀임한 1911년, 나는 마운트 허몬에 홀로 남았다. 아마도 나는 다른 선교사의 자녀들보다 더 철저히 조선식으로 자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온종일 병원에서 일했으므로 형제도 없는 나의 놀이 상대는 거의 조선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조선 놀이를 배웠고 거의 그들처럼 행동했다. 사고 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곳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간섭이 별로 없는 조선의 생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시계 없이 살고 있다. 조선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긴박감과 시간 개념을 배울 수 없었다. 조선인들의 생활 철학은 서두르지 않는 태평함에 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내 성격에도 맞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또 내일이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마치 ‘내일은 오지 않는 것’같이 일한다. 항상 눈을 시계에서 떼지 않아야 하는 이런 생활 방식은 내게 여간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 학교에는 ‘노동 시간’이라 부르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하루 2시간씩 일하고 번 돈을 수업료에 보태게 했다. 그들은 학교 농장에서 내게 여러 일을 시켰다. 또한 학구적인 면에서 이 학교는 내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나는 필수 과목의 하나로 해리슨 박사의 성경반을 수강했다. 강의는 ‘학생 자원 운동’이 탄생되었던 바로 그 교실에서 있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존 포먼 목사의 아들도 한 반이었다. 1887년 아버지를 이 운동에 참가하게 한 사람이 바로 포먼 목사였다. 나도 아버지를 조선으로 가게 했던 ‘학생 자원 운동’에 참여했다.
마운트 허몬에서의 견습은 졸업과 함께 끝났고, 이제 나는 대학에 갈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도시의 종합대학에 갈 계획이었는데 윌슨 목사님의 의견을 따라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가게 되었다. 이 대학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 메리안을 여기서 만났던 것이다. 한 방을 쓰게 된 프레드 브래턴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었다. 문장력이 뛰어난 그는 훗날 『특출한 친구들』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그 책에 나도 친구로 등장하고 있다.
목적이 같을 때 낯선 사람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우리는 마치 상대방의 성격을 탐색하려는 듯 차분히 서로를 관찰했고, 나는 곧 그가 이상적인 동료이며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함께 지낸 숱한 날 밤마다 홀은 침대에 걸터앉아 놀랍고도 신기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홀의 뛰어남은 학교 생활 중에 곧 드러났다. 그는 교회, 선교 단체 등 여러 모임에 나가서 조선에 대한 역사, 부모의 사업, 조선과 다른 곳에서 얻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의 강연은 인기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전해온 민담이다. 그는 ‘학생 자원대’의 회장이기도 했다. 양심적이고 신중한 학생이었으며, 비교적 말이 적었으나 그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되었다. 셔우드 홀과 한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내일을 찾아서
나는 루츠타운 교회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아덴에 있는 작은 교회의 신도였으며 조선으로 파송된 선교사였다는 말을 했다. 집회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날 첫 만남의 자리에서 메리안 버텀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덴의 감리교회 주일학교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당신 아버님이신가요?”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국 시골의 작은 교회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캐나다 시골 교회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에 대해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 몇 차례 만나면서 이미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온 아름다운 목소리와 매력적인 성격의 메리안!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후 메리안은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우리는 곧 약혼을 했고, 마치 구름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는 곧 행복의 구름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미군 의료 보충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모든 적령기의 남자들은 징집 대상이었다.
