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했던 대무신왕은 불과 10살이 되던 해인 서기 13년 11월에 동부여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때 무휼은 적군을 산골 깊숙이 끌어들여 골짜기에 그들을 가두어놓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4년 11살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왕을 대신하여 국정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에 서거한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15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민란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신나라 정권에 실망한 백성들이 참다못해 일제히 반기를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둥 지방의 번숭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일으킨 녹림의 난이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팽창정책
다른 나라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속하여 영토나 세력 또는 상품 시장을 넓히려는 정책을 실시했다.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게는 영토 확장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나라 재건을 기치로 내세우고 신나라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였고, 2년 뒤인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다. 이처럼 중국 대륙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내부적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바깥으로는 왕이 몸소 전장에 나서서 꾸준히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서기 26년 10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킨다. 서기 28년 7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10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한나라의 요동군이 위나암을 향해 진격해오자, 고구려는 수성전으로 맞섰다. 하지만 요동군은 위나암성을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으며, 이에 고구려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요동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하였다. 을두지의 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고구려는 그 이후로도 계속 팽창정책을 실시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낙랑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인 호동왕자였다. 호동왕자는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의 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호동왕자는 살아 생전에 낙랑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서기 32년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의 계략에 걸린 그는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에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이에 후한에서는 낙랑 지역은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에게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후한은 서기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에 밀린 고구려는 낙랑을 후한에게 뺏기고 만다.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은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다.
윤용구씨, 평양 발굴 목간내용 첫 공개 - 한반도서 가장 오래된 인구조사 자료 - “중국인-조선인 따로 집계 민족의식 뚜렷” 한나라의 낙랑군이 북한의 평양지역이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 기원전 낙랑군의 인구, 호구 현황을 기록한 평양 출토 목간의 내용은 국내 학계에 민감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평양 부근의 낙랑 무덤 발굴현장을 찍은 사진이다. | ||||||||||
2000여년전의 이 통계 문서는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센서스 자료가 된다. 2005년 북한 평양 대동강 기슭 낙랑구역의 옛 유적에서 나온 나무쪽 문서(목간)를 판독한 결과 밝혀진 내용이다.
12일 낙랑사 연구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실장은 오는 14일 열리는 한국 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충남대)를 앞두고 이 목간 내용을 남한 학계에 처음 공개했다. 목간 내용은 지난해 입수한 북한 역사학자의 낙랑군 관련 논문에 포함된 것으로, 전체 내용과 수량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연대가 확실하고 출토 경위도 명확해 당대 낙랑군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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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실장이 주목한 것은 47년 뒤 중국 사서에 기록된 낙랑군 공식 인구와의 비교 검토 결과다. 그는 “47년 뒤 나온 기원후 2년 중국 한서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낙랑군 인구는 40여만명으로 호구수는 6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기간 사이 인구 증감을 계산해보면 연평균 증가율은 0.95%정도로 자연증가율보다 조금 높은 수치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이로써 당시 한군현 사회가 낙랑군에서도 비교적 평탄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현별 인구 통계가 중국인과 토착민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과, 통계 기록을 토대로 25개 현을 어떤 경위로 만들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윤 실장은 “고대 중국 행정구역에는 1만호를 기준으로 대현 소현을 나누는 등의 기본적 구분이 있었는데, 이 기록에는 같은 현 단위인데도 인구수의 편차가 매우 큰 점으로 미뤄 인위적 위계를 두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해석했다. 여러 추정이 가능하나 어쨌든 자연군집적인 부락 단위로 행정구역을 편제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정이다. 이는 낙랑군이 전대의 고조선 사회 구조를 해체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통치자들이 조선인 토착민들의 정서를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 목간 문서는 북한 학자의 논문에 소개된 내용만 확인되었을 뿐 목간의 모양이나 글자 모양, 전체 내용, 수량 등이 온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한편 북한이 90년대 발굴된 목간 중에서는 대나무쪽에 쓴 죽간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 실제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발굴 내용에 대한 보고서 발간은 물론 발굴 결과 내용을 그동안 공식적으로 공개한 바 없다. 현재 남북한 및 중국 학계에서는 낙랑군 위치를 놓고 대동강 유역권을 주장하는 기존 통설과 중국 요서지방 주재설을 주장하는 학설(북한)이 엇갈리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보도관련 사료:삼국사기 고구려 편]
-27년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具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
27년 9월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 땅을 쳤다.
그리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을 삼으니 살수 이남(已南)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자료]낙랑 유적, 유물에 대하여
이 고고학적 자료는 대동강 남쪽의 낙랑군 유물들로 낙랑군의 위치가 현 평안남도에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들입니다.
낙랑 무덤의 유물 변화-초기에는 북방계 유물의 비중이 높으나 점점 중국계 유물이 늘어나고 북방계 유물은 현저히 감소함.
정오동 31호 무덤 - 흥평 2년 (195년 후한 헌제)이 적힌 벽돌이 나옴.
신천군 봉황리 1호 무덤(왕경 무덤) - 벽에 정시 9년 (248년 위 제왕)이라 적혀 있음.
