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서늘한 바람과 함께한 [대간
36]
1. 일자: 2014. 7. 12 (토)
2.
장소: 건의령-댓재
3.
행로/시간
[건의령(03:15, 840m, 한내령 2.9km) -> 푯대봉(03:40) -> (한내령) -> 1055봉(05:41) -> 구부시령(05:53, 971m, 덕항산 1.1km) -> 덕항산/덕메기산(06:17, 1073m, 환선봉 1.7km) -> 환선봉/지극산(06:56-07:17, 1082m, 자암재 1.5km) -> (헬기장) -> 자암재(07:40, 932m, 큰재 3.3km) -> (귀네미골/광동댐 이주단지/풍력발전단지. 07:58-08:28) -> (대기 -08:50) -> 큰재(09:00, 1002m, 댓재 4.7km) -> 황장산(10:10, 975m) -> 댓재(10:30, 810m). 19.5km / 7시간 15분]
< 대간 36구간 산행을 준비하며 >
대간 36구간에는 사연이 많다. 건의령(고려 충신들의 결의), 구부시령(아홉 남편과 산 여인의 전설). 귀네미골(광동댐 이주민 부락)이 대표적이다.
동해 바다가 멀지 않은 첩첩산중에도 아픈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살아있는 길을 걷게 된다. 반갑게도
덕항산-자암재 코스는 경험이 있다. 옛 기록을 살피며 마음을
다 잡는다. ‘덕항산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 보며 한참을 서성이다 길을 나선다. 이젠 백두대간이다. 올라오며
눈을 즐겁게 해 주던 풍력발전소가 있던 장소는 ‘큰재’일
것이고, 그 너머로 황장산이 있다. 쉼터로 내려서 걷는 길, 동쪽으로 ‘낭떠러지’라는
경고 표식이 자주 보인다. 실제로 아래는 그야말로 천애절벽이다. 덕항산은
국내의 대표적인‘경동지괴’지형이다. 자암재까지는 약간의 굽이는 있어도 걷기에 그만인 능선이다. 덕분에 정상을 오르며 소모한 시간을 일거에 만회한다. 환선봉 부근 전망바위에 서니 큰재의 풍력발전소가 지척이다. 붉고 너른 황토지대가 보인다. 인근에 고랭지 채소 재배지가 있나
보다.’
전체 코스를 3구간으로 나눠본다. 건의령-덕항산 7.6km 3시간, 덕항산-큰재 6.5km 2시간
반, 큰재-댓재 4.7km
2시간, 총 18.8km, 식사시간 포함 8시간의 산행이 될 것 같다. (산행을 마치고 확인하니 날씨가 선선하여
19.5km 거리를 7시간
15분만에 걸었다.)
< 희망사항 >
경동지괴(傾動地塊), 동편으로
절벽이 있는 지형이다. 길이 험하면 풍광은 좋은 법, 기억은
이를 뒷받침한다. 3년 전 후배사원들과 함께 올랐던 덕항산, 오름
길의 험한 사정을 몰라 후배들 진하게 고생시켰던 산이다. 당시 험하고 가파른 지형으로 올라 편한 능선을
걷다, 더 험한 비탈을 내려서 하산하며 사전 길 정보조사의 중요함을 실감했다. 어스름 저녁, 고생 끝에 찾은 장엄한 지하세계 ‘환선굴’의 장관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늘은 험한 동쪽을 거치지 않고 능선을 따라 건의령에서 댓재까지 길을 이어간다. 고도 표 상으로는 봉우리가 20여개 있지만 이상하게도 다녀온 이들은
편한 코스라 한다. 그래도 지도 등고선에 눈이 자주 간다. 지도와
실제를 확인하는 산행을 해야겠다. (요즘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대간 산행에서는 등고선과 구간별 포인트와
소요시간이 표기된 일반지도보다는 구간의 높낮이를 알려주는 고도 표가 더 실용적이다.)
영월, 삼척, 태백은 유독 고려 말, 조선 초 절개를 지친 충신과 폐위된 왕(공양왕, 단종)과 연관된
전설이 많다. 두문동재, 건의령 등 전설을 품은 지명도 흔하다. 터가 원한을 품고 숨어살기 적당하고, 모반의 기가 서려있는 곳이리라. 아픈 과거가 있는 길을 걸으며 치유의 산행을 하고 싶다.