훈련, 훈련, 또 훈련….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는 너무나 지쳐 옷을 벗을 기력조차 없었다. 1918년이 되자 ‘스페인 인플루엔자’라는 유행성 독감이 발생해 아침마다 한두 사람씩 들것에 실려 나갔다. 나도 병에 걸려 메리안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 생활을 하는 훈련소에서는 이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직접 내 상관을 만나 나를 즉시 일반 주택으로 옮겨 적절한 간호를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는데도 그녀는 성공했다. 메리안의 용기 있는 조처 덕분에 나는 쉽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라는 낭보가 날아왔으며 동시에 병영 밖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메리안은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고 필라델피아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제대와 동시에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연구하던 실험실에서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그들의 연구 광경을 본 것은 숨막힐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메리안과 나는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조선 의료 선교에 대한 마음도 확인했다. 우리는 7년으로 정한 약혼 기간을 내던져버리고 1922년 6월 21일 결혼식을 했다. 나는 캐나다와 미국의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메리안은 미국의 의사 면허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드디어 의료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선교회에 자금이 없어서 우리를 조선에 보내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곧 부유한 친구들에게 우리를 조선에 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봐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부인들은 어머니의 의료 사업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조선 해주의 노튼 기념 병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는지 몰랐다. 근래에 와서 좌절감에 빠져 있었던 우리들은 이 사건의 전환이 마치 기적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조선으로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들은 믿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젊었다. 그 젊음의 열기와 정열로 해외에서 있을 선교 생활의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렜다.
조선을 향해
출발날인 1925년 8월 25일이 다가왔다. 떠날 때의 슬픔과 기다림의 설렘은 선교사 생활에는 항상 따라 다니는 친구다. 우리는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에 런던의 열대병 의학교에서 6개월 동안 동양 질병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동양 각지에서 모인 의사들이었고 교수들은 이 분야에서 뛰어난 권위자들이었다. 레오나드 로저즈경 같은 분은 말라리아 치료 부문의 개척자였으며 간염 치료에 있어서도 특수하고 성공적인 길을 연 분이었다. 이 학교에서 우리들은 이 지구의 곳곳에서 오는 실제적인 의학 자료들을 접하는 행운을 누렸다. 예를 들어 이질의 경우,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식이요법이었는데 지금까지는 묽게 탄 우유를 먹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우유는 ‘외부에서 온 단백질 독소’라는 역효과를 초래해 환자를 사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먼저 정맥 주사로 영양을 보급하고 보리죽을 쑤어서 환자에게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후에 조선에서 이 식이요법으로 선교사들의 두 어린 자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유 식이요법으로 인해 병이 악화되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이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로 환자를 살릴 수도 있고 죽게 할 수도 있었다.
1926년 4월, 배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고베였다.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벚꽃들이 만발한 초봄이었다. 우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아침, 공원에서 편지를 읽었다. 이 편지들은 고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편지에서 우리가 당연히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주로 가게 된 것을 몹시 애석해 하고 계셨다. 그러나 선교회는 평양병원에는 이미 훌륭한 의료 선교사가 책임을 지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해주로 보낸 것이다. 나는 내심 성자와 같은 아버지의 발자취가 살아 있는 그늘 밑에서 지내기는 내 미숙한 인격으로는 어려울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해주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해주에서는 닥터 노튼이 조그마한 치료소로 시작해 이층 벽돌 건물인 누리자 홈즈 노튼 기념병원을 신축 발전시켜 놓았다. 이 병원은 황해도의 1/3을 점하는 해주 지역 주민들에게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한 통의 편지는 해주병원의 닥터 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혼자서 병원을 맡고 있었다. 닥터 노튼이 있다가 1922년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전입되어 갔던 것이다. 그는 편지에다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의 아들과 김창식 목사의 아들이 이제 해주에서 한 팀이 되어 일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썼다. 닥터 김은 김창식 씨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편견과 오해가 많았던 1894년, 평양에서 기독교 박해가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 김창식은 인내와 믿음으로 아버지를 도와 그 역경을 넘겼던 분이었다. 그는 1901년 조선의 신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임명된 목사로 지금은 은퇴하여 닥터 김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를 개척한 두 사람의 아들들로 하여금 다시 만나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셨던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 아버지는 연안용 기선을 타고 긴 여행을 하여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이제 우리는 일본에서 출발하는 야간 연락선을 타고 조선 해협을 건넜다. 솟아오르는 장엄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나는 먼 시야에 들어오는 당당한 조선 땅의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끔 전쟁에 시달린 이 땅이 어째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동트는 순간, 갑판 위에 서 있던 나는 그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바다에 반사되어 황금색의 넓은 길이 마치 내게로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넋을 잃고 이 황홀한 광경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느낌이나 감동은 조선에서 지냈던 소년 시절의 여러 경험들과 밀착되어 남들과는 매우 다른 인상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배가 해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자 초가지붕 위에 박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메리안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메리안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기쁨은 더욱 커졌다.
