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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두 가지 행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정평관집사님이 방문을 하셨습니다. 집사님께서 새로지은 금음집에 들여놓을 세탁기와 전자렌지 그리고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가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일은 저의 기도 제목중에 하나였던 배 까지 가져오셨습니다.
제가 8년전에 이곳 남해에 와서 남해를 돌아 보다가 남해 근처에는 사람들이 살고는 있지만 교회가 없는 섬이 여러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배를 가지고 계신 집사님에게 “집사님! 기회가 되면 제가 월요일에 섬에 가서 전도를 하고 싶은데 저와 함께 섬엘 좀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하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거 참 웃기는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저에게 “목사님! 이 동네나 다니면서 전도 하지, 뭐할라꼬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합니까?” 하면서 코방귀도 안 뀌시길래, 제가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이 좀 상해서 속으로 혼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보세요! 집사님! 저 미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120년 전에 우리 조선땅에 선교하러 간다고 할때 부모형제나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너 미쳤냐? 거기가 어딘데 간다고 그래? 야! 그러지 말고 우리동네나 전도해라 우리동네나!” 하면서 다들 만류 했다면 우리나라는 우상숭배만 하다가 모두가 지옥불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에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도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예수믿은 1000만명 성도들도 다 예수님을 몰라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120년 동안 예수 믿고 천국에 간 모든 성도들도 하나같이 다 지옥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혼구원에 대한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집사님을 생각 하면서 심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저는 그 일이 있은 이후에 “하나님! 차라리 저에게 배를 주세요! 저에게 배를 주시면 제가 직접 배를 몰고 섬에 가서 전도를 하겠습니다!”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한지 만 6년이 되었는데 얼마전에 정평관집사님께서 뜬금없이 전화를 하셔서는 “목사님! 배가 한척 생겼는데 참 좋으네요! 타 보니까 참 좋습니다!” 하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배?” “그럼 혹시 내가 기도해 온 그 배를 하나님이 주시려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정평관집사님에게 어떤 배냐고 물으면서 이것 저것을 물어 보다가 제가 그동안 배를 위해서 기도해온 자초지종 이야기를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정평관집사님이 그런일이 있었냐고 하시면서 “목사님! 그럼 이 배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목사님께 드리도록 할께요!” 하시면서 그 배를 저에게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고나서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이시구나!” 라는 생각에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참 놀랍고도 신기한 일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런일이 벌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겠다는 저의 열망을 기뻐하신 하나님이 정평관집사님에게 배를 구입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 배를 다시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묘막측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만약에 그 배가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그 배는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낚시나 하러 다니는 배가 되었겠지만 그러나 그 배가 저에게 왔기에 그 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받는 “섬사랑”호 라는 귀한 전도용 배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 이름을 섬 전도를 위한 배라고 해서 “섬사랑” 호 라고 지었습니다. 배가 도착 하자마자 저는 사천의 수상기구를 담당하는 안전검사관님께 전화를 드려서 우리 "섬사랑"호 배의 안전 검사를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검사관님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쯤에 안전검사를 하러 와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정평관집사님께서 지난 목요일날 그 배를 함안에서 이곳 남해로 운반해 주셨는데 집사님은 그 배를 커다란 크레인 차에 싣고 오셔서 왕지 선착장에 내려 놓았는데 배가 얼마나 예쁘고 물찬 제비처럼 멋지게 생겼는지 보는 순간에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 날 우리 남해 최고의 어부이신 우리교회 건축 위원장 김강태집사님이 나오셔서 배를 내려야 할 곳과 정박할 곳을 선처해 주시고 그리고 배를 시운전을 해 주시고 정박하는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마침 그날 김막순권사님 큰 아드님 윤명진 집사님이 통영에서 오셨는데 바닷가에서 오랬동안 살아오신 윤명진집사님이 그 배를 보시더니 "저 배가 참 비싼 배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아주 좋은 배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김강태집사님도 하시는 말씀이 정평관집사님이 가져오신 그 배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바다나 호수에서 수상 레저용으로 최고로 인기가 있었던 쾌속정 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 배가 전에 날리던 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평관집사님은 배에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지붕까지 다 조립을 해서 준비해서 가져다 주셨습니다. 