그외 나온 유물들을 판단할 때 벽돌 무덤은 2세기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 존재.
그러나 벽돌 명문 중에는 영화 9년 (353년 동진 목제)이 적힌 것도 있으므로 4세기 중반까지도 벽돌 무덤 형식이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함.
옻그릇 유물에서 초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왔다.
정오동 1호 무덤 - 시원 2년 蜀西工長 (BC 47 전한 원제 ),
원시 5년 蜀郡西工造 (5년 전한 평제)
정오동 6호 무덤 - 건무 5년 蜀郡西工造 (29년 후한 광무제)
석암리 204호 무덤 - 건무 20년 (44년)
석암리 201호 무덤 - 원시 4년 (4년 전한 평제), 거섭 3년 (8년 유자영)
양산대에서 나온 명문
정백동 2호 무덤 - 永始三年 (BC 14년 전한 성제)
석암리 200호 무덤 - 귀잔 : 원시 3년 (2년 전한 평제),
칠반 : 수화 원년 (BC 8년 전한 성제)
기타 다수... (다 적기 힘듬)
이것은 한나라 촉군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증거이고, 전한 시대 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함
1. 낙랑토성
현 북한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동. 낙랑군 치소로 여겨짐. 대동강 남안의 구릉지대 중 표고 58.8미터의 오봉산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대지. 대동강과 접하고 있음. 토성 남쪽에는 낙랑군 시기의 무덤 2,600여기가 분포.
낙랑토성의 규모는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터로 면적은 31만 제곱미터.
토성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낙랑군 설치시라는 견해와 동한 말, 진나라 초라는 견해가 대립 중
2. 낙랑토성 유물
1935-37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 조선고적연구회 주도로 총3회 발굴 조사 진행.
3. 다른 토성들
군현 지배를 위한 다수의 토성이 존재.
운성리 토성 -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 남쪽에 낙랑군 시기 고분 100여기 분포. 너비 8미터, 깊이 1.4미터의 해자. 1962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발굴조사.
성현리 토성 - 평남 운천군 성현리(현 용강군 해운면 갈성리). 동북쪽 480미터 지점에서 점제현 신사비 발견. 점제현 치소로 추정.
청산리 토성 - 황해도 신천군 청산리. 동서 490미터, 남북 200미터 규모. 인근 북부면 서호리에서 "大康4년 3월 昭明王長造"라는 명문전이 발견됨. 소명현 치소로 추정.
지탑리 토성 -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터 규모. 토성 주변에 낙랑군 시기 무덤 다수. 서북쪽 5킬로미터 지점에서 "대방태수 張撫夷"라는 명문전이 나옴. 대방군 치소로 추정.
소라리 토성 - 함남 영흥군 순영면 소라리(현 금야군 새동리). 동서 290미터, 남북 170미터 규모.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낙랑군 시기의 귀틀무덤 2기 발견.
4. 낙랑군의 무덤 양식
낙랑군의 무덤 양식은 시기에 따라 나무곽 무덤(목곽묘),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구분.
(1-1) 나무곽 무덤 - 나무곽 무덤은 토광묘의 한 종류다. 토광묘에는 나무관을 넣는 목관묘가 있고, 관의 외부에 곽을 짠 뒤에 관을 넣는 목곽묘가 있다. 곽을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목곽이라고 한다.
곽의 바닥은 3-5개의 나무판을 깐다. 곽의 네 벽은 2-3개의 나무판으로 만든다. 곽의 뚜껑은 곽의 너비보다 긴 나무판 12-14개로 만든다. 나무판의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
나무곽 무덤에는 3종류가 있다.
1) 나무곽만 있는 경우 - 나무곽 안에 나무관을 넣은 형태. 제일 많다.
2) 나무곽 안에 부장품 칸을 따로 만든 경우 - 제일 적다.
3) 나무곽 안에 안곽을 만든 경우
나무곽 안에 들어가는 나무관은 오늘날 관과 유사하다. 보통 2개의 나무판을 이용해 각 면을 구성한다.
부부 합장의 나무곽이 40여기 발굴되었다. (한 사람만 묻힌 것을 외곽, 두 사람이 묻힌 것을 쌍곽이라 한다.)
(1-2) 나무곽 무덤의 유물 중 주목
도장 - 夫租?君, 周古, ?留私印
방위관측기 - 월과 28수, 갑자 등이 새겨져 있음
(1-3) 나무곽 무덤의 연대
정백동 37호 무덤의 칠곽에 地節四年이라는 기년이 명기됨. 지절 4년은 BC 66년. 전한 선제 때임.
나무곽 무덤의 하한은 BC 1세기말로 봄.
나무곽 무덤의 상한에 대해 북한 사회과학원은 BC 4세기~ BC 2세기로 추정. 위만조선보다 이른 시기임.
나무곽 무덤은 일반적인 무덤 형식으로 요동 지방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음.
(2) 귀틀무덤
낙랑구역 안에서만 200여기가 발견된 낙랑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
귀틀이란 목재를 가로세로로 어긋나게 대서 井자 형태로 틀을 짠 뒤 그 위에 나무로 격벽을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귀틀 무덤은 이렇게 해서 부장품 칸을 따로 만든다.
