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1회 공간시낭독회 차례***
<시인의 산문.20>
신미균: 임종, 처절한 고독 -차옥혜시인의 시를 읽고
<상임시인>
상희구: 알약
서영미: 위대한 동맹 2
설태수: 시간의 층
성찬경: 열구지탕
손현숙: 나쁜 징조
신미균: 털 뽑으세요
안현미: 종
윤종대: 꽃샘추위
이경희: 봄비
이무원: 산은 산대로
이미산: 알파치노의 허수아비
이은경: 낯부엉이 우는 소리
이종성: 나뭇결은 귀가 얇지 않다
<초청시인>
권혁수: 들국화와 소주명 / 바다그림이 있는 지하철
이문연: 속도, 후사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 카두세우스 지팡이
<상임시인>
정겸: 참선중
정준영: 왕금마을버스
최영규: 복제에 대하여
홍사안: 봄
김동호: 수리산 18
김용길: 흙 속에서
김정미: 허공에 심다
문창길:
박무웅:
박해영: 사자이야기
박희진: 太極無極希望星歌
배인환: 비내리는 섬
편집후기:
일시; 2007년 3월28일 수요일 오후 6시
후원; 한국현대문학관, 서울시문화재단
<시인의 산문20>
임종, 처절한 고독
-차옥혜의‘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는 남성의 소변기를 화랑에 전시했다. 사람들은 그 하찮은 소변기가 무슨 작품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에서, 익숙해진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늘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변기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설치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살다보니 대단한 것들이 사람을 감동 시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돌이켜보면 더 큰 감동이 되어 돌아온다.
차옥혜 시인의 시는 오랫동안 곰삭아서 깊은 맛은 내거나, 발효되어 톡 쏘는 시는 아니다. 또한 깊은 좌절과 허무와 비애의 시도 아니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의 작품처럼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기 쉽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차시인은 1986년 민음사에서 ‘깊고 먼 그 이름??을 첫 출간한 이후부터 20여 년간 꾸준히,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자연에 대한 줄기찬 관심과 사랑을 갖고 시를 써왔으며, 그의 시에는 자유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어머니를 잊어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가 계셨던 병원, 오빠네 집, 노인정, 어머니가 다니셨던 길도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객관화 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차옥혜 시인의 시집 ‘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를 만났다. 나는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일년 넘게 참았던 감정을 주체 할 수가 없어 한참을, 아주 한 참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에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기만 하면
언제나 전화를 받던 어머니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전화 벨은 울리는데- 부분
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구절이다. 이것은 정말로 체험이 없으면 가슴에 진하게 전해지지 않는 구절이다. 나도 차 시인처럼 매일 아침 전화를 해 봤기 때문에 이 시가 더욱 내 가슴을 친다.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 했던 사람이 이제는 전화를 할 곳이 없어졌다는, 아니 전화를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은 대단하다. 이것은 그 상황을 똑 같이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늙은 어머니의 이삿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의 집에 불이 켜졌다
/중략/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 밖엔
불켜진 어머니의 집이
천개 만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 가고 있다
- 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 부분
며칠 전 뉴스에, 이십대 후반의 어머니가, 불 난 집에서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으나, 일곱 살 된 아들이 집안에 있는 것을 알고는, 아들을 구하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들과 함께 숨졌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상 어느 누가 나를 위해 불 속에 뛰어들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게 깊은데 자식들은 늙으면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도 꺼린다. 내리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어머니가 측은해서 같이 살다가도, 같이 살면 왜 그렇게 속 터지는 일이 많은지, 친정어머니 모시기가 시어머니 모시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를 외롭고 쓸쓸한 방에 혼자 계시게 하고 돌아서는 시인의 마음이 더 아프게 전해져온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잠자다가 거울을 보다가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아픈 가슴으로 말하네
꽃을 보다가 새소리를 듣다가
빨래를 개다가 별을 보다가
어머니 미안해요
시린 뼈로 말하네
- 슬픈 죄인 - 부분
친척 어들들이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잘하라고, 돌아가시고 나면 뵙고 싶어도 못 뵙는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설마, 뭐 그렇게 까지 보고 싶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무친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 찾아뵙기를 게을리 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어머니에게 잘못했던 일들만 생각나, 차 시인처럼 ??잘못했습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시가 나에게, 아니, 똑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 갈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서도
죽음의 입구 어머니의 처절한 외로운 싸움에
나는 함께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위태로운데
나는 밥 먹으러 나가고
눈을 붙이러간다
/ 중략/
이별의 순간이 바짝 다가왔는데도
나는 자꾸만 꾸뻑꾸뻑 졸고 눕고 싶다
- 임종, 처절한 고독- 부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잠을 자야한다. 이 얼마나 진솔한 표현인가, 여기에 어떤 미사여구가 필요하고, 어떤 시적 은유가 필요할 것인가, 깨끗하고 담백한 문장이 도리어 임종의 순간을 객관화 시켜서 혼자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고독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아무리 권세가 높은 제왕일지라도 죽을 때는 혼자이고, 누구도 그것을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그 처절한 고독의 순간이 어머니뿐만 아니고, 곧 우리에게도 다가온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한정된 지면 때문에, 차옥혜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중에서 제 2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상에는 어머니가 있는 사람과 어머니가 있었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 시집은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싱거울 수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셨거나 혹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시집이다.
