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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4-2회
덕치삼거리-노치마을-덕음산-수정봉-입망치-여원재-장도마을-방아치-고남산-통안재-권포마을
20220116
1.세 개의 역사적 사건이 있는 백두대간 길
백두대간을 다시 걷는다. 지난 번 1회의 웅석봉 산행은 엄밀하게 백두대간 산행이 아니고 이번 2회부터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다. 백두대간은 일반적으로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를 일컫는 것이니, 지리산 웅석봉 구간은 엄밀하게 백두대간에 속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 백두대간 생태교육 전시관 앞에 버스는 멈추었다.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덕치삼거리, 여기에서 백두대간에 들어서게 된다. 이 백두대간길을 경계로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와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로 행정구역이 나뉜다.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와 봉화산과 고남산, 수정봉을 거쳐 덕음산에 이른 백두대간은 노치마을로 내려와 지금 이곳 덕치삼거리 길로 이어져 고기리를 넘어 큰고리봉,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이번 구간은 백두대간 중 유일하게 마을길을 통과하는데, 노치마을-덕치삼거리-고기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백두대간이다.
4번째로 걷는 백두대간 길은 낯익은 길이면서도 새롭다. 날씨는 음산하고 바람이 불며 춥다. 노치마을과 그 뒤 당산목 푸르른 소나무, 덕음산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 이 낯익은 풍경이 음산한 날씨 속에서 가슴에 불을 지피면서 새로운 의지를 불태운다. 일행과 거리를 두고 노치마을로 들어가 맨 뒤에서 노치마을회관 옆의 느티나무와 목돌, 백두대간 조형물, 그 비석들을 혼자서 더 꼼꼼하게 살폈다. 노치마을을 돌아 명품 노치샘에서 물을 마시고 덕음산으로 오른다. 덕음산 입구 네 그루의 노치마을 당산목 소나무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당당한 기상을 푸르게 뿜어내고 있다.
이번 구간은 솔숲길을 끝없이 걸어가는 길이다. 울창한 소나무들은 우람하지 않지만 적당한 굵기로 높이 솟아서 솔숲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송뢰松籟)은 백두대간 산객들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해 준다. 그 솔숲에 숨은 역사의 비밀을 상상하며 길손은 쉬엄쉬엄 산길을 걸었다. 지리산 서북능선 바래봉에 하얗게 피어난 상고대 풍경과 그 뒤쪽으로 살짝 솟아 오른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하는 기쁨을 누리며 여원재에 이르면 세 개의 큰 역사적 사건이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고려말 우왕 때(1380년) 17세의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이 삼남 지방을 노략질했을 때, 꿈 속에 나타난 여인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 산신단에 제사를 올리고 황산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여원재 전설과 함께 적혀 있다. 꿈 속의 여인은 주막의 여인으로 왜구에게 무참히 죽은 여인이라고 하여 여인의 죽음을 진혼하는 사당을 세워 여원(女院)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원이 있는 고개, 여원재라 불린다"고 한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황산 아래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황산대첩비가 파괴되었다. 현재는 황산대첩비를 새로이 세우고 이전의 파괴된 황산대첩비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길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길이라고 한다.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 정보를 접한 선조 임금이 이순신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리지 않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4월 1일에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계급 없이 전쟁터에 임하라는 '백의종군'을 명하는데,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여 4월 24일부터 4월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게 되는데,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 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의 서부 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守城軍)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력 11월 중순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였다." 농민군이 백두대간 능선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성취하려던 혁명의 꿈이 조각조각 부서져 백두대간 능선에 흩어져 있는 듯하다.
2.산행 과정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 남원 백두대간 생태교육 전시관 앞에서 백두대간 덕치삼거리로 진행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과 그 위 높은 봉은 덕음산, 능선의 오른쪽 끝에 수정봉이 솟아 있다.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에서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백두대간으로 들어선다. 백두대간은 덕음산에서 노치마을로 내려와 오른쪽 구룡폭포길을 따라 이곳 덕치 삼거리에서 위쪽의 운봉로를 따라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로 이어져 큰고리봉으로 올라간다.
일제가 백두대간의 맥을 끊기 위해 박은 목돌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1910년부터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의 주요 길지 혈맥에 쇠말뚝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길을 내어 우리 민족정기의 기(氣)와 맥(脈)을 끊은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남원문화원에 따르면 ‘이 목돌 역시 일제가 백두대간의 맥을 끊기 위해 노치마을 앞들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0m의 방죽을 파 지맥을 끊었고 그 안에 목돌 3기(6개)를 설치했다.’고 한다.
노치마을 앞들은 덕음산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으로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목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이곳에 목돌을 설치, 숨통을 조이도록 했다.
목돌은 가로 120cm, 세로 95cm, 두께 40cm 크기로 반원을 이루며 두 개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조임석이 되는데 노치마을 앞들을 경지정리를 하던 중 땅 속에서 5개가 발견되었다. 그동안 가정집 정원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13년 제68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남원문화원이 목돌을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고 일제의 만행과 악행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표본으로 삼고 있다.
