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해방과 하나됨을 위한 고독한 삶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3차 조공의 책임비서였다. 그가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부안에서는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떠돌아 다닌다. 그 동안의 정치상황은 김철수에 대한 평가를 입에도 올리지 못하도록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그러나 김철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그에 대한 글이 잘못 쓰여져 왜곡되어 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려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김철수의 자료집을 보면서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남는데, 해방 후 고향으로 낙향한 이유와 그가 거처하던 집의 벽에다가 써서 늘상 보았다던 서호(恕乎, 논어에 나오는 글로 모든 것을 용서한다.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도 가능함)라는 글의 이면에 숨은 진실이다. 이 글은 현재 소공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데, 왜 이 글을 벽에다 붙여 놓고 보면서 지냈는지,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세 친구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견뎌냈다고 하면서 레닌과 모택동과 이봉수를 들었는데 이들과의 관계도 궁금하기만 하다.
김철수가 살았던 토담집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동네 속에 있지 않고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야트막한 산기슭에 오두막으로 초라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땅이라도 얼고 비라도 오면 황토흙은 방문객의 발목을 한참씩 붙잡고 만다. 동네를 가로 질러 논길을 지나면 遲耘堂이란 현판이 새겨진 흙집이 있고, 그가 정성 들여 가꾸었다는 화단에는 강원도 오죽헌에서 가져온 오죽이 주인을 잃고 무성히 자라고 있다.
지운(遲耘) 김철수는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지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재산이 있었고 원천리의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쌀위탁 판매업'도 하는 넉넉한 가정이었다. 소년 시절엔 재주가 돋보여서 13세 때엔 두승산에서 열린 한시 대회에서 장원을 해서 부모가 소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기도 했다. 화호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성적은 반에서 1,2 등을 했았다. 그의 육성 테이프 「정진석」본에는, 당시 담임이 교장선생님의 아들을 성적조작으로 1등으로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따져 진실을 밝힐 정도로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한학자 서택환을 만나다
그 당시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내다 부모 상(喪)을 당하여 군수직을 사직한 서택환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웠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서택환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 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후일, 사상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고 묻자,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 김철수는 '서택환 선생의 영향으로 사람노릇을 한다'고 자주 얘기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김철수는 전통유학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으로서 전통유학과 독립운동을 위한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한국사회주의 사상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유학시절의 지운 김철수
군산 금호 학교에서 신학문 공부를 시작했고 1912년에는 김성수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 대학 정치과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에 사귄 의제 허백련의 기록에 보면, 의제는 그의 투사정신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김철수는 매사가 분명하여 일본 학생들과도 싸움이 잦았으며 유학생들 중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는 일본에 있는 조선 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 三宅雪嶺씨를 초빙, 시국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三宅의 강연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맨 앞좌석에서 강연을 듣던 김철수는 강연 도중에 일어나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오.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으니 三宅은 내려가시오.”김철수는 큰 소리로 외치며 三宅을 떠밀어 내려하였다. “끝까지 강연을 들어봅시다.”강연을 듣고 있던 최남선이 제안했으나 김철수는 듣지 않았다. 그는 끝내 三宅을 떠밀어내고야 말았으며 장내는 연사를 야유하는 소리와 김철수를 칭찬하는 박수 소리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의식 있는 청년들은 어느 곳에 있거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움이 있었고 민족의 해방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1915년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 결사인「裂指동맹」을 결성하였다. 장래 사방으로 흩어져서 독립운동을 할 것과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 뒤 두번째 비밀결사는 한국인 10명, 중국인 20명, 대만인 10명이 모여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김철수는 식민지 시대에 겪는 고통의 근원은 일제의 강점(强占)때문이라고 인식하여 민족의 독립에 온 힘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감옥에서 친구를 생각하며 우인송(友人頌)을
세 번째 비밀 결사는 귀국 후 1920년에 이루어졌다.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김철수 등이 최린의 집에 모여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그 다음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목적 아래서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이 사회혁명당은 당의 명칭이 붙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사상 최초의 결사였다. 사회혁명당은 국내의 조직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세력인「한인사회당」과 조직적 결합을 하여 「고려공산당」을 1921년에 창립하여 1923년 초까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을 '상해파'라 부른다.