알약
상 희 구
제약회사 중역으로 있는 윤정구 시인은 알고 있겠거니 하고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윤형, 페니실린 같은 주사액은 이로운 박테리아거나 이로운 바이러스 같은 것을 처음 버섯 같은 종균에서 추출한 뒤 차츰 배양하여 고 꼼지락거리는 생명 있는 벌레들이 나쁜 병균들을 마구 잡아먹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알약이나 가루약 같은 항생제 따위는 밀가루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한낱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만 보일 뿐인데 어떤 원리로 악성 세균들을 궤멸시키는 거죠 라고 했더니, 대답 왈, 아 그건 말이죠. 일종의 화학작용인데 말이죠, 아니 이렇게 해선 상형에겐 설명이 안 되겠군, 하면서 거듭 되뇌더니, 그건 쉽게 말하면 이런 원리에요, 왜 알약을 먹을 땐 반드시 물을 마시죠, 알약이나 가루약을 입 속에다 털어 넣고 물을 마시면 순간, 기절한 상태로 있던 조그만 바이러스들이 물 속으로 순식간에 마치 물고기처럼 살아 헤엄쳐나와 꼼지락거리면서 그 나쁜 놈들을 마구 잡아먹어 버리겠죠, 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동맹 2
- 사막의 혀
서영미
나와 사막은 오랜 동맹관계를 약속했다.
방대한 구역과 모래 군사를 겸비한 사막은 나에게 많은 작전정보와 보급품을 지급 했고 나는 선인장처럼 뿌리내리며 건조한 그를 모방했다.
하지만 오랜 건기는 사막을 비겁하게 만들었다.
오아시스와 타협하여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목격한,
나의 말랑말랑하던 몸에는 가시가 돋았다.
동맹관계의 혀와 사막지도와 낙타의 수와 나약한 지도자에 대해 함문할 것을 약속하며
낙타를 버리고 맨발로 사막의 국경지역을 걸어 나온다.
위험한 동맹국이 되어버린 사막은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달콤한 채찍으로,
나의 혀를 사막으로 몰았다.
나는 사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등 돌려 나오는 사막기지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찬 사막바람에 낙타의 똥냄새가 막사를 흔들어 놓았다.
이명처럼 들리는 사막의 바람소리와
낙타의 똥이 오아시스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두려울 뿐,
내가 버린 것은 사막이 아니었다.
시간의 층
설 태 수
흘러가던 시간이 강에 얼어있다.
얼어버린 강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도
강을 보며 상념에 잠길 수 있는 것도
그 상념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것도
겹겹의 양파껍질 같은 시간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의 층에 긴 대롱을 쿡 찔러 넣어
즙을 빨아본다면, 어떤 맛이 날까?
양파처럼 매울까.
바람처럼 덤덤할까.
눈물처럼 짭짤할까.
소태처럼 쓸지도 모르지.
苦生, 苦海 같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단맛은 아닐 것 같애.
아니면, 無맛.
맛 너머의 맛.
들끓는 맛일까.
차거운 맛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悅口之湯)
성 찬경
한 열흘 아내가 피정(避靜) 가 있는 동안
나는 부엌 주인이다. 전권을 행사한다.