정평관집사님은 자기 차에 세탁기 컴퓨터 전자렌지 등 생활용품을 싣고 오셨고 배는 커다란 대형 크레인차를 불러서 함안에서 이곳까지 싣고 왔는데 그 비용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정평관집사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귀한 섬김으로 늘 저희 남해 세광교회 성도들을 감동 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배를 정박해 놓고 김강태집사님과 함께 남해읍에 가서 배에 필요한 닻과 구명조끼와 구명동의 소화기 같은 물건들을 사가지고 왔는데 김강태집사님이 도와 주셔서 그 배에 맞는 모든 기구들을 하나 하나 적절하게 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 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 하겠습니다. 이 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그리고 이 귀하고 비싼 배를 아무런 댓가 없이 주의 종에게 기증한 정평관집사님에게 큰 복을 주시되 그에 합당한 복을 내려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이시간을 빌어서 배를 정박하고 관리하는 모든 일을 도맡아서 수고해 주신 김강태집사님께도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는 제가 김강태집사님보다 한 수 위지만 그러나 바닷일에는 김강태집사님이 저보다 스승 이십니다. 앞으로 제가 김강태집사님으로부터 배 운전하는 법도 배우고 바다도 배워서 안전운행을 하면서 전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일을 통해서 깨닳은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정박해 놓고 들어와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사모가 되어진 이 일에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밴 차량이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 교회의 차를 새 차로 바꿔 주세요!” 하고 기도를 하길래 저도 “아멘!” 하고 화답을 했습니다.
하여튼 기도는 하고 볼 일 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사회복지사 마지막 학기 중간 고사 시험을 치렀는데 그만 한 과목을 시험을 잘 못봐서 낙심이 되었습니다. 장례식 치르느라 바빴고, 그리고 요즘은 이상하게 공부도 잘 안되고 해서 아주 힘들게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한 과목을 잘 못친것 같아서 우울해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배를 주시는 바람에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제가 배를 가져온 다음날 새벽기도때 하나님께 다시한번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예배가 끝난후에 성도님들을 모셔다 드리려고 차를 타고 가면서 “만약에 내가 배 운전면허증을 따고 나면 누구를 제일 먼저 태워드릴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옳지! 하영순집사님을 제일 먼저 태워 드려야 겠다!” 하고는 하영순집사님에게 “집사님! 내가 배 운전 면허증을 따면 집사님을 제일 먼저 태워 드릴께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하영순집사님을 선택한 이유는 하영순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가장 전도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가면 하영순집사님을 모시고 가야겠다 싶어서 하영순집사님을 태워 드리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 간증할 일이 있습니다. 어제 이희순집사님의 친구 김안순집사님이 다녀 가셨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은 우리교회가 허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집회를 할때 이희순집사님의 초대로 우리교회 집회에 참석하신 집사님 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부흥회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그날 김안순집사님이 목요일날 낮시간에 딱 한번 참석을 하셨는데 김안순집사님이 그 낮 집회 시간에 큰 은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김안순집사님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보증을 잘못 서 주는 바람에 사업이 부도가 났는데 그 무렵에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큰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믿고 너무나 기뻐서 사업이고 뭐고 다 뒤로하고 목사님과 함께 열심히 전도를 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뜨거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다시 사업차 사천으로 이사를 오셨는데 이사온 바닷가 동네에 초전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있어서 지금까지 그 교회를 섬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열 댓명밖에 안되는 시골 교회에서 평균 85세의 성도님들과 더불어서 일년 이년 믿음생활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열정이 식어지고 믿음도 침체가 되어서 믿음생활을 등한히 했는데 금번에 저희 남해 세광교회에서 진행된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허주 목사님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다시 힘을 내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금번에 멀리 사천에서 저희 교회까지 일부러 방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집사님은 홍삼 한상자와 30만원의 헌금을 가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계속해서 저희 교회를 돕고 싶다는 말씀까지 해 주셨습니다.