6월말 이 코스를 먼저 다녀온 7기의 사진을 보니 귀네미마을의
고랭지 밭과 누런 흙의 평원, 흰 날개가 달린 풍력발전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소와는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색다른 구도의 사진을 찍고 싶다. 그래서, 사진이 어설픈 내 글의 기댈 언덕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ㅎㅎ
< 건의령 가는
길에 >
버스에 빈 좌석 여럿이다. 맨 뒷줄은 전멸이다. 아예 탈퇴한 아사모님은 그렇다 치고 월송님, 수돌이님, 현철님의 빈 자리가 휑하다. 그 밑으로도 3자리가 빈다. 대간 산행이 후반기에 들어서면 피로현상이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다들 사정이야 있겠지만, 왠지 허전하다. 그간 정이 많이 들어나 보다. 다행히 행진님의 참석이 분위기를 조금은
끌어올린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뜨고 복정이다. 왜 이리로 왔을까 의아해하는
순간, 마운틴님과 대장님이 몇 마디 말을 하더니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선다. 아마도 마운틴님이 설악산 가는 줄로 착각했나 보다. 예정보다 20여분 늦게 죽전에 도착했다. ‘미꾹 갔다 온’ 산거북님을 비롯하여 반가운 얼굴들이 버스에 오른다. 이내 소통,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 중 마음에 드는 것은
버스에서 1시간 정도 숙면을 취하게 된 것이다.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1시 30분, 버스가 오르막에서 힘겨워한다. 휴게소 터에 정차한다. 산거북님이 내 놓은 떡으로 이른 아침을 먹는다. 엔진에 문제가 생긴 버스는 천천히 나아간다. 이 새벽에 어쩌겠나, 일단 가 봐야지.
3시가 조금
지난 시간 휘엉청 달님이 반기는 건의령에 도착했다. 새벽 공기가 차다.
자! 또 출발이다.
< 건의령에서
덕항산 >
들머리를 찾느라 도로 1km를 헤맸다. 트랭글을 다시 세팅한다. 3시
15분, 대간에 들어선다. 바람이 인다. 길섶에 습기가 없다. 강원도 지역 날이 가물다 하더니 실감한다. 덕분에 산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사위가 어둠 속에 잠긴 체, 렌턴의 불빛만이 존재감을 나타낸다. 푯대봉에 올랐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빛이 적어 제대로 나올지 모르겠다. 한내령은 어딘지도 모르게 지나쳤다. 한 시간 반 넘게 내처 걷기만
했다. 송암님께서 쉬어 가자 한다. 작은 봉우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동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드리워진다. 이정표를 보니
건의령에서 5km를 걸어왔고 구부시령까지는 1.5km 남았다. 날이 선선해 물도 먹히지 않는다.
구부시령을 향해 간다. 태백 하시미의
외나무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죽고 하여 무려 아홉 서방과 살았다고 한다.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전설이 대개 그러하듯 황당한 설정이다. 공터에서 잠시 쉼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한다. 이제 덕항산은 1.1kn 거리다.
날이 밝아져 시야가 트이니 자꾸 시선은 동쪽으로 향한다. 나뭇잎에 가린 해의 기운이 감질난다.
< 여명의 흔적 >
< 잠에서 깨어나는
산하 >
사진을 찍느라 후미로 쳐졌다. 작은 언덕을 넘으며 트랭글이 울려댔다. 덕항산 정상이 멀지 않았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다. 잠에서 깨어난 산하가 기지개를 편다. 환선봉에서의 식사를 기약하며
덕항산과는 이별한다.
< 덕항산에서 >
< 귀네미 마을 원경
>
< 덕항산에서
큰재 >
선두는 한참 앞서 갔나 보다. 근래 들어 산행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무전기에서 식당 터를 잡았다는 연락이 온다. 걸음이 빨라진다. 30여분 만에 환선봉에 닿았다. 봉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작은
공터다. 갖가지 음식들이 배낭에서 나온다. 유박사님은 닭다리
강정도 해 왔다. 정성이 대단하다. 후미로 왔으니 식사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당연지사. 20여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는다. 오랜 만에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어 찍었더니 평소보다 선명하다.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선두는 벌써 길을 나선다.
식사를 마쳤더니 발에 힘이 난다. 길도 평탄하다. 묵 밭이 된 헬기장을 지나며 서걱서걱 풀잎이 다리를 스치는 소리가 정겹다. 시멘트
블럭 틈에서도 강하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잡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환선봉에서 288 >
< 귀네미 마을 원경
>
자암재 갈림에 선다. 우측으로 길을 꺾으면 환선굴로 이어진다.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사위는 온통 고랭지
채소밭이다. 풍력발전소의 날개가 밭의 수호자 마냥 거친 바람을 이겨내고 있다. 밭을 들여다 본다. 온통 돌 투성이다. 처음엔 이리 척박한데 농사가 되나 싶었는데, 쉴새 없이 부는 바람을
생각하니 흙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고자 부러 돌을 배추 사이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를
높여 만들어진 밭도 돌 투성이니 근거 있는 추정이다.