절대자유 실험가다. 요리왕이다.
요리의 근본원리를 완전 터득한다.
요리는 세 가지다. 날 요리 발효 요리 불에 댄 요리.
끓이는 요리는 물과 불의 합작이다.
다 나오라 냉장고 깊은 곳 해묵은 것들.
버섯 당근 은행 마늘 고추 꾸미 닭다리.
부글부글 끓인다. 전기냄비가 나의 여의주다.
셀러리만은 날로 먹는다. 절대 끓여서는 안 된다.
간은 새우젓으로 한다. 짜면 물을 붓는다.
뭍 바다 하늘 맛이 얼싸안고 춤을 춘다.
태초에 맛이 있었다.
열구지탕 아닌가.
나쁜 징조
손현숙
산길 걷다보면 발아래 툭, 걸리는 것
상수리나무, 팥배나무, 층층나무, 마가목
뿌리들이
땅속에서 엉망으로 얽혀 있다
부드러운 흙 속에서 저들이 한 짓이라고는
손 한번 슬쩍 잡아보다
입술 한번 살짝 대보다
다리 한번 챙, 감아보다
지극한 순간이라 여겨지는 그때에
그만, 마음이 마음으로 흘러갔을 뿐인데
끼리끼리 간절하게 뿌리를 섞었으면
너 반, 나 반, 반반씩 쏙 빼닮은
우리들의 아이가 세상 밖에서 응앙! 응앙!
주먹 쥐고 우렁차게 울음 울어야 하겠지만
나, 그런 세상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지지고 볶았으면 볶은 대로 꽃핀 이야기 따위
누구나 시치미 똑, 잡아떼고
상수리나무 위에 상수리 열매 맺고
소나무는 송화 가루 폭염처럼 자욱하다
등 뒤에 집을 두고 몇 발짝 걸어본 사람은 안다
섞이면 섞일수록
제 밑둥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처럼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것은 아닐까,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집은 생각보다 선명한 환상이다
털 뽑으세요
신미균
12개의 회전 집게가 초당 365번 회전하여
원하는 부위의 털을 뽑아 드립니다
아직도 쓸 데 없는 털이 많으시다구요
빨갛거나 하얗게 탈색된 털
꼬불꼬불하거나 억센 털
나지 않아야 되는데 난 털 때문에
고민하신다구요
팔 다리 가슴 어느 부위나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강력한 수축작용을 통해
모근까지 제거시켜 드립니다
더운물 샤워 후 사용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털 제거 후에도 통증은 거의 없습니다
양심까지도
말끔해집니다
꽃샘추위
윤 종 대
떠나면서
마지막 긴 꼬리를 휘두르네
남김없이 난분분 분가루를 털어내네
백선이 은방울이 미치광이 화들짝 놀라
붉은 뾰루지가 돋아나네
가는 꼬리 붙잡느라 팔이 늘어지다가
열꽃을 피워 올리며 허둥대다가
눈물을 쏟으며 손을 흔들겠지
나를 깨우지마
손은 절대 흔들지 않아
겨울은 다시 돌아오기나 하지
봄 비
이 경 희
뉘라서
한 응어리
껴안지 않은 이
있으랴
겨우내
덮어 둔
마늘 쪽에
새 움이 튼다
종일토록
소리없이
창 밖을 서성이는 이
하늘도
땅도
어지러이
아른아른
속절없이
꽃망울은
벙글고
그리운
아버지
산은 산대로
이무원
고향은 고향대로
산모롱이엔 여전히 그리움 숨어 있고
길을 지키던 소나무는
허리를 꼰 그대로
내가 왔다
소리쳐도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내가 간다
악을 써도
구름은 구름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무거운 침묵
쌓아올리는 무덤가
훈장처럼 피어 있는
노란 꽃
꽃은 꽃대로
*알파치노의 허수아비
이미산
자다 깨어나 달빛에게 묻는다
그곳은 마땅히 가야할 마지막 지점일까
스무 살에 떠나온 그곳은 변함없겠지 내 여자도 얼굴도 모르는 내 아이도 나를 기다리겠지 나의 유일한 그곳이므로
새떼는 비웃듯 내 머리 위로 찌익 똥을 갈기며 날아가곤 하지만
담배연기 깊숙이 들이밀어 오래된 시간들 만져본다 기다릴거야
그렇다 아니다 쓰레기더미에 핀 민들레꽃이 잠에 취해 중얼거린다
그곳은 욕설의 골목을 오래 어슬렁거린 후에야 나타난다
노숙의 지친 그림자가 뿌리내려 싹을 틔우는 곳, 마지막 꽃대를 밀어 올리는 쓸쓸한 설렘이 있는 곳,
터닝 포인트는 낯선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곳을 갖게 된 자는 마지막 남은 성냥 개피로 낯선 사내에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푸른 달빛의 밤이면 미치도록 그곳이 궁금하다
질문은 이어져 그곳에 관한 진실과 허구의 이분법이 팽팽하게 과거를 물어뜯는다 비쩍 마른 몸뚱이를 푸른 달빛에 보란 듯 걸어놓는다 생을 통째로 난도질하며 달빛 속을 뛰어 다닌다
다시 달빛에게 묻는다 너는 모든 잠 못 드는 방안까지 들락거릴 테니까
불면의 틈새마다 내려앉는 동아줄처럼 그곳은 잠든 아이 곁에서 이 적막한 달빛을 보고 있을 테니까
그곳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다 아니다 그렇다 아니다......