저희가 저녁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했더니 지금 직장에서 함께 동업하시는 이희순집사님이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기에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식사도 마다하고 그냥 돌아 가셨습니다. 어제 저와 사모 그리고 청소하러 오신 권옥란권사님과 이진숙집사님이 모두 함께 앉아서 김안순집사님의 간증을 들었는데 김안순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의 간증중에 가장 큰 감동을 준 이야기는 남동생에 대한 간증 이었습니다. 동생이 이희순 집사님과 같이 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 얼마전에 남동생이 폐와 간 사이에 암덩어리같은 혹이 발견 되어서 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집사님은 동생의 협조와 도움이 없으면 사업에도 큰 타격이 있어서 동생의 건강문제로 인해서 심히 큰 근심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암이 사라지고 폐 질환으로 판명이 되어서 수술을 하지 않고 3개월간 약을 먹으면 완치가 된다는 판정을 받고 얼마 전부터 치료를 시작 했다고 합니다. 김안순집사님은 그 일로 인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하여튼 어제는 김안순집사님이 방문을 하셔서 간증을 해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어제 김안순집사님의 간증을 듣고 마지막에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드리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목이 메서 기도를 잘 못 할 정도 였습니다. 집사님이 돌아가신 후에 다시 설교 준비를 하러 들어와서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다가 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기도를 한 후에 이희순집사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이렇게 귀한 친구 집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김안순집사님이 우리 교회 집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우리가 영육간에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고맙습니다!” 하고 이희순집사님께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희순집사님은 사천에서 한솔환경을 운영 하고 계십니다. 우리 남해세광교회가 처음 소마굿간을 본당으로 리모델링 할때 소마굿간의 스레트를 걷어 내야만 했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 번호부 책을 보고 스레트 처리 회사를 찾았는데 남해에는 스레트 처리 회사가 없고 사천에 있길래 전화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때 전화를 받은분이 바로 한솔환경의 사장님이신 이희순집사님 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장님이 교회에 다니는 분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교회를 새로 지으려고 소마굿간을 리모델링 하는데 오셔서 스레트를 좀 처리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한솔환경에서 특장차를 가져와서 스레트를 처리해 주셨는데 보니까 사장님이 여자분 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그분이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희순집사님이 우리 남해세광교회에 오셔서 스레트 처리를 해 주셨는데 일처리가 끝난후에 한 일주일쯤 지나서 이희순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골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느라 수고 한다고 150만원 상당의 스레트 처리 비용을 안받고 자기가 대신 대납한것으로 처리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희순집사님이 150만원상당의 스레트 처리 비용을 하나도 안받고 무상으로 처리해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김안순집사님과 이희순집사님은 함께 동업을 하면서 서로 상부 상조 하면서 친 형제처럼 지내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이 함께 성공 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가 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부흥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부흥 강사 목사님이신 허주 목사님과 함께 동참해 주신 서울 해오름교회의 하철순권사님과 민경택장로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집회에 참석 했는데 하철순권사님이 예배중에 우리 남해 세광교회가 빔 프로젝터가 없어서 나이든 성도들이 성경 찬송 찾느라 애쓰는 것을 보시고는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서 장로님과 함께 상의한 후에 150만원 상당의 빔 프로젝터를 선물해 주시는 바람에 이제는 빔 프로젝터를 통해서 큰 글씨로 비쳐지는 찬송을 보고 부를수 있게 되어서 예배 드리는 일이 얼마나 편해 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멋 진 배까지 주시고 그리고 김안순집사님을 통해서 이렇게 귀한 사랑도 받게 하셨으니 되어지는 모든 일을 생각할 때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크게 사랑하심으로 땅끝까지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 하면서 더욱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교회가 100명 성도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요즘 교회가 부흥이 되고 그리고 주일학교도 다시 성장세로 돌아서서 아이들도 점점 부흥이 되어 갑니다. 이 시골 구석박지에, 바닷가 마을에, 하나님께서 우리 남해 세광교회에 큰 복을 내려 주심을 인하여 다시한번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갈등(葛藤)의 세상”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세상 모든 나라들이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갈등이 무엇입니까? 갈등이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풀어보면 갈등의 갈자는 “칡나무 갈(葛)”자 이고, 등은 “등나무 등(藤)”자 입니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것이 갈등입니다. 왜 칡넝쿨과 등나무가 얽히는 것이 갈등 입니까? 칡넝쿨은 감아 올라갈 때 오른 쪽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그런데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그래서 칡넝쿨과 등나무가 함께 있으면 서로 같이 얽히고 섥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서 서로 얽히고 섥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갈등관계가 되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등이 계속되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염려와 불안이 엄습하고 나중에는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계층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 이 갈등이 커져서 국가나 민족간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결국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이 전쟁이 끝난 1945년도에 온 인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 세계 평화를 갈망하는 많은 나라들이 모여서 유엔을 창설 했습니다. 그러나 유엔을 창설한 이후에도 인류 역사는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여러 나라에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어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평화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부 전도사 시절에 아이들과 함께 자주 불렀던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이라는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네
우리가 아들 믿을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되
우리가 아들 믿을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되
하날세 하날세
하날세 하날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테러와 살인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 수단에서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군인들이 다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주민들을 공격해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학살입니다. 수단에서는 지금까지 20년동안 5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또 다시 테러와 공격으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전쟁과 테러가 만연한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 나시던 날에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러 내려온 천사들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 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라고 선포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평강의 왕” 또는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카네기 공대를 졸업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주변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한 사람들 이라는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그들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성공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나머지 85%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화평을 유지할 줄 아는 인간관계를 가졌다” 라고 조사 보고를 했습니다.