어머니와 해후하고, 서울에서 우리를 조선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을 찾아 인사했다. 어머니와 친한 기독교 신자인 윤치호 씨, 영국 총영사, 그리고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또 마꼬또 자작 내외도 찾아뵈었다. 후에 그 분은 일본 수상을 지냈는데 평화운동을 했다고 해서 1936년 암살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남편을 방어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우리는 이어 해주 병원을 방문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조선어 학교에 등록했다. 초기 적응 기간에 잘못하면 메리안에게 정신적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후견인 노블 씨의 힘을 빌렸다. 그는 천부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가 메리안의 내적 심리, 향수병 같은 것들을 나보다 잘 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블 씨 부부는 우리를 진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리안, 당신은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낯선 습관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다른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색다르고 독특한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찰나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 외국인 사회는 선교사 집단과 비선교사 집단을 나누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조선어 학교가 있는 이 모리스관도 이곳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업가인 모리스 씨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이 건물에서는 각 파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드리기도 하고 주일이면 언더우드 박사의 박력 넘치는 설교도 듣습니다. 초교파 정신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나는 당신이 머잖아 이곳에서 마치 온 생애를 살아왔던 것처럼 느끼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이곳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까!”
오리엔테이션
조선말을 좀 안다고 뽐냈던 내 체면이 오래가지 못했다. 어렸을 때 쉽게 재잘거렸던 조선말은 ‘어린아이들의 말’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미 습관으로 굳은 말투를 고치는 일은 말을 새로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고생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고전하고 있을 때 메리안은 경쾌하게 나를 앞질러가더니 좀더 점잖은 어른들 세계의 말로 고쳐서 나를 가르쳐주는 게 아닌가! 우리에게는 아펜젤러 같은 뛰어난 선생이 있어 매우 차분하게 배울 수 있었는가 하면 언더우드 선생은 조선말에 능숙하여 학생들에게 기관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조선말로 질문했다. 그 질문이 무슨 뜻인가는 그가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쯤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가 조선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2개월 동안 조선에는 격동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이씨 왕조의 27대 왕이고 마지막 왕이기도 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 서거했다. 장례는 거창하게 거행될 게 틀림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애국자들이 이 행사를 이용해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과 같은 운동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1910년 8월 22일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합병됨에 따라 이씨 왕조는 종말을 고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애국자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 원칙에 힘을 얻었다. 애국자들은 전세계에 일본의 압정을 알린다면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포기하게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33명의 조선 지도자들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이것이 비밀리에 인쇄되어 조선 방방곡곡과 주요 열강의 정부들에 퍼졌다. 이 33인 중에는 천도교 계통이 15인, 기독교 계통이 16인, 그리고 불교 계통이 2인이었다. 일본에 의해 금지되었던 조선 국기들이 나부끼고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체포, 투옥시키고 죽였다. 기독교인들도 많이 체포되었고 죽임을 당했다. 조선 민중들은 이때 처음으로 기독교인들도 조선의 애국자들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독립 시위는 비록 원했던 자유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바꾸게 했다. 사이또 마꼬또가 조선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정책은 전임자들보다 회유적이었으며 주 관심사는 교육이었다. 그가 총독으로 올 때 조선의 학교는 250개 정도였는데 내가 다시 조선에 왔을 때는 약 다섯 배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순종 황제 장례식 날, 어머니는 장례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장례식장에 갔다. 일본 경찰이 우리에게 와서 메리안의 사진기를 철저히 조사했다. 폭탄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된 다음에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메리안은 이 역사적인 행사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내게 졸랐다. 희미한 기억을 정리하려고 골몰하고 있을 때 어렸을 적 서울에서 헐버트 씨 댁 아이들과 놀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헐버트 박사는 원래 조선 국왕으로부터 조선에 관립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온 분이다. 그는 조선 국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기 때문에 1895년 민비가 살해당한 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왕 곁에서 그의 신변을 지켜주었던 세 사람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헐버트 박사는 고종 황제를 대변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조선을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한 일로 일본인에 의해 다시는 조선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추방령을 받았으나,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도 강연, 기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열심히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했고, 결국 조선의 독립을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고, 제 2의 고향인 서울에서 1949년 영원히 눈을 감았다.
