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대호파 두목 이상훈“나는 ‘사시미’의 원조였다” 부제목 : 한국의 최고의 싸움꾼시라소니에게 싸움 배운 보스 - - 전두환, 가난했지만 멋진 장군이었다
리드 '사시미'를 휘두르며 1970년대를 풍미했던 대호파 두목 이상훈(55). 해밀턴 호텔 사시미(회칼)난자 사건을 필두로 재판장을 인질로 한 법정 탈출, 교도소내 인질 난동, 극동호텔 사시미 사건. 모두 대호파 두목 이상훈이 일으킨 사건들이다. 이상훈은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 대도(大盜) 조세형과 서방파 두목 김태촌 등과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가 '코리안 마피아'라는 책으로 엮여 나오자 영풍문고 국내 소설부분 3위에 링크되는 등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소설 같은 삶을 그를 통해 직접 들어 보았다.
본문 영등포를 장악한 뒤 전국으로 그 악명을 떨친 대호파 두목 이상훈, 그는 이제 더 이상 대호파 두목이 아니다. 종로에서 귀금속 타운을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 중년의 사장님일 뿐이다. 하지만 '노는 물'이 달라도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 있다. 이 사장은 자신을 '건달'이라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정의와 의리에 죽고 사는 진정한 '건달 정신'만은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사장은 195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6·25 직전 월남한 이 사장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505방첩대 부산지부 대장을 지냈다. 이 사장은 여섯 살 때 부모님의 불화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그 유명한 주먹 스라소니(본명 이성순)와 한 집에서 살았다. 스라소니는 신의주가 고향이고, 이씨의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인데 두 사람이 의형제 사이였다. 그래서 스라소니를 큰아버지로 부르며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스라소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협객'의 그것을 익히게 됐고, 이것은 나중에 이 사장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주먹 세계로 이 사장이 주먹 세계로 빠지게 된 계기는 스라소니의 싸움을 목격한 데서 비롯된다. 그는 어린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라소니의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당시 민주당 용산지구당 청년조직국장인 그의 아버지가 용산 해방촌 동사무소 앞에서 민주당의 유세를 지지하던 도중 자유당 조직 깡패 20여 명에 의해 린치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장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깡패들의 몽둥이에 무참히 쓰러지자 이를 본 스라소니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이들을 격퇴했는데, 그 기술이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이 사장은“거리가 한 30m쯤 됐지만 순식간에 달려가 이마로 받고 발로 차는가 싶더니 20여 명의 장정을 10분도 안 돼서 모두 쓰러뜨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저런 싸움을 배워야겠다 했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깡패가 됐어요”라고 전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이 사장과 그 가족이 스라소니와 1년 반 동안 함께 생활할 때 스라소니로부터 본격적인 싸움 기술을 전수 받았다. 이 사장에 따르면 스라소니는 박치기가 장기였고 무릎치기, 관절치기, 발 걸어넘기기, 돌려차면서 이마로 받기 등의 기술에도 능했다. 이 때문에 그는 매일 남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새끼줄을 감아 놓고 이마로 받는 연습을 했다. 학교만 끝나면 500번이고 1,000번이고 박치기를 했다. 박치기 다음에는‘무릎치기’와 '급소 공격'을 연마했다. 이 사장은 "이런 기술을 한 3년 동안 배웠죠. 이 때부터는 누구와 싸워도 져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처럼 싸움을 익힌 덕분에 영등포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 보스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 사장은 1970년대 중반까지 영등포의 시장파 보스로 활동했다. 시장파가 대호파로 바뀐 것은 1976년 이후부터인데, 이 때부터 이 사장은 사실상 영등포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대호파의 보스자리에 등극한다.