중얼거림이 토사물처럼 흩어진다
달빛은 무섭게 타올라 사내는 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른 하루를 시작한다
그곳이여 오늘도 안녕하시길
부디 내 생의 가장 마땅한 지점이길
* 진 해크만,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scarecrow
낮 부엉이 우는 소리
이 은경
어느덧,
아름다운 것들로 배고픈 시절이 옵니다
굴뚝에 피어오르던 저녁연기처럼
조팝나무 환하게 피던, 소금계곡
돌 속에 집을 짓던 가재처럼
뒷산 부엉이 울음소리
이대로 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요
때로 내 목소리, 내 속으로 울어
오래 베란다 문 닫을 수 없게 만들던
그 부엉이 울음소리 뚝 끊긴 지 오래입니다
마룻바닥에 가만히 귀를 대고 누운 저물녘
귓속으로 차오르는 참나무 고목 우듬지에
빈 둥지 하나를 올려놓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것들은
반딧불처럼 점점 사라지고
무엇 때문인지조차 모르는 채 이다지도 사무치는 저녁
사라져 더 아름다워지는 텅 빈 길목으로
소낙비처럼 천둥처럼 허기가 몰려오는 저녁이 옵니다
나뭇결은 귀가 얇지 않다
이종성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이들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자르락자르락 서성이는 걸음을 어르며 기다려주다가는 마침내
꺼내놓는 말들을 한 줄 한 줄 적어가기 시작한다.
느릿느릿하다가도 격랑이 일 때마다 제각각 모양과 색깔이 다른
문장들 페이지를 채우고 이내 깊은 속으로 넘겨진다.
포말포말 하얗게 부서지며 소금으로 녹아 가라앉는
것들 헤아려볼 뿐, 무엇이냐고? 묻지 마라.
바다가 깊고 푸른 것은 저렇게 걸어온 길을 등지고
풀어놓는 생의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수심을 모르랴.
지금, 한 생이 지고 온 모래가 흘러내린 백사장
제 무게로 눌린 발자국마저 거두어 물결 돌아가고 있다.
내게도 큰 바다가 다녀간 하루가 있다.
