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태어 나던날 하늘은 온통 ′무지개빛′
"그는 5월 5일에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 지붕 위에 깨끗한 빛이 있어 긴무지개와도 같이 하늘로 맞닿았도다."
'열전'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을 덮어 세상은 무지개빛으로 빛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아이의 태어남을 간략하지만 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
놀랍지 아니한가? 반(反) 궁예적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삼국사기'가 이럴 정도라면 진실로 궁예의 탄생은 축복받은 그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저 말구유에서 예수가 탄생할 때 이를 축복하기 위해 동방박사에게 길을 안내한 '그의 별'의 찬란함처럼 그렇게 '깨끗한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경우 예수로의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보다는 왕건과 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뒤에 자세히 거론될 것이지만 고려 의종 때 사람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참조하고 또 '고려사'를 살피면, 왕건의 탄생설화엔 도선(道詵)이 등장하고 있다.
도선이 당나라에서 풍수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오던 중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을 만나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왕건이라 하십시오."라고 했다 한다. 요컨대 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당시 유행했던 도참사상에 의해 왕이 될 운명임을 암시하는 탄생설화라는 사실을 척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건의 탄생설화 속엔 특이한 자연현상 모티프는 담겨 있지 않다. 유명한 도참사상에 부회(附會)하기 위해 고승 도선을 등장시켰을 따름이다.
신라 초기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한 가운데에서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므로 열어 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는 식의 김알지 탄생설화에서 보이는 신이(神異)함이 빠져 있다.
또 고구려 동명성왕 탄생신화에서 보이는 '금와왕이 이상히 여겨 유화(柳花)를 방 속에 가두었더니 일광(日光)이 비추어 왔다. 그녀가 몸을 피함에 그리로 좇아와 비치며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다.'는 형식의 기이함도 없어졌다.
신화시대와 역사시대가 어느 정도 구분되는 때에 왕건이 태어났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는 전(前)시대 즉, 신화시대의 그것모양, 신화의 형식이 빠진 왕건과는 달리 유독 궁예의 탄생설화를 "지붕 위에 깨끗한 빛이 있어 긴 무지개와도 같이 하늘로 맞닿았도다." 하는 신비로움을 보이고 있으니, 아무리 깎아내려도 궁예 탄생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지 아니한가?
궁예 탄생설화는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족했다. 고려가 궁예에게서 정치성을 찾지 않게 하고자 했다면 더 이상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냥 환상으로 처리하기만 해도 좋았다.
'하늘에 상서로운 빛이 어리었도다.' 하고는 끝. 차라리 궁예 탄생을 신화적으로만 남겼어야지.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란 그 신화 생산의 시간을 지배한 정치적 동기들과 배경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신화라 하지 않던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신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신화의 모든 정치적 모티프들은 서사적 요소들로 대체되고,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면 비정치화된,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바뀌어 제시되는 이야기.
이것이 신화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롤랑 바르트가 "신화는 탈 정치화된 언술이다."라고 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의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져 환상에서 현실로, 하늘에서 땅으로, 상서로움에서 흉조로, 축복에서 혐오로, 비정치성에서 정치성으로 급전직하해 버리고 만다. 이 옹졸한 고려의 사실주의자들이여!
"이 때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나고, 나면서부터 이가났고, 또 한 이상한 빛이 나타났으므로 장래 나라에 불리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이를 기르지 않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 하자 왕은 이를 믿고 곧 중사(中使)에게 명령하여 그 집에 가서 이를 죽여 버리게 하니, 사자는 아이를 강보 속에서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져 버렸는데, 그 유비(乳婢)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얼른 받아 들었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이 그 눈에 들어가서 한 쪽 눈이 애꾸눈이 되었다."
양수(陽數)가 겹치는 5월 5일에 났다고 해서, 나면서부터 이가 났다고 하여, 그리고 '깨끗한 빛'을 '이상한 빛'이라 해석하면서 '장래 나라에 불리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아니한가? 일관이 지나치게 결정론적으로 평한 것이 아닌가?
모든 결정론은 항상 지나치다. 그러므로 아무리 '삼국사기'가 이렇게 기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궁예의 탄생을 '한 영웅의 탄생'이라고 해석하는 데에 무리 없음을 긍정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궁예의 탄생이 당시에 엄청난 정치적 무게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라는 말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왜 외가인가? 빈어(嬪御) 즉, 왕의 첩을 어머니로 하고도 궁내에서가 아니라 외가로 가서 탄생돼야 했을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주몽 탄생신화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아버지 하백(河伯)으로부터 쫓겨나 금와왕에게 의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궁예의 탄생설화는 영웅의 탄생설화의 보편적 형식과 닮아 있다.
'삼국사기'의 "유모가 궁예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온갖 괴로움을 겪으면서 궁예를 양육"했다는 부분이 이를 증거한다. 태어나고 버림받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뒤 비참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형식. 이런 영웅담과 궁예의 인생은 너무나도 비슷하다.
따라서 궁예의 탄생설화만을 살피건대 궁예는 한 시대의 고통을 짊어지고 홀로 걸어가야 할 위대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자들의 기술은 그러므로 영웅을 영웅답게 해 주는 역할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의 '후고구려기'는 노래한다. "신라 임금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더니 / 이가 두 겹이라 목소리도 겹쳐졌네 / 얼굴이 임금에 해롭다고 내쫓으니 / 중으로 행세하며 몰래 돌아다녔다네."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났다 했으니 궁예는 성장도 빠르고 기골이 장대했을 것이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찼겠는가. "목소리도 겹쳤다."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아직 역사에서 궁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의 사자후를 들으려면 시간을 좀 더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