이 사장의 '그때 그 사람들' 1970년대 당시는 암흑가에서 어느 정도 크면 유흥업소의 영업부장이나 연예부장을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당시는 이런 곳 외에는 마땅히 돈 나올 구멍이 없어 건달들이라면 으레 거치는 경로였다. 이씨도 20대가 되면서 큰 유흥업소의 연예부장으로 들어간다. 김포공항 가는 길에 있던 에어포트호텔 지배인이 바로 그곳. 이 사장은 여기서 전두환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가 전두환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무렵의 일이다. 에어포트호텔 맞은편에는 공수여단이 있었는데, 당시 전두환씨가 공수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 한 명이 군복을 입은 채 호텔로 찾아와 놀 만한 곳인지 살펴보고 갔다. 그는 이 사장에게 “저희 어른께서 놀러오면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그런데 저는 어른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곳에는 군인들도 많이 들락거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죠. 그분(전두환씨)은 늘 부관 한 명, 지역 헌병대장 등과 함께 왔습니다. 그러면 저는 구석 자리로 모시고 특별 대접을 해 줬습니다. 매너도 참 좋았고 아주 호탕했어요"라며 "전두환 장군은 저희 호텔에 오면 우리는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당시는 호스티스들을 들여보내 모시도록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때 소진인가, 수진인가 키가 큰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를 예뻐해 자주 찾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당시 그분의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였죠. 친밀감이 있어서 여러 차례 연희동을 찾았죠. 당시에는 이순자씨가 미장원을 할 때였는데, 전 장군은 군인으로 가난하게 살았죠. 찾아뵈서 인사도 올리고, 선물도 사서 아이들과 놀아주었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당시 제가 봤을 때는 군인으로서는 참 멋있었어요.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아요”라고 회고했다. 이 사장은 또 현재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돼 있는 김태촌과도 편지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김태촌은 편지에서 주로 신앙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는 “김태촌 씨와 부인 이영숙 씨를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하고 옥중 결혼한 두 사람 모두 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사회보호법 같은 악법이 폐지돼 김태촌씨 같은 사람들이 구제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어 "우리 사회는 김태촌씨 같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태촌이는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더 이상 보스 김태촌은 찾아 볼 수 없어요. 그야 말로 다 죽어 가는 사람에 불과 합니다"라고 강변하면서 "바깥 세상에서는 비망록이다 호남조직 재결성이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다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사장은 그 증거로 김씨가 그에게 보내온 편지들을 내 밀었다. 자필로 써 내려간 김씨의 편지에는 진심으로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생활에 정진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내가 이 편지를 공개해 김태촌씨의 진심을 알리고 싶어도 매스컴에서 이를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할까 우려돼 공개를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이지요" 이 말과 함께 이 사장 깊은 한숨과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이 사장은 "김태촌씨의 부인과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김태촌씨에게서 자주 편지가 오는데, 이런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제대로 읽지를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씨는 교도소 내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틈틈이 기도를 한다. "김태촌씨의 주도로 일부 재소자들은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모여 하루 한번씩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지 그 장면을 안보고 그 기도를 안 들어 본 사람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태어난 이상훈 신앙생활로 마음을 바로 잡은 이 사장은 출감 후인 1994년 3월24일 바로 사업자등록부터 냈다. 지금은 서울 종로·영등포 등에서 대형 보석 상가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지만 당시는 그야말로 맨주먹뿐이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길에 좌판을 벌여놓고 저가의 시계를 파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싼 자릿세와 값싼 중국제 시계에 밀려 좌판 장사는 이내 접고 만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것이 자동차 야광 특수안경 재고품을 파는 일이었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다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면 월 500만원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거듭나기를 계속했다. 이 사장은 "아무리 힘들어도 암흑시절 만났던 사람들과는 단 한사람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나려면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라고 전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열심히 발 품을 팔아 약간의 돈을 마련했고, 이 돈으로 중국으로부터 가발 수입사업을 시작해 대박을 터뜨렸다. 