<초대시인>
들국화와 소주병
권 혁 수
지하철엔 10월이 없다
들국화 피지 않으니
건초더미 위에 높이 한 다발 올려
황소처럼 실어 나르던
아버지의 청춘
이 빠진 물항아리에 가득 담겨
넘치고
소주병에도 몇 가지 꽂혀
흩날리던 꽃향기
소주에 취해
향기롭던 아버지의 땀내를
종로 3가
지하철역
빈 소주병에서 찾다
바다그림이 있는 지하철꽃집
여자는 하루 종일
그림 속 금빛 모래톱 위에 누워
붉은 암벽의 해안을
거즈로 하얗게 닦는 파도를
바라본다
하얀 안개꽃과 검은 장미
노란 프리지아를 한 다발 씩 건넨다
지하철을 타고
바다로 떠나는 그들처럼
한 송이씩 비어 가는 꽃,
바다를 그리며
지하철 차창에 비친 얼굴처럼
하루 종일 남아
뿌리 없이 시들어가는 꽃들과 함께
지하철꽃집 여자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
오색리본을 가위질 한다
권 혁 수 (약력)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1981년)
계간 <미네르바> 천료(2002년봄)
우리시진흥회(우이시) 회원
카두세우스*지팡이
이 문 연
지구의 귀퉁이를 너무 두드리는 건 아닐까
건성으로 성의 없이 두드린 게야
그러니 아파트 벽 카오스에 금이 가고
사유의 각질에서 피고름이 묻어 나오는 게지
엠덴해연에서 긴수염고래가 긴급 타전을 하건
에베레스트 봉에서 눈사태가 발생하건
발칸반도가 화염에 싸이건
내 지팡이가 너무 민감한 건 아닐까
게놈, 지놈 하면서 기어오르는 통에
약이 치밀은 건 아닐까
그래도 사이비, 도그마가 통하던 시절에는
늘 마지막 고해성사
처음이 끝인 양 찬송가 들려오고
교회의 첨탑에 눈이 소복이 쌓이더니
이젠 너 나 할 것 없이
구름을 몰고 오존층을 뚫고 올라오는 통에
지팡이의 약발이 떨어진 게 틀림없어
아니면, 내가 잘못 꺼내든 지팡이 일꺼야
저 피묻은 나무의 성채로 기어오른 것 좀 봐
바람이 구름을 베어 물고 회오리로 올라오기 전에
지구의(儀) 등고선에 깃발 나부끼게 해야 해
들판에 코스모스 다 지기 전
마파람에도 눈물이 핑 도는
*전령의 神 헤르메스가 갖고 다니며, 평화와 보호를 상징함
속도, 후사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이 문 연
길 위에 시간들이 흩날리고 있다 바삐 달려온 아스팔트 위,머뭇머뭇
굴절된 시간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점점 멀어지는 대지의 공간 속으로
물비린내 싸릿한 한밤의 섹스와, 뜨거운 여름날 한철 메뚜기의 치기와,
밤새 열정으로 걸어두었던 밤하늘의 카시오페아
길 위로 시간들이 쓰러지고 있다 제어될지 모르는 질주의 속도는 이
미3000 rpm, 밟는 엑세레이타에 비례하여 숫자가 오른다는 것은 불안하
다는 것과 불안하다는 것은 이미 놓친 시간의 공허, 늦 철난 깃동잠자
리와 영생을 좆는 파라오와 시간을 비웃는 피라미드와
길 위로 기억들이 지워지고 있다 그 긴 허무를 줄이기 위해 시위 떠
난 화살, 이미 쏜 화살촉에 실려가는 것은 내 두개골의 사유에서 짜낸
기름같은 한 줄의 詩와, 취한 듯 붉은 생채기를 만져주는 눈빛 총롱한
하늘과, 달디단 과일의 살을 파고드는 상처난 내 자존심의 흔적마저
약력: 2003년 시와세계 등단
참선 중
정겸
서울역 지하통로에서 사십대 남자가
가부좌상으로 벽면을 향해 앉아 있다
굳게 다물고 있는 입 언저리에서
부도 난 화두話頭들이 폐기되고 있다
깔고 있는 일간지 경제면에는
통제 선을 이탈한 화살들이
일제히 날아가고 있다
운수대통 돗자리 점집을 지나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행운의 복권집마저 빗나가 버렸다
목표물은 보이질 않고
그가 즐겨 다녔던 9번 출구*에서
벽을 뚫지 못한 화살들이 꺾여 있었지만
원인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씩 동전의 낙하 음이
귓불을 잡아 다니고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자국 소리가
죽비소리처럼 따갑다
반쯤 감았던 눈이 또렷해 진다
갈라진 벽 틈으로
푸른 이끼들이 피어나고 있다
지하도안은 잠시 정전 중이다.
