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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사불자연합회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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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등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신행하는 교사불자회의 등불로서
이 땅을 정토로 구현할 것을 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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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yodeung
The Korean Buddhist Teacher's Association Newsletter
발행일: 불기 2554년(C.E.2010) 8월 1일/발행처: 대한불교조계종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발행인:강영철 /편집인: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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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화
김규현(화가․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
전국교사불자연합회, 파라미타 지도자 연수, 2010. 1. 28-30일, 진해 대광사
축시
정토로 가는 등불 높이 들고
임완숙(시인․전국교사불자연합회 명예회장)
꽃피는 소릴 듣네 향기와 빛깔이
오묘한 참 신령스런 꽃이라네
삼천육백일 쉬지 않고 달려 와
태양을 열 두 바퀴 돌면서
가슴에 품은 열망 줄기를 세우고
푸른 잎새 가꿔
마침내 황홀히 피어난 저 꽃송이를 보라
보드라운 꽃잎위로 천년의 바람은
영산회상의 법음으로 불고 구름 흘러가는
꽃그늘 아래 어린 새들은
작은 발자국 찍으며 재잘대며 노래하네
춤을 추네
너와 나 우리들의 사랑과 자랑
헌신의 땀방울로 환히 피어나는 꽃
경인년 무성한 여름 백호의 기상으로
힘차게 도약하라
정토로 가는 등불 높이 치켜든
오호라, 신령스런 꽃이여!
축사
교등 창간을 축하합니다
혜총 스님(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금번 회보 발행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더욱 새롭게 가다듬어 불법홍포의 최 일선의
전법자로서 이 땅 청소년들의 등불이 되어주신 전국교사불자연합회의 그동안 노고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한국불교 1700년의 역사는 이 땅의 정신문화와 함께 호흡해 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교사불자의 역량에 의해 불교의 미래와 장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중심에는 늘 스승의 역할이 구심점이 되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녹여내어 많은 청소년
불자들을 포교하는 것이 나눔으로 회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어린이․청소년 포교여건은 여전히 부족하고 척박하기만 합니다.
우리들은 선인들의 말씀처럼 보리의 씨앗은 뿌린 만큼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통한 유연한 포교방법을 나름대로 개발해보려는 여러분들의
자발적인 분발심 덕분에 많은 부분에서 성과를 이루어 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사불자 여러분!
수행이 곧 포교이며 포교는 곧 나눔 혹은 보시로부터 시작됨을 다시 한 번 인식해 주시고,
파라미타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새로운 신세대 포교의 진정한 밑거름이 되어주시기를
종단 포교 행정의 총 책임자로서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번 회보를
발행하면서 이런 서원이 더욱 굳건히 지속되어 불퇴전의 정진력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가는 한 법석의 장(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 청안 청락한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시고 그 공덕으로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길 마음 다해 축원 드리면서 회보 발행 축사에 가름합니다.
격려사
교등 창간에 부쳐
지안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승가대학원장)
경전에서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어둠 속에 보배가 있어도 불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듯이,
부처님 법을 설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그 법을 알지 못한다.”
고 하였다.
교직에 종사하면서 불교를 신행하고 부처님 법을 홍포하는 전국교사불자연합회에서
우리 사회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등불을 새로 켜게 되었다. 대단히 반갑고 축하할 일이다.
이른바 <교등(敎燈)>이라는 회보를 발간하여 한 등불이 백 천 등불을 켜듯이,
곳곳을 비쳐주는 빛에서 빛을 전하는 거룩한 전법불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마치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연등을 켜듯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등불을 밝히게 하는 불사다.
불교의 교화 사업을 홍법도생(弘法度生)이라 한다. 법을 넓혀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교육 이념을 예로부터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하였다. 널리 인간을
이익 되게 한다는 말이다. 알고 보면 똑같은 뜻을 가진 두 말이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 부처님도 한 사람의 위대한 교육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을 가르쳐서 그 인간성을 성숙하게 해 주는 성인이었다. 평생 교육에 몸담는
선생님들이 가르침의 등불을 밝힌다는 취지는 아름답고 훌륭한 교육의 본질이라고 생각된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 속에 오히려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진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도 한다. 이 시대 문명사회의
폐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다. 마음이 안온하고 밝아지게 하기 위해서 마음에 등불을
점화시켜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교등>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종교 가운데 불교의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다. 1,70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불교의 교법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지식 공간을 크게
만들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지식인들의 지식 공간에 불교의 교리가 차지한 자리가
넓지 않다는 말이다. 지식을 앞세우며 살아가는 정보시대에 있어 불교의 취약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지식인들에게 불교의 지적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교의 취약점을 보강할 수 있는
절호의 방법이 일선 교사들에게 불교의 지적 이해와 교법의 전파를 부탁하는 일이다.