이 사장은 "내가 직접 고객들에게 가발을 일일 씌워 줘 가며 팔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니 일이 되더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부도를 맞는다. 하지만 이씨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보석 관련 사업에 다시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그는 돈이 얼마쯤 모이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1984년 10월에 청송교도소에서 죽은 박영두 사망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증빙자료를 만들어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 보내고, 함께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2001년 6월 박영두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음을 인정했다. 현재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주범이었던 허평길 교수가 대표를 맡고 있다. 지금 5·6공 피해자협의회 집행위원장직도 맡아 사회보호법 폐지, 삼청교육대 피해 보상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삼청교육대 피해 보상안은 이뤄냈고, 사회보호법 폐지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남북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굶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운동으로, 제 사업 수익금의 상당액을 거기에 쏟아 부을 예정이다. <윤지환 기자>
박스1 <제목> 이상훈씨 "조양은, 신상현씨 린치 한 적 없다"
당시 암흑가의 세력 구조는 복잡했다. 1976년 2월 명동 사보이 호텔 습격 사건이 나기 전 명동은 밤의 황제인 신상사파가 잡고 있었다. 또 전주에서 올라온 이승완(전 호국청년연합회 회장, 구속중) 씨가 이끄는 전북식구들이 명동에서 기반을 단단히 닦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전남 세력보다 전북 조직이 막강했다. 서울 시내 큰 나이트클럽 영업권은 대부분 전북 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전북 조직의 실질적 리더가 이승완 씨였고 행동대장 역할을 한 사람이 이씨의 친구인 이태문 씨였다. 이 사장은“신상사는 자유당 때부터 커 왔죠. 명동 위쪽에는 번개형님(박종석)이라고 있었는데, 퇴계로 쪽이 거점이었습니다. 1976년 양은이파의 보스인 조양은 씨에 의해 사보이 호텔 습격 사건이 일어나는데, 세간에 다르게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당시 신상사파의 보스인 상현이 형님의 아킬레스건을 양은이파가 끊었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 상현이 형님은 조양은 씨에게 린치 당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윤>
박스2 <제목> 이상훈씨가 말하는 "검찰다운 검찰들"은 누구?
1981년 1월 해밀턴 호텔 집단 난투극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날 신문과 TV에 대서특필됐다. 81년 6월5일자 신문을 보면 이상훈 등 흉악범 4명이 법정에서 교도관을 인질로 잡고 탈출했다는 보도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주인공이 바로 대호파 두목 이상훈이다. “1981년 6월5일 서울 남부지방법원 제1법정에서 재판 도중 준비해 간 칼로 재판관을 위협해 탈출했습니다. 칼 두 자루는 신발 밑창에 숨기고, 두 자루는 동생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오후 2시쯤 동생들과 함께 칼을 빼들었습니다. 탈옥은 성공했지요. 곧바로 복수를 위해 밀고자 조직이 운영하던 세탁소로 갔더니 벌써 다 도망쳤더군요. 제가 탈옥한 것을 알고 도피했던 것입니다.” 그 날 저녁은 종로경찰서 앞에 있던 창신 여관에서 묵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대로 경찰서 앞이 오히려 안전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나중에 종로경찰서장은 이 일로 문책당했다. 이 사장은 5일 동안의 고민 끝에 그는 자수를 결심한다. 그는 동생들에게 “연락하면 곧바로 들어 오라”는 말을 남기고 혈혈단신 대검찰청으로 향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곳은 대검 중수부로, 나중에 검찰총장까지 지난 김도언 검사가 중수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수위실에서 곧바로 중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이상훈이라는 사람인데 지금 대검 청사 수위실 앞에 와 있습니다. 제가 남자답게 왔으니 영감님도 남자답게 대해 주십시오. 지금 조용히 내려오십시오.” 김도언 중수부장은 깜짝 놀랐다. 김도언 부장은 “혼자 왔나? 알았네. 금방 내려가겠네”라며 수사관 한 명을 대동하고 내려왔다. 김부장은 수갑도 채우지 않은 채 이씨의 귀에 대고 “뒤로 올라가자”고 했다. 김 부장은 다른 탈주범들은 어디에 있는 지부터 물었다. 이씨는 “나는 영감님을 믿고 왔다, 나로 인해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김 부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사장도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하도록 지시함으로써 5일 간의 탈주극은 막을 내린다. 이 사장은 또 김원치 검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청송교도소에서 투쟁을 계속하다 1993년12월25일 출소했다. 그는 출소 며칠 후에 자신에게 구형했던 김원치(현재 변호사)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이상훈인데, 출감했습니다. 한번 뵙겠습니다.” 이 사장은 김원치 검사 역시 검사다웠다고 회고한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보복 당할까 두려웠을 텐데 김 검사는 “그래, 그럼 저녁이나 하지” 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울 반포에 있던 한 일식집에서 김 검사를 만났는데 당시‘한국일보’기자 한 명과 나왔다. 김 검사가 “고생 많았지? 나를 원망하지?”라고 물어 이씨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영감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폭력의 아수라장에 있었을 텐데 사람되어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윤>지훈 기자불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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