“세상 살기가 힘이 들고 어깨에 힘이 빠지고 살 재미가 없어진다!” 라고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틀림없이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 그런 절망적인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좀 가난하고 살기가 힘들어도 인간관계가 화평하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으로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화평은 가장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 이기에 예수님은 팔복 설교에서 “화평케 하는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11세기에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슬람교, 즉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 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으로 로마에서 십자군 군대를 소집해서 예루살렘까지 대 원정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근 이백년에 걸쳐서 진행된 이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수만명의 미망인과 전쟁 고아가 생겨 났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 사이에 무서운 증오심이 생겼고 결국 그 증오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지역이 이슬람권입니다.
그런데 한창 십자군 전쟁이 2차 3차 4차로 계속되던 그 때에 이 전쟁의 잘못을 지적하고 아군 진영 뿐만 아니라 적군들 에게까지도 평화의 사신을 보내서 전쟁을 끝내도록 화해를 위해서 노력한 평화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십자군 전쟁이 끝나기를 날마다 눈물로 기도했던 아시스의 성자 성 프란시스(St. Francis)입니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기도문을 써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가 이제는 빔 프로젝터가 있어서 이런 좋은 시와 함께 은혜스러운 찬양들을 마음껏 부를 수 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 프란시스가 지은 시와 함께 작곡된 “평화의 기도” 라는 찬양을 다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이 찬양을 부를때에 우리 마음속에 평화의 도구가 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화평”이라는 단어는 헬라원문으로 “에이레네” 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88번 나옵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의 “샬롬”과 같은 말인데 신구약성경을 합하면 이 평화라는 단어가 무려 400번 이상 나타 납니다. 그 만큼 평화는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은 “에이레노 포이오스” 즉 “평화를 만드는 자” 입니다.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평화를 즐기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정도의 평화 예찬론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희생을 각오한 사람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화평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혀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더불어서 화평케 하는 자란 “화평을 만드는 자”를 말하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화를 만들고자 노력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는 이 팍스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했고 결국 팍스로마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팍스로마는 이루어 냈지만 그러나 로마는 팍스로마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로 만들어낸 로마의 평화는 결국 피로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의 식민지 백성인 히브리 민족이 추구하던 평화인데 이 샬롬 평화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평화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심지어 병든자나 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도 “샬롬” 이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라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그래서 샬롬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와 더불어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는 참된 평화 였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해야 할 참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해야할 평화가 바로 팍스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샬롬에 의한 평화 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나 또는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에서나 길가에서도 곧 잘 싸움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하는 아이 주변에는 세 종류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괜히,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를 충동질해서 “야! 너! 쟤 이길수 있어? 쟤는 너를 이긴다던데?” 하면서 싸움을 붙이면서 싸움을 부채질하는 아주 못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로 행여나 싸움에 말려들어 한 대 얻어 터지지나 않을까 싶어서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셋째로 어떻게 해서든지 싸움을 말려 보려고 얻어 터지면서도 죽어라고 말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싸움을 말리는 아이를 Peace 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이라고 하고 이아이 저아이 데려다가 싸움을 붙이는 아이를 Troble Maker "문제를 만드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교회생활을 하면서 지은 죄에 대한 죄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당 짓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분쟁하는 것이고 세 번째가 수군수군하는 것이고 네 번째가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함으로써 이간질을 시켜서 싸움을 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Trouble Maker 즉 "문제를 만드는 사람" 입니다. 