이는 바로 교육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인성 교육의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교등>의 발간을 계기로 전국교사불자연합회의 새로운 도약을 기원하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교직 사회에 불광(佛光)이 비쳐져 밝은 사회가 되고, 지성의 온실이 되어
미래를 발전시키는 큰 힘이 그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아울러 교사불자회의
무궁한 발전을 다시금 기원하는 바이다.
창간사
교등 창간의 기쁨
강영철(전국교사불자연합회장)
우리 전국교사불자연합회는 불기 2549년에 총무원장 녹원 스님과 포교원장 성타 스님의 뜻을
받들어 창립되었습니다. 이어서 각 지역의 교직원 불자회를 주축으로 하여 시도 지부가
발족하였습니다. 오늘에는 20개의 지부․지회가 있으며, 2,000여 명의 회원이 동참하는
큰 모임으로 자라났습니다.
이제 창립 13주년에 즈음하여 회보 ‘교등(敎燈)’을 발간하니 전국의 법우님들과 같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고 자비를 실천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우리 마음의 ‘법당’을 짓는 일이고, 전국교사불자연합회가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회보가 중앙과 지부․지회의 회원들이 교류하고 연대하며, 학생․교직원․
교과서 그리고 우리 시대와 어울리는 마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법우님들
누구나가 주인이 되어 참여하고 소중히 하는 회보가 되면 좋겠습니다. 회보를 쟁기
삼아 어린이와 청소년의 마음 밭을 갈아 부처님 가르침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립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 ‘불국 정토’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풍성한 열매가 열리도록
한마음으로 정진하기를 이천여 법우님들과 함께 부처님 전에 발원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사불자회와 파라미타를
창립하고 지도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모든 일들이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느꼈습니다. 전국교사불자연합회와 파라미타 지도자들은 전법과
교육을 위한 모든 일에 서로 자매가 되어 ‘동사섭(同事攝)’해야만 할 것입니다.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포교원장 혜총 스님, 제호를 짓고 휘호하며
환한 웃음으로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 법문해 주신 상도선원장
미산 스님 그리고 월주․성타․법타․정우․원택․지운․수불․계환․정념․심산․원정․운남․상덕 등
여러 대덕 스님들과 안홍준 국회의원님,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그린 ‘황금물고기’로
축하해 주신 다정거사 김규현 화백님, 축시를 써 주신 법륜행 임완숙 명예회장님,
신연섭․림창홍 전임 회장님들과 회보 발간의 모든 인연들께 삼배의 예경을 올립니다.
스승을 찾아서
팔정도와 ‘지금여기불’
미산 스님(상도선원장, 중앙승가대학 교수)
팔정도법회는 지혜와 자비를 지향하는 법회입니다. 지혜와 자비라는 것은
다름 아닌 계·정·혜 삼학입니다. 계(戒)란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정(定)이란 본래 고요한 자리입니다. 무명 업식 자리로 자꾸 가려는 마음을 가라앉혀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혜(慧) 즉 진정한 지혜는 늘 자비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새로운
삶의 방향을 갖게 됩니다.
초기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삶의 가장 중요한 이치인 4성제를 설파하셨지요. 우리
삶의 갈등 구조의 원인은 갈애(渴愛)입니다. 즉 성취욕, 탐욕이죠. 이로 인해 고통이
재생산됩니다. 그 원인을 잘 알아 치유하면 적멸의 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한 방향 설정이 첫 번째 항목인 정견(正見)이죠. 4성제를 통해 청정한
삶의 방향을 정하고 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칠불통게(七佛通偈)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다.”고 하였습니다. 바르지 못한 생각을 자꾸 내다보면 그 회로가
증장되어 자동적으로 불선법을 행하게 되어 바르지 못한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두 번째가 정사유(正思惟)입니다. 선법을 자꾸 생각하고, 선법에 입각해 사유하면 바로
세 번째인 정어(正語)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바른 행, 즉 정업(正業)이 이뤄지고,
바른 생계(正命)를 영위하게 되고, 정정진(正精進)을 하게 됩니다. 바른 정진을 하려면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반복을 좋아합니다. 일요일마다 똑같이 이렇게 와서
법회를 하는 것이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슷한 법문을 반복해서 듣더라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들으면 완전히 새롭습니다.