*9번 출구: 대우빌딩쪽 출구
왕금 마을버스
정준영
좁은 갓길에 오토바이가 세워졌다
그 뒤로 봉고차가 주차했다
봉고차 뒤로 들어선 마을버스가 길에 꽉 끼었다
버스기사가 봉고차 주인을 찾아 욕을 했다
봉고차 주인이 오토바이 주인을 한참 찾아 욕을 했다
버스에 탄 아주머니들은 붉은 입술을 창밖으로 던지며
욕을 했다
가장 많은 적을 둔
오토바이 주인은 오토바이를 받쳐두었던
쇠파이프를 허공중에 휘둘렀다
오토바이가 길을 비켰다
봉고차가 길을 비켰다
마을버스가 문을 닫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좀 전까지 성을 내던 아주머니들이
깔깔 웃었다
잘 여문 율무알들이
버스 바닥에 떽떼굴 굴렀다
복제에 대하여1
최 영 규
요즘 아이들은 수십 가지의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며 다닌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진잔트로푸스,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북경원인.......
나는 화석인류의 이름 몇 개를 적어본다
언뜻 실재의 그들을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과 직접 대화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도 텔레비젼 같은 것에 출연해
자신들의 삶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백과사전의 작은 그림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들
그러나 나의 편견이나 혹은
빠른 속도의 상상력이 그들을 납작한
책갈피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를 부여한다
실재의 그들을 한번 만나고 싶다
눈빛과 음성을
그들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다
마주치고 싶다
소리내어 불러 본다
“호모에렉투스!”
누군가가 내 옆에서 묻는다
“저요?”
봄
홍사안
창가에 휘날리는
눈부신 깃털
혼곤한 잠을
흔들어 깨우며
밀려들어도
이 적막한 봄날
제물로 피고 지는
꽃 이파리 하나
인력으로 할 수 있으랴
분주한 한낮
귀먹고 눈멀어도
어딘가
숲 속에 숨어 있을
뻐꾸기 저 혼자서 울 듯
사랑한다는 것은
실핏줄을 타고
얼얼하게 번져오는
슬픔일 줄이야.
수리산 18
(봄바람) 김동호
묘향 아파트에서 상연사로 가는
길은 차도도 있고 오솔길도 있고
새로 닦은 산책로도 있지만 구태여
길 아닌 길로 가는 것은 봄바람이다
공연히 심란해 마음이 들떠
마른 풀포기 툭툭 건들며 부서진 낙엽
탁탁 차며 거슬렁 어슬렁 오르다가
부풀어 오른 흙-둔덕 갈라진 틈을 보면
발길 멈추고 오래 바라본다. “녀석들도
이제 일어날 때 되었는데” 중얼대며
잠시 후 낡은 갈잎 방석위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조금 전에 보았던 흙 둔덕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한가운데 약간
벌어진 틈 사이로 무엇이 보였던 것 같다
갑자기 밑이 편치 않다. 지금 내 밑엔
나를 올려다보는 자 있지 않을까
혀를 날름대며 눈을 껌벅이며 신기한 듯
나의 그 곳을 호기 찬 눈으로 올려다보는
자 있지 않을까. 그 호기심 아직은
이빨도 없고 독도 없고 그저 봄바람
봄바람 같은 것이겠지만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앉았던 자리를
힘껏 걷어찬다. 아무것도 없다. 허-
허공이 웃는다
흙 속에서
김용길
흙 속에 누워 본적이 있는가?
아주 흙에 덮여서
천천히 숨을 멈추어 본적이 있는가?
그를 하관하는 날
삽으로 흙을 퍼 넣으며
나도 따라 들어가 누웠다
그는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눈물에게로 가서 닿았다
우리는 눈물과 눈물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었다
차츰 눈물이 불어서 내 몸이 떠올랐다
둥둥 떠올라서 나는 무덤 밖으로 밀려나왔다
나는 콧구멍에 가득한 흙을 털어내고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깊고 깊은 저 나락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고
나는 바람 속으로 걸어나왔다
허공에 심다
김정미
가슴은 텅 비고 머리는 잡념으로 가득 찰 때, 나는 바닥에 머리를 대고 벽에 기대어 거꾸로 선다. 정수리 부근으로 터질 듯 혈류가 쏟아진다. 얼굴은 붉은
시한폭탄처럼 부풀어 폭발의 순간을 기다린다. 무의식 저 밑바닥에 포복한 힘
이 곁가지를 들썩인다. 역류된 핏방울이 닿아 간지러운 봉오리 부끄럽게 맺
힌다. 담쟁이넝쿨처럼 벽에 달라붙은 몸뚱이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손사래를
치며 한 그루 물구나무 뿌리를 내린다.