조선어 학교를 마치고 임지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메리안에게 내가 태어난 집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내가 태어난 방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방을 구경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교 생활 초기에 노블 씨 내외와 함께 이 집을 썼고 노블 씨의 딸이 태어날 때도 이 집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출산을 도왔었다. 나는 메리안에게 노블 부인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소년 시절 나는 노블 부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힘을 얻었소. 부인은 두 아이를 잃고 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 메리안은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해주로 가기 전 노블 씨 댁을 다시 한 번 찾아가자고 졸랐다. 우리가 그 댁에 갔을 때는 노블 씨 부인은 외출중이고 대신 노블 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노블 씨가 우리에게 해준 이야기들은 선교 생활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선교에 대해 그가 내린 정의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돈이란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는 개인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당신들의 생활에서 돈이 차지하는 가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단지 선교 사업을 위한 자금 외에는 말이지요. … 당신들 두 사람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미국에서 산다고 하면 전문의사로서 부유하게 살겠지요. 아마도 동창들은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비싼 요트를 소유하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게 될 겁니다. 어떤 동창이나 친구들은 자기네들이 입지 않는 헌 옷들을 당신들에게 주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그들이 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물건도 그냥 얻게 되거니와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을 통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곳 선교사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 수에 따라 똑같은 봉급을 받고 있으므로 경쟁 의식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선교사의 삶이란 그 가치가 지대하여 다른 어떠한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되고자 한 동기가 불분명하고 종교적 믿음이 약하고 열정이 적은 사람들은 자연히 이 생활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당신이 탈락하면 그 자리를 메꾸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의 자리를 일반 사회의 의사들은 탐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종사했던 하나님의 사업은 심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맡긴 임무를 수행할 때 항상 하나님께 힘을 주십사고 간구하고 인도하심을 부탁드려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하나님을 충정으로 섬기리라고 확신합니다.”
첫해와 예순한 번째 해
우리가 해주에 도착하자마자 닥터 김은 이 도시에 있는 중요한 관리들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방문 결과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았다. 황해도의 박 지사는 소년 시절의 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진정으로 반기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친절했던 또 한 사람은 일본인 경찰국장인 사사끼였다. 그는 자기 가족은 이곳에서 고립되어 있다면서 아내도 친하게 지낼 사람이 없어 고독하다고 했다. 우리는 점점 그들을 좋아하게 됐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수년 후에 우리가 어떤 위험을 맞게 되었을 때 이 우정은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병원 원장과 남자 기독교학교 교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무를 시작하는 첫날 교무주임으로부터 장기간 무단 결근한 교사 한 사람을 파면시켜달라는 요청이 왔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파면 당할 선생이 침통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 잠시 하나님께 인도를 청하는 묵도를 올렸다. 자세히 알아본 결과 그의 아내는 폐병으로 죽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같은 병에 걸렸는데 아이를 간호할 사람이 없어 출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우리 북쪽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이 문둥병을 큰 수치로 생각하는 것처럼 폐병에 걸린 것을 말할 수 없는 수치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누가 폐병에 걸렸어도 밖에 나와 말할 수 없답니다.” 나는 그 아이를 특별히 격리하여 비어 있는 병실에 입원시켰다. 그날 저녁 나는 석유등 밑에 앉아서 지인 몇 사람에게 폐결핵 환자들을 위해 작은 병동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조선에서 나의 꿈인 결핵요양소를 짓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메리안은 여자 환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맡았고 나는 남자 환자들을 맡았다. 한 번은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이 업혀 왔는데 이미 호랑이 발톱에 할퀴어 눈알이 빠지고 심하게 상처를 입은 뒤였다. 