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사색당파로 이 나라를 후금(청) 오랑캐에게 뺏긴적이 있었다. 반청파 충절김상헌 -오랑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대신이 한양을 뒤돌아 보며 지은 시입니다.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산봉으로서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로 구성되어 있다
13세기 유목민족이였던 몽골족의 징기스칸이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그의 손자가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60년간 지배하게 되었는데 중국대륙을 지배한 후 고려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1231년 고종 18년부터 28년 동안 7차례나 침략하여 왕족들은 원나라에 잡혀가 그 곳에서 원나라의 왕실과 결혼을 해야 했고 고려는 몽고의 속국이 되었다. 이때 고려의 여인들 삼만명이 잡혀갔다는데 사람이 아닌 곡물로 취급되었다. 그 여인들이 다시 고려로 돌아오면서 환향년의 유래가 시작되었다.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후금의 홍타이지(청태조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청 태종 숭덕제)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왔다. 이들에게 쫓겨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끝까지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패배하고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도 청나라에 끌려간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줄타기 외교로 나라를 지탱하던 광해군과 명나라 사대주의에 찌든 양반들., 양반들의 승리로 광해군 동생 아들인 인조가 등극하고(인조반정)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나아가 후금에 머리를 땅에 찧으며 절을 하고 항복하게 된다., 인조는 기세등등한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위세앞에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청나라에 대항한 죄인이란 명분으로 127계단을 오르면서 다시는 청나라를 무시하지 않고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군신의 관계를 인정하는 서약을 하게 된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삼배를 하고 아홉번 이마를 쥐어박으며 올랐다. 임금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흐르고 이를 보는 백성들은 통곡을 하였다. 그 추운 겨울날, 청나라 태종이 물러가라 할 때까지 무릎을 끓고 앉아 있었다. 삼배구고두! 가슴 아픈일., 처녀 15만명을 오랑캐에게 바쳐야 했던 아픈 추억.,그래서 조혼제도도 생겼다고 한다. 후금에 끌려가 몸을 망친 아낙네들이 다시 고향을 찾아온다, 환향녀(還鄕女).... 당연히 반갑게 맞아야 하나.,사람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간사한지라 오랑캐에 몸을 바쳤다고 모두 놀리곤 하였다 한다.,가슴 아픈 환향년이 되었다. 홍제천이 물이 맑고 맑은 모래가 쌓인다고 하여 모래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래내는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지방마다 맑은 물은 보통 모래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당시 임금은 이제 환향년에 대한 이야기로 나라가 또 어지러우니.., 후금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인들은 4대문안에 들어오기 전에 모래내에서 몸을 씻으면 몸 마음이 다 깨끗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딸, 이모, 누나, 동생하며 잘 살라고 백성들을 타일렀다고 하네요.
호로자식...환향녀가 돌아올 때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낳은 자식을 말한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으로 그 자긍심이 대단하다. 이러한 민족성 때문에 타민족 그것도 오랑캐라고 업신여기고 있는 北方胡虜(북방호로)의 피가 섞인 자식을 예의도 없는 버릇없는 놈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요년석’ 또는 ‘요녀석’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음력 1월 4일 ~ 1645년 4월 26일)는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 인조가 왕이 되자 1625년(인조 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는데, 이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인절미
인조대왕때 이괄이 난을 일으켜 한성으로 침입하여 왔을 때 왕은 공주로 피난하였다. 임금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에 있는 임씨댁에서 보자기에 콩고물 묻힌 떡을 진상..... 왕은 시장한 참에 입에 넣고 는 이게 무슨 떡이냐고 물으니 떡 이름은 모르고 임씨댁에서 진상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참! 절미로구나! 하였다고.... 이리하여 임씨성을 따고 절미를 붙여 " 임절미"이라고 불렀으나, 그후 현재까지 인절미로 전해 온다고 합니다.
은어, 도루묵
조선의 14대 임금이었던 선조(1552~1608)가 임진왜란 때 피난가시면서 먹을 것이 궁하자 한 어부가 '묵'(목어)이라는 물고기를 바쳤습니다. 무척 시장했던 선조 임금은 가릴 것도 없이 먹어보고는 너무 맛이 좋아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 궁궐에 돌아온 선조임금은 문득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銀魚)'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보았더니 옛 피난지에서의 감칠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은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고 말했답니다. '도로 묵'이 나중에 '도루묵' 으로 바뀌어 '노력을 기울인 보람도 없이 헛되게 되는 일'을 '도루묵'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