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구교구 최초의 본당 칠곡군 왜관 신나무골성지
♧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번지. 경부고속도로 왜관 나들목에서 빠져 나오면 바로 국도 4번선과 연결되는데 우측으로 가면 왜관읍이고 좌측으로 가면 신동을 거쳐 대구로 간다. 대구 쪽으로 4㎞쯤 가면 길 오른쪽으로 경부선 연화역이 있고 경부고속도로 밑을 지나 1㎞ 남짓 거리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 신나무골 성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였던 신자촌.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자 이념적 도전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를 하였으며 이를 피해 모인 신자촌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중의 우련발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된다. 많은 신자들이 배교(背敎)·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 만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이 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곳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어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텔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최양업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가 신나무골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호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순회 사목를 하기 시작했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지역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신을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순교한 이선이의 묘이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이곳에서 살다가 한티로 피난가서 순교 당한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소를 한티로부터 이장하였다. 그러나 이선이의 장남 배도령(스테파노)의 묘는 찾지 못했다.
*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33년 세워진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른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한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교육 기관이었다. 신나무골 성지는 1894년 가실 본당 소속의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에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영남 지방의 천주교회 선교 요람 기념비를 세웠다. 대구 지역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 당시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전시관을 복원했으며, 로베르 신부의 흉상을 건립했다. 로베르 신부 흉상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로서 1877년 한국에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며 신학생을 모아 가르치던 한국명 김보록인 로베르 신부를 기리기 위한 흉상이다.
* 사제관은 로베르 신부가 대구 교구 첫 본당 신부로 발령 받고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지금은 신나무골 성지와 관련된 자료들의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명상의 집은 신나무골에서 피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로서 20~25명 정도의 인원이 숙박을 할 수 있다. 신나무골 학당은 현재 소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2.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 왜관 가실성당 (佳室 / 아름다운 집)
왜관 가실성당이 위치한 낙산리 일대의 천주교 복음전파는 1784년(한국 천주교 창립시기)으로 가늠되고 낙산리에 살았던 성섭이라고 불리는 한학자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유교 의식 및 제사의식과 배치됨으로써 유교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박해의 시작되고 1886년경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 한불수호조약(1886년)이 수립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하경조 신부(1894년 조선 파견)가 국내에 파견되어 1894년 6월 칠곡 지천 신나무골 거주하며 경북 북부지방의 전교활동을 하게되고 성당 물색을 하는 가운데 현 낙동강가에 가실 성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낙동강가 언덕위에 성당이 세워진 가장 큰 이유는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안동, 부산권역까지 전교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실성당은 1895년 본당 설립되었으며 대구 계산성당 이후 가장 오래된 대구대교구 성당으로 1924년 9월 신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현 성전 봉헌이 봉헌되었다. 설계는 프와넬 신부(전동성당도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한 때 피정성당(드망즈주교)로, 그리고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 성전 안의 사진은 2007년 사진)
본당 내 색유리화(예수님 일생)를 유심히 살펴보면 뜻 깊은 시간이 될 수 있다.
* 성모당 / 1995년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웠다고 한다
* 빛바랜 사진 한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