수행 정진이 어떤 것인지 정의를 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면,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중생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할지라도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팔정도의 정진이란 기꺼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제 토요일의 정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토요일 밤에 참선하러 선원에 가야 하는데 무슨 핑계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드시겠죠.
반복하기 싫은 거죠. 그러나 기꺼이 반복하는 것이 정진의 첫걸음입니다.
정정진에서 정념이 나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해서 맑히는 중심축이 ‘염(사띠)’입니다.
밝은 지혜의 증장에도 중요한 바탕이 되죠. 수행을 잘 하는 방법이 정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삶의 중심을 항상 유지하는 것입니다. ‘염(念)’ 자 속에 들어 있는
이제 금(今) 자. ‘지금여기’를 놓치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번 초파일 저녁에 모여 점등법회를 하고 제등행렬을 지어 뒷산 숲 속으로 걸어갔지요.
그 숲 속 잣나무를 지나갈 때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도 제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렬 지어 이 길로 가기로 정한 것이 잘 한 것인가?
다른 길로 갔어야 하나?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잘 따라오나?’
그러다가 생각을 다른 곳에 두지 말고
‘지금여기’만 보자 싶어서 ‘석가모니불’ 하던 것을 ‘지금여기불’이라고 소리 내어
정근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띠가 되었습니다.
‘지금여기불(佛)’할 때 ‘불’이란 ‘깨어 있음[覺, Budh]’입니다. 인생의 이치와
우주 만유의 이법은 바로 ‘지금여기’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성불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사띠가 이루어지면 정정(正定 바른 삼매)이 저절로 됩니다.
팔정도는 우리 삶을 알차게, 역동적으로 만듭니다. 팔정도가 불교 수행의 시작과 끝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세간적(世間的) 팔정도와 출세간적(出世間的) 팔정도로
구분했습니다.
전자는 수다원 도(道)·과(果) 이전까지의 유위적 한계 속에서 닦는 팔정도이고,
후자는 수다원 도·과를 얻고 난 후의 팔정도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유위적
한계 속에서라도 끊임없이 팔정도를 행하다보면 무위적인 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소홀히 한다고요?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정진’ 속에 ‘인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사유’, ‘정어’, ‘정업’에는 보시행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어’ 즉 바른 말도 엄청나게 큰 보시입니다. ‘정업’ 즉 바른 행위는 몸으로 하는 보시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가 육바라밀과 다르지 않습니다.
팔정도 수행이 삶 속에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이제 그것을 구체화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팔정도 수행과 교육을 바탕으로 한 보살행에서 저는 앞으로 다음 네 가지에 포인트를
두려고 합니다.
(1) 인권 문제와 사회 정의입니다.
(2) 복지 문제입니다. 지역 사회의 어려운 분들을 생각하는 복지, 그리고 나라 전체의
복지 문제입니다.
(3) 환경·생태·생명 문제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친절함과 따뜻함을 나누어라”
라고 선원 입구에도 현수막 글씨가 붙어 있지요. 이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4) 다문화 현상의 이해입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언어도 점점 다양화되고,
생각도 다양화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결혼으로 인해 자꾸 생겨나는 다문화
현상에 무관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뜻을 나누어 이런 사회에서 생기는 부조화,
위기에 방향성을 갖고 대처해야겠습니다.
어제 조계사에서 열린 문수 스님 추모재에 많은 분들이 왔습니다. 문수 스님은
3년간 결사를 하고 군위 지보사에서 무문관(無門關) 수행으로 정진만 하던 분이었습니다.
소신공양의 진정한 의미를 경전에서 읽어보겠습니다.
"정의를 따르다가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면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낫다.
지혜롭지 못하면서 높은 평판을 얻는 것은 지혜가 있으면서 평판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못하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보다 못하다. 욕망에서 얻어지는 쾌락보다는 욕망을 벗어나 자기를 단련하는
괴로움이 낫다.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
-테라가타(장로게)
“일체 중생 희견보살께서 일원정명덕 부처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할 때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증득하여 육신으로 공양함을 서원하고
향유(香油)를 몸에 바르고는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 옷으로 몸을 감아
거기에 향유를 끼얹고 몸을 스스로 태워 공양을 올려 불은(佛恩)에 보답한다.