김철수는 자신이 사회주의사상을 갖게 된 것은 천성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특히 걸인이나 어려운 자들을 보면 도와주는 집안 고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독립과 불쌍한 자들의 계급해방을 위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도 진독수·황각 뿐만 아니라 모택동·구추백·이립삼과도 만났다. 김철수는 그의 시에서 친한 친구 3명으로 모택동을 생각했고 서로 나이가 같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에게 더욱 친밀감을 가졌는데 모택동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를 기려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인물들이 많았는데 한번 사귀면 혹 이념이 다르다해도 교우 관계를 지속했다. 이념을 달리했던 장덕수와 교우관계는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을 1934년 경성 감옥에 있는 동안 아래와 같은 시로 표현하였다.
평생에 내 스스로 즐겼네, 두서넛 친한 벗이 알고 있거니
한마음 계합함만 허여한다면, 천리 밖 떨어져 있는 것 무슨 상관이랴
적적한 제 번번이 만나보고, 어려운 곳이 좋이 서로 추종했네
이처럼 참다운 취미 있으면, 때때로 활가시 읊으리
단기 4267년에 경성감옥에 있을 때에 모진 형벌로 인하여 일시 실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우인송(友人頌)'을 지어 스스로 위로한 것이다. 갑진년 청명절 (1984년 3월)에 92세 늙은이.(이균영 해석)
해외 운동은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상해파는 조국해방투쟁의 지원을 받기 위해 러시아의 혁명 정부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들은 민족주의적 경향이 국제공산주의 보다 강했으며 자신들의 운동이 러시아인들에게 흡수되기를 원치 않았다. 김철수는 목숨을 걸고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을 넘나들며 상해파의 대표로서 이르크츠크파와의 치따회의에서 연합을 시도했지만 타협점이 없어 결렬되었다. 국경수비대를 피하기 위해 9백리 길을 걷고 밀림을 헤쳐 가기도 했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참아내는 고행을 감내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 김립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철수는 '나라 없는 사람들이 해외까지 와서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살상까지 해서는 안된다'고 주변을 설득하였다.
조공 3차 비서가 되다
이제 해외운동가들의 마지막 희망은 국내외 항일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독립운동단체를 통일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한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의 만주 등에 임시정부의 본거지를 두지 않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상하이에 정부를 둔 것은 외교독립노선을 표방하는 것이어서 무장투쟁론자들의 세력을 포함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철수는 국내 개조파 대표로 이 회의에 참여했으나 각 조직의 의견 대립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국내에 들어온 김철수와 친구 이봉수는 조공에 입당하여 쓰러져가는 당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2차 조공때는 김철수가 이 당의 조직 부장으로 활동했고, 두 가지의 주요한 사업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민족주의 진영과 합동하여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갈등관계에 있는 서울청년회파와 북풍회를 당내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 내부에서는 김철수가 이 두 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수행해 나가는데 적절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6·10만세 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공이 와해된 후, 3차 조공이 재건되어 김철수가 책임비서로서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승인을 받고 돌아왔지만, ML파의 파당성과 전횡이 알려지면서 당을 해체하였다. 그 후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위험한 임무를 맡아하며 운동의 전위에 서서 조공의 재건과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그는 1928년에 검거되어 8년 8개월 동안 형무소에 있다가 만기 출소한 뒤, 1940년 여름 다시 수감되어 해방될때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항소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에서였다. 고문으로 실신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국내와 일본, 만주, 중국, 소련 등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였으며,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명분 아래서는 민족운동가들과의 협조체계를 긴밀히 했었다.