기본적인 모양 형태는 이렇다.
┌─┬┐
│ ││
│ ││
├─┤│
└─┴┘
옻그릇 유물에서 초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왔다.
정오동 1호 무덤 - 시원 2년 蜀西工長 (BC 47 전한 원제 ), 원시 5년 蜀郡西工造 (5년 전한 평제)
정오동 6호 무덤 - 건무 5년 蜀郡西工造 (29년 후한 광무제)
석암리 204호 무덤 - 건무 20년 (44년)
석암리 201호 무덤 - 원시 4년 (4년 전한 평제), 거섭 3년 (8년 유자영)
양산대에서 나온 명문
정백동 2호 무덤 - 永始三年 (BC 14년 전한 성제)
석암리 200호 무덤 - 귀잔 : 원시 3년 (2년 전한 평제), 칠반 : 수화 원년 (BC 8년 전한 성제)
기타 다수... (다 적기 힘듬)
이것은 한나라 촉군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증거이고, 전한 시대 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함. 재야사가들은 낙랑구역의 무덤들이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공격하고 군현을 설치한 뒤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광무제가 살수 이남을 공격하여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은 건무 20년(44년)이다.
귀틀 무덤은 BC 1세기 말에서 AD 2세기 초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
정백동 7호 무덤과 191호 무덤에서 2세기 초 쓰여진 청동거울이 나왔기 때문임.
석암리 219호 무덤에서는 王根信印, 王野之印이 나옴.
(3) 벽돌무덤 (전축분)
벽돌무덤은 횡혈식 석실묘 등장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
궁륭식 천장과 연도(무덤으로 들어가는 길)를 가지고 있다.
낙랑 구역에만 1,000여 기가 있음.
신분이 낮은 사람이 묻힌 벽돌곽 무덤과 신분이 높은 사람이 묻힌 벽돌칸 무덤으로 나눠진다.
관이 있는 곳은 한칸, 두칸 짜리들이 있고 (칸은 방이라고 생각하면 됨) 칸에 따라 창고처럼 작은 ?칸이 붙어 있는 것들이 있다.
정오동 31호 무덤 - 흥평 2년 (195년 후한 헌제)이 적힌 벽돌이 나옴.
신천군 봉황리 1호 무덤(왕경 무덤) - 벽에 정시 9년 (248년 위 제왕)이라 적혀 있음.
그외 나온 유물들을 판단할 때 벽돌 무덤은 2세기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 존재.
그러나 벽돌 명문 중에는 영화 9년 (353년 동진 목제)이 적힌 것도 있으므로 4세기 중반까지도 벽돌 무덤 형식이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함.
(4) 낙랑 무덤의 유물 변화
초기에는 북방계 유물의 비중이 높으나 점점 중국계 유물이 늘어나고 북방계 유물은 현저히 감소함.
고대에는 문건을 나무함에 넣은 뒤 노끈으로 싸맸다. 그 노끈을 함부로 풀 수 없도록 진흙을 붙인 뒤 도장을 찍는다. 이 도장이 찍힌 진흙을 봉니라고 부른다. 관원들은 봉니를 찍기 위해 진흙을 넣은 통을 가지고 다녔다.
낙랑의 봉니는 매우 많이 발굴되었다. 너무 많이 나와서 일부는 위조품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재야사가들은 흔히 모든 봉니를 위조로 몰아부치는데 물론 그럴 수는 없다.
6. 점제현 신사비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 온천군 성현리)에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발견.
높이 130센티미터, 너비 109센티미터, 두께 21센티미터.
예서체 80여자 수록.
XXX년 4월 무오에 점제현장XX
X建丞屬國會X爲衆XX
神祀를 건립하고 비석을 새기노니
X평산군의 덕은 높은 산의 산신과 비견하고XX
점제현에 X佑하고 좋은 비바람을 일으키고 기름진 토지의 혜택을 내리시니
XX이 壽考하고 오곡이 풍성하며 도적이 들끓지 않고
XX蟄藏하고 길하고 이로움이 출입하여 모든 신의 빛을 받게 하나이다
7. 화폐
전한 반량전, 오수전.
왕망 화천, 대천오십.
8. 葬玉 - 무덤에 넣은 옥 塞玉 - 아홉 구멍을 막는 옥
. 입 - 含玉
. 항문, 코, 귀 - 부드러운 천에 옥을 싼 뒤 구멍을 막음
. 눈 - 나뭇잎 모양의 옥을 끈으로 연결하여 안경처럼 맴.
玉豚 - 손에 쥐어준다
璧 (원반 모양) - 가슴에 얹는다
9. 기타
띠걸이 - 바클
옥결 -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활깍지에서 장신구로 변함 (5센티미터 이하)
양모양의 패옥 - 양은 길상의 의미로 사용
금동 곰모양 상다리
나무 인형과 목마도 출토된 것이 있다.
구장수鳩杖首 - 한나라에서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새가 꽂힌 지팡이를 내려주었는데, 지팡이 끝의 새장식을 구장수라 함. 높이 5-10센티미터, 지름 13-17센티미터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