(......) 스스로 소신하면 그 광명은 두루 80억 항하사 세계를 비춘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소신공양은 깨달은 구도자가 자신의 온몸을 태워 자신은 절대 삼매에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그 빛으로 중생을 널리 구제함을 의미합니다.
경전적 근거가 있기에 중국, 베트남, 한국에서 이런 종교적 행위들이 나왔습니다.
일반적 사유 방법으로 보면 해석이 힘들고 불편하겠지만, 이는 분신자살이 아닙니다.
1963년 베트남의 틱꽝둑 스님이 시내 한복판에서 후예시(市) 대량학살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것, 불교 신앙 의식과 전법의 자유를 줄 것을 요구하며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결가부좌를 한 채로 소신공양을 하였습니다.
지금 초미의 관심사가 4대강 사업입니다. 공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으며,
아무도 예측 불가입니다. 4대강 참 살림의 대안은 이러합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합의해가며 사업을 추진했어야 한다.
둘째, 하천 관리 시스템을 충분히 논의했어야 한다. 큰 강들을 무조건 운하식으로
개발할 것이 아니라 지천(支川)부터 잘 해서 본천을 살렸어야 한다.
셋째, 문화재 보호를 생각했어야 한다.
넷째, 3년 이내에 즉 대통령 임기 안에 마치려 하고, 당대에 모든 것을 끝내서
눈에 보이는 업적을 쌓으려 하기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시범 지역을 정해서 해야 합니다. 청계천 치수가 잘 되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청계천 관리에 하루에만 무려 2천만 원 이상이 드는 것이죠. 이렇게 엄청난 돈을
복지에 쓴다면 어떻겠습니까? 동네에만 봐도 폐지를 주워 힘들게 살아가는 노인 분들,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잘 모른다고 하지만, 전문가들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종합하면 그러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 같이 몸을 풀고 ‘자애 미소 명상’을 시작하겠습니다.
*불기 2554년 6월 6일 상도선원 제100회 팔정도법회 법문을 축약한 글입니다.
*출처: 상도선원 카페
http://cafe.naver.com/sangdomeditation.cafe
사슴 동산
인간적인 부처님
쟈니 휘니티(Jonny Finity, 포항이동고 미국인 영어 교사) 지음
이미정(포항교사불자회원․포항이동고 영어 교사) 옮김
“세상을 향상 시킬 곳은 우선 자신의 마음과 머리와 손에 있다.”
-로버트 메이네드 피어시그(Robert M. Pirsig, 1925~ , 미국의 작가, 철학자),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내가 다닌 작은 사립 기독교 학교의 중학생 때까지
우리는 교회에서 매우 활동적이었다. 나는 날마다 성서를 읽었고 하느님에게 기도하였으며,
천국에 가기 위해 정말 열심히 믿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의심으로 시달렸다.
특히 어린이에게 지옥은 상상하기에도 무서운 곳이고, 내가 저지른 나쁜 일 때문에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의심은 두려움을 키웠다.
의심은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강하게 믿지 않는 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나의 미심쩍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나에게는 불편하였다. 그것은 위선적이고 불성실한 일인 것만 같았다. 나는 톰 롭빈스(Tom Robbins, 1936~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 소설가, 에세이스트)가 소설 <<길의 또 다른 매력(Another Roadside Attraction)>>에서 쓴 것을 믿었다.
“진정한 용기는 그대의 생각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변화를 겪고,
의식을 확장시키는 어떤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참된 용기는 자신의 진부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을 배우기 시작한 내 삶의 후반에는 더 많은 의문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오직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신앙에 충실히 노출되었기
때문에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임을 알았다. 인도에서 힌두교 집안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우연한 탄생으로 영원히 지옥에 가도록 심판 받아야 했을까?
많은 종교들은 서로 배타적인 신들의 존재를 가르친다. 하지만 그대는 그 모든 신을
다 믿을 수는 없을뿐더러, 옳은 신을 믿지 않으면 영생의 운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미지가 내 믿음 속에서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단지 몰라서 어떤 것을 믿었다는 이유로 영원한 고통을 심판받아야 할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종교로 인해 천국에 가게 될 비열하고,
악랄한 기독교인들을 많이 만났다.