한 번도 이 자리를 떠나본 적 없는 나무다.
내 의지로는 이파리 하나 뒤집어 본 적이 없는 나무다.
허공을 날던 새가 앉으면 새보다 허공이 무거운 나무다.
딱 두 번, 주먹만한 열매를 매달고는 여태 불임인 나무다.
쓰러져 누운 그대로 다리가 되는 거목을 보며 생각한다.
내 한 몸 바닥에 누이면 팔 다리를 흔들며 우는 바람이 되려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우는 몸이 전부 울음통인 바람.
유효기간을 모르는 욕망이 배꼽 아래서 발효되고 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이 잦아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머리는 텅 비고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찰
물구나무가 될 때까지
사자 이야기
박해영
사람은 저마다 사자를 한 마리씩 품고 산다고 했다.
한데 나는 동물원에 가서도 사자의 울움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왕이면 숫사자면 좋겠다. 나는 수컷이고 그 아름다운 갈기
참, 내 속에 있다는 사자는 언질을 주는지 모르겠다.
산천초목 울리던 목청으로
쩌렁쩌렁 포효하면
아파트 관리실 아저씨 난리 날 텐데
사무실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차장이고 부장이고 벌벌 떨면
당장 쫓겨날 텐데
사람마다 사자를 품고 산다는 말을 듣고부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숨을 쉰다.
나는.
太極無極希望星歌
박희진
미·러·중·일 4국이 분단국가인
이 나라 둘러싸고 북 치고 장고 친다。
자기네도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세계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은
한국밖에 없다면서 북 치고 장고 친다。
청색은 적색 꼬릴 적색은 청색 꼬릴
물고 늘어지며 돌라 한다。
돌고 돌아 무섭게 가속도를 내다 보면
두 빛깔은 하나의 빛깔 된다。
마침내 통일 이룬 대한민국 거듭 난다。
태극은 무극되고 무극에서 별이 뜬다。
시공을 넘나드는 무소불능 빛덩어리,
세계의 온갖 협잡을 몰아내고
분열과 싸움의 상처를 치유하는
새 별 우러르며 세계는 환호하리。
開天節頌歌
아아 開天節 태극기와 무궁화 뜻도 깊어라
요즘 무궁화 나날이 예뻐지고 티 하나 없네
보라 태극기 국기일뿐 아니라 宇宙旗임을
우리 다함께 춤추며 찬미하세 금수강산을
지구 淨化는 세계의 중심부인 한국서부터
太極旗 찬미
우주의 원리 태극기 볼 적마다 정신이 반짝
태극 모습을 국기로 삼은 나라 오직 한국뿐
비 내리는 섬
배인환
비가 내린다
섬에 비 내린다
비 내리는 섬이 보고싶다
끝없이 비가 내린다
그래서 황홀하게
황홀하게 섬을 본다
하늘이 울고
번개치고
강풍이 사납다
파도는 제 세상이다
낙수물 소리가 들린다
실로 오래만에 들어보는
심장이 뛰는 소리이다
걸어서 섬을 일주한다
비 내리는 섬을
걸어서 본다
섬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개의
랜즈에 의해 조절된다
그래도 비가 내려
섬은 오랫만에 머리를 감고있다.
비누 냄새가 확 풍긴다
여자냄새가 난다
비가 내려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편집후기>
* 시인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어느 시인이 외할머니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머니도 그리움의 대상이냐고..., 시인은 또 깜짝 놀라면서 할머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곁에서는 왜 어머니는 모두 따뜻한 모습으로만 그려져야 하는 것이냐고, 자신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상처만 남긴 어머니라고, 핏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여러 가지의 그림을 그리고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 저 각각의 그림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는 것이겠지요. 아픔은 아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시간은 시간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를 잘 운반해 줄 것 입니다.
* 3월의 초청시인으로는 권혁수 시인과 이문연 시인을 모셨습니다. 옥고를 보내주신 두 분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 배인환 선생님께서 수필집 ‘아버지의 원두막과 어머니의 유품’을 출간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 상임시인들의 원고가 다섯 달 이상 도착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동으로 상임에서 퇴출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들은 연 회비를 3월 말 까지는 꼭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