자연인 김철수는 살고 정치인 김철수는 죽다
해방에 대한 그의 입장은 '식민지시대에 줄기차게 싸워 온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일관되게 주장하여 해방조국에 침투할 외세를 경계하였다. 또한 '모든 파당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공산주의 내부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 공산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되어야한다는 입장이었고 당 운영에 있어서는 첫째, 당을 외국처럼 공개당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여러 계층을 흡수하는 통일전선체로서 합법적인 당 운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여 통일정부를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김철수는 민족주의와 당과의 접촉 창구로써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박헌영과 김철수는 합법적인 당 운영의 요구와 영등포 노동자 300명의 입당문제로 대립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박헌영의 전횡에 반대하여 여운형과 함께 사회 노동당을 만들었다. 사로당은 사회주의진영과 민족진영이 함께 통일전선체로 나가야한다고 방향을 정했다. 남로당이 결성되고 전위적 조직체제를 가지면서 북노동당대회결의에서 사로당의 소행이 반동으로 규정되어 비난받고 해체되자, 김철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체의 정치에서 손을 떼고 귀향하였다. 그가 바랐던 조국은 이념을 초월한 하나된 조국이었지 파당을 통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이념만이 남아 있는 그러한 조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은 경직된 이념보다는 실천을 통해서 하나가 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당시 정치상황에 환멸을 느끼자 낭만적인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정치일선에서 일체의 손을 떼고 1947년에 고향에 돌아와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연인 김철수는 살고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족해방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줄기차게 사선을 넘나들었건만, 해방된 조국에서 사상문제가 자신에게 올무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사상을 택했던 것은 식민지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고생한 동지들에게서까지 차가운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사실조차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이토록 김철수는 자신에게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자신과 가족에게 엄격함을
그는 가족들에게도 엄격했다. 해방 후 원천리의 집에는 식솔들이 꽤 많았다. 딸 금남이 죽고 다섯이나 되는 그의 외손들까지 같이 살다 보니 끼니를 잇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큰 외손녀가 폐결핵에 걸리자, 마산 결핵요양소라도 보낼까하는 가족들의 요구가 있었다. 이 당시 김철수의 동생 창수씨가 국회의원으로 농림분과위원이었으니 그에게 부탁만 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김철수는, "정노식 선생의 부인은 굶어 죽으셨다. 딸은 폐병으로 죽었는데, 없으면 죽는 것 아니냐.”며 가족의 어려움을 애써 외면하였다.
후처를 얻은 아들이 있었다. 부인이 언제 올지 몰라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그 아들은 밤에 몰래 어머니를 보러 들어왔다. 아들이 온 것을 안 김철수는 “야야, 동네 사람 보기 전에 어서 나가거라”고 타일렀다. 이 아들과는 이 문제를 평생 풀지 못하고 지냈다. 자신은 사회주의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어긋나는 생활은 용납 할 수 없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그의 화두는 항상 '통일'이었다. 그는 1996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보았다. 그래서 통일되는 그날을 보기 위하여 백살하고 네 해를 더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었다. 소련에서 철새를 연구하기 위하여 표식을 붙여 보낸 비둘기가 부안군(扶安郡) 행안면(幸安面) 궁안리(宮安里)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안(安)자 세 개로 三安이란 시를 써서 통일에 대한 기쁨과 열망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꽃을 가꾸며 자주 산에 오르다
그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다. 공주나 대전이나 서울에 올라가면 지인들을 만나서 며칠 밤을 세우며 담소도하고 한시를 주고받곤 하였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들을 써서 선사하기를 즐겨했는데, 이 글 중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士當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微斯人誰與歸
이 글귀를 쓰면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선비가 미리 알아 이를 막아 냈어야 했다는 회한을 담으면서, 선비의 자세는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천하사람들이 모두 대우를 받은 뒤에 선비가 받아야한다고 그 의미를 해석했다. 60년대 중반에는 선산이 있는 백산면 대수리로 손수 토담집을 지어 거처를 옮겨 살았다. 분단된 한국에서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고독하고 초라한 생활을 하였다. 아버지를 모시고자하는 자녀의 바람도 뿌리치고 이 초라한 곳에서 이웃도 없이 살았다. 꽃과 자연을 좋아하여 집 앞에는 자그마한 화단을 가꾸고는 애써 가꾼 꽃들은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곤 하였다. 여러 차례 지리산과 설악산을 등반했는데 87세 때에도 설악산 대청봉을 혼자 등반하였다. 눈덮인 설악산을 검정색 무명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는 할아버지를 공원관리자들이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곳에서 탈진하여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끝내 등정에 성공하였다. 울릉도에 진달래와 종달새가 없다는 말을 듣고 울릉도에 여행 갈 때는 진달래와 종달새 한 쌍을 가져가기도 했다. 단종이 귀양살이하던 강원도의 청령포를 밤에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전복되는 통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단종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두견이 소리를 밤에 듣고자했던 것이다.