언제, 어디서 내가 처음으로 불교를 소개 받았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어떤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이끌렸던 일이 기억난다.
그런 것들은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가르쳐지거나 어떤 책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통찰과 성찰을 통하여 그런 것들을 깨달아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앨런 왙츠(Alan Watts, 1915-1973)는
“불교에는 모종의 우주적 입법자가 부여한 어떤 도덕률이 있다는 사상은 없다.”
고 하였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가장 적절하면서도 중요한 내용이 있다.
“단순히 그대가 들었다고 어떤 것을 믿지 말라.
단순히 많은 사람이 말했고 소문났다고 하여 어떤 것을 믿지 말라.
단순히 그대의 종교 경전에 적혀있다고 하여 어떤 것을 믿지 말라.
단순히 그대의 스승들과 어른들의 권위로 하여 어떤 것을 믿지 말라.
누대로 전해 내려왔다고 하여 전통을 믿지 말라.
하지만 옳은 지 그른 지를 살피고 따져 보아서, 그것이 합리적이고,
개인과 전체의 선과 이익에 좋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도록 하라.”
-<<앙굿따라니까야>><깔라마경>(A.Ⅰ. 171-173)․<밧디야경> (A. Ⅳ. 193)
내가 불교를 종교라기보다는 삶의 지침으로 여기고 있지만,
부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말고
직접 겪어보라고 제자에게 설법한 종교지도자 보다 그 무엇이 더 정직하고
가식을 벗어던진 모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직접 경험해 보았다.
2006년에 나는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흘 동안의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에
동참하도록 초청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는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뉴에이지(New Age)'나 동양 종교들과 유사한 사악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전에는 정말로 한 번도 명상해보지 못했지만, 마음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명상 해보고픈 열망이 있었다. ‘명상’이란 말은 내 마음 속에 평화와 평정(平靜),
이완이라는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흐르는 강가에 앉아
강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노인이나, 전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꿈꾸는 공동체의
장발을 한 히피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 수행의 기회가 생길 거라곤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열흘 동안의 수행은 그때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한 분명한
답을 알게 해주고, 내 마음을 청정히 할 시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대 인도의 빨리어(Pali)로 ‘통찰’을 뜻하는 ‘위빠사나’는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끈 2,500년 전의 명상 기법으로 부처님이 칭했던 말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참된 성품, 즉 무상(無常) 혹은 변화의 드러냄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이것을 생각하고서는, ‘설마하니!’ 하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에는 간단한 개념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단지 지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이해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주의 깊고도 지속적인 자기 관찰을 통하여
몸이라는 틀 속에서 체험의 차원으로 이것을 이해하셨다. 이 체험적인 이해는
위빠사나의 목표이고, 내 인생에서 예전에 배웠던 그 어떤 것 보다 더 나를 공명시켰다.
우리는 하루에 11-12 시간 동안 좌선을 하였다. ‘아나빠나(anapana)’, 곧 ‘호흡’ 명상으로
시작하여, 움직이지 않도록 지시 받은 한 시간 동안 다리를 꼬고 앉아서 위빠사나 명상을
하였다. 때때로 몹시 고통스러웠다. 한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좌선하고 나면 무릎은
큰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고, 등줄기는 폭죽처럼 경련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회의가 일었다. 하지만 나는 참아냈고, 그래서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불교를 일으킨 고타마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명상 전에는 10일 쯤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삼 일째 되는 날에는 몹시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기다렸고
그래서 배웠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쁜 길로 유혹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지
적군이나 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머리(mind)’와 ‘가슴(heart)’을 가지고
명상 수행을 하였다. 산만해지거나, 성난 생각이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면,
나는 평정심을 닦았다. 내 결심은 한층 강해졌고, 마음은 더욱 맑아졌다.
몇 번의 아름다운 순간 속에서 나는 과거나 미래를 생각함이 없이 현재에,
오직 현재에 머물렀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 하셨던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던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A Personal Buddha
By Jonny Finity
The place to improve the world is first in one's own heart and head and hands.