독사에 물린 사람, 장결핵이나 만성 말라리아 증세로 비장이 팽창한 환자, 놀랄 만큼 많은 커다란 난소낭종으로 복부가 늘어진 환자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암종은 별로 발견되지 않았다. 암은 서구보다 이곳이 훨씬 적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내 청진기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거의 다 결핵 환자들이라는 점을 알려 주었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이 이미 병세가 상당히 전전되어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환자들을 청진하고 병세를 진단할 때는 환자의 얼굴에 스쳐가는 아주 작은 표정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참고해야 한다. 흔히 이러한 관찰 과정에서 머리털 하나의 차이로 오진이 발생한다. 여기서는 물어볼 선생님도 없고 환자들을 보낼 전문의도 없거니와 의논할 의사들도 없다. 거기다가 우리 뒤에는 조그만 실수도 크게 떠벌릴 조선의 무당들이 도사리고 앉아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직업상 매우 고독함을 느꼈다. 이때 마음속 깊은 데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나를 진정시키고 격려했다. “너는 지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주님이 도와주시고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순간 나는 다시 자신을 찾았다.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조선에 온 첫 해에 어머니는 예순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조선에서 61회 생일은 대단히 특별한 날로 여겨 ‘환갑’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조선인 친구들은 그렇게 중요한 날을 아무 행사 없이 그냥 넘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잔치에는 손님들이 매우 많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그 동안 어머니가 남편과 딸이 묻힌 이 조선 땅에서 좌절감, 포기, 반대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성취한 어머니의 노력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사였고 뜨거운 그들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환갑잔치가 있은 지 2년 후 어머니는 그토록 꿈꿔왔던 조선여자의과대학을 설립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다. 이것은 최초로 조선에 세워진 여성을 위한 의학교로 우석대병원과 고려대학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첫 아이
크리스마스가 어느덧 눈앞에 다가왔다. 해산일이 가까워지자 나는 메리안에게 병원 일을 점점 줄여가도록 했다. 그런데 아기를 낳기 전 어느 날 밤 긴급 환자가 생겼다. 50킬로미터쯤 떨어진 동네의 장폐색증으로 누워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였다. 우리는 급히 왕진 준비를 하여 떠났다. 이윽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12센티미터나 되는 매우 탈색된 내장을 꺼냈다가 그걸 다시 뱃속의 제자리에 넣자 등잔을 들고 있던 두 조선인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사랑방으로 돌아오자 방안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을 때 얻는 새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리하여 또 하나의 전도 지역의 문이 열렸다. 환자가 회복되자 그곳 두 마을에서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해왔다. 우리들은 그 지역에도 정기적으로 의료 사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메리안의 출산은 잘 진행되었고 조선인들이 예견한 대로 아기는 사내아이였다. 부모 노릇이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무렵, 해주에는 전에 있었던 동학을 상기시키는 반외국, 반기독교 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과 학교에 대해 기회만 있으면 우리 선교회의 노력을 나쁘게 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하자 조선은 ‘은둔 왕국’에서 ‘허가 왕국’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것은 허가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중 위생 계몽과 교육을 위해 마을을 찾아다니며 강연회를 열려고 했는데 이 일을 못하게 하는 끝없는 방해에 부딪혔다. 이런 일들은 내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결핵 요양소를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 미국에서 메리 버버그라는 사람이 죽으면서 조선에 새 병원을 짓는데 쓰라고 유산을 남겼다는 유언 내용을 선교회에서 통지받은 적이 있는데, 유언자의 조건이 공중 위생 교육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로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들 중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공중 위생 집회를 가지려고 할 때마다 허가를 내주지 않고 항상 우리를 애타게 했던 바로 그 관리였다. 그를 괴롭힌 기침의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폐병이었다. 그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로 굳어졌다. 그는 곧 몸이 마르고 병색이 짙은 소년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외아들이었는데 그 아이는 병균이 폐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목의 내분비선까지 감염되어 있었다. “저 아이는 저한테는 금과도 같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는 흐느껴 울었다. “선생님, 그 기독교 신의 신통력을 제발 써주세요. 사람들은 이곳을 ‘구세병원’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네?”