이런 사람 때문에 학교에 가기가 싫어지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직장에도 문제가 생기고 모든 곳에 괴로움과 고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Peace 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은 못 되더라도 부디 Trouble Maker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 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와 타협 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도저히 평화롭게 지낼 수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는 화평을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망치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악한 일만 했기에 예수님은 그런 악한 일만 행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이다" 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들을 냉정하게 책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도 화해를 이루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향하여 "너는 차라리 이땅에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뻔 했도다!” 라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죽여 처형한 당시의 악한 장로와 대 제사장들과도 끝까지 타협하거나 화해를 하지 않고 대적하는 관계로 지내셨습니다. 이것은 죄와 타협 할 수 없는 불의에 항거하는, 의를 위한 단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주한 그들은 하나같이 당시에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큰소리 친다고 해서 다 훌륭한 신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잘못 믿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죄를 지었던지 용서해 주셨고, 어떤 병에 걸렸던지 고쳐 주셨고,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 가도록 엄청난 축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을 구원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돌아 가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할 수만 있으면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평화의 사도인 것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함마슐트(Hammarskjold)씨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다가 어느날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고 현장에서 그분의 시신을 찾았는데 거기서 그분이 들고 다니던 조그만 손가방을 발견 했습니다.
그 손가방 속에는 유대인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쓴 “나와 너(I and Thou)” 라고 하는 책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함마슐트가 자기 나라 말로 번역을 하기 위해서 스웨덴어로 번역하던 원고 뭉치도 함께 발견이 되었습니다. “나와 너”의 평화를 이룩하기 전에는 국제 평화를 이룰수가 없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는 참된 평화를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깨닳은 함마슐트씨는 그 책을 번역하여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읽게 하려고 틈틈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여행 할 때마다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데 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함마슐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있을때 국제 적으로 큰 갈등이 되었던 수에즈 운하 분쟁을 해결했고, 중동 내전을 종식 시켰고, 냉전이 한창이던 1954년도에는 중국에 억류돼 있던 유엔군 소속 미군 15명을 구하기 위해서 함마슐트가 베이징으로 날아 갔는데 거기서 함마슐트는 열흘이 넘도록 주은래(周恩來) 총리를 끈질기게 설득해서 결국 유엔군 미군포로를 돌려 보내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주은래도 함마슐트의 열성과 인간적 매력에 감복해서 도저히 풀어줄 수 없는 포로들을 풀어준 것입니다.
함마슐트는 유엔 사무총장 재직시절에 몸을 사리지 않고 분쟁지역들을 돌면서 중재했고 마지막에 콩고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콩고로 가다가 그만 비행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함마슐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요!” 라고 기도 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화평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누군가가 평화의 사도( peace maker)가 되어서 희생적으로 섬길때 진정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워할 사람 다 미워하고 원수 갚을 것 다 갚고 사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가정이나 직장 또는 이웃이나 교회 안에서 조금 섭섭한 일이 생겨도 주님 안에서 풀고 서로 사랑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잘못이 있습니다. 내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하나님이 직접 다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주님의 사랑으로 그냥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군가가 시간적인 희생과 물질의 희생과 자존심의 희생을 드리는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되어 갑니다. 내가 따질 것 다 따지고 내가 주장할 것 다 주장하면 그런 교회는 은혜는 사라지고 냉냉해 지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내 주장을 펴려고 하기 보다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실 배우기도 바쁜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천국의 생활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생활이요 천국생활을 훈련하는 것이 믿음생활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그곳은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화평케 하는자가 되려면 제일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진정한 peace maker, 평화의 사도가 되려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그래서 욥은 욥기22장 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먼저 화목 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과 먼저 화평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으면 아무런 복도 주어지지 않고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어떤 축복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오직 한가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된 화평을 찾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이라고 증거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로 14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고 증거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되어 참된 평화와 행복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돌아가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것이 복 중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래서 돈에 인생을 걸고 돈을 생명으로 알고 돈에 목숨을 걸고 살아 갑니다. 이와같은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한 소설이 “진주” 라는 소설입니다.