청빈하고 겸손했던 그는 토담집 한 칸의 좁은 방에 살면서 젊은이들의 방문을 받으면 항상 따뜻한 아랫목을 양보하였다. 방문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싶어하면 주는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을 실천했다. 겨울에 눈이라도 올라치면 지운당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고 거센 바람 한가운데서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다. 겨울에도 얼굴까지 기어 다니는 쥐들의 극성탓에 모기장을 쳐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대수리 토담집의 고독한 삶
어느 겨울날, 사람이 그리워 찾아 나섰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죽음직전까지 이른 적이 있었다. 나라 잃었던 식민지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상 전위에 서서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며 죽음을 무릅쓰고 힘쓰던 그였지만, 분단된 조국은 작은 토담집과 겨울의 칼바람과 공안당국의 감시만을 남겨 주었다. 공안 당국은 그를 1급으로 분류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를 만나고자하는 사람은 늦은 시간을 택하거나 작전을 방불케하는 식으로 만나 볼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감옥에서도 이러한 의지를 꺾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사실만이 평생 따라다닐 뿐이었다. 식민지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고 친일했던 사람들이 다시 득세하는 이곳에는 진정한 해방이 찾아 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정치에서 손을 놓긴 하였지만 꾸준한 독서를 하여 2,000여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고, 신문 스크랩을 계속하면서 사회가 정의로워지며 밝아지기를 바랐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방에는 꼼꼼히 적은 수첩이 40여권이나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그날 그날의 일기가 적혀 있었고 주소와 메모 등이 앞뒤의 표지까지 글자 한자가 들어 갈 틈이 없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민가에서 떨어진 토담집엔 그의 외로움만이 묻어있는데, 민족의 해방과 하나되기를 힘썼던 김철수같은 사람이 외로워진다면 우리의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인 잃은 집은 돌보는 이 없어 비바람이 몇 차례 더 불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한국 전쟁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동생 광수와 복수는 월북했고 옥중에서 만나 둘째 사위로 맞은 이복기는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애써 가족 얘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도 81세의 둘째 딸 용화씨는 돈지면에서 남편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갖고 홀로 살고 있다. 행여 장기수들을 만나면 혹시나 하는 설레임과 희망을 갖고 남편의 소식을 묻곤 했다 한다. 이런 미련 때문에 장기수병에 걸렸다는데, 이제 희망을 버리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소녀적에는 명곡과 시를 좋아한 용화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피해자지만,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역사의 진보를 위해 자양분으로 썩어간 혁명가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다. 2년의 결혼생활을 했지만 항상 바깥에서 생활한 남편과는 자녀가 없었고 광주 학생운동과 관계된 언니가 남긴 5 남매를 친자식처럼 키워냈다.
현대사 역사 자료를 남기고
김철수는 암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지던 때에도 자신이 쓴 자료를 숨겨서 병원으로 가지고 갔다. 몇차례에 걸쳐 자료를 분실하면서도 계속 자료를 남기려 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너무 자의적인 주장이 많고 사실이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료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료를 숨기는 것이었다. 60-80년대의 정치상황은 남북문제가 대결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자유롭게 글을 쓰기나 말하는것도 통제되는 암울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료를 받은 딸 용화씨는 긴장이 되어서 다른 일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병원 벽장에 옷가지로 덮어서 몰래 숨겨 놓았었다고 한다. 병원에 있을 때, 선생은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실각한 신문기사를 보고는, '살다보니 이렇게 좋은 일도 있구나'하며 병실의 간호사들에게 마르코스가 쫓겨났다고 기뻐하며 큰소리로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초기 사상운동의 산증인이라 평가되는 김철수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던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상 운동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어려웠던 시절이 계속되었고, 80 년대엔 소장파 연구자들에 의해 소수의 무력적인 투쟁 중심의 운동가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소홀했기 때문이다.
1986년 3월 16일 94세로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본대로 들은대로 생각나는대로」「해방 후 동작개요」등의 유고와 녹음 증언 등을 남겼다. 또한 이곳 부안에서는 그를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 김철수의 대한 그리움의 향기를 남겼다.
그가 죽자 광주의 허백련의 제자들은 무등산에 묻힌 의제의 묘 옆에 안장하려했으나, 생전에 그의 원대로 자신때문에 말없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다 먼저간 부인이 묻혀 있는 선산에 묻혔다. 그의 묘에는 오후가 되면 볕이 들고 그 옆을 해당화만이 외로이 지킨다. 그리고 논을 가로질러 보이는 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따뜻한 이웃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기일(忌日)에도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자 소중씨의 가족 외에 지역의 주민 몇이서 그를 기릴 뿐이다.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연보
1893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新安) 주씨(朱氏) 사이에서 태어남
1906 김아로와 결혼. 3남2녀 낳음(금남,용선,용일,용화,용덕)
1908 이평면 말목에 있는 한학자 서택환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뜸.