이번 일은 그 관리와 아들의 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가 조선에서 결핵과 싸워 이기려면 이들이 치료를 받아 완쾌되어야 했다. 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우리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도의 응답을 많이 보아왔다. 나 자신도 경험상 기도의 힘을 절대로 믿었으며, 덧붙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각각 알맞은 지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 지성을 닦고 훈련시켜서 지혜롭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항력이 없고 말라서 가죽만 남은 그 소년을 성공적으로 치료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소년이 차츰 회복되자 우리는 햇볕을 조금씩 쬐게 처방했다. 이 일광욕은 목의 내분비선에 감염된 결핵을 매우 빠르게 녹였기 때문에 다들 경탄할 정도였다. 소년은 곧 체중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년의 아버지도 병세가 회복되었다. 어느 사이 소년은 병원의 귀염둥이로 등장했다.
하루는 닥터 김이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흥분한 모습으로 내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옛날 평양에서 선교 개척을 시작한 우리 부모들을 박해했던 행정관이 이 도시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가 왜 왔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곧 밝혀졌다. 장본인이 내 진찰실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의 특별 결핵 환자인 소년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들과 손자를 만나고 난 다음 그는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아마 나를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전에 내가 죽이려 했던 사람의 아들이오. 당신 부친의 조수였던 김창식도 내 손에 죽을 뻔 했었소. 그 감방에 들어갔다가 죽지 않고 살아나온 사람은 사실 김창식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기독교를 박해했던 우리들은 점점 세력을 잃은 반면 기독교인들은 매우 강해졌소. 우리 상식으로는, 이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에게 보복해야 할 차례요.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내 아들과 손자에게 베풀어 준 것과 같이, 사랑과 친절을 보여주었소. 나는 기독교인들을 존경하게 되었소.”
이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모두 기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와 그의 아들이 우리와 교회를 보호해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소년은 빠지지 않고 주일학교에 나왔으며,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환등기로 ‘예수의 생애’를 보여주는 집회에 참석했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기적들을 조선에 결핵 요양소를 세우려는 나의 꿈을 곧 실현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후 우리 아들 윌리엄과 많은 조선의 아기들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세례식이 진행되고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흰옷 정장을 입은 한 조선 사람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있는 저 백인 아기가 평범한 보통 아기가 아니라 하락(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을 중국 발음으로 표기한 조선 이름) 선생의 손자라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인생의 수렁에서 날 꺼내주신 분이 바로 하락 선생이었습니다. 나를 광명의 세계로 구해주신 분이 바로 하락 선생이었습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가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탄성만이 터져나올 뿐이었다.
식이 끝난 후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윌리엄은 언제나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이제 시작하려는 사업을 나의 아버지, 윌리엄의 할아버지가 축복해 주시는 것 같았다. 짧았지만 선교 사업에 일생을 바쳤던 아버지께서 내 갈 길을 다져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
그 이후 닥터 셔우드는 해주에 결핵 요양소를 열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 퇴치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1940년에 들어서자 일본 군부는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자유를 속박했다. 심지어 그를 스파이로 몰아 엉터리 재판을 하고 형까지 언도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을 떠나 인도로 의료 선교의 길을 떠났다. 훗날 그가 캐나다에서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양화진 아버지의 묘 옆에 안장되었고, 메리안도 5개월 뒤 그를 따라 양화진에 묻혔다.
***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닥터 셔우드는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 속에서 이런 글을 발견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머니의 영적인 고뇌가 끝나던 순간에 씌어진 일기였다.
남편이 내게 주었던 『살아 계신 그리스도』라는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고 표현한 성경 구절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에만도 이러한 표현이 서른 곳이나 된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선교사의 완전한 표본으로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위해 행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명은 너무나 크고 높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고는 부탁하시지 않는 분이다. 예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우리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라는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반복해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전에는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를 보내셨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나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 조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첫댓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조선 땅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그들의 믿음,열정, 헌신이 열매맺어 오늘의 한국 개신교가 있게 했음을 확신합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