– Robert Pirsig
I grew up in a Christian family. We were very active in our church, and until middle school I attended a small private Christian academy. I read my Bible daily and prayed to God, and I tried to believe really hard that I would go to heaven. But doubt plagued my mind. Hell is a terrifying place to imagine, especially for a child, and I remember days from my childhood when I was sick with fear and guilt for the sins I had committed. My doubts compounded my fear – to doubt means to not believe completely, and didn’t Jesus say “whoever believes in me shall not perish, but shall have eternal life”? I felt sure that I wasn’t believing strongly enough. I couldn’t talk to anyone about my uncertainty, because everyone I knew was in the church. It was unsettling to be a part of a community that didn’t question what they were taught. It seemed fake and insincere. I believed what Tom Robbins wrote in Another Roadside Attraction:
Real courage is risking something that might force you to rethink your thoughts and suffer change and stretch consciousness. Real courage is risking one's clichés.
Later in my life, when I began to learn about other world religions, more questions arose in my mind. I knew I was a Christian only because I had been born into a Christian family and dutifully exposed to the faith. What would have happened if I had been born into a Hindu family in
I can’t recall when or where my first introduction to Buddhism occurred, but I remember being drawn to the idea that certain eternal truths reside within all of us. They cannot be taught by someone else or read in a book – we have to realize them for ourselves through insight and reflection. According to Alan Watts, a British philosopher, “Buddhism has in it no idea of there being a moral law laid down by some kind of cosmic lawgiver.” Even the Buddha said, in one of his most powerful and meaningful quotes,
Do not believe in anything simply because you have heard it. Do not believe in anything simply because it is spoken and rumored by many. Do not believe in anything simply because it is found written in your religious books. Do not believe in anything merely on the authority of your teachers and elders. Do not believe in traditions because they have been handed down for many generations. But after observation and analysis, when you find that anything agrees with reason and is conducive to the good and benefit of one and all, then accept it and live up to it.
Though I have never considered Buddhism to be a religion – rather, a guide to living – the Buddha is nonetheless a religious figure. And what could be more honest and unpretentious than a religious leader who tells his disciples not to believe anything he says, but to put it to the test? And so I did.
In 2006 I was invited to participate in a 10-day Vipassana retreat in
'Vipassana,' 'insight' in the ancient Indian language of Pali, is what the Buddha called the technique of meditation 2500 years ago that led him to his enlightenment. His enlightenment was basically the revelation of the truth of nature; impermanence, or change. Most people would probably contemplate this for a few moments and shake their head. Duh! This is a simple concept to understand. But the Buddha didn't just understand this idea at an intellectual level. He understood it at an experiential level within the framework of his own body, through careful, constant self-observation. This experiential understanding is the goal of Vipassana, and it resonated with me more than anything I had learned before in my life.
We practiced seated meditation for 11-12 hours per day, beginning with ‘anapana’, or ‘breathing’ meditation, and progressing to an hour-long ‘determined sitting’, during which we were asked not to move at all. It was excruciating at times. After an hour of sitting in one position, my knees felt like they had been beaten with a sledgehammer and my back was a spasm of fireworks. At first I was skeptical. But I stayed, and gave it a chance. This was the teaching of the founder of Buddhism, Gautama the Buddha. I figured ten days wouldn't hurt, though after the second and third days I have to say I felt like bolting. But I stayed, and I learned. The Buddha said “It is a man's own mind, not his enemy or foe, that lures him to evil ways,” and I practiced meditation with a pure mind and heart. When I became distracted or angry thoughts entered my mind, I practiced equanimity. My resolve became stronger, my mind clearer. For a few beautiful moments I existed in the present and only the present, without thought of the past or the future, and I began to understand what Jesus meant when he spoke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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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피디에프 파일이 사진으로 인하여 용량이 많아서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편집 원안을 올립니다. 사진들이 인쇄본보다 칼라이고 커서 보기가 좋은 장점이 있군요. ^^
참 좋은 신행수기입니다. 다음에도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 신행수기를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교등>을 창간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을지,.... ,그저 감사하고, 기쁨에 춤을 추고 싶군요. 향운거사님! 부처님의 축복을 받으소서!~
감사합니다! 축시도 축사도 스님들의 말씀도 회장님 말씀도 신행수기도 참 감동적이군요! 은혜롭고 자비로워라! 희유하십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종소리 법우님 티베트 여행 잘 다녀오셨는지요? 고산증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좋은 여행이었을 것 같아요. 다음 호에서는 선생님의 글을 싣고 싶군요. ^^
덕분에 많이 정화된 여행이었습니다!