이 진주라는 소설은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백”이 쓴 소설입니다. 진주라는 소설에는 “키노”라는 남자와 그의 아내 “조안나”가 등장 합니다. 이 두 부부는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어느날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다가 아주 크고 진귀한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진주는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만큼 엄청난 값이 나가는 그런 진주 였습니다. 그들은 그 진주를 발견한 순간에 “야 이제 우리의 모든 가난은 끝났다! 이젠 행복한 삶만 남았다!” 라고 외치면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엄청난 값이 나가는 귀한 진주를 찾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귀한 진주를 보기 위해서 늘 키노부부의 오두막집을 기웃 거렸습니다.하루는 키노 부부가 몸이 아파서 읍내에 있는 병원을 찾아 갔는데 전에 그들의 아이가 다쳤을 때는 그들을 대수롭지도 않게 여기던 의사가 그들 부부가 진주를 발견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몇 번씩이고 그의 집으로 찾아와서 자기들을 돌보아 주는 과잉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귀한 진주를 찾았다는 소식이 도회지의 진주 장사들에게까지 전해져서 진주 장사들이 그 진주를 사기 위해서 그들 부부를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진주 장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진주를 싸게 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터무니 없는 값을 제시하자 이들 부부가 그들에게 진주를 안팔려고 하니까 나중에 이 진주 장사들은 폭력배를 동원해서 그들 부부에게 안팔면 가만 안두겠다고 협박을 하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심지어 어느날 밤에는 그 진주를 훔쳐 가려고 이들 부부의 집에 강도가 침입했습니다. 그래서 키노는 그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 그 강도와 목숨을 건 격투까지 벌여야만 했습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그들은 그 진주가 자기들에게 큰 행운과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고 있다가 진주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힘들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결국 이들 부부는 그 진주를 깊은 바다 속에 다시 던져버리고 맙니다.
이 소설은 재물이 결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참된 평안과 행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은 화평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더불어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사람은 이제 이웃과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자가 되라는 말씀에는 이웃과의 화평을 이루라는 말씀도 담겨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장 14절로 15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하여 제일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참된 화평은 복음이 전해 짐으로써 이루어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의 사도(peace maker)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참된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 할 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애정을 쏟고 심혈을 기울입니까? 전도할 사람을 찾아가서 이것. 저것 다 치다꺼리 해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툭하면 선물을 사들고 가서 섬기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수를 믿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구원 받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도 기뻐 하시고 전도한 사람도 기뻐하고 구원받게된 본인도 감사해서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큰 기쁨은 그 전도 대상자를 열심히 섬기면서 전도한 사람이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면 구원이 있고, 기쁨이 있고 거룩한 영적인 축복과 범사가 잘되는 은혜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경우에 따라서 실천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조항이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무조항인 것처럼 화평게 하는 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무조항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시기 바로 직전에 전 인류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는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라는 말씀입니다. 평화는 내가 싸우려고 뽑아 든 칼을 칼집에 도로 꽃을때 비로소 이루어 집니다. 내가 먼저 싸움을 절제하고 내가 먼저 참고 내가 먼저 용서하면 평화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면서 사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일상(full-time vocation)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 신부는 말하기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오늘날 그 누구도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다른 이웃이나 그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웃과 불편한 관계로 사는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 설교를 하신후에 이어지는 23절로 24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예배가 상달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부부 싸움을 하거나 어떤 다툼이 있은 후에 교회에 와서 앉아 있으면 몸은 교회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불편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참 감사한 일은 어쩌다가 일 년에 한 두 번 집안에서 다툼이 생기면 제 집사람이 저에게 먼저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면서 “혹시라도 목사님이 예배를 집례 하는데 방해가 되면 안되지” 하는 마음 때문에 먼저 사과를 하는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 가 없습니다.
우리가 화목하지 않고 불화속에 살면 모든 축복의 통로가 꽊 막혀 버려서 아무런 복이 임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화목한 후에 다시와서 예물도 드리고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교훈입니다.