1.백두대간(白頭大幹)과 14정맥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길이 약 1,470km(남한지역 680km)의 산줄기로 나라 땅의 모든 물줄기를 서류와 동류로 갈라놓은 근골(筋骨)이다.
14정맥(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의함)
장백정맥(정간) (두류산~서수라)
청북정맥 (마대산~낭림산~마곶)
청남정맥 (마대산~낭림산~광량진)
해서정맥 (두류산~화개산~장산곶)
임진북예성남정맥 (두류산~화개산~진봉산)
한북정맥 (추가령~진봉산)
한남금북정맥 (속리산~칠현산)
한남정맥 (칠현산~문수산)
금북정맥 (칠현산~안흥진)
금남호남정맥 (영취산~주화산)
금남정맥 (주화산~조룡대)
호남정맥 (주화산~백운산)
낙동정맥 (매봉산~몰운대)
낙남정맥 (연신봉~분산)
2.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 마을
주천면 덕치리 노치(蘆峙) 마을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터 잡고, 이어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서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억새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노치(蘆峙)로 쓴다.
한국전쟁 때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전국에서 백두대간 능선이 유일하게 통과한다. 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다. 이 마을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은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의 지친 발걸음을 거두어 주는 따뜻함이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우리 국토의 등뼈와 같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 이곳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지나는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려 자행했던 대간·정간·정맥·기맥·지맥을 끊었던 대표적 사례, 그 현장이 바로 이 마을에 있다. 일제는 이 마을에 돌로 만든 석침(石針)을 묻고 숯을 묻어 뜸을 떠 지맥을 차단하여 불구의 몸을 만들었다. 일제가 묻은 석침은 1976년 주민들에 의해 뽑혀졌고, 숯을 묻어 뜸을 떴다는 곳은 지금도 웅덩이로 남아 그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통과지점이면서 중요한 혈맥의 시작과 끝이 되는 곳으로서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의 끝이 되고 다시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이러한 현장을 세상에 널리 알려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정립하고 백두대간의 중요성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남원문화원과 마을 주민이 뜻을 모아 여기에 백두대간과 산줄기를 형상화한 작은 조형물을 세웠다.
2003년 12월
남원문화원
노치마을 발전협의회
현재 노치샘은 원래 고려시대 절터로 고승이 도술로 판 샘이라고 한다. 바위에서 나오는 생수는 물맛이 뛰어나 염병(장티푸스) 같은 돌림병이 심하게 돌던 때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신기하게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고 전해오고 있다.
혹시 물을 쓰다 부족할 때에는 우물속의 달팽이 모양에서 물을 떠야 하는데 반드시 마을처녀가 물을 퍼올려야 할만큼 정하게 여겼다. 주산제 때는 정월 초하룻날 우물을 품고 새끼줄로 금줄을 쳐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해놓고 당산제 당일 이른 새벽 제사에 올릴 정안수를 뜨러 가면 산신인 호랑이가 샘 주위를 돌며 지키다가 제사가 시작되고 첫물을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셨다는 어르신들도 많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식수로, 또 병을 이기게 해주는 약수로, 신비로운 전설의 성수로 오늘도 백두대간을 찾는 탐방객이 한 모금 목을 축이며 쉬어가고 있다.
덕음산에서 주천면 덕치리의 노치마을과 주천면 고기리를 거쳐 큰고리봉으로 백두대간이 이어지고 있다.
노치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 속하는 마을로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회덕리와 노치리를 병합하면서 회덕과 노치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가 되었다.
노치마을은 덕음산, 지리산, 만복대 등의 산줄기의 높은 곳에 갈대가 많아 갈재라고 하다가 ‘갈대 노(蘆)’자를 사용하여 한자식 표기인 노치리가 되었다. 노치마을은 조선 전기에 경주 정씨와 경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는 수령 500년의 소나무가 위치하고 있어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대부분이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고 있다.
노치마을 인근의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 일원에는 남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전시관이 조성되어 2016년 4월 26일부터 개장하여 운영 중에 있다.
이 산봉은 마을 안내판에 덕음산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런데 왜 덕운봉이라 했을까?
청동기시대의 부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지석묘) 모양이 산 위에 있다. 자연석일까? 아니면 고인돌(지석묘)일까?
수정봉 정상표석과 수정봉 설명안내판 그리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수정봉(804.7m)은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계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이백에서는 650m의 높은 산이, 운봉읍 주촌리에서는 250m의 낮은 산이 된다.
수정봉은 입망치를 사이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하는데, 양지산성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 개의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성이 평면 형태는 표주박 형태를 이룬다.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석축 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이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은 남원시 운봉읍 엄계리, 오른쪽은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술말(酒馬), 주막에서는 말(馬)이 달리듯 술을 마셔야 한다?
