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에 대한 견해차이
행복님께서 그간 대종회 카페에 기고한 글에 대하여 “족보에 계재한 여사열전의 ❶羅裕 羅州人은 출생지를 나타낸 것이지 본관 기록이 아니다. ❷우리나씨는 고려때에는 羅州羅氏로 본관을 사용하지 않했다. ❸나지강공께서 중국에서 망명 온 분이 어떻게 신라에 좌승상이 될 수 있느냐.” 에 대하여 졸종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하여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종중 역사도 확실하지 않은 자료를 잘못 주장하면 종인들을 誤導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합니다.
❶, 나유(羅裕)나주인(羅州人)은 출생지를 나타낸 것이다.에 대한 반론.
1, 백천조씨 족보--나유 선조님의 처가가 백천조씨로 六世 정국공신 은천부원군 조문주 공이 장인인대 그 백천조씨(배천조씨)의 족보에 조문주의 사위로 羅裕(나유) 羅州人 문 과 상서대장군, 父 우복야 득황(得璜)으로 기록 되어있으며
2, 남양홍씨 족보--남양홍씨 족보와 유(裕) 선조님의 사위와 따님 묘소 앞의 비석에도 통 의군부인 나주나씨(通義郡夫人 羅州羅氏)로 각자 되었습니다.
3, 한산이씨 족보--죽헌 나계종공은 한산이씨의 중시조이며 도첨의 찬성사 이곡(李穀)이 장인이고 고려말에 대 학자로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목은 이색(李穡)과 남매간인데 그 한산이씨 족보에도 나계종(羅繼從) 羅州人 官 고려조 예문관 제학 撰 가정선생 화상찬 이라 기록되이 있고.
4, 서천향교지, 한산향교지, 고금실기
위에 기록된 자료들은 고금실기는 충남도에서 발간했고 서천향교지와 한산향교지는 지 역 향교에서 발행한 서적으로 모두가 서천 태생이지만 서천인 이라고 한 곳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한산이씨 족보는 모두가 조선시대 제작되었지만 고려때 사적들입니다.
❷ 우리 나씨는 고려때에도 나주나씨로 본관을 한 일이 없었다에 대한 변의.
1, 위의 자료에서 보는바와 같이 裕 선조님의 처가 족보인 백천조씨 족보와 따님의 시댁 족보인 남양홍씨 족보와 죽헌공의 처가 한산이씨 족보에 분명히 나주나씨로 되어 있습니 다.
남양홍씨 사위 홍융공과 따님의 묘비도 고려때에도 우리 나씨가 나주나씨로 행관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편 裕선조님의 동생인 允공의 손자사위가 창녕成氏로 문정공 成汝完인데 그 부인이 경안택주 錦城羅氏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조에 와서도 송재공의 따님 두 분께서 文化柳 氏 족보에 錦城羅氏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고려때와 정묘보 이전까지는 우리 나씨도 다 른 성씨들과 같이 구 본관과 신 본관을 같이 사용 해온 것이 확실합니다.
만성보를 보면 같은 성씨로서 구 지명 본관과 신 지명 본관을 계속하여 사용해오다가 근 래에 와서 통일한 성씨도 많고, 같은 성씨이면서 오늘날까지도 두 개의 본관을 사용하 는 성씨로는 고성이씨(철성이씨), 수원백씨(남포백씨), 동성이씨(사천이씨), 상주이씨(상산 이씨), 서림이씨(서천이씨), 迎日정씨(延日정씨, 오천정씨), 대구서씨(달성서씨), 경주석씨 (월성)등 오늘날 까지도 같은 자손이면서도 두 개 이상의 본관 을 사용하는 성씨는 많 고, 이밖에도 많은 성씨가 구 본관을 사용해오다가 신 본관으로 바꾸어 한동안 두 본관 을 사용한 성씨는 허다합니다.
❸ 지강공께서 중국에서 망명해온 어른이 언제 신라에서 좌승상이 되었겠느냐? 터무니없는 말이다. 또 신라에 좌승상 품계가 있었느냐? 에 대한 졸종의 견해입니다.
그 당시는 철조망이 없었을 터이니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왕래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 다. 또 벼슬이란 실직(實職)만이 벼슬이 아닙니다. 학문이 고명하면 사후에도 증직으로 예우를 합니다.
한 가지 예로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曺植선생과 송 우암의 제자 명재 尹拯선생과 수초 당 權忭선생은 벼슬길에 한 번도 나간일이 없었지만 학문이 고명하여 사후에 영의정과 판서를 증직한 사실이 있습니다.
족친께서 신라에 좌승상의 품계가 있었느냐?에 대하여 말씀 드리자면 경주최씨 호남종친 회에서 발행한 서적 중에 파경노 이야기가 나옵니다. 최치원이 어렸을 때 신라에서 으뜸 가는 羅승상의 딸이 천하일색이라는 말을 듣고 거울 수리하는 사람으로 가장하고 수리하 는척하다가 일부러 거울을 떨어뜨려 거울을 깨고 거울 값으로 羅정승댁 하인이 되어 나 중에 나정승의 사위가 되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경주최씨의 기록과 같이 비록 신라에 정승이라는 직제는 없었지만 각간이니 상대등이니 하면 인지하기가 어려우 므로 신라의 승상 나업(羅業)공과 같이 조선시대 기록이니 알아보기 쉽게 기록하지 않했 나 십습니다.
❹ 나주가 언제 나주로 되었느냐에 대한 졸종의 소견입니다. 점쟁이 에게라도 물어보았느냐 하셨지만 역사는 승자편에서 쓰기 때문에 왜곡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쓰여지는 대로 전하게 마련입니다.
一例를 들면 이 고장에 있는 문헌서원(이곡, 이색선생을 기리는 서원) 경내에 조선 개국 공신 하륜이 찬한 이색선생의 신도비가 있었는데 고려말 이색 선생의 기록이 너무나 왜 곡되어 우암 송시열 선생이 비문을 고쳐 쓰고 비를 다시세운 일이 있습니다.
羅州로 개칭한데 대하여「고려사」에는 천복3년(서기903) 왕건이 주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 10여성을 공취하고 나주로 개칭했다하고, 「한민족의 역사」의 연표와 「한국인의 족 보」의 연표에는 효공왕 7년(903)에 나주로 개칭했다 하고, 「한국 민족 대 백과사전」 에는 서기 940년에 왕건이 나주로 개칭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효공왕때 나주로 개칭 했으나 왕건이 개칭한 것으로 썼을 수도 있습니다. 역 사는 단언해서도 않되고 속단해서는 더욱 않되는 것입니다.
♦증빙 자료♦
ㄱ, 백천조씨 족보.
ㄴ, 나유 선조님 사위 洪戎공과 따님 나주나씨 묘비 및 남양홍씨 족보,
ㄷ, 한산이씨 족보.
이곳 서천의 군지, 향교지, 고금실기, 서천의 금석문등 모든 문헌의 儒賢편에 실린 목은 李穀 선생은 출생은 경북 영덕 외가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도 영덕군에서는 국비와 군비 로 목은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거국적으로 하고 있지만 모든 문헌에는 영덕인(盈德人)으 로 기록한 곳은 한 곳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ㄹ, 서천향교지,
ㅁ, 한산향교지
ㅂ, 고금실기(古今實記),
ㅅ, 나씨 지장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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