화가가 되기 원하는 소년 몇 명이 당대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다빈치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세워놓은 이젤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예민한 그의 그림작업이 방해를 받아서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 앞에서 붓을 집어던지면서 “화실에서 조심하지 않고 넘어져서 분위기를 망치면 어떻게해” 하면서 그 소년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혼이난 그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지만 도무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혈기를 부리고 났더니 그의 뛰어난 창조성과 영감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붓을 놓고 밖으로 나가서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너는 그저 구경 하다가 이젤에 걸려서 넘어진 것 뿐인데 내가 공연히 화를 내서 너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도 마음이 상해서 그림을 그릴수가 없게 되었구나 내가 너에게 사과하마 나를 용서해 주겠니?” 그렇게 소년과 화해를 청한 후에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로소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하면 은혜와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중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이웃과의 관계가 소원해 진 분이 있다면 그 관계를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뻥 뚤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칼 노락이 쓴 카아바의 미소(Le sourire de Kiawak) 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어느날 낚시를 하러 가는 아들 키아바에게 아빠가 놀리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네 새끼손가락보다 굵은 물고기를 잡아와 보아라”
어린 키아바는 얼음을 깨고 낚싯줄을 드리웠지만 한 마리도 못 잡습니다. 그런데 실망할 즈음에, 갑자기 줄이 팽팽해집니다. 그래서 줄을 당겼더니 아주 커다란 물고기가 올라왔습니다. 키아바는 우쭐해졌지만 그러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방금 잡은 물고기가 자기를 보고 씽긋이 웃으면서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키아바는 차마 미소짓는 물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키아바는 자기가 잡은 그 큰 물고기를 도로 물 속에 놓아 줍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빠에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아들을 놀립니다. 그러나 키아바는 아빠에게 미소 짓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아빠와 함께 길을 가는데 갑자기 큰 곰 한 마리가 나타나서 키아바의 앞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아빠는 겁을 주어서 곰을 쫓아버리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곰에게 막대기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소리를 지르면서 막대기를 휘두르자 곰도 점점 더 무섭고 사납게 으르렁 거렸습니다. 그때 키아바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키아바는 곰에게 다가가서 씽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곰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일을 한번도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이, 더구나 화가 나 있는 곰인 나에게 미소를 짓다니... 곰은 어찌 해야 할줄 몰라 서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빠는 그 사건이 있은후에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키아바는 고기를 잘 잡는 낚시꾼은 아니지만 훌륭한 마술사같은 아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키아바는 여러 사람의 칭찬에 우쭐했지만 그러나 그 일도 곧 잊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먼 곳에서 온 사냥꾼이 두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이 동네로 오고 있다는 소식 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집이 무너질까봐서 얼음집을 두배 세배로 두껍게 쌓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키아바는 조용히 마을 입구로 걸어 나갔습니다. 다가오는 폭풍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저 멀리서 무섭게 불어오는 폭풍을 본 키아바는 조금 무서워서 몸을 움츠렸지만, 그러나 이내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다가오는 폭풍에게 씽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폭풍은 그 어이없는 광경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너 같은 어린애의 미소가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서 폭풍이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키아바는 “물론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잖아요?” 하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키아바의 말을 들은 폭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너털 웃음을 웃기 시작했습니다. 폭풍이 웃느라고 바람을 불게 하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폭풍은 잔잔해 지고 말았습니다. 키아바는 마을로 돌아가서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아주 편안하게 잠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진리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나운 곰도 거센 폭풍도 키아바의 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키아바의 무기는 천진난만함과 미소입니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키아바의 천진난만함과 미소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속 마음을 숨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머리를 써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기업도 나라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안되면 돈으로 공세를 하고 그래도 안되면 군대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23절에 보면 라멕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한 살인을 자랑하고 스스로의 힘을 자랑하면서 노래를 하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그게 바로 라멕의 노래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폭력은 오늘날에도 그 위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의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신뢰 한다면 싸울필요도 없고 갈등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제 김안순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안순집사님은 사업을 하다가 