바래봉 왼쪽의 산봉은 덕두산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석장승 운성대장군, 여원재 설명안내판, 동학혁명유적지 백두대간비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 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리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그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터에 임하라는 '백의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인 동선(動線)을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4월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 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이순신 장군의 고독한 발자취를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보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코스 안내
오수교차로 ▶ 2.5km 월평정류소 ▶ 2.7km 사매교차로 ▶ 1.5km 오리정휴게소 ▶ 2.6km 뒷밤재 ▶ 5.6km 축천교 ▶ 2.4km 동림교 ▶ 2.1km 월락삼거리 ▶ 5.0km 이백초등학교 ▶ 2.2km 양가저수지 ▶ 3.0km 여원재 ▶ 3.5km 운봉초등학교 ▶ 13.0km 주천 외평마을 ▶ 7.0km 밤재 ▶ 구례(남원 구간 53.1km)
여원치(여원재, 470m)는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상에는 여원치로 표기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연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 바로 아래는 여원치를 알리는 비석이 있으며, 고개 남쪽에는 국도24번 도로가 이백면과 운봉읍을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여원치는 백두대간 지리산 주능선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고개로, 지리산 고리봉으로 이어진다. 여원치 인근 산정부에서는 남원의 들판과 지리산 시루봉을 비롯한 산군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여원낙조라고 하여 운봉팔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기원전 삼한시대 마한의 별궁이 있었다는 전설, 그 궁터가 남아 있는 계곡, 정상의 주지봉 산신단에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 준다는 전설 등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 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11월 중순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운다.
2008. 11. 22.
남원시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가 황산전투에 임할 때 어느 노파가 꿈에 나타나 고남산 산신단에 올라 3일간 기도하고 출전하라고 알려 주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다. 이성계는 꿈 속의 노파가 고갯마루에서 주막을 운영하다가 왜구의 괴롭힘으로 자결한 주모였다고 믿고 노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여원(女院)'이라 불렀는데 그때부터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고개로서, 산줄기는 고남산과 수정봉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예부터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호남 지방 진격을 위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고개 서쪽에 고려 말기(1380년) 작품으로 보이는 마애불상(전북유형문화재 제162호)이 있는데 이성계가 지리산 여신이 꿈 속에서 가르쳐 준 대로 고남산에서 제사를 지낸 뒤, 운봉 황산(황산대첩비)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을 물리친 뒤, 그 보답으로 새겼다고 한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김개남이 남원성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1만명을 이끌고 여원재로 진격해 갔지만 운봉군수 이의경의 명을 받은 일목장군 박문달이 5천의 군사와 매복하고 있다가 동학농민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영남지방에 한 발도 들여 놓지 못했다.
서부지방산림청
고려 우왕 6년(1380년) 삼남 지방을 침략한 17세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이성계 장군이 물리친 역사적인 산, 그 아래에 조선왕조에서 황산대첩비를 세웠는데, 일제시대 일본이 황산대첩비를 파괴하였다. 현재는 그 위치에 새 황산대첩비와 파괴된 황산대첩비를 함께 세워 놓았다.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장동마을 왼쪽으로 돌아서 정면의 산줄기를 따라 진행한다. 힘이 들면 장동마을을 가로질러 정면의 능선으로 올라설 수 있다.
방아치 방향으로 진행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고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이다. 1894년(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담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공격하였다.
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했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이때 민보군은 방아산 산성의 성돌을 중요한 무기로 이용하였다.
2015. 10. 31
남원시·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정상표석은 정상에 있지 않고, 특이하게도 산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고남산(846.5m)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유치재~고남산~여원재를 통하는백두대간 상에 놓여 있다. 산 정상에는 무선중계소와 헬기장이 들어서 있다. 백두대간 주맥의 분수계로 고남산의 물줄기는 동쪽의 낙동강과 북서쪽의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산은 돔(dome) 형태로 중생대의 대보화강암인 조림질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치상 옛날부터 전쟁의 요충지로 고려말 1380년(우왕6)에 인월면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당도하여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산신제를 올리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왼쪽 봉화산 방향으로 진행. 황산이 운봉 지역의 요충지로 솟아 있다.
임도 아래쪽으로 따라가도 되지만 백두대간은 임도 위쪽에서 통안재-매요마을 숲길로 이어진다.
오늘의 백두대간 산행을 이곳에서 그치고 권포마을로 내려간다.
행정구역 : 전북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면적 : 2.6㎢
운봉읍에서 북쪽으로 4km, 여원치에서 동으로 3.7km, 고남산을 배경으로 권포제와 넓은 들로 펼쳐진 평화롭고 깨끗한 마을로 1960년대 인구가 1,000여 명에 달했으나 2001년 현재 80세대 237명(남118, 여119)이 거주하고 있으며 고려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천제단을 태조봉(고남산을 지칭)에 세워 전승을 기원할 때 동행한 정도전이 제왕봉(고남산을 지칭)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권포(權布)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때는 운봉군 서면에 속하고 서면청사가 본 마을에 있기도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남원시 운봉읍에 속한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에 닥칠 액을 예방하고자 세워진 4기의 석장승(남장승2, 여장승2)이 지금도 오가는 사람을 맞으며 횡액을 막아주고 있고, 석장승 2기(1523년 건립으로 추정)와 마을 앞뒤에 있는 거목의 느티나무는 유구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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