군산금호(金湖) 학교에서 신학문 공부시작
1912 와세다대학 정치과 입학
1915 재일본유학생들과 ‘열지(裂指)동맹’결성
1916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선언함. 귀국
1920 ‘사회혁명당’결성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
1921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상해), 재무담당 중앙위원
1923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참가(상해)
1924 귀국, 거주제한 조치 당함. 전북민중운동자동맹 가입
1925 조선공산당 입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1926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코민테른 파견대표자
1927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2차대회를 승인 받음
서울상해파 결성에참가
1929 길림성 돈화현, 조공 재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
1930 귀국. 체포. 치안유지법 최고형 10년선고
1938 대전형무소에서 출옥(10월)
1940 서대문 예방구금소 구금
1945 공주형무소에서 출옥(8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피선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전형위원 피선
1946 3당합당문제와 관련하여 박헌영에 반대(8월). 무기정권 처분받음
사회노동당 임시중앙위원회에 피선(11월)
1947 사회노동당 해체. 정계에서 은퇴한 뒤 고향으로 낙향
꽃과 나무를 벗하며 허백련 오지호 등의 예술가와 교류
1968 선산이 있는 대수리로 토담집을 지어 거처를 옮김
1976 부인 김아로 사망
1986 사망. 묘소는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선산
김철수, 이름 없는 혁명가의 길
|
딸 김용화 할머니가 12일, 아버지 지운 김철수 선생 묘소를 찾았다.ⓒ부안21 부안 출신 가운데 김철수라는 이름이 있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고 1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를 만큼 치열한 독립투쟁을 펼쳤다.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음에도 1986년 죽을 때까지 공안당국의 1급 감시 대상이었다. 국가보훈처는 2005년 8월 3일 독립운동가 김철수와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주인공 김산을 비롯한 좌파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을 8.15 60주년에 서훈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김철수의 딸인 돈지의 용화 할머니께 전화 했더니, 선생이 원했던 조국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평가였다면 하는 아쉬움과 나라를 찾기 위해 몸을 내 놓은 독립운동가를 등급으로 나누어 서훈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씀도 하셨다.
12일, 지운 선생이 살던 토담집을 둘러보는 딸 용화 할머니ⓒ부안21
낙향한 지운 선생은 손수 토담집을 지어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의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부안21민족에게 진정한 해방을 김철수(金錣洙(1893∼1986))는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동진강 수로가 닿는 곳으로 아버지는 쌀 위탁 판매업을 하는 넉넉한 소지주였고 재주가 있는 아들의 교육에 열성이었다.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냈던 서택환이 서당을 열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서택환은 ꡒ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ꡓ고 가르쳤다. 김철수는 서택환의 영향으로 사람 노릇을 한다고 자주 얘기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 유학시절은 유학생들과 더불어 『학지광』을 만든 일이 눈에 띈다. 이 잡지를 통해 유학생들의 상호 친목은 물론 국제정세, 국내 상황의 변화 및 세계사조의 변화 등을 함께 고민해 나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 결사인「열지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고, 두 번째 결사는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귀국 후 1920년에는 「사회혁명당」을 조직했고, 이동휘 세력과 조직적 결합을 하여 「고려공산당」을 1921년에 창립하여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외 운동가들의 희망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표방하여서 무장투쟁론자들의 세력을 포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철수는 국내 개조파 대표로 이 회의에 참여했으나 각 조직의 의견 대립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24년 귀국한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역임한다.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구속을 피하고, 하반기에는 책임비서가 되어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0년에 검거되어 출소한 후 1940년에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예방구금 되었다.
지운 김철수의 유학시절.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재평가 해방 이틀 후에 공주 감옥소에서 출옥한 김철수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정당통일을 목적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한다. 공산당대표로 김철수가 참여하여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을 자임하지만 좌우익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김철수는 사회노동당 창당에 나선다. 아울러 김규식을 지도자로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창당 후 이탈자가 발생하고 당이 해체되자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는 심정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철수는 손수 지은 토담집을 ‘이 정도면 편안하다ꡑ는 뜻의 ꡐ이안실(易安室)ꡑ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그는 남북의 통일을 염원하며,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듯 외롭고 힘든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적 감화와 기억을 남겼다. 그의 독립운동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사회주의자 정도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 조국해방 60돌에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함으로써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배워온 우리들에게 비로소 두 눈으로 독립운동사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철수는 자신의 한 일을 자랑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며 역사의 대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조국이 어려울 때 중국과 러시아와 한국을 넘나들며 풍찬노숙 하다가 어느 후미진 산골에 묻혀 조국의 나무에 자양분이 된 이름 없는 혁명가이기를 바랐다. |
첫댓글 답사는 2,4,6,8,10,12월 짝수달이고 홀수달은산행인디..4월이나 6월로 추진하면 되겠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