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사업이 바닥으로 내려 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집사님은 사업을 하다가 이희순집사님을 만났는데 이희순집사님과 동업을 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이희순집사님과 나누고 서로 공동운명체로 그렇게 새 출발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보증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또 다시 같은 상처를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희순집사님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한가지로 인해서 김안순집사님은 이희순집사님과 모든 것을 다 함께 공유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김안순집사님은 정말 크리스챤의 진실을 가진 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김안순집사님도 이희순집사님을 통해서 서로 상부 상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만남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위험을 각오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치 키아바가 천진난만함과 순수한 미소로 세상을 이긴 것처럼 그렇게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큰 갑부가 되었지만 말년에 자기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느날 자기가 여행중에 있는데 호텔에서 아침에 신문을 펼쳐든 순간 기절 초풍을 하게 됩니다. 그 기사는 “살인자 알프레드 노벨 사망” 이라는 기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대문짝 만 하게 났는데 살인자가 죽었다고 기사가 난 것입니다. 사실은 동생이 죽은건데 신문기자가 잘못알고 노벨이 죽은줄 알고 그렇게 기사를 쓴 것입니다. 노벨은 그 기사를 보고 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광산도 파고 굴도 뚫으라고 좋은일에 쓰라고 발명을 한건데 그 다이너마이트가 사람을 죽이는데 쓰여져서 자기를 살인자 알프레드 노벨이라고 쓴것을 보고 크게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노벨은 자기의 전 재산을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주라며 스웨덴 왕립과학 아카데미에 몽땅 기부를 했습니다. 이것이 노벨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벨상은 1901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약 830명의 수상자를 배출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신앙의 사람이요 훌륭한 과학자인 퀴리 부인을 비롯해서 수 많은 물리학자 경제학자 문학가 사상가등이 노벨상은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상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애쓴 사람이 받는 노벨 평화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권위를 가진 노벨상도 냉정하게 들여다 보면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해서 상이 주어 졌기에 오랜 세월동안 그 수상자가 거의 유럽과 서구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무저항 운동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인도의 간디는 무려 다섯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자가 되었지만 끝내 이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보다고 위대한 평화의 사도가 정작 상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이나 노벨 의학상 또는 노벨 물리학상은 그나마 공정한 심사를 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노벨 평화상은 기준이 애매 모호해서 올해 누군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발표를 하면 어떤때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인정을 하는가 하면 어떤 해에는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과연 이 사람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지 1년만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이 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리고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앞장서서 일하고 있는것은 분명 하지만 그러나 오바마가 과연 노벨 평화상을 받을만한 일을 했는가?” “그가 인류 평화를 위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어떤 신문은 “오바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것은 앞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첫 번째 미래적인 노벨 평화상이다”라는 기사를 써서 그의 수상을 노골적으로 비꼬기도 했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상이요 권위 있는 상입니다. 그러나 그 상도 사람이 주는 상이기에 이와같이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보다 더 귀한 상이 있는데 그 상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평화상”입니다. 물론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평화상은 노벨 평화상과 달라서 여러 사람이 심사위원이 되어 주는 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심사위원이 되어서 결정하고 주시는 상입니다. 권위는 노벨 평화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상은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평화상입니다.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하나님 평화상 감이다” 하고 하나님이 판단하셔서 주시는 상입니다. 이 하나님 평화상을 수상받을 사람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상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9절에는 "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스웨덴 돈으로 1000만 크로네, 우리 돈으로 약 17억원 정도의 돈이 상금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돈은 한푼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상”이 주어 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따라살면 내가 가는 곳에 화평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화평케 하는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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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도에재미는 응답에 있지요~~ 기도하면되는데...왜 고민하나요~~
믿음으로 확신하며 올리는 진정한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이는걸 경험해본자는 그 기쁨을 알지요~~
나도 울남편의 믿음이자라 이젠 새벽제단까지 쌓는 모습보며... 기도가 헛되지 않음에 감사하고 있지요,
주위에선 권사믿음까지와도, 남편구원못한분들이 부러워하길래, "나만의 남편전도법'을 간증해
울 목사님,사모님은 울교회가 남여 비율이 같아지길... 소망한답니다~~
작은개척교회 2년밖에 안됐어도, 50여명이 올해 100명으로 배가되는 기대를 심어주었지요~~
동명씨~~ 돕는손길 끊이지 않길... 기도합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