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릉지』[徽陵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휘릉에 대해 기록한 책.
개설
『휘릉지(徽陵誌)』는 경기도 구리시의 구리 동구릉 경내에 있는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휘릉(徽陵)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장렬 왕후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이다. 현재 『휘릉지』는 1건이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이왕직(李王職)에서 원본을 등사하였거나 또는 이전 『휘릉지』를 참고하여 1910년경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
『휘릉지』의 저자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휘릉지』는 이왕직에서 간행한 것이다.
형태/서지
『휘릉지』는 1책 51장으로, 크기는 가로 19.9㎝, 세로 26.7㎝이다. 본문 한 면에 총 10행이 들어가나, 한 행에 기록된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다. 판심(版心)[접어서 양면으로 나눌 때 책장 가운데 접힌 곳]에는 상주 어미(上朱魚尾)가 그려져 있다. 권수제는 '휘릉지(徽陵誌)'이다.
구성/내용
『휘릉지』 권두에는 1769년(영조 45)에 영조가 내린 어제 칙유(御製勅諭)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능의 관리를 철저하게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휘릉지』가 본래 영조 연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어 장렬 왕후의 출생과 가례에 관한 간략한 기록, 왕비로 책봉될 때의 교명문(敎命文)과 옥책문(玉冊文), 장렬 왕후가 승하한 후 지은 지문(誌文), 시책문(謚冊文), 애책문(哀冊文) 등 장렬 왕후에 대한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휘릉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짧게 제시되었으며, 능의 유지를 위한 여러 지시 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수호군 물침 잡역 수교(守護軍勿侵雜役受敎)'는 능의 수호군에게 잡역을 시키지 말고 능의 유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다. 휘릉 유지를 위해 설정한 향탄산(香炭山)·위전(位田)·복호(復戶) 등에 대한 기록도 있다. 능에서 각종 행사나 의식을 진행할 때의 규칙이나 문서 양식도 상세히 열거하였다.
의의와 평가
『휘릉지』는 휘릉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휘릉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왕실에 있어서 왕릉의 중요성도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참고문헌
국립 문화재 연구소, 『역사의 숲, 조선 왕릉』(눌와, 2007)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http://lib.aks.ac.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장렬왕후[莊烈王后]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휘릉에 묻힌 조선 후기의 왕비.
개설
장렬왕후(莊烈王后)[1624~1688]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이다.
가계
장렬왕후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과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의 딸이다. 인조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두지 못하였다.
활동 사항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어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인조의 비(妃)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는데, 왕후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장렬왕후가 새로이 간택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효종이 사망하였을 때 효종에 대한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예송 논쟁이 일어났으며, 1674년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하자 또다시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다. 예송의 결과로 남인과 서인의 정권이 바뀌기도 하였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장렬왕후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의 휘릉(徽陵)이다. 인조와 인조의 원비 인열왕후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장릉(長陵)에 묻혀 있다. 1688년 장렬왕후가 사망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이 조성되었다. 1970년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장렬왕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한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화재청 조선 왕릉(http://royaltombs.cha.go.kr)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휘릉 신도비[徽陵神道碑]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휘릉의 신도비.
건립 연혁
휘릉 신도비(徽陵神道碑)는 1747년(영조 23)에 세워졌다. 『목릉 휘릉 혜릉 표석 영건청의궤(穆陵徽陵惠陵表石營建廳儀軌)』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따르면 1746년(영조 22) 11월 19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김한운(金翰運)이 경종(景宗)의 비 단의 왕후(端懿 王后)의 무덤인 혜릉(惠陵)에 표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영조는 혜릉과 함께 휘릉(徽陵) 등에도 표석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해 12월 1일 영건청의 설립을 시작으로 사업이 진행되어 이듬해인 1747년 3월 4일 건립이 마무리되었다.
형태·구성
휘릉 신도비는 화강암 재질의 가첨석(加檐石)[지붕돌]·농대석(籠臺石)[비석 받침돌]과 오석(烏石) 재질의 비신(碑身)으로 구성되었고, 전체 높이는 272.9㎝이며 폭은 184.5㎝이다. 가첨석은 높이 38.4㎝, 폭은 124.5㎝이며, 한옥의 지붕 모양으로 지붕 용마루의 내림마루[용마루에서 추녀마루를 잇는 부분]가 상당히 낮게 처리되었고 처마선은 수평에 가깝다. 비신의 높이는 158.5㎝이고 폭은 67.9㎝이며,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장렬왕후휘릉(朝鮮國 莊烈王后徽陵)'이라고 새겼는데 유척기(兪拓基)의 글씨이고, 장렬 왕후의 생몰일·책봉일·장례일 등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蔭記)는 여선군(麗善君) 이학(李壆)이 썼고 해서(楷書)로 새겼다. 농대석은 1단인데 높이는 76.0㎝이고 폭은 184.5㎝이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가치 및 의미
휘릉 신도비는 1682년(숙종 8)에 건립된 영릉(寧陵)[효종(孝宗)과 그의 비 인선 왕후(仁宣 王后)의 능]의 표석 이후 지속적으로 세워진 조선 왕실 능의 능표 중 하나이다. 능표의 양식은 점점 간략화되어 영조·정조(正祖) 시기에 확립되었는데, 휘릉 신도비는 정형화된 능표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목릉 휘릉 혜릉 표석 영건청의궤(穆陵徽陵惠陵表石營建廳儀軌)』
『영조실록(英祖實錄)』
『조선 왕릉 종합 학술 조사 보고서』Ⅴ(국립 문화재 연구소, 2013)
이민식, 「조선 시대 능묘비에 관한 연구」(한성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 전공 석사 학위 논문, 1997)
국립 중앙 박물관(http://www.museum.go.kr)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http://gsm.nricp.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휘릉[徽陵]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왕비릉. 사적.
내용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1688년(숙종 14) 64세로 죽었다. 휘릉은 숭릉(崇陵: 현종릉)보다 불과 4년 뒤에 조영하여 능석물(陵石物)의 제조 및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무석(武石)의 경우 목이 가슴에 파묻히고 눈과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괴이한 용모로 만들어져 있음이 다르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문화재대관』사적편 상(문화재관리국, 197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9-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