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했지, 지금도 그분을 아는 사람은 씨름계의 거성이라고 부를 정도니까.” 원로 씨름인 이수영(68·육일운수 대표)씨의 회고다. 그가 말한 그분은 누굴까. 여기 그에 대한 짧은 기록을 우선 소개한다. ‘진주는 추석 다음날부터 씨름판이 열린다. 진주에는 옛날부터 천하장사가 많이 나서 유명하다. 양점배 장사는 대소 씨름판에서 218회 연속 우승하여 유명하다’(디지털 진주문화대전 세시풍속 씨름편) ◇점배로 불린 사나이=점배, 그의 본명은 양윤식이다. 이름보단 점배, 양장군으로 더 자주 불렸다. 머리 희끗한 진주 사람이라면 점배, 양장군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점배는 등이 큰 점이 있고 배가 볼록한 그의 신체적 특징을 빗댄 별칭이고, 양장군은 씨름판에서 그의 기세가 장군같다 하여 붙여졌다. 아직도 지역씨름인들 사이에선 양점배, 양장군이라고 물어보면 “아!”라는 대답이 돌아올 정도로 그가 남긴 족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경남정보고 강주섭 씨름부 감독은 “세대가 달라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양점배란 이름을 익히 들어왔다”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씨름인이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21년 진주시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탓에 어린나이부터 씨름판에 본격 뛰어들기 직전까지도 목수일을 했다. 삼시세끼조차 해결하기 버겁던 시절, 그는 혈혈단신 당시 씨름으로 유명했던 대구의 나윤철 선생을 찾아가 씨름이론을 배웠다. 이수영 씨는 “선생은 당초 대구까지 가서 씨름을 배우려고 했는데 나윤철이란 분은 170㎝ 정도에 불과한 단신의 선생님을 보고 ‘넌 씨름 체질이 안 되는 것 같다’며 귀향시켰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문하생 입문이 좌절된 것. 그러나 대신 체계적인 씨름이론을 습득한 선생은 절차 부심했다. 선생은 씨름 독학에 나섰다. 이후 자신의 불리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하루도 쉴 새 없이 남강 백사장을 뛰어다녔고 한 겨울에도 꽁꽁 얼어붙은 남강얼음을 깨 땀을 씻어가며 연습에 몰두했다. 지금은 사라진 구 제일극장 바로 옆 200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쉴 새 없이 오르내렸고 서장대, 비봉산, 금산까지 뛰어다녔다. 그렇게 연습한 덕에 체격에 비해 날렵한 몸매와 순발력을 키운 선생은 남강백사장 100m을 12, 3초에 주파할 정도로 민첩성을 자랑했다. ◇타고난 승부사=선생은 별칭 점배답게 큰 배를 자랑했다. 거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압록강이라 불린 이북 출신의 박진호 옹과 2m 16㎝로 당대 최고의 거인으로 노장군으로 불렸던 함양의 노한성 옹 등 거구의 선수들과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190㎝ 정도의 장신이었던 박진호 옹과 170㎝ 밖에 안 되는 선생의 신장차이는 컸다. 나란히 서면 간신히 어깨에 닿을 정도의 신장차이가 났던 것. 신장의 열세를 느낀 선생이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배기술이다. 당시 박진호 선생의 주특기는 들배지기, 들리면 지는 경기였다. 그래서 배를 내밀어 몸을 안 붙혀주는 전략을 짜낸 것. 노장군과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산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기 전국대회 결승서 노장군을 꺾어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제트기라는 별명을 하사받을 정도로 선생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레 붙여진 별칭이 바로 점배다. 선생의 배에 얽힌 일화는 많다. 일부러 배를 키워내기 위해 죽을 사발째로 마셨다는 얘기부터 자장면 곱빼기 3그릇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는 얘기도 있다. 선생의 주기술은 돌림배지기, 배를 이용, 타고난 근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배위에 얹어 돌려 넘어뜨리는 단순한 기술이다. 그러나 선생과 맞선 상대는 이 기술을 알면서도 당했다고 할 정도였다. 배를 이용한 기술은 자신보다 신장이 큰 선수나 중요한 경기에서 사용했을 뿐 선생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체구가 작은 선수에게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생은 전국무대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216연승을 달렸다는 말도 있고, 한 해 열린 대회의 40% 정도는 우승했다는 말도 있다. 나머지 대회는 거리가 멀고 대회일정이 겹쳐 출전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우스갯말도 나올 정도였다. ◇진주씨름에 큰 발자취를 남기다=선생은 김학성, 강두만, 이수영씨 등을 길러냈지만 매우 엄격히 가르쳤다고 한다. 이수영씨는 “선생님은 씨름밖에 몰랐다”며 “제자들이 다른 일로 훈련에 빠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도중 그만둔 친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월사금이 밀려 고민하는 제자 몰래 대신 내준 경우도 있을 정도로 아꼈다”고 말했다. 선생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새벽까지 술을 퍼 마시던 그를 주변 사람들이 건강을 염려하며 말리자 자신은 침 한 번 뱉어도 술이 안 취한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주량을 자랑했다. 좋아했던 술안주는 돼지비계. 그러나 경기를 앞두고는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라디오마저 귀했던 50년대 당시로선 일찌감치 쇼맨십에 눈을 떴다. 특히 관중 앞에선 제왕적 기질을 과시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진주씨름계의 거성 양장군이 입장한다”고 방송하면 한 10~20분 정도 일부러 늦게 들어갔다. 관중이 전부 기립박수로 안 맞아주면 아예 입장을 안 한 것이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고 박수소리가 요란해질 때 양 팔을 좌우로 편채 분위기를 즐기며 느릿느릿 입장하는 그의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러한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때 일본 스모계를 평정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운 선생이지만 노부모를 떠날 수 없어 단념했다는 말도 있다. 현역에서 은퇴한 선생은 지금의 대안동에서 피혁점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훗날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약 115㎏까지 나가던 체중은 거의 50㎏나 빠졌다. 평생의 소원이 씨름도장 건립이었던 선생은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68년, 4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갔지만 진주씨름에 그의 발자취는 영원히 남았다. 아쉽게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20여 년 전 진주씨름을 널리 전국에 알린 그의 족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다 불발된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맨 위 사진=고 양윤식 선생의 현역 시절 모습.(앞줄 오른쪽 두번째, 선생의 사진과 기록물은 생전 운영하던 피혁점이 화재로 불타는 바람에 상당수 소실돼 전하지 않는다) ▲아래 사진=고 양윤식 선생의 제자 이수영씨가 현역시절 선생의 활약을 설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