< 삼척 방향 원경 >
< 두 야생화의 공존
>
인근에 광동 댐이 만들어 지면서 이주민들을 위해 조성된 귀네미 마을, 아마도 우리나라 최대의 고랭지 채소밭이리라.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고도를 높이자 풍력발전소가 점점 가까워진다. 8시 30분
무렵 바람개비 날개가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멀리
288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후미를 기다리나 보다.
아이넷님과 다정이님, 돈도니님이 모퉁이를 도는 것을 본 지라 청한님에게 먼저 가라 한다. 아무래도 아이넷님을 기다려야겠다. 원 없이 사진을 찍었다. 풍차를 배경으로 그리고 배추밭을 배경으로 말이다.
< 풍력발전소가 있는 풍경 >
20여분을 기다린다. 후미는 소식이 없다. 낭패다. 혹
누군가 탈이 나 하산해 버린 것이 아닌가? 아까 무전을 듣고 손짓하던 청한님의 모습이 계속 뇌리를 스친다. 뒷걸음으로 전진하며 나아간다. 임도 바리게이트를 만난다. 길가에 이정표가 있다. 근처에 큰재가 있다 하는데, 우측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대간 표지기도 없는데 하고 몇 발짝
디뎌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임도 방향으로 가 보지만
역시 표지기가 없다. 낭패다. 일단 후미를 기다리기로 한다. 머지 않아 지친 얼굴의 다정이님과 돈도니님이 온다. 그 뒤로 산소리님과
아이넷님이 보인도. 살았다. 짐짓 그들을 기다린 냥 사진을
찍는다. 길은 임도 너머로 이어졌다.
<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의 풍경 >
9시 큰재 도착, 이제 남은 거리는 4,7km다. 선두는 1km 이상을 앞서 가고 있으리라. 큰재에 들어서며 임도를 버리고
숲에 접어든다.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우측으로 지난 산행에서
지나온 청옥산, 고적대, 자병산 능선이 보인다. 회색 빛의 조화가 멋지다. 아이넷님을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잘 나왔다.
< 큰재로 향하며 >
< 큰재에서 댓재 >
바람이 몹시 분다. 비올 바람이다. 귀네미 마을의 풍력발전소는 우연히 건설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은
평소 때도 바람이 잦을 곳이다. 길가 이정표는 계속 황장산까지의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후미가 황장산 2.8km 부근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2km 지점을 통과한다. 놀라운 속도다. 선두와 별 차이 없이 댓재에 닿을 수 있다.
대세 오르막 길이 이어진다. 길가에 둥굴레인지 금강초롱인지 종
모양의 야생화가 피어 있다. 잠시 멈춤이 앞 사람과의 거리를 제법 낸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메라를 꺼낸다. 두고 가면 돌아와 후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 금강초롱/둥글레 >
< 횡장산에서 >
황장산을 지나고도 한참을 오르니 1105봉 팻말이 있다. 고도계 상으로는 1050미터 정도인데 잘못 만들어진 표식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비탈을 내려서니 그토록 기다리던 댓재다. 7시간 15분의 유쾌한 산행이 끝났다. 범사에 감사한다.
< 에필로그 >
한 떼의 산꾼들이
산을 오르려 한다. 누군 내려온 길을 누군 오른다. 바람이
죽었다. 한 여름 뙤약볕이 쏟아진다. 시간 체크용으로 댓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는 버스에 오른다. 비록 상대적으로 길이 편안하다 하지만 20km에 육박하는 대간은 만만치 않았다.
태백으로 이동하여 사우나를 하고 근처 고깃집에서 뒤풀이를 했다. 술
한잔에 고기 한 점, 오늘 따라 술이 당긴다. 꽤 많이 먹었다. 교대에서 2차를 하자고 제안한다.
모두 동의한다. 술 기운에 들떠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영동고속도로를 질주하더니 이내 죽전이다. 죽전파가 모두
내린다. 2차는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경험에 의하면 기쁜
마음으로 술자리를 할 기회가 사실 쉽지 않다. 오늘은 그 쉽지 않은 날이었다. 288이 있어 행복했다.
< 36구간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